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86
085화 흑사관 (2)
“안정 사관 강해인은 대마도 정벌과 이키섬 공략, 구주(큐슈)에 있는 왜구의 본거지까지 토벌에 대승을 거두었다.”
킬방원은 어제의 만남을 뒤로한 채 담담하게 포상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왜구의 배 980척을 격침하고, 수천의 왜구를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으며, 왜구에게 끌려갔던 수많은 포로를 해방하였으니, 역사에 길이 빛날 대승이라 하겠다.”
음?
공이 부풀려져 있는 것 같은데.
왜선 980척을 만났다고 했지, 격침했다고 하지는 않았다.
해전을 제외한 왜구를 죽인 공로는 시부카와와 오우치가 가져갔다.
보고서에도 각종 전과를 축소했다.
트집 잡는 놈이 분명히 나올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왜…….
“이에 논공행상을 시작하니…….”
조정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킬방원은 계속 말을 이었다.
본래 논공행상은 최고 지휘관부터 하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래에서부터 차례로 올라갔다.
마치 폭풍 전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조선군 총괄을 맡은 이위형을 2등 연무공신(聯武功臣)에 책록하고, 정3품 수군절도사로 제수하며, 부산포에 경상우수영을 설치하고 이곳의 총책임자로 임명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위형은 킬방원에게 절을 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교지를 받았다.
북방에서 십수 년간 고생만 하고 인정은 제대로 못 받았다더니.
드디어 출셋길이 열렸네.
같이 일해본 결과, 군기를 매우 엄격하게 잡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괜찮은 장군이다.
지금 시대에는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어 단점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마지막으로 왜구 토벌을 성공적으로 이끈 안정 사관 강해인은…….”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1등 연무공신(聯武功臣)에 책록하고, 청해공(青海公)으로 봉한다.”
조선의 작위는 공작, 후작, 백작의 3등작이다.
여기서 공작은 Duke가 아니라 Prince.
이젠 대군이라는 칭호로 바뀌었다.
따라서 청해공이라고 해도 진짜 공작에 봉해지는 건 아니고, ‘공작 대우’ 같은 느낌으로 보면 편하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얘는 종친 같은 대우임.’이라고 한 것이다.
킬방원도 원래는 정안공으로 불렸으니까.
여담이지만 ‘청해’라는 시호는 내가 최초가 아니다.
태조 이성계의 의형제인 이지란이 청해백(青海伯)이라는 백작에 봉해졌다가, 후에 양렬공(襄烈公)이 되었다.
여진족 출신이 무슨 청해냐고 할 수 있는데, 이지란의 본관이 청해 이씨다.
함길도 청해리 출신이라고.
“이상이다.”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1등 공신에, 봉호까지 받았는데 벼슬 이야기는 없었으니까.
또한, 포상이라고 할 수 있는 공신전에 관한 이야기도 없었다.
“전하. 왜구 토벌에 공을 세운 안정 사관 강해인의 품계를 그대로 두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사옵니다.”
국사 시간에 단골로 나오는 언론 삼사.
그중 하나인 사간원의 간관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입을 열었다.
“어찌 2등 공신인 이위형을 정3품 수군절도사로 제수하시면서, 1등 공신인 강해인을 정5품 안정 사관으로 두시나이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조선 조정의 대소신료가 전부 내 적인 줄 알았는데, 내 편을 들어주는 이도 있구나.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하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삼사의 대간.
그러니까 대관과 간관은 대신들을 견제하는 게 목적이니까.
대신들이 나를 싫어하니까, 나를 옹호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참고로 지금 언론 삼사는 사헌부, 사간원, 집현전이다.
아직은 홍문관이 문서 보관소 역할 정도밖에 못 한다.
아마 세조가 집현전을 박살 낸 이후에나 홍문관도 삼사에 이름을 올리지 않을까?
“벼슬 품계는 대명의 황제 폐하와 합의를 한 후에 내릴 것이니 심려치 말라.”
“예. 전하.”
영락제 이름이 나오니까 바로 물러서네.
진짜 걔는 뭘 하고 다니기에 이렇게 위엄이 쩌는 건지.
