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640
640화. 다음은 없어
서서히 황혼으로 물드는 하늘이 칠 주야간 계속된 축제에 끝을 고하고 있었다.
스스스슷…….
땅거미와 함께 밀려오는 저 붉은 운무만 아니었다면, 도시는 지금도 축제를 즐기고 있었을 것이다.
용봉비무의 결승전이 치러지고, 그 승자에 관중들이 환호하고, 천무제의 순위가 발표되었을 것이며, 오대학관의 학생들과 강사들이 지난 일 년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눈물과 웃음으로 한 해를 마무리했으리라.
그리하여 충격적인 결과가 강호무림을 놀라게 했을 것이고, 낯선 이름의 후기지수들이 무림의 신성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피처럼 붉은 적발적안의 괴물이 이곳에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반겨 줄 분위기는 아니네? 같이 즐기고 싶어서 서둘러 왔는데 말이야.”
정사연합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불청객을 노려보는 고수들의 안광이 하나같이 서슬 퍼런 빛을 뿌렸다.
“맨손으로 오긴 좀 그래서 선물도 들고 왔거든.”
키득거린 흑야마제가 손을 까닥이자, 일사도가 들고 있던 수급을 정사연합을 향해 던졌다.
휘익!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수급이 데구르르 몇 바퀴를 굴러, 정사연합의 선두에 있는 무림맹주의 발치에 떨어졌다.
“……곤륜 장문인.”
“저런 천인공노할 놈들!”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반으로 갈라진 수급의 정체를 알아본 구파의 장문인들이 일제히 노호성을 터트렸다.
말 그대로 폭풍전야의 분위기였다. 천하무림의 고수들이 끌어 올린 공력의 여파로 흙먼지가 떠올라 서서히 휘돌고 있었다. 어지간한 자들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압력을 견뎌야 할 터였다.
그러나 흑야마제는 마치 산보라도 나온 것 같은 걸음으로 정사연합 진영을 향해 걸어갔다. 사도들이 그 뒤를 수행하듯 뒤따랐다.
저벅. 저벅.
고작 다섯이서 수천 명의 고수가 내뿜는 기세를 헤치고 태연하게 다가온다. 오히려 정사연합의 고수들이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저마다 손에 든 병장기를 꽉 움켜쥐었다.
“혈교의 사도들…….”
“저 괴물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었던가…….”
“본문의 제자들은 저들과 부딪치지 마라! 너희의 상대가 아니다. 최소 절정에 이르지 못한 경지로는 접근조차 해선 안 될 것이야!”
구파의 노고수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사문의 제자들에게 경고했다.
천하가 평화로워진 이후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었던 공포가 수십 년 만에 악몽처럼 되살아났다.
과거 끔찍하도록 강하고 무자비한 모습으로 정파무림의 고수들을 도륙하던 괴물들이,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났기에.
“다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봐서 흥분했나 본데?”
당대의 혈마를 자처하는 사내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 뒤에서 사도들은 표정이 없는 얼굴로 무심하게 적들을 응시했다. 그 순간 세 명의 목소리가 하나처럼 동시에 울렸다.
“지존이시여. 명을 내려 주십시오.”
그러나 흑야마제는 곧바로 적들을 도륙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핏빛 보석안이 수많은 얼굴을 지나 백수룡을 향했다.
우웅-!
두 사내의 시선이 똑바로 마주한 순간, 대기가 묘한 공명을 일으켰다.
흑야마제의 입꼬리에 매달린 뒤틀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우리도 오랜만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나는 그쪽이 초면이라.”
“왜 이러실까. 네 덕분에 나는 꽤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데 말이야.”
흑야마제는 백수룡의 정체를 한눈에 간파했다.
과거 남궁세가에서 역천신공을 사용해 자신을 물러나게 한 복면인.
그 이후 흑야마제는 역천신공에 집착하게 되었고, 일사도에게 반란을 일으킨 죄로 지하뇌옥에 갇혀 역천흑야마경을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조차도 혈마의 안배가 아니었을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흑야마제는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한때는 널 반드시 찾아내서 죽이고 싶은 생각뿐이었는데……. 막상 다시 만나니 반갑기만 하네. 그 미치광이의 계획, 꽤나 흥미롭지 않아?”
“잡아먹혔다기보다는 섞인 것에 가까워 보이는군. 둘 다 미친놈이라 가능한 일인가.”
