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316
1316화 아직 싸울 수 있어!
크게 낙심한 무심은 고개를 돌려 엽현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자신을 속인 엽현이 원망스러웠으나, 이제는 연민이 느껴졌다.
육공주에게 찍힌 이상 그 말로는 보나 마나 참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엽현은 바닥에 대자로 뻗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의 머리는 이미 노인의 그것처럼 하얗게 변해버렸고, 얼굴 곳곳에도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비통한 심정이었다.
검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충분히 육공주를 죽일 수도 있었을 텐데.
새로운 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 못내 아쉬웠다.
‘제기랄, 정정당당한 대결에 치사하게 끼어들다니!’
이때 무심이 엽현 곁으로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엽현이라 했나?”
엽현이 무심을 향해 민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안하게 됐소. 괜히 나 때문에…….”
이에 무심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냐? 운명이니 하고 받아들여야지…. 그나저나 정말 죽을 때가 됐나 보구나. 너 같은 애송이가 하는 말에 홀랑 넘어가다니.”
“…….”
이때 무심이 엽현곁에 홀랑 누웠다.
“이제 다 포기하련다! 삼십 명도 넘는 증도경 강자를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이냐!”
무심이 히죽 웃으며 엽현을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앞으로가 걱정이구나. 나야 그렇다 쳐도 너는 지옥 불구덩이에 들어가든, 기름에 만 년 동안 튀겨지든 할 테니까.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게다! 껄껄껄!”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시오?”
“하하하! 그럼 웃음이 안 나오게 생겼느냐? 너 때문에 하루아침에 죽게 생겼는데!”
“…….”
이때 육공주가 엽현 앞에 나타났다.
그녀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무언가 말을 하려는 순간, 엽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육공주를 꽉 끌어안았다.
육공주가 깜짝 놀라 엽현을 떨어뜨리려는 이때, 한 자루 검이 그녀의 등을 꿰뚫었다.
이 검은 육공주 뿐만 아니라,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엽현의 몸통도 관통했다.
모두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 이때, 육공주가 주먹으로 엽현의 가슴을 후려쳤다.
푸확-!
그대로 피를 토하며 날아가는 엽현.
바닥에 쓰러진 그는 기력을 다한 듯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무심이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독한 놈… 과연 기개가 있는 녀석이었구나. 어차피 죽을 거 나도 반항이나 거나하게 해 봐?”
이때 육공주가 포효하듯 소리쳤다.
“으아아악! 이 죽일 놈! 벌레만도 못한 놈! 감히 본 공주의 옥체에 손을 대? 내 너를 산 채로 껍질을 벗긴 후 끓는 기름에 튀겨 주겠다!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영원히!”
그녀의 고함은 곧 바람을 타고 저승 전체로 퍼져 나갔다.
한편,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는 엽현은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동귀어진을 시도했지만 육공주는 특수한 체질 덕분인지 죽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가 반드시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육공주의 몸에서 뭔가가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 * *
이 시각 저승의 어느 대전 안.
남장은 합장을 한 채로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밖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 있었지만 결국 움직이지는 않았다.
사실 그는 엽현이 피안화를 구했을 때, 이미 이런 결말을 예상했었다. 때문에 엽현과 은원을 정리한 것 외에는 교류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한편, 아음 역시 고개를 숙인 채 침묵에 빠져 있었다.
그녀 역시 관여하지 않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지금 엽현을 위해 출수하는 것은 곧 육공주를 적으로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엽현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아음이 침묵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정이었다.
오유계의 어느 이름 모를 성역.
막념이 모닥불 앞에 앉아 멍하니 불을 바라보고 있다.
이때, 엽지명이 나타나 다급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엽현, 엽현이 저승에 있소!”
막념이 고개를 들어 말없이 엽지명을 쳐다보았다.
막념의 미지근한 반응에 엽지명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가 저승에 있다고! 지금 구해주지 않으면 위험하단 말이오!”
그제야 막념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귀에 그렇게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했건만 아직도 어린애와 다를 바 없구나. 한낱 욕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 도경을 찾으러 가다니……. 주의를 주면 뭐 하나, 개똥으로도 듣지 않는 것을! 설령 오늘 내가 구해준다 해도 앞으로도 똑같은 잘못을 계속 저지를 텐데, 그럼 이게 의미가 있나? 휴… 됐다. 그만하자. 사람 보는 눈이 잘못된 나를 탓해야지.”
막념은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불빛에 스친 그녀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경 때문이 아니오!”
뒤에서 들려 온 엽지명의 목소리에 막념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이때 엽지명이 막념에게 다가와 손을 펼쳤다.
그녀의 손안에는 회색 액체가 든 병이 들어 있었다.
이 병을 본 순간 막념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황천성수?”
이에 엽지명이 막념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저승에 간 것은 도경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황천성수 때문이었소.”
막념이 미간을 찌푸리며 엽지명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요. 그가 저승으로 향했던 것은 모두 그대 때문이었소!”
“날… 위해서?”
“그렇소! 그 녀석은 이미 그대의 영혼에 이상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서 내게 저승으로 가는 길 안내를 부탁했소. 이 빌어먹을 병 하나를 얻기 위해 그가 어떤 고생을 했는지 아시오?”
“…….”
엽지명은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그간의 사정을 설명해 나갔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막념의 주먹엔 힘이 들어갔고, 차가웠던 안색도 점차 누그러져 갔다.
특히 엽현이 황천하에 몸을 담근 대목에서는 막념도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혈맥지력이나 검역의 보호가 없는 상태에서, 육신과 영혼이 생으로 녹는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형용할 수 있으랴!
“그놈은 그냥 바보일 뿐이오! 내 살다 살다 그렇게 무식한 놈은 처음 봤소!”