“허허허. 이제 왜구도 토벌되었으니 여진족만 토벌되면 조선은 태평성대를 누릴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주상 전하의 은덕입니다.”
“하오나 매년 가뭄이나 홍수 등 흉작이 발생하니, 황정(荒政)을 게을리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황정은 흉년을 대비하는 것.
조선의 중대사다.
“올해도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소서.”
“하지만 조선은 제후국이 아닙니까. 하늘에 직접 제사를 지내는 건 천자국인 명나라와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듣자 하니 평안도에는 벌써 가뭄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하옵니다. 원통한 죄수들을 다시 조사하시어 억울함을 풀어주셔야 하옵니다.”
“태상왕 때부터 무리한 축성(築城)이 많았으니, 요역을 줄이시고 백성의 삶을 살피시옵소서.”
“각 지역에 조관을 보내어 미리 백성의 삶을 살피고, 고을에 비축된 곡물의 양을 점검하며, 구황을 위해 필요한 물품들을 확인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만약의 경우 금주령을 내리시고, 사시를 용인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하지만 중대사를 다루는 것치고는 대책에 답이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가뭄과 억울한 죄수는 상관관계가 없어서?
기우제를 잘 지내지 못해서?
뭐 좋다.
기우제는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고, 금주령은 곡식의 낭비를 줄여주며, 일용품 거래가 가능한 사적인 시장도 구제책이 될 수 있지.
죄수를 풀어주는 일은 현대에도 흔히 있는 일이니까.
광복절 특사 같은 거.
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없다는 건 심각한 문제다.
“양질호피(羊質虎皮).”
“…….”
가볍게 내뱉은 혼잣말에 갑자기 조정의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양에게 호랑이 가죽을 씌운다고 호랑이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외관은 훌륭하나 실속이 없음을 의미하지요. 비슷한 말로 속 빈 강정, 빛 좋은 개살구 등이 있습니다.”
일부러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연유로 그런 말을 하는가.”
나를 보며 분노한 이는 이숙번.
1, 2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우고, 조사의의 난까지 진압하는 등 무공이 대단한 ‘문관’이다.
킬방원의 측근 중 측근으로 워낙 총애를 받는지라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세를 누리는 중이다.
“가뭄이 자주 든다면 보를 쌓아 저수지를 만들고, 수차를 만들어 물을 끌어오고, 논과 밭을 재정비하여 물을 대기 쉽도록 개편하자는 제안이 먼저 나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안다.
한반도의 강수량은 대부분 여름 장마철에 집중되어 있어서 지랄 맞은 환경이라는 걸.
그러니까 조선의 관리들은 더 유능해져야 한다.
“누가 그걸 모르느냐!”
“알면 좀 하세요.”
“뭐라!”
“이보게. 그대의 능력이 출중한 건 알겠네만, 이곳은 전하께서 계신 어전일세. 너무 무례한 것이 아닌가.”
날뛰려는 이숙번을 제지하고 나선 이는 하륜.
킬방원의 킹메이커다.
다재다능한 능력자이지만, 탐욕이 너무 강한 인물이다.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진인사대천명이라.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하늘의 뜻에 기대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체 무엇을 안 했다는 말이냐?”
“대응하기 급급하지 않습니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근본적으로 대비를 해야지요.”
“안 했을 것 같으냐!”
“안 했을 것 같은 게 아니라, 안 하셨습니다.”
너희로선 최선을 다했겠지.
내가 봤을 때는 최선이 아니다.
시대를 감안해도 그렇다.
다른 나라를 배우려는 노력은 쥐뿔도 안 했으니까.
“아니라면 묻겠습니다. 왜국에서도 자격수차(自激水車)라 하여 수세를 이용해 자전하는 수차를 씁니다. 근데 왜 조선에서는 구식 수차만을 사용하며 쓸모가 없다고 합니까?”
“왜국 따위를 배우란 말이냐?”
“불치하문(不恥下問). 논어 공야장 편에 나오는 말로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도 배울 점이 있으며, 모르는 걸 묻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했습니다.”
“강 사관! 아무리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는 것이다!”
