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7
7화
“한데 손에 든 것은 무엇이냐?”
한 가지도 궁금해 보이지 않는 목소리로 둘째가 물었다. 다친 새의 발목을 봐주던 첫째도 고개를 들어 셋째의 행색을 보았다.
“재미난 것을 가져왔구나.”
밉보이길 무서워하거나, 흠이 잡히길 두려워하거나. 웬만한 천신들은 형제의 주변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유달리 매정하다고 평을 받는 셋째의 주변에는 더욱 그러했다. 한데 곡동산 호랑이의 엄니보다 날카롭다는 그의 손에 낡은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땅에서 소금이 돋아나도 그러려니 할 둘째가 관심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잘 익은 구왕을 따러 간다더니.”
하나 태만한 둘째는 팔을 움직여 보따리를 헤집지 않았다. 드러누워서 고개만 까닥거리는 그를 대신하여 짐 보따리는 첫째의 손에 들어갔다.
“땅의 것이네.”
첫째는 입에 대지도 않을 것이면서 허리를 굽혀가며 찬찬히 보따리 안을 살폈다. 빗살이 촘촘한 참빗, 붉은빛이 도는 면경, 쌓아놓은 걸 보아하니 여인의 것이었다. 첫째는 한쪽 구석에서 검집을 풀고 있는 셋째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구왕은 어디에 있니?”
천신과 천신의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한쪽은 흑룡을 부리고 한쪽은 금빛 솔개를 부리는 자다. 다툼의 이유는 늘 그렇듯 이 지루한 생을 살다가 보면 한 번씩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으나, 본심을 파고들면 품위를 두고 벌이는 알력 싸움이렷다.
그처럼 큰 지위를 가진 천신끼리 싸움이 붙으면 아랫사람은 곤란해지는 법이요, 윗사람은 머리가 깨지는 법이었다. 말려서 될 싸움이 아니었는지라 결국 삼형제는 이 진흙탕 싸움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아랫것이 싸우는 이유를 세세하게 알 필요는 없지만, 대강 추려보니 두 천신의 사이에는 종 하나의 선택이 갈렸더랬다. 서로 일 잘하는 종을 두고 옥신각신하다가 전쟁의 코앞까지 이르고 만 것이었다. 누가 들으면 천신도 별 볼 일 없다고 하겠으나 애초부터 하늘의 사람과 땅의 사람은 별다를 것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하여 둘의 사이도 풀 겸, 다툼을 지혜롭게 끝낼 겸, 덕이 많고 능력이 출중한 신령 하나를 가려내어 구왕을 먹일 참이었다. 형제들이 직접 고른 신령에다가 구왕까지 먹였다니 이만큼 구미가 당기는 종도 없는 것이었다.
마침 지나가던 셋째가 구왕을 따오기로 약속을 하였는데 그는 빈손이었고 낡은 보따리가 대신 들어오니 황당하기 그지없는 상황이 아니던가. 한 번도 일을 그르쳐 본 적 없던 셋째의 기행이라서 형제의 호기심이 당길 수밖에.
“이미 다른 이가 가졌어.”
“다른 이?”
“다른 이라니?”
구왕은 처음 손을 탄 자에게만 힘을 내어주는 까다로운 능금이었다. 예외로 형제들의 손에 들어온 것은 그렇지 않았는데 엉뚱한 신령 하나가 익은 구왕 하나를 따버리고 만 것이었다. 덜 익은 구왕을 먹으면 사람도 신령도 아닌 미물로 변해버린다. 그 엉뚱한 신령의 운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나쁜 것인지.
첫째는 황당한 얼굴로 허리를 폈다.
“하면?”
셋째는 정갈하게 앉아 앞만을 응시했다.
“도둑은 삼천 년 동안 영겁불에 두고 우리는 다시 구왕이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겠지.”
둘째는 별 싱거운 소리를 다 듣겠다는 표정으로 귀를 후볐지만, 마음 약한 첫째는 고개를 흔들며 걸어왔다.
“삼천 년이라니 그렇게 가혹하게?”
영겁불은 말 그대로 영겁 동안 꺼지지 않는 불이었다. 해가 떠오르는 곳에 있으며 그곳은 이미 죄인의 살이 익어가는 악취로 가득했다. 불에 구워지기 전에 악취로 먼저 혼절하는 이가 있을 지경이니, 죄질이 나쁜 자 중에서도 악질들만 가는 곳이었다.
“쉬이 막을 수 있는 전쟁을 막지 못했으니 천 년, 구백 년을 기다린 능금을 멋대로 따버렸으니 천 년, 갈 곳과 가지 못할 곳을 구분 못 했으니 천 년.”
“어쩜 그렇게 모질단 말이냐. 알고서 훔쳐먹은 이가 얼마나 된다고.”
“죄를 판단하는 것에 모질고, 모질지 않고는 없으니까.”
둘째는 칼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천신의 전쟁이라는 것도 나서서 한쪽을 전멸시키자는 셋째의 의견에 크게 반대한 첫째 때문에 일어났다. 겨우겨우 셋째를 구슬려 평화로운 방법을 찾았다고 여겼으나, 엉뚱하게 구왕을 가로챈 도둑의 목숨까지 구하고픈 모양이었다.
“길을 잃은 종이 목이 말랐나 보지.”
둘째는 보면 볼수록 천제라는 작자가 배합을 잘 해두었다 싶었다. 자신은 가만히 구경하고, 저 둘은 옥신각신 다투며 최고의 방법을 찾아내니 말이다.
“신령이야. 종이 아니라.”
