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299
298화 범유행 (1)
“허…….”
영락제는 허무한 듯한 숨소리를 내뱉었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가장 위협이 되었던 존재.
어떻게든 찾아내어 미칠 듯이 죽이고 싶었던 존재.
그런 존재가 뜬금없이 나타나서 멋대로 죽어버렸으니까.
“폐하. 물러나시기를 주청 드립니다. 독으로 보여요. 그것도 맹독.”
병필 태감 문루가 건문제를 진단하더니 우려 섞인 말투로 말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문루는 온갖 독에 해박했지만, 그렇다고 세상 모든 독이나 질병을 아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건문제의 몸에 퍼져 있는 독은 문루 인생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되었다.”
“예?”
“문루와 장군들은 따라오거라.”
영락제는 문루와 주요 장군들을 데리고 막사로 들어갔다.
“후우…….”
문루와 장군들을 둘러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강인하고 철혈의 모습만 보였던 황제의 지친 듯한 모습에 문루와 장군들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짐은 이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시어요?”
“말 그대로의 의미니라.”
사실 영락제의 건강은 예전에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하지만 건문제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자신이 죽는다면 말 그대로 나라가 뒤집힐 게 불 보듯 뻔하기에, 강인한 정신력으로 죽음마저 늦췄던 것뿐이다.
건문제가 확실하게 죽은 지금.
영락제의 생기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다만 나라에 평안이 찾아온 것은 아니다. 대명을 다시 통일해야 하고, 주제도 모르고 간을 보았던 제후국들에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겠지.”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건문제가 죽음으로서 진명에는 정통성도, 구심점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지리멸렬하는 문관들 따위 가볍게 짓밟으면 그만이다.
제후국도 마찬가지다.
대명이 다시금 통일되면.
급하게 움직이지 않고 10년 정도만 다시 내정에만 집중한다면.
제후국은 싸워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일 것이다.
“이는 짐의 역할이 아니다. 첨기라면 능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폐하…….”
“첨기는 문무를 겸비한 군주의 재목이다. 짐보다 훨씬 더 성군이 될 수 있다. 그대들이 충심으로 잘 보필하기를 바란다.”
병필 태감 문루나 장군들이 엄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문루나 몇몇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대명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짐이 붕어하였다는 소문을 내지 말라. 그래야 제후들이 경거망동하지 않을 터이니.”
“폐하께서 하실 수 있사옵니다. 부디 약한 소리 마시어요.”
“…….”
“폐하?”
문루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떨리는 손으로 맥을 짚고, 코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가져다 대기도 했다.
“폐하!”
모두가 깨달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호걸이자 거인이 눈을 감았다고.
“폐하. 남경 방면에서 전령이옵니다!”
애통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깨듯, 막사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황제의 붕어했다고 알릴 수는 없기에 문루가 막사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냐?”
“남경 방면에 대만 국왕 강해인이 100여 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현. 정화 제독께서 장렬히 전사하시고, 목성 장군은 항복했다고 합니다.”
“뭣이!”
우려하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문루는 알고 있다.
강해인이 이끄는 수군이 어떠한 힘을 지녔는지.
만약 놈과 부딪히게 되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포만 맞다가 전투가 끝날 것이다.
안 된다.
적어도 지금은 안 된다.
대명군은 지금 지칠 대로 지쳐있고, 전염병도 창궐해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태에서 맞부딪혔다가는 전멸이다.
“아드득.”
문루는 이를 벅벅 갈며 참았다.
굴욕적이지만 어쩔 수 없다.
최대한 빨리 퇴각하여 폐하의 시신을 황태손 전하께 보여드리고, 동시에 전력을 온존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이 있다.
“전군에게 전하라! 당장 모두 퇴각하라고.”
엄밀히 말하면 병필 태감 문루에게는 군 지휘권이 없다.
하지만 장군들도 지금 상황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무창성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얼마나 힘들게 함락한 성인데.
그냥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버립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어요.”
문루의 살벌한 안광을 내뿜으며 대답했다.
“무창성은 한동안 누구도 사용할 수 없는 죽음의 성이 될 테니까요.”
비록 인위적으로 전염병을 퍼뜨리는 방법은 몰랐지만, 독이라면 누구보다 더 잘 안다.
그리고 한 번 당했으면 갑절로 갚아주는 것은 일도 아니다.
장군들이 필요한 물자만 챙겨서 북경으로 회군할 준비를 할 때.
