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241
240화 제3의 로마 (2)
아침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왔다.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간밤에는 잘 주무셨습니까?”
내 방 근처에 있던 석피와 이소군이 나를 맞았다.
순간 욱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왜 공주가 내 방에 자고 있어?”
“…….”
“…….”
내 말에 석피와 이소군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그러니까…….”
“전하. 기억 안 나십니까?”
말주변이 없는 석피 대신 이소군이 입을 열었다.
“이 궁전은 황녀의 궁전입니다. 그러니까 전하의 방에 공주가 들어간 게 아니라, 전하께서 공주의 방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뭐……?”
비잔틴 제국은 조선의 동양의 후궁이나 이슬람의 하렘처럼 여자들만 따로 머무는 공간을 마련하지 않나?
……포르투갈에선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애초에 우린 연회 전까진 방을 배정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네. 기항하자마자 바로 전투를 하러 갔으니.”
“전하께서는 무척 기뻐하시면서 ‘보물’을 외치며 공주의 방 안으로 들어가셨지요. 그리고 아침이고요.”
“아니, 그건 그리스의 불을 말하는 거였지.”
“‘그리스의 불’이 뭐죠?”
“아…….”
그러고 보면 내가 따로 이야기해준 적이 없다.
오해와 오해의 연속이다.
“아니, 그러면 소피아 황녀께서는 외간 남자가 방에 들어왔는데 그걸 얌전히 두고 보셨단 말입니까?”
“아바마마께 미리 이야기를 들었으니까요. 그리고 얌전히 두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요?”
“의자로 머리를 후려쳤죠. 푹 주무시더군요.”
내 머리가 아픈 게 숙취가 아니라 맞아서 그런 거였나?
“그리고 이 땅은 본래 그리스의 문화를 따릅니다. 그리스는 모계 중심의 사회고요.”
“그런데요?”
“따라서 결혼 생활에 필요한 집은 여자 쪽에서 구해야 하죠. 따라서 이상할 건 없습니다.”
아.
갑자기 TV에서 봤던 그 할아버지 짤이 생각나네.
옳게 된 나라는 그런 거라고.
괜히 역사가 깊은 게 아니라고.
“……황녀가 결혼식도 안 하고 초야를 치르는 건 문제가 많지만요.”
“내가 의자 맞고 기절했다면서요? 그래도 초야에요?”
“피를 안 본 깔끔한 첫날 밤이네요. 역사에 길이 남을 거예요.”
왜인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소피아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식사나 하러 가죠.”
***
우리는 에게해가 내려다보이는 궁전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그러니까 제가 아니라 ‘그리스의 불’을 원했다는 건가요?”
“언젠가 제조법이 실전될 것 같아서요. 기록만 해두고 싶었죠.”
“사용할 생각은 없고요?”
“더 나은 거라면 조금만 노력해도 만들 수 있어요. 내가 원하는 건 천년 간 로…… 제국을 지킨 무기의 원전입니다. 역사적 가치가 있으니까요.”
로마라고 하면 발작할까 봐 제국으로 치환했다.
그 배려가 나쁘지 않았는지 소피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괜찮아요.”
“뭐가요?”
“제가 알고 있으니까요.”
“……네?”
“궁금해서 슬쩍 보고 배웠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어차피 이제는 엄청난 비밀도 아니니까요. 오스만도 쓰는 마당에.”
“……그래요?”
“오래전에 유출되었어요. 다만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알려지지 않았기에 그들은 잘 사용하지 않죠. 또, 로마는 그리스의 불을 끄는 방법도 잘 알고 있고요.”
네이팜탄을 끈다?
산소를 차단하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내가 의아한 듯이 바라보자 소피아는 와인을 들어 올렸다.
그리스식 나이는 만 나이와 같기에 성인이긴 하지만, 어쩐지 아이라는 생각이 들어 살짝 거북했다.
한 살만 더 먹고 마시지.
“식초로 끄면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에는 와인이 되다만 식초가 매우 많죠. 그러니 오스만은 더욱 사용하지 않는 겁니다.”
“아…….”
“그러니 그리스의 불 제조법이라면 아쉬워할 필요 없습니다. 그보다는 다음 이야기를 마저 하고 싶군요. 제3의 로마라고요?”
석피는 라틴어를 전혀 몰라서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반면 이소군은 어느 정도 익혔는지, 우리의 대화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로마의 정신과 정통성은 이어지는 게 좋다고 봅니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힘들어요. 수많은 견제가 들어올 테니까요.”
유럽에서는 개나 소나 로마의 황제를 자칭한다.
유럽 역사에서 가장 무겁고 위대한 이름이니까.
심지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메흐메트 2세도 스스로를 ‘카이세리 롬’, 그러니까 로마의 황제를 자칭할 정도다.
이때부터 오스만 술탄국은 오스만 제국이 되기도 하고.
