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638
638화. 사도들이여
“내가 잡종이라고……?”
상상조차 못 했던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새빨간 핏빛 눈동자가 일사도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흑야마제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는 모습이었다.
“큽……. 크흐흐…….”
꿈틀대는 입매와 파르는 떨리는 어깨.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한 흑야마제가 앙천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 이제 와서 그런 구차한 핑계를 대겠다고? 스스로 말하고도 쪽팔리지 않아? 아니면 인정하기 싫은 건가?”
가공할 공력이 실린 음성에 대기가 투명하게 일그러지고 땅이 진동했다.
흑야마제를 따라온 혈교도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곳까지 오면서 그가 보여 준 살육과 광기를 떠올린 탓이었다.
천하를 공포에 떨게 하는 악인들조차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존재가, 핏빛 안광을 드러내며 스스로 선언했다.
“내가 바로 이 시대의 혈마다.”
콰콰콰콰콰-!
주변을 잠식한 붉은 운무가 살아 있는 파도처럼 사납게 물결쳤다. 당대의 혈마를 추종하는 혈교도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일사도는 멸시 어린 시선으로 흑야마제와 그의 추종자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같잖군.”
동시에 일사도의 전신에서 칼날 같은 기세가 번져 나와 흑야마제의 가공할 기운에 대적했다.
“잡스러운 혈공을 익혔다고 지존을 참칭하다니.”
콰앙-!
바닥을 찍은 진각에서 충격파가 폭발했다. 돌풍이 불어닥쳐 혈마를 자칭하는 사내의 핏빛 머리카락을 뒤로 휘날리게 만들었다.
일사도가 서슬 퍼런 음성으로 혈교도들에게 명령했다.
“혈마지존의 대리인으로서 명한다! 본교의 현 전력으로는 천하무림을 도모하기에 어려운바, 전원 퇴각한다. 반란을 꾀한 오장로 흑야마제의 죄는 돌아가서 처벌할 것이다.”
잠시나마 그의 존재감이 흑야마제를 압도했다.
수십 년간 혈마의 대리인으로서 군림한 사내의 명령.
역천흑야마경의 힘에 심취한 혈교도들마저도 흠칫하게 만드는 위압감이 있었다.
그의 좌우로 늘어선 다른 사도들의 존재감까지 더하면, 그들의 상징성은 침범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사도들의 인정을 받지 않은 자가 진정한 혈마지존이 될 수 있을까?’
팔가의 가주들, 살아남은 장로들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것은 흑야마제가 완성한 역천흑야마경이 지닌 문제점이기도 했다.
만약 그가 순정한 역천신공을 대성했다면, 혈교도들은 어떠한 의문조차 갖지 않고 그들의 지존에게 복종했을 터.
그러나 흑야마제는 자신의 무공과 역천신공을 섞는 무모한 시도를 하였고, 그 결과 개세(蓋世)적인 성취를 얻는 대신 역천신공이 가진 특성 중 일부를 상실했다.
일사도는 그것을 한눈에 꿰뚫어 보았다.
“오장로. 너는 그저 압도적인 힘과 공포로 교도들을 억누를 뿐이다. 그렇기에 잡종이다.”
“……뭐, 들어 보니 틀린 말은 아니야. 당신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그것뿐인 것 같지는 않지만. 큭큭.”
흑야마제는 단지 무공만 고강한 미치광이가 아니었다. 불가해한 광기에 잠식돼 있는 듯 보이지만, 번뜩이는 교활함과 영악함을 동시에 지닌 자였다.
키득거리며 웃는 그의 시선이 사도들의 뒤쪽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날 인정하지 않으려고 꼬투리를 잡는 걸 보니, 저곳에 가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봐?”
핏빛 눈동자가 천하무림이 모여 축제를 벌이는 도시를 응시한다.
정파무림의 승리와 평화를 상징하는 곳.
혈교도들에게는 당연히 증오의 장소일 수밖에 없었다.
헌데 사도들이 그 앞길을 가로막는다?
그들이 합류하면 천하무림을 일거에 쓸어 버릴 절호의 기회임에도?
그 이유가 정말 자신이 혈마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까…….
흑야마제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맺혔다.
하지만 그는 주절주절 혈교도들을 설득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지. 나를 따라가 천하를 짓밟을 것인지, 아니면 저 구시대의 망령들이 시키는 대로 꼬리를 말고 달아날 것인지.”