문루는 동창의 요원들을 이끌고 무창성 곳곳에 파괴 공작을 시작했다.
중원의 핵심 곡창지대라는 장강 중류.
그 중심의 도시 무창.
이제 한동안은 누구도 이 근방에선 살고 싶다는 생각을 못 할 것이다.
무창성이 정화되고.
대명이 다시 군을 정비할 때까지.
그때까지만 잠시 맡겨두기로 하지.
***
대명군을 강제로 장강 북쪽의 양주로 옮겼다.
그리고 양쪽의 배를 한데로 모아서 불태웠다.
앞으로 한동안은 서로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상황을 정리하고 나니 어느덧 3일이 지났다.
“여기는 어떻게든 됐는데…….”
이제는 무창으로 가서 영락제를 상대해야 한다.
“후우…….”
무섭다.
이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걸 아는데도 무섭다.
이건 본능적인 문제다.
인간이 총을 들었다고 해서 호랑이나 곰이 안 무서울 것 같나?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시련을 넘는다면.
더는 두려워할 것이 없어진다고.
“가자.”
전투 피로는 적다.
투석기 몇 번 쏘고, 대포 몇 발 쏜 것뿐이니까.
우리는 장강을 따라 올라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창에 다다를 수 있었다.
“아…….”
너나 할 것 없이 할 말을 잃었다.
무창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도였으니까.
“우욱. 우웨에에에엑”
여러 전투를 겪어봤던 베테랑 전사 중에서도 참지 못하고 토사물을 쏟아내는 이가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거대한 강임에도 새빨갛게 물들어 있다.
황혼 녘도 아닌데 말이다.
강 옆, 성 앞에는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다.
성안에서는 매캐한 검은 연기가 올라가고 있고.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성안에는 이보다 훨씬 더한 참사가 일어났을 것이다.
힘들게 성을 함락시키고 나면 병사들은 그동안 받았던 엄청난 스트레스를 해방하려고 할 테니까.
“지독한 냄새다.”
날이 습하고 덥다.
시체는 벌써 썩어들어가고 있고, 당연히 벌레가 들끓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석피가 묵직하게 물었다.
“돌아간다.”
“예.”
여기 머물러봐야 좋을 게 없어 보였다.
“맙소사. 이게 극동의 전쟁입니까?”
헨리 왕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린 나이 때부터 상당한 전투를 치렀던 그도 이 정도 전투는 처음 보는 모양이다.
“첩보에 의하면 10만 대 10만이 맞붙었다고 하네.”
공성을 하려면 최소 세 배의 병력이 더 필요하다고 하지만, 영락제는 양을 질로 메꾼듯했다.
“10만…….”
“이 정도야 이 근방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
“성인 예하의 말씀을 의심한 건 아니었습니다만, 솔직히 과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었군요.”
헨리 왕자는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글쎄…….”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공들여 함락시킨 성을 버려둔다는 건 이상했다.
“설마 남경으로 향한 겁니까?”
“그건 아닐 거야. 저 참상을 봐. 적은 피해가 아니야. 큰 희생을 치러서 얻은 성을 버릴 정도면 뭔가 큰 변고가 생긴 걸 거야.”
“성을 버려둘 정도의 변고란 무엇일까요?”
“…….”
망루로 올라가 망원경을 들었다.
“역시…….”
시신의 피부색이 이상하다.
차라리 검기만 했으면 불에 탄 흔적이라고 생각했으련만.
보랏빛으로 썩어들어간 시신이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돌림병의 흔적이다.
“빨리 배를 돌려라. 여기를 벗어난다.”
“예!”
그 뒤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강 근처에 주둔하며 상황을 살폈지만, 영락제의 군대가 온다는 소식은 없었다.
대신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중원 전역에 각기 다른 괴질이 창궐하고 있다고.
***
그동안 방역은 철저하게 대비했다.
전쟁 준비보다 방역 준비를 더 철저하게 했을 정도다.
하지만 막상 중국 전역에 괴질이 창궐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공포가 밀려왔다.
전생에 코로나 때 어떤 일을 겪었는지 확실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역병에 대한 위험성은 이 시대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기에, 내 지시를 철저하게 잘 따라주었다.
그래도 부족했다.
좀 더 체계적이 효과적인 대응이 필요했다.
나는 대만으로 돌아오자마자 지도자급 인사를 모두 소집했다.
“이런 일을 예상하고 미리 대비하신 걸 보니 새삼 전하께서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갑자기?”