정도란 누가 정합니까?
백성을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는 게 그렇게 힘듭니까?
등등.
여러 반론이 떠올랐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막 나가기로 했으니까.
내 사업체를 이용해서 조선을 하청으로 부려먹으며 압박할 건데 굳이 설득할 이유가 없지.
“왜국을 배우자니! 그러고도 그대가 선비라고 할 수 있는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륜은 더더욱 기세등등하게 나왔다.
“내가 정의인데 무슨 상관입니까? 대감의 청렴이나 잘 챙기세요.”
“뭐, 뭐, 뭐?”
하륜은 마치 렉 걸린 동영상처럼 버벅댔다.
“대, 대체 뭘 믿고 이렇게 오만무도하게 구느냐!”
“역사를 믿습니다.”
“뭐라?”
“후손들은 저를 시대를 앞서나간 선구자, 위대한 탐험가, 조선의 개혁가, 최초의 경제학자 등등 많은 수식어로 부르며 찬양할 겁니다.”
“대단한 자신감이구나!”
“예. 정말 자신 있습니다. 반면 하륜 대감은 부패한 탐관오리로 길이길이 남을 겁니다.”
사관은 온갖 기록을 접한다.
개중에는 왕조차 읽을 수 없는 기록도 있다.
덕분에 잘 알지.
네가 한 쓰레기 짓을.
“신덕왕후의 정릉 인근에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자 노른자위 땅을 홀라당 삼켰지요? 멋대로 백성을 동원하여 땅을 개척하고 날름 해 처드셨고요. 심지어 노비에게 매관매직까지 하셨지 않습니까.”
“흥. 네놈이 그리 주장한다고 누가 받아줄 것 같으냐? 이제 너는 조선의 기록을 쓸 권한이 없다.”
“왜 없습니까?”
“네게 허락된 권한은 조선 밖의 일을 기록하여 전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네가 조선에 관한 어떤 기록을 남기더라도 정사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제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기록을 쓰다 보니 이런 불안이 들더군요. ‘어쩌면 높으신 분들이 내 기록을 말살해버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요.”
실제로 정화의 원정 기록은 명 사대부에 의해 삭제되고 말살되었다.
조선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세조 때 단종실록을, 중종 때 연산군일기를 뜯어고쳤다는 의혹도 있으니까.
사관들이 필사적으로 기록을 지킨다고 해도, 임진왜란 같은 전쟁이 터지면 소실될 수도 있고.
대체 어떻게 하면 기록을 완벽하게 후세에 남길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역사 덕후인 친구를 떠올렸고, 그의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단언컨대 암호화폐야말로 가장 완벽한 물질이다.’
녀석의 영끌 올인이 대박을 터뜨렸는지는 모르겠다.
그건 별로 안 궁금하고, 대신 친구가 입에 침을 튀겨가며 설명했던 블록체인 기술의 위대함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는 그 위대한 기술을 이 시대에 적용하기로 했다.
“답은 간단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의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기록을 보내버리면 됩니다.”
“……무슨 뜻이지?”
“여러분들의 부정부패와 잘못을 철저하게 기록하고, 각국의 언어로 번역해서 제 항해 기록과 함께 온 세상에 퍼뜨릴 겁니다. 탐관오리의 가문 이름까지 함께요.”
내가 600년 뒤 미래에 살아보니, 기록 말살은 그리 타격이 없더라고.
오히려 흑역사를 박제해놓고 두고두고 조리돌림 해야 제대로 된 타격이 있더라.
‘OO위키/하륜/논란.’
같은 느낌으로.
“앞으로 조선에 방문하는 모든 이들은 현재 조선을 알기 위해 제 기록을 참조할 터. 조선에서 정사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제 기록의 가치가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난 이미 월드 클래스거든.
“오늘은 제가 왜국의 자격수차를 배우자고 말했는데, 대감이 왜국을 배우는 건 수치스럽다 하여 거절했다고 쓸 겁니다.”
아. 조선에는 박제해 마땅할 흑역사가 가득하구나.
물론 저기에 있는 사관은 ‘안정 사관 강해인이 이렇게 말을 하였다.’라고 쓰겠지만.
