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44
44화
구름을 타면 금방이겠지만 산영의 머릿속은 한 놈만 쫓느라 거기까지 생각해 낼 정신이 없었다. 겨우 사람들 틈에서 머리를 내미니 꿈결처럼 사라진 희사였다. 산영은 혀를 차며 비좁은 틈으로 빠져나와 허겁지겁 달려나갔다.
헐떡이며 골목길 안쪽에 들어서자 자신이 묵는 가옥이 보였다. 예스러운 케케묵은 대문은 드나든 사람이 없는 것처럼 적요했다. 하나 사람이 두고 간 수선스러운 인기척은 숨길 수가 없었다. 산영은 그의 기척이 훤한 안채가 아니라 뒤뜰의 별당으로 향했음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발자국은 산영이 머무는 별당 안으로 선명하게 찍혀 있는 것이었다. 마치 나 여기에 있소 외치고 있는 듯한 발자국을 따라 조심조심 걸었더니 소통을 거부하며 닫힌 문이 나타났다. 바람이 잘 들라고 나올 적에 문을 열어두고 왔음이었다. 안쪽에서 걸어 잠근 모양인지 산영이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덜커덕 소리가 났다.
“희사 님.”
어린애 못된 짓도 아니고 이게 무슨 농지거리란 말인가. 산영은 애탄 기억을 새까맣게 잊고서 문고리를 뽑을 듯 잡아당겼다.
“얘기 좀 하는 게 어떨지요.”
하나 이 고집쟁이는 안쪽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깜깜무소식이었다. 산영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중이었다. 자기를 쫓아 나와 지켜보던 것이 이다지도 부끄럽단 말인가. 애초에 오순도순 지내던 자신에게 성낼 일이 무어란 말인가. 귀하게 자란 천신이라 그러한가. 비위 맞추어 주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산영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소리쳤다.
“자꾸 이러시면 저기 안채를 내가 쓰고 말지. 흑둥이 데리고 가가지고 침상도 쓰고, 서책은 여물로 주고…….”
그때 협박이 통한 것인지 안쪽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산영의 말이 상황을 잊을 만큼 우스운 모양이었다. 타다 남은 성질이 돌아온 것은 말해 무엇할까. 하나 문가에 찰싹 달라붙은 산영의 귀에 웃음만 잡힌 건 아니었다. 불안정한 숨소리가 웃음 사이사이 섞여 있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던 산영은 헉 소리 내며 문을 흔들었다.
“어디 아프신지요?”
기척이 없는 것처럼 숨소리가 잦아들더니 산영의 재촉을 못 이긴 문이 열렸다. 열리자마자 보인 것은 별당에 가두어두기에는 너무도 큰 희사였다. 아까의 쓰라린 표정은 잠결에서 본 것처럼 멀쩡해진 그가 서 있었다. 그는 산영의 별당에서 무엇을 찾으러 온 것일 뿐이라는 듯 문간에 기대었다. 산영은 그즈음 차곡차곡 포개둔 설움이 흩어지고 말았다.
저를 바보로 아는지 툭하면 붙임성 없이 도망치는 그의 작태가 참으로 상처였다.
“무엇 하십니까.”
“옆으로 서. 나가게.”
산영은 싫다고 도리질하며 그의 배를 힘껏 밀었다. 그렇다고 밀려날 희사가 아니었으나 노력이 가상했는지 한두 걸음을 물러나주었다. 그가 만들어준 틈으로 발을 들이민 산영은 어디로 도망갈 수 없게 문을 걸어 잠갔다.
“얘기 좀 합시다.”
눈에서 살벌한 불꽃이 튀는 기분이었다. 산영은 희사가 냉큼 떠나갈까 봐 그의 소맷자락을 쥐고서 말을 이어갔다.
“요즘 왜 그러십니까.”
무얼 얘기하는지 뻔히 알면서 희사는 딴청 피우듯 미소를 지을락 말락 했다. 혹 놀리는 것인가 싶어 째려보면 다시 싸한 얼굴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듯싶었다. 산영은 무작정 나가려고 발을 비튼 그의 앞에 똑바로 섰다.
“못 나갑니다.”
당돌한 산영의 말에 희사는 어이없는 듯이 말꼬리를 늘였다.
“밤새 이러길 원해?”
“예. 밤을 새우더라도 말을 하란 말이지요, 말을.”
그때 침묵으로 무장할 줄 알았던 희사가 갑작스레 몸을 낮추고 산영을 몰아붙였다. 상체가 다가올수록 산영은 뒤로 슬쩍 밀려나다가 문짝에 닿고 말았다.
“놓아.”
산영은 차마 거세게 나가지 못하고 입술을 물었다. 하나 그의 소맷자락을 붙든 손이 하나에서 둘로 늘었다. 당찬 산영의 의지를 본 희사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 웃음 틈틈이 아까 보았던 산산한 표정이 나타났다. 통증을 참는 듯 사늘한 눈길로 덮는다. 워낙 그의 표정이 희귀했는지라 미주알고주알 알고 있는 형편이었다.
“어디 아픈 거 맞으시면서 왜 그리 고집을 부리십니까.”
산영은 천연덕스레 소맷자락을 놓고 그의 이마로 손을 올렸다. 발꿈치까지 들어 거의 다가갔을 즈음이었다. 그가 창피 줄 정도로 산영의 손길을 피하는 게 아닌가. 자신의 손목을 끌어다가 이마에 올려주었던 때가 기억났다. 산영은 주먹을 쥐고 희사에게 달려들듯이 말하였다.
“많이 먹어서요?”
