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69
69화
낭군에게 자신 어린 포부를 밝혔지만 죄 허깨비였다. 산영은 그러마 하고 무덤덤한 척했지만 속내는 일어난 일을 정리해 보다가 머리 싸매고 앓아눕기 직전이었다. 통 넓은 사람처럼 마음대로 하시지요, 이것도 마음대로 하시지요, 하다가 보니 어느새 혼례라는 놈이 옆자리에 앉아 내일모레 하는 것이다.
뒤처리하느라 바쁜 것인지 뜸하게 보던 희사는 혼례 전에 남녀가 자주 보면 부정을 탄다면서 따로 지내자며 통보했다.
뜻밖의 소식에 놀랐다. 희사가 미신에 연연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음이었다. 이 혼례에 목을 매야 하는 사람은 산영이거늘, 준비부터 예물까지 희사가 빠릿빠릿 결정하고 이쪽의 허락을 정중히 요구했다.
산영은 이것도 적당하고 저것도 고와서 딱히 이거다 결정 내리지 못한 것이 많았다. 그중 산영의 손가락에 끼울 가락지는 대여섯 개를 구해와 골라보라고 하는 통에 눈앞이 흐렸다. 희사에게 가타부타 말은 안 했지만 부담이 등을 찔렀다.
‘참……. 가락지가 곱습니다.’
‘어느 것이.’
‘하나만 고르기 어려운데 혹 다른 분들은 뭐라 합니까.’
‘네 가락지인데 다른 분에게 물을 리가 없지 않아.’
‘내가 이런 것을 껴본 적이 없어 가지고.’
결국 다섯 손가락에 죄 껴보고는 희사 또한 말이 없었다. 어떤 것은 금을 두드려 펴 붙인 문양이 각별했고 어느 것은 홍옥인지라 연정을 의미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산영이 고민하며 머리를 싸매자 희사의 선택은 전부 아니올시다로 바뀌었다.
‘다시 만들라 하지.’
‘아니, 아니, 아니. 어째서…….’
‘특별히 못 고르겠다는 말은 특별한 게 없다는 뜻이니. 안 그래?’
희사는 잡음 없이 완벽할 때까지 들이미는 성정이었다. 아무리 산영이 아니 된다, 잘못 했다, 말하면서 바짓가랑이를 붙들어도 이미 가락지는 희사의 손을 떠난 참이었다. 해온 것 없는 산신령이 까탈스럽게 주문한 것 같아 짐스러웠다. 앞으로는 아무거나 고르겠다고 다짐한 것도 잠시. 바짝 굳은 산영의 앞에 희사는 또 다른 일거리를 짊어지고 나타났다.
‘꽃이요?’
하늘의 혼례식에서는 신랑 신부가 고른 꽃을 내내 위에서 뿌려준단다. 땅의 꽃은 제법 의미도 알고 이름도 알지만, 하늘의 꽃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인 산영이 무얼 알고 고르겠는가.
‘희사 님.’
‘응.’
‘고냥 고거 희사 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면 안 될는지요.’
‘안 되는데.’
‘예?’
‘네 눈에 가장 곱고 흡족할 혼례 날이 아니면 내게 의미 없어.’
이분이 집요한 것은 알았다만 이렇게까지 완벽을 추구하는 이인지는 몰랐다. 더욱이 하늘의 혼례식에서는 사내는 까만 옷을, 여인은 푸른 옷을 택해 혼례복을 짓는다는데 얼마 전 활옷을 말한 대가로 산영의 옷은 땅의 여인처럼 붉게 정해진 참이었다.
그것도 영 모르고 있다가 치수를 재러 온 바느질꾼이 물어보아 알게 된 것이었다. 꼭 붉은색을 고집하는 사연이 있느냐며 묻는 것이다. 산영은 얼이 출타해 희사에게 따져 묻지도 못했다.
그렇게 한동안 시달려, 꽃이니 예복이니 음식이니 잔뜩 고르고 희사는 부정 탄다며 사라진 것이었다. 녹색 윗도리에 노오란 치마를 입은 산영은 강처럼 넓은 방에 앉아 창밖 구경하는 신세였다.