즉, 유럽에서 ‘로마의 황제’를 자칭하는 순간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만을 적으로 돌릴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새로이 나라를 세우려고 합니다. 프레스터 존 왕국처럼요.”
“그 나라는 정교회 국가인가요?”
“다국적, 다민족, 다인종, 다종교 국가입니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개방성을 표방하는 나라죠.”
“관용은 강자의 권리입니다. 새로 생긴 나라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가능합니다.”
“좋습니다.”
까탈스러운 척하지만, 그저 좋다고 하네.
이쯤 되면 소피아 팔레올로고스는 뭐든지 다 좋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정치 체제는 어떻게 세울 생각입니까? 플라톤의 철인 정치도 괜찮다고 봅니다만.”
“저도 인상 깊게 봤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제도입니다.”
“왜죠?”
“동방에는 그와 비슷한 제도가 있었습니다. 구품중정제라고 하죠.”
구품중정제는 삼국지로 유명한 위나라의 조비가 시행한 제도다.
과거 제도가 없던 시기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만들었다.
조비는 환관이나 관직의 세습을 무척 싫어했다.
또한, 순욱이나 제갈량 같은 훌륭한 재상들이 여러 인재를 추천하여 나라를 강하게 키운 것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구품중정제는 지방에 중정이라는 관리를 임명하여, 그가 여러 인재의 덕과 재능을 보고 관리로 임명하게끔 하는 제도입니다. 하지만 처절하게 실패했습니다.”
“어쩌다가…….”
“처음 중정은 플라톤이 말한 대로 이상적으로 정치를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중정은 그보다 못했고, 나중에는 뇌물을 받아 관직을 임명하거나, 지방의 권리를 과도하게 침범하는 일도 생겼지요.”
“그건 중정을 잘 임명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나는 사람의 인격과 능력을 그리 신뢰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장 못 믿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성인이자 선지자로 인정받는 나조차도 스스로를 인간쓰레기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다.
“제대로 만들어지고, 작동하는 시스템만이 인간 내면의 이기심을 억제할 수 있다고 봅니다. 또한, 뛰어난 사람이 모든 걸 해결하면, 그다음 세대에는 억제되었던 문제가 반드시 터진다고 생각합니다.”
뛰어난 지도자가 계속 나올 수는 없으니까.
만약 조선에 세종대왕이나 정조, 이순신 같은 장군만 계속 나왔다면 나라를 뺏길 일도 없었겠지.
“따라서 나는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제도로,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라를 건국할 것입니다.”
이상적이라고 말하지만, 원 역사에서 검증된 제도를 사용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그것의 문제점을 지적하지만, 그래도 현대의 민주주의는 인간이 고안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체제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렇다.
나중에는 더 좋은 게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 새로운 땅이 어디에 있죠?”
“흠……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됩니다. 비밀이니까요.”
사실 알려준다고 해도 상관없다.
안다고 해서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건 시험이다.
내가 앞으로 소피아 팔레올로고스를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한 시험.
“이 땅은 거대한 구형입니다.”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유럽에서 서쪽으로 항해하면 명 왕조나 조선, 지팡구에 닿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사이에는 미지의 세계가 있다고 하던데요. 아, 그 미지의 세계에 건국하려는 겁니까?”
“……네?”
뭐야.
어떻게 알고 있어?
“바랑인 친위대에게 들었어요.”
바랑기는 비잔틴 제국 사람들이 북유럽을 가리킬 때 쓰던 호칭이다.
북유럽 사람은 바랑인, 영어식으로는 바랑기안이라 불렀다.
본래는 바이킹에서 시작된 것인데, 이들은 비잔틴까지 왔다가 그 뛰어난 전투력을 인정받아 용병으로 일하고는 했다.
이들을 정식 편제에 받아들여 친위대로 편성한 것이 바랑인 친위대.
비잔틴의 친위대인 타그마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타그마 톤 바랑곤’이라 불렸다.
“그 옛날 위대한 바이킹 선조들이 서쪽으로 항해를 했는데, 아이슬란드를 넘으면 큰 섬을 만나고, 거기서 더 넘어가면 끝도 없는 대륙이 펼쳐져 있다고 하더군요.”
“네. 맞습니다.”
삽화 별도 첨부
중간의 큰 섬은 그린란드.
끝도 없는 대륙이란 바이킹의 식민지, 빈란드를 말하는 것이겠지.
“그 전설이 정말이었던 건가요?”
“바이킹이 그곳에 당도했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이 시대에는 전설로만 취급되는 이야기다.
캐나다 동부 뉴펀들랜드섬에 바이킹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사실로 입증되는 시기는, 세계 대전 이후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남북으로 끝도 없이 이어진 대륙이 있다고 추정됩니다. 어쩌면 중간에 뚫린 지형이 있을지도 모르고요.”
현대의 지식을 알고 있는 나는, 당연히 그런 곳이 없다는 걸 안다.
이 시대의 눈높이에 맞춰 그렇게 대답했다.
