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worldly Illusion Hunter RAW novel - Chapter 192
190화. Collapse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추상적인 문양이 가득 조각된 금속 원통 같은 게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원통에서는 확산 속도가 빠른 연푸른색의 기체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하여간에 이 나라는 미친 것들이 왜 이렇게 많…….
‘아니, 자세히 보니 역시 한국인은 아니네.’
정정하자.
이 행성은 아무래도 미친 인간의 비율이 너무 높은 것 같다.
지구가 멋지다고 생각한 것이 불과 3분 전인데 바로 환생이 후회될 줄이야.
요즘에는 누굴 건들지도 않고 조용히 살았는데 어째서 내게만 이런 시련이 찾아든단 말인가.
‘오늘은 그냥 지구의 물고기를 구경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래. 정말로 그랬을 뿐인데.
“대체 무슨……!”
“됐으니까 달려. 어서!”
아쉽게도 안윤승의 보호막은 아직 원시적인 단계라 유해한 기체를 걸러내지 못한다.
하지만 불의의 기습은 이제 한두 번 겪어본 것도 아니어서 그런지, 침착함은 자동으로 유지됐다.
나는 안윤승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외쳤다. 최대한 호흡을 참고 이 장소에서 벗어나라고.
그러나 아무래도 그 간단한 발버둥마저 쉽지는 않을 모양이다.
‘제기랄!’
영화에서는 악당들이 대사를 주절주절 늘어놓으며 시간도 주고 하던데.
갑자기 나타난 그들은 전문가적인 태도로 잽싸게도 달려들었기에.
***
깜빡.
짙은 아이홀이 특징적인 누군가들의 눈이 순차적으로 깜빡인다.
여성과 남성.
그들은 이전부터 한 팀으로 일해오던 각성자 심부름꾼이었다.
심부름이라는 단어를 보면 으레 장보기 등의 자질구레한 일을 연상하기 마련이나, 그들이 하는 일은 더욱 폭이 넓고 깊었지.
뒷조사. 협박. 보복.
그중에서도 가장 돈을 많이 쳐주는 일은 당연히 생명이 걸린 일이었는데.
이 업계의 선배들은 총이나 칼 등의 도구를 활용해 일을 하곤 했으니 뒤처리가 항상 번거로웠지만, 오늘날의 현대 사회에는 좀 더 세련된 살인법이 등장했다.
각성 능력.
그것이 그들이 속한 시장에 변화를 가져다준 것이다.
[me : 정말 이런 조건으로 일을 하라고요?] [client : 그래.]그나저나 이번 의뢰는 다시 생각해봐도 역시 특수성이 짙다.
일명 ‘알라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냥꾼 듀오는 얼마 전, 어느 한국인의 부탁을 받게 됐는데.
그 내용이 무려 최상위 헌터인 김기려를 해치라는 것이었으니.
“아무리 그래도 S급은 좀.”
원래는 임무를 거절하려 했는데 말이다.
이게 웬걸. 그 한국인 의뢰자 쪽에서 얼마 뒤에 선뜻 흥미로운 계약서를 보내왔다.
김기려를 딱히 죽이라는 것도 아니고.
당신들의 능력으로 그저 살짝 건들고 빠지면 OK.
도망은 얼마든지.
하지만 만약 부탁을 들어준다면 어마어마한 보상을 통째로.
보상.
그래. 결국은 그 한국인이 준다는 보상이 외국의 심부름꾼들을 자극한다.
약 67만 유로의 암호 화폐.
한화로는 무려 10억에 달하는 돈.
그것을 단지 ‘도전’의 대가로 얻을 수 있다면 고민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기에.
요즘은 이 심부름 업계도 마냥 호황이 아니다.
살인처럼 법적인 리스크가 매우 큰 건이 아닌 이상, 10억이라는 큰돈을 턱하니 벌 수 있는 의뢰는 제법 드물다.
게다가 대상이 S급이라는 특수성만 아니었어도 이런 일감은 선배들이 채가 구경도 못했을 테니.
‘따져보면 괜찮은 조건이야.’
팀 알라이는 그 후에도 의뢰인과 메시지를 몇 차례 더 주고받았고.
이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설령 임무를 실패하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더라도, 남한은 묻지 마 폭행의 법적인 처벌 수위가 낮은 국가니 이래저래 안전장치가 있기도 하다.
“그 돈이 있으면 미리 봐둔 건물을 살 수 있어.”
누군가는 각성을 축복이라 부르던가.
하지만 알라이라는 이 한 쌍의 각성자들은 요술을 부리게 된 것을 그다지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특이하게도 그들은 같은 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스킬 사용은 멀쩡한 데 반해 정작 면역 시스템에 큰 문제가 있었으니까.
그들의 체내 마력은 뭉치지가 않는다.
그래서 다른 각성자들처럼 육체가 강인하지 않다. 게다가 하필 깨우친 요술은 생물의 정신을 건드는 힘.
S급처럼 압도적으로 태어난 것도 아닌 그들은 스킬로 몬스터를 죽일 수 없다.
따라서 사냥꾼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른 일로 돈을 벌면 그만 아니냐고?
