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70
70화
온 산이 떠들썩하게 준비한 혼례식 날은 화창했다. 새벽부터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장식하는 종들의 손톱에 진한 꽃물이 들었다. 처마 위로 올라가 꽃을 뿌려야 하는 어린 종들은 실수를 예방하기 위해 연습 또 연습이다.
며칠 전부터 나와 건건이 엄중 감시하던 신랑은 혼례 준비의 막날까지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다가 떠났다. 평시라면 팔불출이라며 종들끼리 시시덕거렸겠지만 그자가 전 주인을 어떻게 끝내버렸는지 기억하는 이들은 묵묵히 일할 뿐이었다.
새 주인으로 모실 산영을 깨우려고 그간 알뜰살뜰 보살핀 명우가 움직였다.
발그레한 꽃은 왼편에, 노르스름한 꽃은 오른편에 둔 다음 하늘에서 뿌릴 꽃은 흰 것으로 준비해 두었다.
새 주인의 취향이 소박한지라 들꽃이 핀 꽃밭에서 하는 듯한 분위기를 지향하신단다. 바느질꾼의 말로는 신부의 예복이 푸른색이 아니라 붉은색이며 머리 비녀도 용잠은 불길하고 봉잠은 어울리지 않고 해서, 길조라고 불리는 암사슴을 여러 마리 조각해 둔 보관으로 결정 난 참이었다.
꽃을 촘촘히 엮어 술상에 올려두고 하늘의 예법대로 신부가 마실 술은 연분 꽃을 우려 만든 홍색 술이고 신랑이 마실 술은 연분 뿌리를 우려 만든 백색 술이다. 입에 머금고 있다가 증인이 명운석에 부부의 이름이 박히는 것을 본 연후에 술을 삼키고 맞절하면 이 말 많은 혼례식도 끝이었다.
연분 꽃은 구름산에서만 나는 희귀한 꽃으로, 향이 그윽하고 천생배필이라는 의미까지 지녔다. 이번 혼례식 술에 들어갈 꽃은 흠이 없을뿐더러 몇백 년간 지고지순 자리를 지킨 놈으로 구해오라는 당부에 애 좀 먹었다는 후문이었다.
“곱다, 잘 꾸몄네.”
“곱기는. 곱게 차린다고 또 사람을 얼마나 들들 볶았을지.”
경사스러운 혼례식에 혀를 차면 부정 탄다. 첫째는 둘째의 등판을 세게 후려쳤다. 부정이라는 단어를 기피하는 막내가 들으면 한바탕 파란을 일으킬지 몰랐다.
하나 첫째의 불안은 기우였는지 혼례식 장소를 바라보는 아우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둘째가 이 혼례식을 엎자고 제안하는 게 아닌 이상 저 웃음꽃이 사라질 일은 없어 보였다.
오죽이나 좋으면 저럴까. 하기야 첫 만남부터 단칼에 베어도 모자랄 구왕 도둑을 살려온 것 하며, 그 도둑이 뇌물이라며 쥐여 준 보따리를 들고 올 때 연이 닿은 게지. 첫째는 다사다난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웃었다.
“저…….”
종이 우물거리며 굽신댄다. 때가 됐으니 흑색의 예복을 갖춰 입으라는 말일 것이다. 불평불만인 둘째를 대신해 갈아입는 것을 도우려고 셋째를 쫓았다. 겸사겸사 혼례를 치르는데 갖고픈 것은 없느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매일 그날이 그날인 그들의 긴 세월에 혼례처럼 재미난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철없는 맏형 흉내를 내며 아우가 벗은 겉옷을 받아주고 있을 때였다. 신난 첫째의 뒤에서 흥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첫째는 허둥거렸다. 방해하지 말고 나가 있으라며 둘째의 팔목을 잡으려고 하는데, 기민한 둘째의 몸은 진작에 튀어 나가 셋째의 웃옷을 끌어 내렸다. 널찍한 등판이 가림 없이 드러나고 한소리 준비한 첫째의 입은 쓸모를 잃었다.