“충고 하나 해 줘?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보다 받아들이고 빈틈을 노리는 게 쉬워.”
“참고하도록 하지. 일단 널 죽여 보면 뭔가 새로운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푸하하하하! 나 지금 너무 흥분되는데?”
두 사내는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할 대화를 나눴다.
그들을 지켜보는 천무학관주 진량의 숨결이 흥분으로 거칠어지고, 불존과 검성은 침중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당대의 혈마를 살폈다.
무림맹주는 불구대천의 원수에게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은 감정을 꾹 참으며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 외에도 절세고수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으나, 흑야마제는 그들이 깊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화아아아아아악!
흑야마제의 적발이 하늘로 치솟았다. 두 눈에서는 핏물 같은 안광이 일렁이고, 하늘로 한 치쯤 떠오른 그의 전신에서 막대한 기파가 번져 나왔다.
“축제의 마지막 밤을 즐겨 보자구.”
흑야마제의 말이 끝나는 순간, 뭉클거리던 붉은 운무 속에서 혈교의 군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걸어 나오는 자들의 눈이 하나같이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들끓는 마기를 주체하지 못한 탓에 몸 주변에 흐르는 기운이 악귀의 형상처럼 일그러져 보이기도 했다. 하나같이 인간이 아닌 듯했다.
크아아아아아아!
크하하하하하하!
혈교의 마인들이 짐승 같은 괴성을 질러댔다. 그 뒤로 붉은 운무가 출렁이며 파도처럼 함께 밀려왔다. 지옥의 마귀들을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
“……!”
전쟁을 경험해 보지 못한 무인들, 숨 막힐 정도로 짙은 마기에 안색이 하얗게 질린 무인들의 몸이 두려움으로 굳었다.
모든 것이 갑작스럽고 급박하게 벌어졌다. 마음의 준비와 대처를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아미타불! 적의 모습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그때 불문의 현기 어린 내공이 담긴 육합전성이 동요한 아군을 진정시켰다. 황금빛에 휩싸인 불존이 앞으로 나서며 다시 말했다.
“저희가 이곳에서 패배하면 뒤에 있는 도시가 무너질 것이요, 천하가 환난에 빠질 것입니다. 결코 물러나선 안 될 것입니다.”
십존의 일좌이자 천하무림의 버팀목인 소림 최고수의 말이었다. 정사연합의 무인들이 심호흡을 하며 서서히 공포를 떨쳐 냈다.
불존뿐만이 아니었다.
“상대는 혈교다. 구파는 합공을 수치라 여겨서는 안 될 것이야. 합격진을 펼쳐라!”
검성의 청아한 음성에 구파의 고수들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존심 강한 구파의 무인들은 본래 합공을 수치로 여기지만, 이 자리에서만큼은 모두가 군말 없이 진법을 이루었다.
“……드디어 이 순간이 왔군.”
천무학관주는 희열에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산사태처럼 몰려오는 혈교도들과 그 뒤에서 키득거리고 있는 흑야마제, 무심한 표정의 사도들, 죽음을 각오하고 공력을 끌어 올리고 기수식을 취하는 무인들을 둘러보며 벅찬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천하에 무(武)를 꽃피울 난세가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천무학관주의 달뜬 중얼거림은 무림맹주 야율황의 귀청을 찢을 듯한 고함에 묻혔다.
“혈마여―!”
쩌렁쩌렁한 사자후에 달려오던 혈교도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다음 순간 선두에 있던 대여섯의 머리가 그대로 터져 나갔다.
퍼버버벙!
커다란 주먹을 앞으로 뻗은 무림맹주가 흑야마제를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공력을 잔뜩 끌어 올린 절세무인의 전신에서 맹렬한 기세가 들끓었다.
“드디어 그 낯짝을 구경하는구나. 네놈들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사내가 여기 있다! 자신 있다면 본 맹주와 단둘이서 한번 붙어 보자꾸나!”
두 주먹을 자신의 가슴 앞에서 강하게 부딪친 무림맹주가 홀로 성큼 나섰다. 정사연합에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지금 나한테 비무를 신청한 거야?”
흑야마제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한 손을 들어 올린 그의 모습에, 해일처럼 밀려오던 기세의 혈교도들이 어느새 전부 멈춰 서 있었다.
몇 마디 호령으로 적의 진군을 멈춰 세운 무림맹주가 껄껄 웃으며 상대를 도발했다.
