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483
483화 날 즐겁게 해주기를 바란다
계옥탑 오 층!
탑 안에서의 움직임을 감지한 엽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가 드디어 나오려는 것일까?
이때, 장내 모든 무인의 시선이 엽현에게로 쏠렸다.
“보아하니, 네게 아직 남겨 둔 한 수가 있는가 보구나.”
성주의 말에 엽현이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지금이라도 부디 무릎을 꿇고 싹싹 빌기를 권한다. 아니면 네 몸은 여기서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게 될 것이니까!”
“하하하, 나를 찢어 죽이겠다고? 방금 그 말은 이 성역이 존재한 이래로 가장 우스운 농담이로구나!”
순간, 성주가 웃음을 뚝 그치더니, 엽현의 복부를 내려다보았다.
“어서 내놓거라!”
권능이 담긴 말이 떨어지는 순간, 엽현의 미간 사이에서 다시 작은 탑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웬 남자 하나가 엽현 앞에 나타났다.
대략 삼십 대 전후로 보이는 남자의 미간 사이로 작게 ‘帝(제)’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양손을 품이 넓은 소매에 감추고 있었으며, 발에는 검은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갑작스런 인물에 등장에 장내의 무인들의 표정에서 호기심이 동했다.
이때 엽현의 곁에 나타난 이 층 존재.
엽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매우 무거웠고 또 무거웠다.
모두의 시선 속에 남자가 고개를 들더니 눈을 감고 천천히 공기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후아… 신선한 공기… 이 공기가 이렇게나 상쾌할 줄이야. 역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 소중함을 모르는 것이지.”
“너는 누구냐!”
“내가 누구냐고?”
성주의 말에 남자가 감았던 눈을 떴다.
“내가 누구냐 물었느냐?”
순간, 남자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미친 듯이 웃는 남자의 웃음소리엔 어쩐지 알 수 없는 처량함이 느껴졌다.
엽현이 남자를 바라보며 곁에 있던 이 층 존재에게 속삭였다.
“저놈이 그렇게 대단해?”
“발에 묶인 족쇄가 보이느냐? 그건 탑이 한 짓이다. 탑 안에 가두는 것조차 모자라 족쇄까지 채운 것을 보면 그의 실력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할 수 있겠지?”
엽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눈앞의 남자와 성주가 양패구상(兩敗俱傷:양쪽이 다 패해서 상처를 입는다는 뜻)하기만을 바랐다.
그것이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결과였다.
둘 중 하나라도 살아남게 되는 날엔 또다시 위기가 닥쳐올 것이 분명하니까.
이때 남자가 천천히 성공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구냐 묻었나? 알려주지. 나는 제형(帝邢)이다.”
‘제형?’
성주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런 이름은 들은 적 없다.”
“하하하! 너같이 하찮은 놈이 어찌 나를 알 수 있겠느냐?”
그 말을 듣자 성주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너는 본 주가 본 자들 중에 가장 건방진 놈이로구나. 부디 네 실력도 그에 걸맞길 바란다!”
음성이 떨어짐과 동시에 성주가 남자를 향해 점지했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에서 차가운 빛줄기 하나가 성공을 뚫고 떨어졌다. 마치 유성처럼 길게 꼬리를 남기며 내려오는 빛에는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이를 본 순간, 미앙천 등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심지어 이 층 존재의 눈빛에서도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초월천지(超越天地)…….”
“초월천지? 그게 뭔데?”
엽현의 물음에 이 층 존재가 대답했다.
“저자는 이미 ‘도(道)’의 문턱에 이르렀다. 그의 능력이 이 세계를 뛰어넘은 까닭에, 세상의 어떤 제한도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인간들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그야말로 ‘신’에 가까운 존재지. 그는 세상의 법칙에 속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엽현이 고개를 들어 성공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제형을 바라보았다.
성주가 쏘아낸 빛은 거의 제형의 머리 위에 도달한 상태였다.