세끼마다 수십 가지의 찬을 내오는데도 산영은 입맛이 없어 수저를 몇 번 휘적거리다가 말았다. 산영의 시중을 든다고 배정된 명우라는 여인은 깍듯한 자세로 몇 입 더 드시라고 했지만 더 들었다가는 얹힐 것 같아 물린 것이 두어 번이었다.
하나 이 명우라는 여인은 희사의 앞잡이인지 끼니를 대충 때운 날에는 꼭 군것질을 들여 어떻게든 산영을 배부르게 만들었다. 물리려고 하면 저가 경을 친다며 호들갑을 떠는 통에 맞지 않아도 넘긴 것이 화근이었나 보다.
종일 두통에 시달리다가 보약 한 첩을 다려 마신 참이었다.
“체기는 좀 어떠십니까?”
명우가 뒤에 와 공손하게 물었지만 산영의 정신은 저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언제쯤 하늘 아래로 내려가 볼 수 있을지.”
“산영 님.”
“식구들이 내가 혼인하는 것을 알면 놀라 자빠질 터인데…….”
명우는 한참 답을 주지 않다가, 체증에 좋다는 차를 산영의 발치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산영 님은 이제 형제 산의 주인이시온데 원하면 가지 못할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산영은 평상시라면 속으로 묻고 넘어갔을 것을, 명우라는 여인이 넙죽넙죽 답을 잘해주자 그간의 고민을 떠넘기고 싶었다.
“아무래도 일이 잘못 돌아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산영 님. 그 무슨…….”
“아니, 잘못됐다기보다 너무 커지고 있어서. 옥룡산이야 내 다리로 한 시진도 안 걸려서 다 돌아볼 만한데. 여기는 하루 반나절을 써도 다 돌아볼까 싶고, 이런 산을 무리 없이 돌보자니 앞이 깜깜하고. 여기 다 돌아보고 옥룡산까지 신경 쓰려면 내 몸이 몇 개가 되나 싶고……. 그렇다고 희사 님한테 말하자니 실망하실까 두려운데.”
말하다가 보니 목이 탄 산영은 가져온 차를 후릅 마셨다. 체증에 좋다는 말이 참말인지 띵하던 골이 가라앉는다. 산영의 달금한 한숨은 찻물 위에 번졌다. 호강에 겨워 저런다고 손가락질 안 당하면 다행이지만 낭군과 태생부터 반대인 사람이었다. 이 고민을 늘어놓으면 떼쟁이라고 여길까 봐 꾹꾹 누른 것이다.
“무엇이 그리 걱정이십니까, 산영 님.”
“예에……. 그러게나 말입니다.”
“산영 님께서 안정되시는 날까지 그분께서 도와주실 텐데요.”
명우의 다정한 말에도 산영의 고민은 달라지는 바가 없었다. 산영의 머릿속에서는 희사의 신분에 대한 부담이 커지는 중이었다. 하늘에서 가장 높으신 분인데 형제까지 줄줄이 있는 것을 보니 천제는 아닌 듯싶고, 그럼 천제 다음이거나 비슷하다는 소리인데.
어쩌다가 저랑 혼인할 마음까지 먹었을까. 그만큼 제 자태가 고혹적인가. 아무튼 분수에 맞게끔 사는 것이 옳은 게 아닌가 싶었다.
“원래 혼례 전에 여인들이 심란한 것은 당연합니다.”
명우는 산영이 비운 잔에 찻물을 따르고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절도 있는 동작에 산영은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나는 찻물도 대강 따라 마시는데…….”
산영의 투정에 미소를 지은 명우는 노련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혼례를 한 후부터는 대뜸 낭군의 이름을 부르면 아니 되시는 것, 알고 있으십니까?”
“예에?”
겨우 체기를 가라앉히고 찻물을 홀짝거리던 산영은 그러면 앞으로 무어라 부르냐고 손을 떨었다. 명우는 산영의 손에 위태위태 들린 찻잔을 뺏어다가 내려놓고 설명해 주었다.