셋째의 고상한 발음에 둘째의 귀도 솔깃하기는 하였다. 열을 내던 첫째는 한 걸음을 물러서서 뒷짐을 졌다. 하늘의 사람이 아니라 땅을 다스리는 신령이라. 평범한 신령이 해의 기운을 이기고 용케도 구왕 나무 앞까지 왔다 싶었다.
“그럼 무엇이 문제란 말이니.”
첫째는 옳다구나 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어떻게든 살려낼 방법을 찾은 모양이었다. 셋째는 고요한 눈을 들어 첫째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구왕을 먹은 신령이 필요하고, 마침 신령이라는 아이가 구왕을 먹은 게 아니니.”
가만히 관망하던 둘째가 그때 끼어들었다.
“하나 우리가 선택한 아이가 아닌데.”
아무리 구왕을 먹어 신력이 높아졌다고 한들, 고고한 천신의 눈에 들려면 외양은 물론이요, 말씨나 걸음걸이까지 그들이 탐을 낼 만한 위인이어야 했다. 한데 손때 묻은 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이에게서 그만한 품위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고, 아무래도 우연히 뽑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금방 탄로 날 위험이 있었다. 하면 전쟁을 어물어물 넘어가려다가 더 큰 화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모르면 가르치면 되고, 없으면 만들어주면 될 일이니까.”
첫째의 마음은 어리석은 생명 하나를 구했을 때의 기쁨으로 차올랐다. 비록 일을 망쳐 버릴 위험이 있었으나 끝에만 잘 풀리면 되는 것 아닌가.
“영겁불에는 이제 자리도 없단다, 아우야.”
엄한 셋째의 손에서 구해내지 못한 목숨들이었다. 이번에 하나를 구했으니 나머지도 죗값을 다 치르면 몰래 빼내올 작정이었다. 하나 셋째는 그런 형제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엷은 비소를 입가에 올렸다.
확실히 피 칠갑을 하는 것보다야 어리석은 신령 하나를 떨어트려주는 게 싸게 먹히는 방법이었다. 그 이후로도 다툼의 불씨가 꺼지지 않는다면 그의 방식대로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평화로운 경고는 두 번씩이나 하늘에 납시지 않는 법이니까 말이다.
* * *
산영은 창살에 갇힌 죄인처럼 얌전히 기다리려고 했다. 한데 등, 둔부, 허벅지에 간지러운 홍반이 난 것 같았다. 빈약하던 신력이 물결처럼 너울대며 여기에 있음을 주장하고 있었다. 끽해봐야 계곡물을 퍼 나르거나 덕담을 빌어주는 정도의 신력을 가졌던 산영이었기에 작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산영은 옥령산 근방에 있는 여느 산신령보다 우월한 산신령이 되었다. 하나 기운만 장사만치 넘친다 뿐이지, 막상 눈으로 보이는 힘은 없어 산영은 버러지에 물렸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어디 산의 산신령은 구름을 타고 다니고 비를 몰고 다니며 바람을 휘파람으로 불러올 수 있다고 하더라도 설마 그게 제 얘기가 될 줄은 몰랐다.
다만 산영은 값지다는 구왕을 먹어서 그러한지 몸이 가볍고 허기가 지지 않는다고 여겼다. 왜 구왕이 귀한 줄도 모르면서 귀하다고만 알고 있었다.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낙서를 그리고 있던 산영이 문득 눈을 들어 올렸다. 다친 데 없이 멀끔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따귀라도 맞았으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던 산영은 날렵한 몸을 일으켰다.
“하늘이 도우셨지.”
산영은 바닷게를 발견한 낙지처럼 싼 걸음으로 달려갔다. 몸이 가벼우니 발을 몇 번 놀리지 않았는데도 벌써 사내의 앞에 다다르고 말았다. 산영은 이리저리 기웃대며 사내의 몸에 이상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래도 하늘 인심이 어디 가지는 않았나 봅니다.”
산영은 사내가 상처 하나 없이 왔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천신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산영은 올 것이 왔다는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빚쟁이 등쌀이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이었다. 산에 난 귀한 산삼도 함부로 가져가면 화를 입는 것을, 하늘에 난 구왕을 먹은 신령이 어찌 될지는 사내의 입에 달렸다. 부디 옥룡산에 돌아갈 수만 있게 해달라고 싹싹 비는 찰나였다.
품위 있게 산영을 내려다보고 있던 사내의 입이 달싹였다.
“난 이름을 잊었거든.”
“예?”
이 무슨 뒤로 넘어져 뜬구름 잡는 소리란 말인가. 긴장한 채 손을 모으고 있던 산영은 맥이 풀려서 혀가 꼬일 지경이었다. 혹 사내가 머리를 세게 맞은 것은 아닐까 싶었다. 산영의 염려스러운 얼굴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는 제 할 말을 마쳤다.
보통의 하늘 사람이라면 이름을 잊었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고 만다. 이 만상에 하찮은 들풀조차 이름이 있는데 유일무이하게 이름 없는 자들을 아는 까닭이었다. 사내는 눈치를 말아먹은 산영을 보고 비식거렸다. 물론 지나가던 개미 새끼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묘한 비웃음이었다.
“네가 내키는 대로 불러.”
어차피 싸움에 이골이 난 천신에게 가져다주면 영영 볼 일 없는 산신령이었다. 흰 옷감을 두르고 맨발로 돌아다닌다고 다 같은 산신령이 아니었다. 눈동자가 푸른빛을 띠는 것을 보아하니 물과 관련된 생을 가졌을 것이고, 요모조모 따지지 않아도 출생조차 비천할 것이 분명했다.
전쟁을 막을 요긴한 마개로 써먹을 것. 셋째는 늘 그렇듯 쓸 만한 연장에게 친절한 편이었다. 제 등에 붙은 게 거미줄인지 그물인지 알 길이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