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233
232화 잡혀있는 기강 (2)
그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고.”
항해 도중 몇 번이고 다른 배와 마주쳤지만, 그들은 우리를 볼 때마다 역병신을 만난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방향을 틀어 도망갔다.
사략선은 물론, 일반 상선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어선까지도 도망간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마치 유령선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네.
“선장님! 오스만으로 향하면 혹시 콘스탄티노플도 가나요?”
그러거나 말거나 엔히크 왕자는 해맑은 목소리였다.
오히려 위험이 없어졌다는 걸 깨달아서인지 더욱 기분 좋아 보였다.
“비잔틴 제국은 오스만의 적이잖아. 가기엔 애매하지 않을까?”
“꼭 그렇지는 않아요.”
“뭐가?”
“콘스탄티노플의 위기는 언제나 있었지만, 그 누구도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을 넘지 못했어요. 그 유명한 이을드름조차도요.”
“이을드름이 뭔데?”
“튀르크어로 번개라는 뜻이에요. 바예지트의 별명이죠.”
“아~”
바예지트 1세는 오스만에서 손꼽히는 정복 군주다.
재위가 10년 조금 넘는데, 오스만의 영토를 두 배로 늘려놨으니까.
유럽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공포의 정복 군주다.
하지만 말년에 제대로 죽을 쑤게 되니, 바로 티무르 제국의 대칸, 티무르에게 영혼까지 털린 것.
그동안 정복했던 영토 대부분을 한순간에 날려 먹는다.
진짜 인생이 허망하긴 하다.
“갑자기 궁금해지네.”
“뭐가요?”
“한때 티무르 칸과 명나라 황제하고 한판 붙을 뻔했거든.”
세계관 최강자들의 싸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진다.
“네? 극동과요? 왜요?”
“명나라 황제가 티무르에게 ‘7년간 밀린 조공을 바쳐라.’라고 말했고, 티무르는 ‘직접 가져다주겠다.’라고 답했어.”
티무르로서는 칭기즈칸의 정당한 후예를 자처하는 만큼,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쫓아낸 명나라에 복수하려는 생각도 있었겠지.
그러면 대칸으로서 정통성이 확실해질 테니까.
“그 전에 티무르가 죽어서 결국 무산되었지만. 진짜 궁금해지긴 하네.”
“누가 이겼을까요?”
“붙어봐야 알겠지만, 나는 내가 섬기는 황제가 질 거라는 생각이 안 들어. 지금도 워낙 정정해서 50만 대군을 이끌고 대칸의 후예들을 정리하러 초원으로 향했거든.”
“와…… 50만…….”
엔히크의 말에 의하면 현재 포르투갈 총인구가 70만이라고 한다.
잼민이 입장에서 50만 대군은 움직이는 나라 같은 느낌이겠지.
“그래서 비잔틴에 가도 별문제 없는 이유는 뭔데?”
“오스만을 비롯해 수많은 이들이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을 넘으려고 했지만, 이를 넘은 이는 천 년 동안 존재하지 않았죠.”
“안타깝네.”
“네?”
“아니야.”
미래를 아는 나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기네스북에 올라도 좋을 만한 그 기록이 40년 후에 깨질 테니까.
“그 때문에 오스만도 적당히 조공을 바치고 지내요.”
“점령 못 하는 거야 그렇다 치지만, 조공까지 바칠 이유는 없잖아?”
현재 비잔틴 제국은 땅 대부분을 빼앗겨 망하기 일보 직전.
그야말로 산소 호흡기 달고 겨우 연명하는 중인데, 이런 상태에서도 조공 요구라니.
제정신인가 싶었다.
“애초에 비잔틴은 대체 뭘 믿고 조공 요구한 거니?”
“사실 비잔틴에게는 비밀 무기가 있어요. 그게 뭔지는 가르쳐 주지 않겠지만요.”
이 시대에 비밀무기라 해 봤자지.
“그 비밀 무기 하나 믿고 저러는 거야?”
“그것만은 아니에요. 흑해 북쪽에서는 엄청난 양의 밀이 생산되는데, 콘스탄티노플은 그 무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항구니까요. 돈이 많아요.”
그렇긴 하겠네.
지정학이 진짜 개사기이긴 하다.
현대의 튀르키예도 이걸 믿고 미국이나 러시아를 향해서도 큰소리 뻥뻥 치던데.