가장 먼저 결단을 내린 것은 팔가의 가주들이었다. 누구보다 정파무림에 큰 증오를 가진 혈교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도여. 그대들의 시대는 끝났네. 새로운 지존을 받아들이게.”
거구의 노인, 팔가의 가주들을 대표하는 절세고수 주일천이 입을 열었다. 다른 가주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일사도는 무심한 얼굴로 대꾸할 뿐이었다.
“주일천. 대장로가 살아 있을 땐 눈치 보느라 입도 함부로 열지 못하던 잡것아. 그래서 저 잡종과 어울리기로 마음먹었나?”
“……말을 가려서 하라. 그나마 우리가 당신들에게 존중을 보일 때에.”
거침없는 폭언에 주일천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동시에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어두운 자줏빛으로 물들었다. 자전마공의 공력을 끌어 올린 영향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팔가의 가주들과 생각이 같은 것은 아니었다. 몇 남지 않은 장로들, 무력대의 대주들 중에는 조심스럽게 사도들을 따르자는 의견도 있었다.
“사도의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우선은 회군하고, 전력을 재정비한 후에…….”
“천하일통을 앞두고 물러나자니. 납득할 수 없소!”
“저 증오스러운 놈들이 눈앞에 있는데 이제 와서 물러나자고?”
“허면 여기서 우리끼리 내전이라도 치르자는 건가!”
흑야마제의 추종자들이 조금 더 우세했지만, 수십 년간 혈교를 지배해 온 사도들의 의견을 따르자는 자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혼란에 빠진 주변을 둘러본 흑야마제와 일사도가 동시에 말했다.
“뭘 고민해? 혈교다운 방식이 있잖아?”
“전부 물러나라. 오장로와 내가 담판을 짓겠다.”
당사자들을 제외한 모두가 물러나며 자연스럽게 넓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붉은 운무가 불길하게 넘실거렸다.
마주 선 두 절대자가 각자 공력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피로 씻어 해결하자.”
“피로 씻어 해결하지.”
콰콰콰콰콰콰!
역천흑야마경과 무극검의 기운이 뻗어 나와 서로를 사납게 할퀴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싸움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대기가 비명을 지르고 땅에는 날카로운 상흔이 새겨졌다.
‘일호…….’
경천동지할 싸움의 시작을 지켜보던 사도들의 표정이 굳었다. 일사도의 무공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흑야마제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그들조차 여태껏 겪어 보지 못한 불가사의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키득.
흑야마제가 두 팔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리며 말했다. 그에겐 따로 기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전에는 내가 아쉽게 졌지만, 오늘은 좀 다를 것 같지 않아?”
“아쉽다라……. 그때의 너는 내 전력을 끌어낼 수준조차 되지 못했다.”
코웃음을 친 일사도는 기수식을 취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들지 않은 빈손이었다.
그 모습을 본 흑야마제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검도 들지 않고 나를 죽이겠다고?”
“고작해야 짐승을 도축하는 일에 검까지 필요할까.”
그 순간, 사도들을 제외한 모두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일사도가 검을 쥐듯 허공에 오른손을 뻗자, 그의 손안에 강대한 기운이 맺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영롱하게 피어난 무의 총화(總和)가 선명한 검의 형상을 이뤘다. 극한에 이른 검객의 기예와 심득, 의념으로 빚어낸 신검이었다.
“……그건 무슨 무공이야?”
흑야마제조차 절세의 검객이 스스로 빚어낸 신검을 황홀하다는 듯 바라봤다. 강기의 덩어리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보다 훨씬 더 아득한 무언가였다.
“무극광검(無極光劍).”
짧게 대답한 일사도의 눈빛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무극광검을 가볍게 그러쥔 채로 흑야마제의 미간을 뚫어질 듯 노려봤다.
‘빠르게 결착을 낸다.’
이 일대를 장악한 붉은 운무는 혈교의 모든 마공의 힘을 증폭시키는 공능을 지니고 있었다.
흑야마제가 완성한 저 끔찍한 마공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반면 마공을 익히지 않은 사도들에겐 이곳이 불리한 환경임이 명백했다. 단기에 승부를 봐야 했다.
“……이거 정말 죽을 수도 있겠는데? 뭐? 비키라고? 큭큭. 그래도 조금은 상대해 보고 싶은데? 나도 꽤 오래 기다려 왔거든.”
고개를 삐딱하게 한 흑야마제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듯 중얼거렸다.