“갑자기라니요. 저희는 항상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하께서 부정하신 겁니다.”
찬양받고는 있지만,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안 좋은 일을 대비함에 있어 예상이 맞는 것보다 차라리 틀리는 게 낫다.
예상이 틀리면 나만 바보 취급받고 끝나지만, 예상이 맞으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 테니까.
대비는 엄청난 대가를 상당한 대가 수준으로 낮춰주는 역할밖에 못 한다.
“분명히 해야 할 건, 방역은 국가의 의무라는 점이다.”
물론 이 시대에도 역병이 창궐하면 조정에서 나선다.
유럽에서도 흑사병 때 국가 차원에서 대응했고.
하지만 아직 의학이 발전되지 않은 시기인지라 그 대응은 조잡했다.
국가의 전력을 쏟아부어 역병을 막으려 애쓰지도 않았고.
여차하면 백성이 죽든 말든 마을을 봉쇄해 버리면 되니까.
“그리고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이 필요하지.”
“돈이요?”
“방역에 신경 쓰다 보면 경제활동을 못 하게 된다. 그리되면 병에 걸리기 전에 굶어 죽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이런 점에서 대만은 치명적이다.
대만은 기본 상업을 중심으로 성장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또, 농지가 충분히 개간되기 이전에 수만 명의 장인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인제 와서는 무역이 막히면 자칫 식량부족으로 고사할 수도 있다.
식량을 수입해 온다고 해도, 식량을 살 돈이 없어질 수도 있고.
“역병에 대응하는 기본은 청결이고, 그다음은 충분히 먹이고 잘 쉬게 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언제나 함께했던 흔한 질병인 감기.
그 감기조차도 이 시대에는 굉장히 위험한 질병이다.
잘 먹고, 잘 쉬면 낫는데, 이 시대에는 잘 먹고 잘 쉬는 것 자체가 사치니까.
즉, 면역력 자체가 굉장히 낮다는 뜻이다.
백신이나 치료제를 개발할 의료 인프라 자체가 없는 상황에서 믿을 거라곤 예방과 자체 면역력뿐이다.
“현 시간부로 대만은 방역에 국가의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동맹들과 연락을 긴밀하게 연결해라. 머리를 맞대고,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음으로써 함께 이겨내겠다.”
“하오나 전하. 전염병이 돌면 교류는 최대한 자제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지당한 말이다.”
이번 역병이 어떤 메카니즘으로 전파되는지는 모르겠으나, 교류가 없으면 전파될 일도 없겠지.
“하지만 현재 역병은 대명과 진명에 발생했고, 우리와 동맹들은 한 발 떨어져 있다. 지금 공조 체제를 만들어야, 손을 맞잡을 수 있다.”
상호방위조약도 평화 시에나 가능한 거지, 전쟁 중인 국가와는 맺어주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예외적으로 전쟁 중임에도 강대국을 등쳐먹는 데 성공한 사람도 존재하긴 하지만.
“꼭 그렇게 공동대응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전염병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나는 필요하다면 머리를 숙이고 적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 역병은 모든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반드시 승리해야 할 인류의 주적이다.”
전염병이라는 게 언제 어디로 퍼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 첫 타자가 대만이 될지, 조선이 될지, 일본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전염병은 도미노와 같다.
한 나라가 쓰러지면 그 주변 나라도 줄줄이 쓰러진다.
따라서 첫 도미노가 쓰러지지 않도록 주변에서 도와야 한다.
그게 지상과제다.
“솔직히 회의적입니다. 나름 가까워졌다고는 생각합니다만, 누가 타국의 일을 진심으로 도와주려 하겠습니까?”
“할 수 있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한다.
인간이 이타적인 동물이라 생각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의도한 대로.
“분명히 말하지. 이번 역병을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천하의 판세가 달라질 것이라고.”
다들 폭삭 망하는 와중에 나는 조금만 망하면 그 자체로 승리한 것과 다름이 없다.
“또한, 어려운 와중에도 손을 내밀 줄 아는 덕이 있는 국가가 만백성의 민심을 얻고, 향후 천하를 주도하게 되리라고.”
이미 시행하고 있던 당동벌이.
갈라치기와 잘 연계하면 중국에서 다시는 황제가 나오지 않도록 만들 수도 있다.
“우리는 희망의 등불이 될 것이고, 환하게 불타올라 절망의 그림자를 걷어낼 것이다.”
본심을 숨긴 채.
나는 철저하게 선역을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