“부부는 일심동체이고 위와 아래가 없으니, 서로 존중하고 존대하며, 아마도 서방님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낯 간지러운 서방님 소리가 입에 배도록 연습하시는 게 어떠냐는 말을 남기고 명우는 찻잔을 치우러 방을 나섰다.
산영은 명우가 나가자마자 드러누워 이불자락을 입에 물었다. 열어둔 창문으로 기어드는 바람에 가슴을 식히려고 들어도 무소용이다. 산영의 마음에 난 불은 산영의 손으로 꺼야 함이었다.
불이 꺼지지 않게 장작이 들어온다. 형제산, 옥룡산, 혼례식, 서방님. 활활 타오르는 불은 속을 다 태우고 나서야 꺼질 듯싶다. 고로 산영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한숨이 아닌, 장작을 태울 때 나는 연기였다. 식혀보자고 입에서 연기를 내뿜는데 명우의 말이 남긴 장작이 컸나 보다. 불은 지지 않고 타올라 산영의 입에서 서방님 소리가 나오도록 했다.
“서방님이 다 무어야. 희사 님, 하면 깔끔하고 얼마나 좋게.”
그때 잘난 웃음소리가 바람에 업혀 흘러들어 왔다. 깜짝 놀란 산영은 얄미운 쥐처럼 훔쳐 들은 놈을 잡으려고 했으나 도둑은 당당하게 찾지 말라며 말렸다.
‘얼굴 내밀지 마.’
알고 보니 아는 도둑이었다. 산영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두 다리를 쭉 폈다.
“희사 님이지요?”
신랑 신부가 혼례 전에 같은 방을 쓰면 부정을 탄단다. 평생 지겹게 볼 거, 며칠 참는다고 안 죽는다며 어른들의 말을 새겨듣는 것이 좋다나 뭐라나. 물론 희사가 한 말이 아니라 그의 첫째 형님이 한 말이지만 희사는 무시하는 대신 이렇듯 칼같이 지키는 것이다.
“희사 님, 희사 님. 그거 들으셨습니까?”
‘무엇을.’
“글쎄, 이제 희사 님이라고 못 부르고 그것이.”
혼자서 부를 때는 목구멍에 턱 걸리던 것이 막상 당사자가 눈앞에 나타나니 술술 흘러나왔다. 하나 새신부의 부끄러움 덕에 목소리가 작아지기는 하였다.
“서방님.”
그 한마디를 하고 산영은 뒤로 굴러갔다. 이불을 때리고 돌돌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산영의 행동이 뻔히 예상 가는지 희사는 작은 웃음을 흘렸다.
잠만 이렇게 주접을 떨 때가 아니지. 산영은 체면 차리며 일어나 창가에 손을 올렸다.
“왜 오셨습니까.”
뒤늦은 물음에 희사는 낭군처럼 답했다.
‘체했다고 들었는데.’
“예.”
창문 밖으로 내민 산영의 손을 소중하게 잡는다. 큰 손 안에 가두어두고 조몰락거리다가 손가락 사이사이를 부드럽게 매만져 준다. 그 은밀한 손길에 가슴께가 따스해지고 골칫거리로 치부한 일들이 해봄 직했다. 하나 낭군의 위로는 끝이 없었다.
순리처럼 끼워지는 굵직한 가락지에 산영은 넋을 빼앗겼다. 희사는 가락지를 넣어주자마자 산영의 손을 돌려주었다. 산영은 손가락에 낀 백색의 가락지를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음에는 차십니까, 부인.’
서로 존대해야 하고 대뜸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된다. 산영은 조금 실감이 나려고 했다. 답을 못 하고 고개만 끄덕거리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희사는 발을 돌려 창가 앞을 떠나갔다. 과연 하늘을 업고 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그래, 이 정도면 하늘도 한 번 업어볼 만하지로 바뀌었다.
추후 산영은 불안해질 적마다 가락지를 어루만지며 마음을 달랬다. 이렇게나 아껴주는데 분명 자신도 걸출한 무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렴. 자신 잃은 마음을 애써 덮었다. 잘 해드려야 할 서방님, 낭군님. 혼례 전날까지 반복된 주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