인상을 찌푸린 희사의 얼굴이 산영을 대했다. 그의 눈은 무슨 소리냐는 듯 묻고 있지만 산영은 확신하며 재차 따졌다.
“많이 먹어서 그러면 왜 그 떡집에는 값을 달아두셨답니까? 왜 사람 마음을 애간장을 태웠다가 애달프게 하고. 왜 여인네 가슴에 비수를 꽂냔 말입니다.”
울거나 하면 지는 모양새였다.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았으나 속 좁은 눈물이 기어코 모습을 드러내었다. 산영이 소매로 한 마리를 훔치면 또 하나를 보내고 다급하게 쓸어 없애면 두 마리를 보냈다. 개구쟁이 같은 눈물을 닦고 닦다가 산영은 손발을 들었다. 눈물을 흘리며 서러움을 퍼내었다.
“같이 살면서 이것도 안 맞을 수 있고, 저것도 안 맞을 수 있지. 그러면 앞으로 이러지 마라, 얘기하면 될 것을. 내가 꿔다놓은 보릿자루도 아니고.”
말하다가 보니까 해도 될 말, 안 해도 될 말까지 죄 엉켜져 나오는 중이었다. 산영의 그칠 줄 모르고 나오는 눈물은 마음을 다독일 적까지 흘러내릴 것 같았으나 때를 맞추어 다가온 손 때문에 주춤하고 있었다.
산영의 눈물을 사죄하는 것처럼 훔쳐 가더니 축축한 뺨을 손등으로 쓸어본다. 놀란 가슴에 눈물이 잦아든 산영은 고개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희사의 표정은 아까와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불량스럽고 험상궂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이 땅의 악업을 긁어모은 얼굴로 손길은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었다. 손과 마음이 따로 노는 듯한데 산영은 그 사이에서 기통이 터졌다.
“아픈 것이 맞네, 맞어.”
쌀쌀스레 얼굴을 돌려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가도록 했다. 눈물 몇 방울 닦아준다고 풀릴 서러움이 아니었다. 하나 이 대책 없는 사내는 고개를 기울여 산영의 위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서러움을 가져가려는 듯 다가온 입술을 피하지 못한 채로 맞이하고 말았다. 다정하게 산영의 짠맛이 나는 입술을 삼켰다가 정겨이 놓아준다.
산영은 단순한 입맞춤 한 번에 홀라당 하는 마음이 뜻밖일 뿐이었다. 하나 그의 표정만은 전과 같이 겨울에 닥친 것처럼 무표정했다. 별다른 의미 없이 울음을 달랠 뿐인 입맞춤인가. 산영은 고개를 치우려 했으나 그의 손이 다가와 단박에 턱을 잡았다.
“놓으시지요.”
그를 만나면 비구름을 자랑하고 같이 저녁상을 들자고 얘기하려 했었다. 한데 희롱이 묻은 태도에 마음은 뒤범벅 잡탕이 되고 있었다. 대관절 그의 의도는 무어란 말인가. 희사의 태도는 명백히 자신의 마음을 재미 삼아 쥐락펴락하는 것밖에 되지를 않았다.
“놓아…….”
하나 산영의 째린 눈은 희사의 무표정한 얼굴이 숨긴 땀방울을 보고야 말았다. 한순간에 서러움을 한편으로 치우고 걱정이 스민 시선이 희사의 상태를 짚으며 돌아다녔다. 그러고 보니 두 다리로 서 있기만 하지 아까부터 이렇다 할 말도 없었다. 주체 못 하게 취한 듯 풀린 눈은 또 어떻고.
산영은 겁 없이 그의 뺨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왜 이리 얼굴이 상한 것이지?”
희사는 눈을 감고 산영의 손바닥에 입술을 문댔다. 알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도 모르고 저지르는 짓이 분명했다. 생각해 보니 성하던 사람이 제 별당으로 들어온 것부터 이상스러웠다. 혼이 나갈 정도로 곤혹스러운 일이 생긴 것이 아니라 혼이 나갈 정도로 아픈 것이 맞을 터였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예?”
산영의 손이 뺨을 어루만지며 증상을 살피듯 하자 그는 눈가를 찡그린 채로 웃었다. 고통스러운 웃음이 삽시에 끝나자마자 그의 고개가 산영의 어깨로 떨어졌다. 희사는 자그마한 어깨에 의지하여 단 숨을 뱉어내었다.
“나도 모르는 병이야.”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이람. 희사 님!”
“영영 모르고 싶어.”
“제정신이 아니구먼.”
이마에 손을 대보니 장난으로 넘길 수준의 열이 아니었다. 신령들은 골골하면 자신의 산에 틀어박혀 며칠 요양하면 된다지만 하늘의 사람들이 병에 걸리면 약을 지어 먹는지, 의원을 부르는지 알 길이 없음이었다. 산영은 발을 동동 굴렀으나 희사의 표정은 갈수록 평안해 보였다.
“치사한 사람 같으니라고……! 여기서 쓰러지면 아니 됩니다. 예?”
치사스럽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억울하다며 방방 뛴 제가 더 민망스럽지 않은가. 아픈 사람을 상대로 투정 부린 것 같아 미안함이 더해지는데 마침 산영의 눈에 푸근한 침상이 보였다.
안아 든 상태로 움직이려 하는데 희사는 눈을 뜨자마자 나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산영은 그의 등판에 아프지 않게 손바닥을 내려치고 침상으로 이끌었다. 희사의 발은 땅에 심은 듯했으나 산영이 발을 구르자 순순하게 따라왔다. 산영의 고집이 그의 고집을 꺾어놓은 것이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픈 이에게 달아둔 빚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웬만한 빚쟁이도 못 하는 것이니. 서러움의 빚은 나중에 따지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