일사도는 미치광이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검에만 집중했다.
‘무극검이 베지 못할 것은 없다.’
마음에 검을 세운 순간, 일사도의 신형이 사라졌다.
절세고수들을 제외한 모두가 그 움직임을 놓쳤다. 무극광검의 흐릿한 궤적만이 긴 꼬리를 남겼다.
흑야마제의 신형도 제자리에서 흩어졌다. 역천흑야마경이 전신을 휘감는 것과 동시에, 막대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화아아아아악!
공간 자체를 일그러뜨리는 압력이 발생했다. 휩쓸려 날아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티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콰콰콰콰콰콰칵!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수십, 수백 번을 충돌했다. 순간순간 신형이 겹쳐질 때만 흐릿하게 잔영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찰나의 시간조차도 분절하는 절세고수들의 싸움은 사람의 인지를 벗어나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빡였을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지고, 참았던 호흡을 간신히 한 번 내뱉었을 때…….
싸움이 끝났다.
다시 나타난 두 사내의 신형은 마치 겹쳐진 것처럼 보였다.
피를 흘리는 자는 없었다. 서로의 몸에 각각 손과 검을 꽂아 넣은 모습으로 마주 서 있었음에도.
“…….”
일사도는 흑야마제의 복부를 꿰뚫은 무극광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꿈결처럼 흩어지는 기의 결정체를 지켜보다가 흑야마제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분명 베었으나 죽이지 못했다. 마공과 역천신공을 뒤섞은 괴력난신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키득.
“심장이 아프지 않아? 아까부터 신경 쓰는 것 같던데.”
반면 흑야마제의 손은 일사도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몸 안으로 파고든 손가락이 심장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일호!”
사도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안광에서 벼락을 튀기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이글거리는 분노가 모든 것을 태워 버릴 것처럼 강렬했다.
가까워지는 그들의 모습을 핏빛 눈동자에 담으며, 흑야마제는 나른하게 웃었다.
“저건 좀 감당하기 싫은데. 잠깐 비켜 주지.”
스스스슷…….
그 순간, 역천흑야마경의 어둠이 사라지고 붉은 기운만 남았다. 세상이 온전하게 핏빛으로 물드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화아아아아아악!
흑야마제를 중심으로 붉은 운무가 더욱 강렬해지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곧 이곳에 재림할 존재를 열렬히 경배하는 것처럼.
“……!”
“……!”
사도들은 역천신공의 순수한 기운과 마주하고 눈을 부릅떴다.
지금 그들의 시간은 과거와 겹쳐지고 있었다.
절세의 외모에도 불구하고 기괴하게만 보였던 흑야마제의 얼굴 위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존귀한 존재가 덧씌워진다.
“사도들이여.”
꿈결처럼 나른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 순간 사도들의 안광이 흐릿해졌다.
“기다림이 많이 길었더냐?”
흑야마제를 단숨에 찢어 죽일 기세로 짓쳐 들던 사도들이 굳은 듯 멈춰 섰다.
그들의 앞에 있는 존재는 더 이상 흑야마제가 아니었다.
평생을 기다려 온 주인께서, 그들을 부르고 있었다.
“지존………이시여…….”
쿵!
일사도가 가장 먼저 무릎을 꿇었다.
헐거워졌던 심장의 술법이 다시금 그의 영혼을 단단히 옭아맸다. 흉터투성이인 얼굴에 희열이 가득했다.
“지존을…… 배알합니다.”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려 왔나이다…….”
쿵! 쿵!
이사도와 삼사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눈동자가 빛을 잃고, 이지가 흐릿해진다.
그들은 거부할 수 없는, 처음부터 정해진 자신들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쿠웅-!
혈교의 네 번째 사도 또한 바닥에 무릎을 처박았다.
“…….”
벙어리라고 알려진 혈교의 네 번째 사도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나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떠는 것이, 혈마의 재림에 감격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간 너희들의 노고가 많았음을 안다. 그 인내의 결실을 맺을 날이 머지않았으니, 너희는 나를 믿고 따르라.”
혈마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사도들이 감격에 겨워 몸을 떨었다. 팔가의 가주들, 장로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눈에 광신이 가득했다.
“…….”
고개를 푹 숙인 사곤의 눈동자는 다른 이들과 다른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혈마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죽인다.’
혈마의 뒤를 따르며, 사곤은 치밀어오르는 살기를 능숙하게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