“겁이 나면 거절해도 좋다. 당대의 혈마가 겁쟁이라는 사실을 곧 구주강호에서 모르는 자가 없게 되겠다만.”
“무림의 축제에 비무대회가 빠지면 섭섭하지. 관중들도 이렇게 많은데.”
맹주의 제안을 받아들인 흑야마제가 키득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순식간에 두 절세고수의 대결이 성사되었다.
“맹주께서 어찌…….”
“말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정파무림의 고수들이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수군거렸으나, 맹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군에게 경고했다.
“이건 내 싸움이니 아무도 끼어들지 마라!”
백수룡은 미간을 좁히며 그런 무림맹주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그는 자신을 꼭 선봉장으로 내세워 달라던 맹주의 모습을 떠올렸다.
“……상황을 봐서 결정한다고 했잖소.”
무모한 싸움이었다.
권왕 야율황이 십존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임은 맞지만, 역천신공을 괴이한 방식으로 대성한 흑야마제의 상대는 아니었다.
‘스스로도 모르지 않을 텐데.’
상대와의 격차를 느끼지 못할 만큼 맹주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혼자서 생사결에 나선 이유를…… 백수룡은 왠지 알 것 같았다.
“시작할까?”
적발적안의 사내가 요사스러운 미소를 띤 순간, 권왕의 흐릿해진 주먹이 그 얼굴에 작렬했다.
꽈아앙-!
강기를 두른 커다란 주먹이 대기를 찢어발기고 흑야마제의 턱을 후려쳤다. 충돌의 순간에 터진 충격파만으로도 어지간한 나무는 뿌리째로 뽑혀 나갈 만한 위력이었다.
“혈마여. 일어나라.”
권왕은 십여 장을 날아가 바닥에 처박힌 흑야마제를 노려봤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그가 얼얼하다는 듯 자신의 턱을 만지고 있었다.
“꽤 아프잖아?”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다.”
콰아아앙!
지반을 밟아 터트리는 듯한 진각과 함께 야율황의 신형이 쏘아졌다. 가속이 붙은 거구의 사내가 허리를 틀면서 주먹을 세차게 휘둘렀다. 산조차 무너뜨릴 거력이 담긴 일권이었다.
권왕(拳王).
그는 두 주먹으로 왕이라 칭송받을 만한 신위를 증명한 절세무인이었다. 주먹이 닿기도 전에 공간이 먼저 일그러졌다.
“이건 좀…….”
눈을 크게 뜬 흑야마제가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순간 그의 그림자에서 치솟은 흑암강기가 전신을 갑주처럼 감쌌다.
콰콰콰콰콰쾅!
권왕의 주먹이 갑주를 통째로 때려 부술 기세로 쏟아졌다. 눈 깜빡할 사이에 수백 줄기의 궤적이 흑야마제의 호신강기를 두들겼다.
절세고수의 공격은 일격 하나하나가 산을 무너뜨리고 호수를 가를 위력을 지녔다. 때문에 한 번이라도 정타를 허용하면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죽일 수 있다.’
갑주를 입으면 함께 산산조각내고, 호신강기를 두르면 그조차도 때려 부순다.
설령 상대의 호신강기가 부수지 못할 만큼 단단하다고 해도, 내가중수법의 묘를 더한다면 내장을 토해 내게 만들 수 있었다.
필생의 공력을 두 주먹에 담아 휘두르며, 권왕은 결심했다.
‘혈마여. 전력으로 때려 죽여 주마.’
설령 주먹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생사결에 나선 야율황의 각오였다.
콰콰콰콰-!
강기의 파편으로 인해 그들이 디딘 땅이 사방으로 갈라졌다. 자욱하게 번진 흙먼지가 용권풍처럼 휘몰아치고, 핏물이 허공에 비산했다.
“계속 저렇게 무모하게 공격을 쏟아부었다가는…….”
“맹주께선 지금이 유일한 기회라고 판단하신 것이겠지요.”
절세고수들조차 경이로운 표정으로 권왕을 바라봤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유성우 같은 주먹을 쉬지 않고 쏟아붓는 맹주의 모습에서, 그가 선천지기까지 끌어 올렸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선천지기를…….”
“그만큼 혈교에 대한 원한이 깊다는 의미겠지.”
“저만한 충격이 누적되면 제아무리 호신강기가 단단하다고 해도 타격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권왕은 일격마다 벽력탄의 폭발을 상회하는 충격을 가진 주먹을 반각이 넘도록 휘둘렀다.