“혈상약의 통증이 여전하구나.”
첫째는 들고 있던 셋째의 겉옷을 떨어트렸다. 황급히 달려가 아우의 등판을 보니 혈상약의 붉은 글씨가 선명했다. 혈의 맹약은 지키기 전까지 깨지지 않음이었으니, 영영 지킬 수 없는 약조를 일생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소리였다.
하나 형제의 걱정에도 아우는 혈상약의 글자 위에 가만히 손을 얹어둔다. 속임수로 가려두는 것처럼 혈상약의 글자가 살구색으로 바뀌었다. 감쪽같이 가려두었지만 통증은 여전할 터.
“산영이가 영영 모르게 할 셈이니?”
아우는 도와주는 이 없이 묵묵하게 흑색의 예복을 갈아입었다. 도울 일 없으면 참견하지 말라는 태도에 둘째는 혀를 끌끌 찼지만 첫째는 부정 타니까 그만두라고 할 수 없었다. 아우는 일을 그르칠 것 같은 둘째를 돌아보며 말갛게 웃었다. 골탕 먹어 우습다며 흥흥거리던 둘째는 움칠거렸다.
“장점을 꼽자면.”
혈상약의 장점.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독한 아우는 정중한 예복으로 등판을 가렸다.
“산영이가 가까이 오면 통증이 진해져.”
“장난, 농이지?”
“해서 그 아이가 죽거나 사라지면, 나는 알 수 있게 되니까 말이야.”
이것이 가만 보니 혈상약의 통증이고 형님의 반대이고 그게 대수냐. 전에는 갈라놓으면 칼부림이 나겠구나 싶었지만 이참에 반대하면 영생토록 산영을 데리고 숨어 나타나지 않겠구나 싶었다. 돌보는 이가 사라진 하늘이 망하는 건 덤이다.
아우는 질색하는 둘째에게 가벼이 턱짓했다. 탁상 위에 고이 올려둔, 백옥의 수사슴이 올려진 보관을 씌워달라는 뜻이다. 착복하는 과정을 홀로 하면 부정 탄다는 첫째의 말을 착실히 따름이었다. 멍한 둘째는 누가 시키는 것처럼 보관을 들어 올려 아우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손님으로 참석한 형제의 할 일은 거기까지였다. 착복을 마친 셋째는 신랑이 있을 자리로 돌아갔고 형제는 엉거주춤 마련해 둔 자리로 올라갔다. 양측 부모의 자리를 비워두고 그다음 자리가 형제의 자리였다. 부를 손님도 없으면서 차린 음식은 수백 명 부른 혼례식 저리 가라였다.
둘째는 기왕 온 것 배나 채우자며 수저를 들고 이 음식, 저 음식을 기웃거렸지만 역시 손에 들린 건 없음이었다.
“난 이제 모르겠다. 저들끼리 알아서 잘 살겠지.”
혼례라는 거는 서로를 차차 알아간 후에 해도 늦지 않다고 조언한 첫째는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바뀌었다. 저렇게 혈상약의 통증도 좋다고 참는 아우를 보자니 일찌감치 둘을 맺어주어야겠다. 산영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어디로 날아가지 못하게 그가 지켜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구박하는 시댁의 말로를 보여주었던 아우가 우습다기보다는 절박하게 느껴지는 탓이다. 마음 여린 첫째가 훌쩍거리자 하늘에서 작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지가지 한다며 한숨 쉰 둘째는 울먹거리는 첫째에게 말을 쏘아붙였다.
“아니, 본인이 혼례 올려? 왜 울고 자빠져, 울고 자빠지기는.”
둘째는 가림막 천 없이 세워둔 자리에서 비나 맞고 있어야겠냐며 투덜거렸지만 첫째는 그치지 못하고 울먹거렸다.
“비 오는 날 혼례 하면 잘 사는 거 모르니.”
“얼씨구. 이놈의 팔자야. 내 주위는 어째 하나같이 이 모양이냐.”