이런 거 보면 단군 할아버지가 터를 잡을 때 조금만 더 신경 써줬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러면 콘스탄티노플도 가볼까?”
“네! 선장님!”
잼민이를 앞세우면 비잔틴 제국도 흔쾌히 받아주겠지.
나는 어느 쪽 편도 들지 말고, 양쪽에서 뜯어내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도록 하자.
***
우리는 내전의 주요 요충지이자, 튀르키예 제3의 도시.
여기에 현재 오스만의 최대 항구라 할 수 있는 이즈미르를 거쳐 콘스탄티노플 쪽으로 북상했다.
이곳에 온 이유는 오스만과 거래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비잔틴 제국 황제를 만나서 이야기라도 해야, 나중에 유럽에서 꼬투리 잡힐 일이 줄어든다.
다행히 오스만은 현재 내전 중이라 나한테 신경 쓸 여유는 없을 것 같다.
“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노플~”
“그렇게 좋냐?”
“그럼요. 성지잖아요. 그동안 못했던 성지 순례를 쭉 해도 좋을 것 같아요.”
“미안하지만 예루살렘은 근처에도 안 갈 거란다.”
지금쯤 맘루크 술탄국에서 이를 벅벅 갈고 있을 테니까.
내가 하는 행동 자체가 동서양 중개 무역으로 큰돈을 버는 맘루크 술탄국엔 밥줄을 끊는 위협으로 여겨질 테니.
“어쩔 수 없죠. 테오도시우스의 성벽만으로 만족할게요.”
나도 사진으로는 많이 봤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어서 무척 기대되긴 한다.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은 정말 멋져요. 정말로, 정말 멋지죠. 흥! 극동에는 이런 거 없죠?”
얘가 나랑 같이 다니다 보니 열등감이 생겼나 보다.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걸 보면.
“이쪽에 유명한 성이라면…… 만리장성이 있네. 그레이트 월.”
“그게 뭐죠?”
“대명의 북방에 있는 긴 성이란다. 이보다 긴 성은 존재하지 않지.”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은 7만 피트가 넘어요.”
“알아.”
콘스탄티노플의 서쪽을 지키는 성벽의 길이는 20km 조금 넘는다.
“만리장성은 그것보다 300배는 더 길어.”
“하하하. 농담도 잘하시네요. 그런 게 있었다면 동방견문록에 쓰여 있었겠죠.”
“놀랍게도 사실이다. 있었긴 한데, 1600년 정도 전에 만들어진 거라 마르코 폴로가 왔을 땐 거의 다 파괴되었지.”
현대에서 보는 만리장성은 명나라 중기부터 다시 지어지기 시작해 청나라 때 완성된 것이다.
이 시점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명나라가 굳이 만리장성을 다시 지은 이유는,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면서 이를 보호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리장성은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 완공되지는 않았다.
대신 군데군데 엄청난 방어력을 지닌 관문이 들어서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그 유명한 산해관이다.
대운하도 그렇고.
만리장성도 그렇고.
그냥 천도를 안 하면 저런 걸 만들 필요도 없는데.
정치적인 목적 때문이라면 서쪽이나 더 남쪽으로 천도해도 괜찮고.
진짜 중국 황제는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
“프레스터 조선 왕국에는 유명한 성이 없나요?”
“있긴 한데…….”
수원 화성이라고.
근데 아직 안 지어졌다.
“음…… 천리장성이라고 있었어. 테오도시우스의 성벽보다 30배 정도 긴 성이지.”
“와~ 한번 보고 싶어요.”
“있었는데, 없어졌어.”
“왜요?”
“대칸의 군대가 와서 부쉈거든.”
나도 잘 모르고 있던 사실인데, 환생하고 나서 배웠다.
고려의 천리장성은 대몽항쟁 때 무너졌다는 사실을.
“새로 안 지었나요?”
“조선도 생각이 남달라서.”
“어떻게요?”
“백성들이 부역으로 고통받으니까 부역을 최소한으로 줄였거든. 따라서 성도 잘 안 쌓는다.”
“하지만 그러다가 누군가 침략하면 더 큰 피해를 볼 텐데요.”
“대신 그 돈으로 화포를 개량하지.”
이렇게 보니 조선도 만만치 않게 미친 나라네.