콰콰콰콰콰쾅!
반면 호신강기를 갑주처럼 휘감아 주먹을 견뎌 내는 흑야마제의 모습은, 웅크린 채로 소나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일방적이고 처절한 싸움이었다. 부수느냐 버티느냐의 대결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 사내가 지닌 일평생의 증오와 집념은 지켜보던 혈교도들조차 기가 질리게 만들었다.
“……끝났군.”
백수룡의 낮은 목소리와 동시에,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맹주의 주먹이 스스로 멈췄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근육이 가닥가닥 끊어지고 뼈마디가 조각난 탓에, 그것을 억지로 붙들 내공마저 모두 소진해 더 이상 팔을 들어 올릴 수 없었다.
“멋졌어. 기억에 남을 만해.”
호신강기를 거둔 흑야마제는 더 이상 주먹을 뻗지 못하는 권왕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봤다.
권왕의 주먹을 수없이 버텨 낸 전신은 피투성이였으나, 입꼬리는 여전히 천하를 조롱하듯 비틀려 있었다.
“너는…… 인간조차 아니로군.”
선천지기마저 모두 소진한 권왕의 얼굴은 의외로 평온했다.
그는 다소 허탈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봤다.
가슴 한복판에 큼직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회복 불가의 상처였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선천지기를 끌어쓴 순간부터 각오한 일이었기에.
스스스슷…….
죽어 가는 권왕의 눈앞에서 흑야마제는 상처를 재생했다. 부러진 뼈가 저절로 붙고, 흐르던 피가 다시 상처로 스며들어 사라진다. 마치 시간을 거스르는 듯 기이한 능력. 역천(逆天)이었다.
“재미있었어. 선천지기까지 끌어다가 발악하는 모습을 보니, 어디까지 할지 보고 싶더라. 전부 다 헛된 짓이었지만.”
혈마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정사연합의 고수들 중 많은 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절망을 느꼈으나, 야율황은 절망하지 않았다.
“……헛되지 않았다.”
야율황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찾았다. 생사결을 시작하고 처음이었다.
이내 백수룡과 눈이 마주친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그 말을 끝으로 야율황은 절명했다.
피로 젖은, 산산이 조각난 두 팔을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였다. 절세고수의 육신은 죽어서도 대지에 꼿꼿하게 버티고 섰다.
“자, 본교가 일 승을 거뒀다. 다음은 누가 나설 거지?”
흑야마제가 스스로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며 다시 앞으로 나섰다.
“순서대로 계속 덤벼도 좋아. 아니면 여럿이서 한 번에 덤벼도 상관없어.”
오만함이 극에 달한 모습이었다. 웃는 낯짝으로 정사연합의 절세고수들을 하나하나 품평하듯 둘러보는데, 몇몇이 분에 못 이겨 앞으로 나서려 할 때였다.
콰아아앙!
흑야마제가 서 있던 땅이 반으로 갈라졌다.
훌쩍 뒤로 물러난 흑야마제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내려서는 상대를 바라봤다.
“벌써 나서려고?”
“다음은 없어.”
바닥에 내려선 백수룡은 차분한 음성으로 뇌까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야율황을 바라봤다.
“맹주. 고생했소.”
백수룡은 야율황의 시신을 허공섭물로 띄워서 안전한 후방으로 옮겼다. 역천신공을 익힌 미치광이를 경계했으나 놈은 방해하지 않았다.
‘당신이 벌어 준 시간. 천금처럼 쓰였소.’
붉은 운무의 등장부터 혈교의 습격까지. 모든 것이 급작스럽게 진행되었다.
정사연합의 무인들은 전쟁을 치를 각오를 제대로 다지지 못했고, 도시는 제대로 대피하지 못한 양민들로 인해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그 상태에서 곧바로 전투가 벌어졌다면, 정사연합은 감당할 수 없는 큰 피해를 입었으리라.
“다음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이지?”
맹주가 흑야마제와 생사결을 벌이며 시간을 버는 동안, 백수룡은 혈교의 전력을 파악하며 어떻게 싸울지 구체적인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또한 절세고수들은 장막에 싸인 새로운 혈마의 무공을 일부나마 견식할 수 있었으니, 야율황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이제 네가 죽을 차례라는 뜻이다.”
흑야마제를 노려보는 백수룡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