무슨 소리. 그들이 태어난 국가는 초능력자를 향한 시선이 모질기 그지없어 각성자 인식표라는 규제까지 걸어 세웠으니. 그들은 이제 평범한 노동조차도 할 수가 없는 신세였다.
어딜 가든 목줄이 걸린 맹수처럼 흘겨봐지고, 일반인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언감생심 탐내지 말고 던전으로 꺼지라며 배척해대는 삶이라니.
“의뢰를 받자.”
그들은 결국 불법에 빠졌다.
처음은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 고향을 버렸으며, 불법체류자 신세로 돈을 벌다 스페인에 정착했다.
나중에는 신분을 세탁하고 외모도 정돈하여 더는 심부름 일에 매달릴 필요가 없어졌지만.
이제 그들은 일반적인 직업으로 얻는 수입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천만 원, 억, 십억.
무언가 특별히 노력을 한 것도 아닌데, 각성 능력은 그야말로 요술 항아리처럼 돈을 끊임없이 만들어냈으니.
그들은 이제 이 업계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자신들의 행위로 각성자들의 인식이 나빠지는 것쯤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어찌 보면 헌터 협회의 고병도 같은 인물이 초능력 혐오를 가지고 있는 것도 다 이런 자들이 원인이리라.
갑작스레 찾아온 마법의 시대는 자본주의 사회와 맞물려 많은 문제를 야기했으니까.
그러니…….
***
팀 알라이는 S급 헌터를 골탕 먹여 달라는 그 의문의 의뢰를 수락한다.
한데 한 쌍의 날개처럼 비슷한 체격을 가진 이자들은 어째서 오늘을 노렸을까?
그것은 바로 도주의 용의함 때문이었다.
미리 조사한 바로는 저기 있는 스킨헤드의 남자가 바로 김기려의 가장 친한 지인이라니까.
‘평일 대낮에 갑자기 아쿠아리움이라니. 특이하군.’
그들의 작업에는 반드시 일정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알라이가 감시해 왔던 것은 김기려가 아니라 안윤승이다.
두 심부름꾼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김기려의 발을 묶을 방법을 생각해 뒀다.
‘우리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 나만 믿어.’
슈우우우우.
의문의 기체가 공간에 터져 나온 사이.
곱슬머리를 한 여성 작업자 쪽이 먼저 앞으로 튀어 나간다. 병적인 문제로 몸이 약한 각성자치고는 도발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는 법.
“윽!”
그녀가 달려들자, 도망치던 안윤승은 등을 잡히지 않기 위해 황급히 몸을 돌렸는데.
이는 작업자가 노리는 바였다.
해외의 각성자는 상대의 하단을 공격하려는 척하다가, 그의 방패가 아래쪽을 향했을 때를 노려 손에 숨긴 무언가를 재빨리 뿌렸으니까.
출처를 알 수 없는 은색의 입자들.
이는 다름 아닌 [비명말뚝]의 단검 가루였다. 그들은 유니크급 아이템의 통증을 자아내는 부분을 갈아 분말을 상대에게 투척한 것이다.
“아아아아악!”
“윤승아!”
이윽고 터지는 비명.
추가로 알라이가 입장하기에 앞서 내던졌던 여러 개의 원통은 각각의 효과를 가진 상태 이상 유발 아이템.
수면. 마비.
혼란. 실명.
이것은 나찰사원의 고문자들도 알아내지 못했던 제2의 윤활법이다.
사실 이 세계의 각성자들은, 여러 가지의 부정적인 효과에 동시에 노출됐을 때 상태 이상 방어력이 급락하는 경향이 있었다.
“으, 윽……?!”
얼마 지나지 않아 안윤승이라는 이름의 한국인 헌터가 스르륵 한쪽 무릎을 꿇는다.
이처럼 정신 계열의 공격은 위협적인 힘이었다.
방어계 헌터여서 남들보다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옆에 난 샛길로 딱 한 번만 무너트리면 간단히 제압이 가능하니까.
‘됐다.’
안윤승이 행동 불능이 되자 비로소 뒤에 숨어 있던 인물이 거리를 좁히기 시작한다.
이 외국인 각성팀의 남자 쪽은 특이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타인을 어느 환상 속의 세계에 밀어 넣어, 마치 주인 있는 자각몽에 빠트린 것처럼 상대를 마음껏 괴롭힐 수 있었으니.
【꿈의 초대】
이곳의 말로는, 그렇게 불리는 초능력.
현실의 상대가 얼마나 강하든 간에 그 허구의 공간에 들어오면 그대로 끝이다.
그는 자신의 마법으로 만든 정신적인 세계 속에서만큼은 그야말로 신 같은 존재였다.
‘쇼크사로 몰아가는 것까지는 무리지만, 높은 확률로 기절시킬 수는 있어.’
이름 모를 남자는 표적을 향해 마력을 쏟아붓는다.
목표는 금발의 한국인.
지금도 안윤승은 자신의 동료에게 끊임없는 위협을 당하고 있으니, 한국의 네 번째 S급은 친한 지인이 걱정되어서라도 달려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그럼, 이쪽은 적당히 싸우는 시늉만 반복하며 상태 이상 원통 노출 시간을 늘리면 됐다.