이때 제형이 한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그 순간, 강렬하게 떨어지던 빛이 갑자기 희미해지더니, 이내 연기처럼 순식간에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이를 본 성주의 두 눈이 순간 가늘어지면서, 눈동자 깊은 곳엔 무거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성주는 제형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때, 성주 밑에 서 있던 제형이 고개를 흔들었다.
“수준 낮아서 못 봐주겠군……”
그 말과 동시에 오른발을 들어 허공을 가볍게 밟았다.
예상과는 달리 잠잠한 장내.
하지만 이때, 장내 모든 무인들이 소스라치듯 놀랐다. 왜냐하면 성공 중에 있는 수많은 무인들의 몸이 갑자기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성주를 제외한 나머지 무인들의 육신이 소멸되기 시작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성주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잠잠하던 우주는 이내 비명 소리로 가득 찼고, 살아남은 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미앙성역으로부터 멀어지고자 발버둥 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 깜빡할 사이, 무인들로 빽빽했던 성공엔 단 한 사람, 성주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멍하니 서 있는 성주의 앞에 나타난 제형.
“너… 너는 도대체 누구냐!”
성주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치자, 제형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 역사에 의해 지워진 사람이라고 할까?”
이때 성주가 제형을 향해 달려들면서 손톱으로 공간을 긁었다. 그러자 제형 주변의 공간이 순식간에 소멸됐다.
그와 동시에 그 주변의 공간에 갑자기 불길이 솟구쳤다.
지옥 불처럼 짙은 불길은 그로부터 일 각가량 지나서야 겨우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전히 연소 됐을 때, 그 자리엔 제형이 그을린 곳 하나 없는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장면을 본 성주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약해, 너무 약하다고.”
제형이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성역은 하나같이 약한 놈들뿐이로군…….”
“도대체 네 정체가 무엇이냐!”
성주의 고함 소리에 제형이 웃으며 대답했다.
“말했잖아, 제형이라고.”
“이익…….”
“이제 재미없으니까, 죽어.”
그 말을 뱉은 순간, 제형의 신형이 사라졌다가 눈 깜빡할 새에 다시 제자리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때 그의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성주의 머리였다.
‘이럴 수가! 저 성주를 단번에 제압하다니!’
엽현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이 층 존재가 초월천지의 경지라고 한 성주가 이렇게 간단히 제거 돼 버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때 이 층 존재가 말했다.
“이제 알겠지? 탑 안의 존재들은 저런 자들과 비교 대상이 아니다.”
“…….”
성공에 서서 가만히 성주의 머리를 보고 있던 제형이 손에 힘을 주었다.
퍽-!
성주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지더니 그대로 소멸했다.
그러나 이때, 제형이 어둠 속 어딘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 본체로 덤빌 테냐?”
본체!?
설마 방금 죽은 것은 성주가 아니라 그의 분신이었단 말인가!
상대에게서 아무런 응답도 들려오지 않자, 제형이 흥미를 잃은 듯 고개를 흔들었다.
“실력도 없는데다, 재미도 없는 놈들이군!”
이제 그의 시선은 아래쪽에 있는 무인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엽현에게로 향했다.
순간, 그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엽현의 앞에 나타났다.
“…….”
제형이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엽현을 바라보며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이 탑에 육만 칠천 년 동안 갇혀 있었다. 무려 육만 칠천 년! 너는 이게 무슨 느낌인 줄 아느냐!?”
엽현이 그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
“그거 참 고욕이었겠군. 하지만 그 일은 나와 큰 상관은 없지 않나?”
“상관? 물론 있지! 지금은 네가 탑의 주인이니까!”
“하지만 널 가둔 건 내가 아니잖아? 복수를 하려거든 원래의 주인을 찾아가야 하는 거 아냐?”
“그건 안 돼!”
“왜 안 되는데?”
엽현이 궁금해하자 제형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야… 못 이기니까…….”
“…….”
한숨을 푹 쉰 제형이 엽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대답하거라. 검의 주인은 언제 돌아오는 것이냐?”
‘검의 주인? 천녀를 말하는 건가?’
이는 엽현도 알 수 없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모른다고 하면 이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것뿐이었다.