“제 생각에 후손들은 저를 백성을 위하는 살신성인의 학자로 보고, 대감을 자존심만 높은 탐관오리라 여길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십니까?”
“흥. 그래 봐야 조선을 떠나서 오래 항해를 할 터. 향후 조선의 사정을 얼마나 잘 알아낼 수 있을까?”
대단한 멘탈이다.
본인이 부정부패를 저지른 탐관오리라는 걸 부정하지 않네.
다른 대신들은 벌써 낯빛이 하얗게 질렸는데도 말이다.
내가 말한 외국에는 당연히 명나라가 포함된다.
유학의 본산에 부패한 탐관오리로 기록되는 것.
조선 사대부에게 이것만큼 불명예가 없다.
종계변무만 봐도 어떤 수준인지 알 수 있지 않은가.
마치 바티칸 교황청에 ‘어느 영주는 성경에서 금지한 일을 했다.’라고 기록된 급이다.
더욱이 명나라 기록에 탐관오리로 남으면, 명나라에서 외교전을 할 때마다 두고두고 잘 이용할 터.
이는 가문 대대로 계속 악영향을 미친다.
참고로 종계변무.
그러니까 태조 이성계가 이자춘이 아닌, 이인임의 자손이라고 기록된 사건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상에는 반골 기질이 있는 사람이 많아서요. 삼사의 대간이나 예문관의 사관 등 몰래 제보해줄 사람은 차고 넘칩니다.”
“마음대로 하거라! 누가 그런 되지도 않는 협박에 숙일 것 같으냐!”
“와우. 이왕 부패한 관리로 널리 알려졌으니 막가자는 뜻입니까?”
“네놈. 어린놈의 자식이 가정교육을 못 받아 예의가 없구나! 계속 그따위로 행동하다가는 비명횡사할 날이 올 것이다!”
“만약…….”
내 관복을 잡고 단번에 뜯어냈다.
찌직!
입궐하기 전에 칼질해둔 덕에 조선의 관복은 쉽게 반으로 갈라져 찢어졌다.
그러자 안에 입고 있던 비슷한 관복이 드러났다.
다만 가슴에 단학이 그려졌다는 점이 달랐다.
아직 흉배가 없는 조선 관복과는 결정적인 차이점.
명나라 관복이다.
“제가 조선에서 죽거든, 이는 조선 대신들의 음모에 의한 암살로 여겨달라고 명나라 조정에 미리 말해두었습니다.”
“…….”
조정의 분위기가 다시금 싸해졌다.
암살이 아니라고 해도.
내가 죽는 순간 전쟁이다.
전쟁이 아니라고 해도, 전쟁에 준하는 대파란이다.
조선의 대신이 명나라의 내각군보를 암살한 초유의 사건이니까.
그리고.
내 지위가 올라갈수록 더더욱 큰 압박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제가 좋든, 싫든 저를 살리려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당신들의 목숨이 매우 위험해질 테니까요.”
킬방원 전하.
감사합니다.
덕분에 깨어났습니다.
조선을 바꾸기 위해서라면, 저는 누구의 힘을 빌리든, 어떤 수단을 쓰든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요. 제가 정의입니다. 앞으로 제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좋아 보이는 기술은 다 가져올 터인데…….”
세계의 기술로 포장한 시대를 앞선 기술이지.
측우기라든가.
수차라든가.
교잡이라든가.
어비나 인광석을 이용한 퇴비법이라든가.
저수지 건설 방법이라든가.
이거 잘만 하면 모내기법도 제대로 시행할 수 있다.
농업뿐만 아니라 상업이나 공업에 관련된 기술도 있고.
“여러분들의 뛰어난 능력을 잘 활용하셔서 그 기술들을 조선에 제대로 적용하세요. 만약 이를 게을리하셨을 경우 뒷일은 감당하기 힘드실 겁니다.”
영실아.
너는 나에게서 도망갔지만, 나는 네 상사를 갈궈서 내가 원하는 일을 시킬 거다.
원청에서 하청으로 도망갔으니, 편히 지낼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