“…그래, 나도 녀석이 이 정도로 멍청할 줄은 몰랐다.”
막념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엽지명이 말을 이어가려는 이때, 막념의 손에 한 자루 검이 쥐어졌다.
잠시 검신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던 막념이 빈 허공을 향해 천천히 검끝을 찔러 넣었다.
이때, 검이 들어간 공간이 양쪽으로 서서히 갈라지더니, 두 여인 앞에 또 다른 암흑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끝도 없이 길게 이어진 공간을 본 순간.
엽지명이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이건… 저승으로 향하는 길…?”
‘일검에 저승으로 가능 길을 열어버리다니… 이게 과연 실제로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엽지명은 손을 벌벌 떨며 고개를 돌렸다. 문득 시선에 들어온 막념이 괴물로 느껴졌다.
‘괴물… 이건 괴물이 틀림없어!’
일반적으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넘어가려면 두 지점이 만나는 장소로 가서 도지계라는 관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예외가 있다면 직접 길을 뚫어버리는 것이지만, 이런 방식을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시도 자체가 꿈에나 있을 법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차원 사이에 놓여 있는 우주장벽과 이승과 저승을 막고 있는 공간장벽, 여기에 마지막으로 도지계의 힘까지 강제로 뚫어버려야 하는데,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인가!
한편, 막념이 강제로 저승행 길을 열어버린 이 순간.
저승의 어느 황무지에 서 있던 목생이 경악에 찬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았다.
“누, 누가 감히 이런 짓을…….”
* * *
저승.
바닥에 대자로 누운 엽현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한편에선 육공주가 살기 어린 시선으로 엽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낱 버러지라고 여겼던 사내에게 일격을 당했다.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었던 치명상이었다.
도정의 지체 높은 신분인 육공주에게 이는 크나큰 굴욕이었다.
“버러지… 내 너의 영혼을 이곳에 못 박아 세상이 끝날 때까지 형벌 속에 살게 할 것이다!”
“크큭… 웃기시네…….”
이때 누워있던 엽현이 힘겹게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크게 숨을 들이켠 그는 고개를 돌려 곁에 있는 무심을 바라보았다.
“형씨, 나 좀 일으켜 세워주시오. 아직 더 싸울 수 있소.”
“뭐…? 하하하! 살다 살다 너 같은 독종은 처음 본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무심이 엽현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엽현은 두 다리로 서긴 했지만, 그의 무릎은 곧 무너질 듯 휘청거렸다.
이에 무심이 황급히 엽현을 붙들었다.
“이봐, 진짜 싸울 수 있어? 가만있어도 곧 뒈질 거 같은데?”
“크큭… 검수가 어디 이렇게 죽는 것 봤소? 죽더라도 싸우다 죽는 게 검수요!”
무심이 감탄한 듯한 눈빛으로 엽현을 바라보았다.
“네 말이 맞다! 사내라면 죽더라도 길동무 하나쯤은 데려가야지!”
“하하하! 무형, 잠깐 비켜서시오. 내 마지막으로 펼칠 화끈한 초식이 하나 남아 있으니까!”
이 말에 무심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이니 원하는 대로 하거라. 네가 죽으면 나도 곧 뒤따라가겠다. 어차피 나도 이곳에 묻힐 팔자니까. 참, 오늘 빚진 것은 다음 생에 계산하도록 하자꾸나!”
무심은 마지막으로 엽현의 어깨를 툭 건드리고는 멀리 물러났다.
무심이 떠나자 엽현이 비틀거리며 육공주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크큭… 괴롭히고 싶다며? 뭘 쳐다보고 있어? 빨리 덤비지 않고?”
“하하하! 과연 기개가 있는 놈이로구나! 너 같은 놈일수록 괴롭히는 맛이 있지!”
말을 마친 육공주는 곧바로 엽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순간, 손에서 응집된 한 덩이 뇌전이 엽현을 향해 휘몰아치며 날아갔다.
뇌전이 지나간 공간이 와르르 무너지니 그야말로 세상의 마지막 순간을 보는 듯했다.
이제 모두의 시선은 엽현에게로 향했다.
과연 그는 이 공격을 막아 낼 수, 아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하하하하! 결국, 네 도움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이로구나! 오너라!”
엽현이 허리를 젖히며 광인처럼 웃는 이 순간.
그의 하얗게 바랜 머리가 점점 붉게 물들어가더니, 뇌전이 코앞에 닥쳤을 땐 눈동자마저 한편의 혈해(血海)로 변해 있었다.
혈맥지력(血脈之力)!
찰나의 순간, 풍도성 전체가 살벌한 살의로 뒤덮였다.
뒤이어 엽현이 검령을 꺼내 들었다. 이때 검령의 검신 역시 요염한 붉은 기운을 띠고 있었다.
검끝이 정면을 향한 순간, 날아오던 뇌전이 그대로 대나무 갈라지듯 양쪽으로 갈라졌다.
현재 엽현의 경지는 증도경.
여기에 혈맥지력까지 각성한 상태이니 검이 펼쳐내는 위력은 그야말로 ‘공포’에 가까웠다.
엽현의 검이 뇌전을 쉽사리 제거한 순간, 지켜보던 자들의 표정 또한 멍해졌다.
‘다 죽어가던 녀석에게 아직 저런 힘이 남아 있었다니…….’
무심 역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보면 볼수록… 대단한 녀석이로군…….”
이때 육공주가 엽현을 향해 소리쳤다.
“너 같은 벌레에게 그런 혈맥은 사치다! 지금 바로 뽑아서 본녀가 흡수할 테니 얌전히 있거라!”
말을 마친 순간 육공주의 신형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