둥둥거리며 북소리가 울리고 춤꾼들이 신명 나게 춤을 추어 흥겨운 잔치를 벌였다. 하늘에서는 눈물 같은 빗방울이 쉼 없이 내려온다. 어린 종은 준비해 둔 수만 송이의 꽃을 처마에서 뿌리기 바빴다. 꽃비가 내리는 혼례식의 마침은 신랑 신부였다. 큰 문이 열리고 문지방돌 위로 수줍은 발이 들어섰다.
문에 걸어둔 청실과 홍실을 신랑 신부가 폴짝 뛰며 넘어온다. 이로써 부부로 인정받는 첫발을 디딘 것이나 다름없었다. 흐뭇하게 웃은 첫째는 일어나 신랑 측으로 가고, 산영의 어미를 대신하여 명우가 신부 측으로 갔다. 부모 없이 단출하게 치러지는 혼례식치고 분위기가 볼만했다.
나풀거리는 하얀 꽃이 오들오들 떠는 새색시의 소매로 쏘옥 들어갔다.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걸어오는 산영의 눈은 술상에 고정되어 있었다. 새신랑은 긴장한 게 한눈에 보이는 색시를 더없이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태가 흐뭇하여, 첫째의 수선스러운 울상은 눈치 보며 사라졌다. 졸금졸금 오던 비는 신랑 신부가 술상에 다가왔을 즈음 그쳤다.
하얀 꽃비 속에서 명우의 손에는 붉은 술이, 첫째의 손에는 백색 술이 잡혀 있었다. 새색시는 단풍처럼 붉은 술을 덜덜 떨며 머금고, 새신랑은 백색 술을 고민 없이 머금었다. 어여쁜 신랑 신부가 허리 숙이며 맞절하고, 증인으로 나선 첫째는 허허 웃으며 명운석을 꺼내 들었다.
명운석은 흑색의 돌판으로, 실지 있는 장소는 은하수 저편이지만 비슷한 돌을 꺼내어 보고픈 사유를 적으면 잠시 볼 수 있었다.
첫째는 미끈하게 갈아둔 흑색 돌판을 바라보며 산영의 이름이 떠오르길 기다렸다. 혼례식의 마지막 절차. 연을 엮은 증거로 백색의 글자가 흑 돌판에 새겨졌다.
술을 머금고 상대를 훔쳐보는 눈빛에 애정이 그득했다. 불그스레한 뺨을 가진 산영은 낭군을 힐끔거렸고 차분한 아우의 입꼬리는 위로 향해 있었다. 배필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꽃비처럼 영영 고매하게 살았으면, 첫째는 남몰래 잠이 든 아버지에게 빌었다.
“이 증인은.”
부부의 연으로 엮이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돌판에 떠오른 백색의 글자를 보자마자 첫째는 미소를 지었다. 한데 글자의 길이가 짧다. 읽어나가려는 시도는 첫째의 입술이 막았다. 머뭇거리며 흔쾌히 읽지 못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떠오른 이름은 줄곧 하나뿐이었다.
산영. 산영은 옥룡산 터줏대감으로 홀로 살아서 그러한가, 따로 가지 뻗듯 엮인 인연은 없었다. 명운석에는 부부 외에도 부모, 형제, 자식, 그리고 그 밖에 삶에 중요한 연들이 적히는 법이었다. 아직 인연 없이 깔끔하기만 한 산영의 삶에 부부라는 글자가 적혀야 하거늘. 아무리 돌판을 쓰다듬어도 산영의 이름 옆에 적히는 이름이 없었다.
증인이 되어 명운석에 적혔음을 알려야 했건만. 때를 늦추며 지체하자 새신랑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독한 술을 오래 머금고 있으면 머리가 어지러운 법. 산영도 힐끔힐끔하며 첫째를 바라보았다. 하나 첫째는, 막내의 형님은 입을 뻥긋할 수가 없었다. 목을 길게 빼고 기다려도 아우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