위기가 찾아온 것을 깨달은 엽현은 계옥탑의 힘을 발동했다. 하지만 그의 이마에 탑이 출현하는 순간, 탑은 순식간에 원래 자리로 되돌아갔다.
이 모습을 보자 제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같이 죽어보려 했느냐? 그러기엔 너는 너무 약하다. 아니, 어리다고 해야 하나?”
말과 동시에 제형이 엽현을 향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엽현은 자신의 전신에 죽음의 기운이 몰려옴과 동시에 육신이 무너져 내림을 느꼈다.
바로 이때, 이 층 존재가 엽현을 자신의 뒤로 잡아당기면서 제형을 향해 앞발을 날렸다.
이에 제형이 가볍게 한 손을 저었다.
쾅-!
이 층 존재가 그대로 공간을 뚫고 날아갔다. 방금 그가 있던 자리엔 커다랗게 구멍이 생성됐는데, 천지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인지, 이 구멍은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제형이 다시 손을 들어 올린 순간, 이번에는 미앙천이 엽현의 앞을 막아섰다.
“쯧쯧, 벌레들이란…….”
제형이 혀를 차며 주먹을 뻗었다.
가벼워 보이는 공격이었지만, 미앙천이 화들짝 놀라며 양손을 교차해 앞쪽을 방어했다.
쾅-!
천 장 밖으로 튕겨 나간 미앙천. 주먹을 막은 양팔이 그대로 가루가 되어 떨어져 나갔다.
제형이 다소 의외라는 표정으로 미앙천을 바라보았다.
“내 공격을 막고도 죽지 않다니, 제법이로구나. 하지만 그래 봐야 너 역시 한낱 개미에 지나지 않는다.”
날카로운 표정으로 제형을 바라보는 미앙천.
하지만 제형은 더이상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엽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원래 검의 주인을 기다리려 했으나, 보아하니 나타나지 않을 것 같구나. 아쉽지만 할 수 없지. 대신 세상에 다시 나온 기념으로 너희들의 목숨을 거둬주겠다.”
제형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 순간, 미앙성역 전체가 뒤흔들리더니, 지반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는 진정으로 미앙성역을 멸망시킬 셈이었던 것이다.
이때, 화사가 제형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하지만 그에게 가까이 가기도 전에 보이지 않는 힘에 튕겨져 나갔다.
마가족의 꼽추 노인 역시 시도해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순간, 엽현의 눈이 번뜩이더니, 그의 손에서 한 자루 검이 딸려 나왔다.
진혼검!
곧바로 이어지는 일검정혼!
검이 막 떨어지는 순간, 돌연 뭔가에 가로막혀 허공에서 멈췄다. 그의 검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제형의 두 손가락이었다.
“어떻게…….”
엽현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자, 제형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검은 쓸 만하고, 검기도 나쁘지 않다. 다만 네 실력이 너무 약한 것이 흠이로군. 게다가 내 영혼은 이미 불사의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따위 장난감으로는 상처하나 낼 수 없다.”
순간 제형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쾅-!
진혼검의 검날이 그대로 조각조각 부서져 공중에 흩날렸다.
이때 엽현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소혼의 음성.
[주인… 사실 주인은 약하지 않습니다… 잠시나마 주인을 따를 수 있어 기뻤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길…….]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엽현.
이를 본 제형이 웃음을 터트렸다.
“표정이 좋구나. 나는 네가 더 절망했으면 좋겠다.”
말이 떨어짐과 함께 제형이 손을 들어 올렸다.
바로 이때였다.
윙-!
엽현의 몸 안에서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검명 소리!
순간, 탑에 꽂혀 있던 검 중 하나가 엽현의 몸에서 빠져나와 빛처럼 하늘로 솟구쳤다. 눈 깜빡할 사이에 성공에 도달한 검은 천천히 누군가의 손으로 떨어졌다.
무인들이 동시에 성공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그들의 시선 속에 하얀 장포를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제형이 몸을 돌려 남자를 바라보더니,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왔는가? 너는 부디 날 즐겁게 해주었으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