하긴. 침략자가 없어지면 성도 필요 없을 테니.
마냥 망상으로 치부하기도 어렵다.
이 상상을 실현한 전투가 바로 행주 대첩이니까.
행주산성은 솔직히 성이라기보다 뒷동산에 담장을 둘러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후후훗. 아무리 프레스터 조선 왕국의 화포라고 해도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못 뚫을 겁니다.”
“그렇겠지.”
“따라서 프레스터 조선 왕국은 위대하지만, 로마는 더더욱 위대합니다.”
“…….”
난 딱히 조선이 위대하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솔직히 그렇잖아.
조선 역사가 우리 역사긴 해도, 세계사에 큰 영향을 줄 정도의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 적은 없으니까.
“…….”
“왜요? 아, 죄송해요. 프레스터 조선 왕국도 로마만큼 위대해요.”
“그게 아니라…….”
여기까지 왔는데도 배들이 우리 함대를 피해 다닌다.
그야말로 기겁한다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다.
바로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려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지나가는 함선마다 경기를 일으키고, 심지어 이즈미르 항구로 진입하려고 하니, 항구가 난리가 났다.
무함마드 이 자식.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기에…….
결국, 행선지를 변경하기로 했다.
일단 콘스탄티노플에 정박해서 상황을 알아보고, 여차하면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어 흑해에 있는 항구로 향하기로.
하지만.
이 선택지 또한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땡땡땡땡땡땡!
“꺄아아아아아아악!”
우리가 콘스탄티노플에 가까워지자, 성은 난리가 났다.
마치 임진왜란 초기, 왜군들을 발견한 동래성 같은 모습이다.
“진짜 뭐 어쩌라고…….”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얘는 또 어딜 간 거야.
“어떻게 하죠?”
“일단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서 흑해 쪽 상황을 살펴보자.”
“네…….”
콘스탄티노플로 못 들어갈 거라는 생각 때문인지 잼민이의 실망이 크다.
하지만 완전한 애는 아닌지라 이 상황에서도 불만을 내뱉지는 않았다.
“설마 성에서 공격해오지는 않겠지?”
당연한 말이지만 콘스탄티노플도 화약 무기를 쓸 줄 안다.
화약보다는 ‘그리스의 불’이라 불리는 네이팜탄이 더 유명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긴장한 채로 폭 1km 정도의 무척 좁은 해협을 건넜다.
1km 폭의 바다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한강 정도 수준으로 보였다.
“왼쪽으로 가면 유럽, 오른쪽으로 가면 오리엔탈.”
지정학적으로 너무 환상적이다.
이러니 튀르키예가 배짱 장사를 해도, 미국이나 러시아가 최대한 잘 해결해 보려고 하는 거겠지.
“아…….”
감탄은 오래가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 성을 지나칠 때, 무함마드가 한 것으로 추정되는 만행의 자취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맙소사. 콘스탄티노플이…….”
“잼민아. 저거 함락 안 된다며?”
“저라고 이럴 줄 알았나요?”
콘스탄티노플은 삼각형 모양인데, 이 중 두 명을 바다와 강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삼면을 전부 둘러놨는데, 서쪽이 제일 두껍고, 그다음이 남쪽이다.
게다가 해발고도도 높아서 사실상 남쪽에 상륙하는 건 불가능하다.
반면 북쪽은 완만하고, 항구도 있어 주로 이쪽을 이용해 교역한다.
당연히 위험하다는 걸 비잔틴 제국 사람들도 안다.
그래서 중간에 바다, 그러니까 골든 혼으로 침입하는 걸 막기 위해 주석으로 만든 엄청 두꺼운 사슬을 연결해 놓았다.
여기에 전시에는 쇠사슬 뒤에 함선까지 배치해 놓는다.
그야말로 철벽 봉쇄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울림도 잠시다.
지금 보니 성벽은 군데군데 날아가 있고, 쇠사슬을 바다에 가라앉은 건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짓이네.”
오스만이 이런 짓을 하기엔, 함선이 바쳐주지 않는다.
비잔틴 제국은 이런 짓을 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한다고 하더라도 성을 무너뜨릴 정도의 화력을 내지는 못한다.
“어, 어쩌죠?”
“사람을 보내야겠지.”
“어디로요?”
“콘스탄티노플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오해부터 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