“그곳은 빈 땅인가요?”
“아니요. 원주민들이 삽니다. 하지만 아직 철기도 사용하지 못하는 원시적인 문명이더군요.”
“그들을 노예로 삼을 생각이고요?”
“이것 하나만 확실히 하죠. 나는 노예 제도를 극히 혐오합니다. 내가 새로이 건국하는 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노예 제도를 허가하지 않을 겁니다.”
안다.
인류의 역사는 착취의 역사이고, 미래에 지탄을 받더라도 노예를 쓰는 게 훨씬 더 좋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노예 제도를 혐오하는 까닭은 도덕 때문이 아니다.
나는 한 명의 천재가 수십, 수백만을 먹여 살린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노예 제도는 그 천재가 나올 가능성을 죽여버린다.
정확히는 천재가 나오더라도, 목화솜이나 따다가 죽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노예 제도로 얻는 이익도 크겠지만, 아무도 모르게 잃어버렸던 손실이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기회를 줄 겁니다. 내 선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상적인 이야기군요.”
“세상을 바꾸는 건 언제나 이상이었죠.”
“그런다고 다툼이 없어질까요?”
“그건 영원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쟤보다 낫다.’라는 생각은 할 수 있게 되겠죠.”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미국도 수없이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인류의 죄악이라는 핵무기를 실제로 사용한 유일한 국가이기도 하고.
그런데도 많은 나라,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세계의 리더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나마 미국이 제일 괜찮기 때문이다.
미국 빼면 누가 리더 할 건데.
2위인 중국? 3위인 일본? 4위 독일? 5위 인도? 6위 영국?
리더 없이 평등하게 하면 되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에 대한 대답은 ‘국제 연맹’으로 잘 나와 있다.
“나는 완벽하게 도덕적인 나라를 꿈꾸는 게 아니라, 수없이 많은 나라 중 그나마 제일 괜찮은 나라를 꿈꿉니다.”
“그래서 그곳의 원주민들은 어쩔 생각이죠?”
“최대한 공존해야겠죠.”
“그들이 당신을 거부한다면요?”
“……죽을 겁니다.”
“죽이는 게 아니라 죽는다?”
“네. 자연스럽게. 대부분.”
그들은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에 면역력이 없으니까.
아메리카로 가기 전, 우두법 백신이나 항생제를 비롯해 대비책은 최대한 마련할 생각이다.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인다면 살아날 가능성이 그나마 커지겠지.
하지만 나를 적대하면 그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고.
그들의 미래는 원 역사처럼 흘러가겠지.
이래서 내가 쓰레기라는 것이다.
다 알고 있으면서 결국에는 해버리니까.
‘내가 안 하면 누군가가 더 최악의 방법으로 해버릴 테니까.’라는 핑계를 대면서.
“침략자가 되는 거네요.”
“…….”
학교 다닐 때 이렇게 배웠다.
‘구한 말 조선을 침략한 일제는 나쁘다.’
역사는 인류의 오답 노트다.
따라서 국사는 한국인의 오답 노트라고 불릴 수 있다.
그런데 그 오답 노트에서 배운 게 ‘상대는 나쁘다.’ 뿐인가.
약하면 공격당하는 건 인류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그래왔다.
심지어 개미 역시도 군단을 이루어 다른 무리와 전쟁을 치르곤 한다.
따라서 침략자 탓을 하기보다는 조선이 먼저 개화하지 못했고, 과학 기술을 등한시했고, 군인을 푸대접한 것부터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일제가 잘했다는 게 아니라, 약육강식의 국제 사회에서는 심판이 없고, 마찬가지로 선량한 피해자 역시 없다는 말이다.
승자와 패자.
강자와 약자만 있을 뿐이다.
“기회를 주는 겁니다.”
“무슨 기회요?”
“나를 평화로운 전파자로 받아들일지, 잔학무도한 침략자로 받아들일지에 대한 선택의 기회죠.”
“괴로워 보이네요.”
“전혀 괴롭지 않습니다. 순교자 행세를 할 생각도 없고요.”
완벽한 선역이 될 생각이었다면 정치나 군사 부문에 끼어들었으면 안 되었다.
가만히 앉아 연구나 했어야겠지.
원정대에 합류한 순간부터 내 손은 이미 피에 물들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저 어떤 것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일일지 고민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제3의 로마입니까?”
“바느질의 첫 단입니다. 나는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줄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후손들의 몫이겠죠.”
“좋아요.”
오늘 아침부터 계속 들은 말.
좋아요.
SNS에 올린 내 생각을 동의받은 것 같아서 조금 위안이 되었다.
“모순되는 말이지만, 평화로운 침략자의 길이라면 나도 함께 걷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뭘 하실 거죠?”
피식 웃었다.
“메흐메트 술탄을 만나러 갑니다.”
그 말에 소피아의 표정이 당첨 안 된 복권처럼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