그것이, 저 S급의 내성을 무너트리는 계획이었거늘.
‘어?’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금발의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스킬을 발동한 술사는 자신의 의식이 어딘가로 빨려들어 가는 듯한 아찔한 감각을 느꼈다.
놀랍게도, 정신 침투가 불과 몇 초 만에 성공해 버린 것이다.
마치 F급의 약골이라도 공격한 것처럼!
***
아무것도 없는 흰 공간.
편의상 심부름꾼 2로 부를 어느 각성자는 이 순백의 여백을 본 순간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다.
방금도 말했듯이 이곳은 현실 세계에서의 능력이 그다지 중요치 않으니.
설령 자신의 등급이 아주 낮았다 해도, 여기에선 S급 헌터를 마음대로 짓밟을 수 있다.
“…….”
금발의 한국인은 당황이라도 했는지 말없이 주변을 훑어보고 있었는데.
“혼란스러워요?”
이때, 외국의 각성자는 자신의 목표에게 첫마디를 건넸다.
“어차피 여기에선 시간도 많으니 이야기 좀 하죠.”
“…….”
“사실 S급을 상대해 보는 건 처음이라서. 어쨌든 저는 좀 궁금해요. 다양한 주제가.”
“…….”
“대답을 잘하면 당신이 앞으로 뭘 당할지 정도는 미리 알려줄 수도 있어요.”
그나저나 반쯤은 호기심에 받은 의뢰였는데 맥이 빠진다.
S급 헌터라기에 잔뜩 긴장했는데 이건 뭐, 뚫는 맛도 없이 바로 정신 침투에 성공해버리다니.
어떻게 최상위 각성자의 정신이 이렇게 나약하지. S급이라는 게 고작 이런 수준의 존재들이었다면 앞으로 관련 의뢰를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도 괜찮으려나?
그리고 언젠가, 돈을 많이 모으면 하와이에 건물을 올려 유유자적한 은퇴 생활도 누려보고.
“왜 말이 없어요. 내 말 들리잖아요?”
두 사람은 명백히 국적이 달랐지만, 기려의 귀에는 신기하게도 상대의 언어가 한국어로 들렸다.
어느 한쪽이 픽시의 번역기를 차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한국의 네 번째 S급 헌터는 대화를 이끄는 히스패닉을 빤히 쳐다봤는데, 그 시선에 알라이의 술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상한 기분이죠? 당신의 각성 능력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서는 사용할 수 없을 거예요. 음,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바라지 않으니까.”
이에 금발이 답한다.
“그래?”
다소 짧고 간결한 단어다.
“그래요. 여기에선 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된다고요. 나는 이 안에서만큼은 S급 헌터고, 슈퍼 히어로고, 당신은 힘이 없는 일반인이지.”
그리고 이 순간.
갑자기 새하얀 허공에서 수족관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파란색의 물방울이 팍 튀기는데.
해외의 각성자는 이것으로 자신이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그러니 언행은 신중히……. 아니지. 아예 열심히 반항해도 상관은 없네요. 오히려 재밌겠어! S급의 발버둥이라니.”
소심한 태도이던 바깥의 모습과 달리 제법 거만한 자세를 유지하는 심부름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각성 능력이 제대로 먹히기만 하면 그동안 어떤 존재든 금세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첫 관문만 넘으면 누구든 유린할 수 있는 강력한 힘.
이제는 눈앞의 S급 헌터를 정신적으로 고문해 기절시킨 뒤, 동료와 도망치면 임무 완료다.
딱.
그는 손가락을 튕겨 누군가의 머리 위로 세찬 물을 만들어 쏟았다.
…하지만 반응이 뭔가 좀 이상했다.
그 금발의 남자는 머리 위로 물이 쏟아졌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그러니까 정말로 눈꺼풀 하나를 깜짝 않고 이쪽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기에.
“……?”
거기에서 몇 초를 더 기다려 보니 곧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
이쪽을 줄곧 주시하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기색을 바꿨다.
입은 벌리고 눈은 접은 것이. 마치 거죽만 사람인 무언가가 웃음이라는 표정을 모방한 듯.
“고마워.”
뒤이은 것도 참 이상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어?”
“너는 요술을 정말 생각 없는 방식으로 쓰는구나. 이건 특정 대상을 자신의 정신 안으로 끌어들이는 스킬이야. 어딘지도 모를 제3세계에서 서로 만나는 게 아니라.”
“무슨…….”
“휴. 솔직히 습격을 당할 때만 해도 식겁했는데, 어떻게 하필이면 이런 각성자가 자객으로 왔는지.”
“…….”
“혹시 아직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왠지 거북하다.
해외의 각성자는 상대의 말소리에서 뜻 모를 불쾌감을 느껴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김기려는 여전히 표정이 그대로였다.
“집주인인 네가, 방금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사람을 불렀잖아.”
뚝. 뚝.
그는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수정체 위를 훑고 지나갔음에도, 한 치의 변화도 없이 미소를 지켰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