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worldly Illusion Hunter RAW novel - Chapter 195
193화. 읍소
한적한 오후.
“어머나, 세상에.”
그 사이에 대표실에 못 보던 기물이 늘었다.
가장 크게 바뀐 것은 바로 그들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테이블.
유리도 석영도 아닌 것이, 마치 그 재질 자체가 내부에 힘을 품고 있는 듯이 예술적으로 빛나는 이것은 다름 아닌 마정석을 깎아 만든 가구였다.
에스더는 그런 가구의 위에 커피잔을 올려놓고 대화를 잇는다.
“솔직히 말하면 기려 씨 연락을 받고 놀랐어요. 갑자기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말씀하시다니. 뭔가 곤란한 상황이라도 생긴 건가요?”
“조금이요.”
“아무튼, 어서 말해봐요! 나는 우리 기려 씨 소원이라면 언제든 들어줄 의사가 있거든요. 오히려 저번의 빚을 갚을 수 있게 되니 기쁘고 좋은데요?”
그리고 잠시 뒤, 대표실의 공기에 고풍스러운 실내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한 마디가 흘렀다.
“기쁘신가요. 하지만 제가 부탁드릴 건……. 사람을 처리하는 일이라 좀 성가실 텐데…….”
이곳의 방문자가 충격적인 말을 꺼낸 것이다.
그런데 에스더의 반응은 단조로웠다.
그녀는 웃는 얼굴 그대로 이내 답했다.
“누굴 죽이면 되는데요?”
금발의 남자는 조용히 땅을 쳐다보고 있다가, 한참 뒤에서야 고개를 들고 정정했고 말이다.
“잠깐만요. 제가 방금 말한 건 ‘사회적인’ 처리라는 뜻이었어요.”
“아하.”
“뭐, 물론 에스더 씨도 농담이었겠지만. 워낙 자연스럽게 말씀하시니까 꼭 진짜처럼 들리길래…….”
농담 아닌데.
에스더는 처진 눈을 껌뻑거리며 뒷말을 삼켰다. 이러는 사이에 기려 쪽이 대화를 이어 나갔고.
“아무튼, 사실 제가 요즘 어떤 일 때문에 걱정이 좀 많아요.”
얼마 안 가 그 부탁의 정체란 것이 드러났다.
“갑자기 고병도 회장이 제게 각성자 용역을 보냈거든요. 그것도 사람을 완전히 해치겠다는 의도로요. 이런 상황에선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다.
김기려는 고민 끝에, 아예 이번 문제를 저주술사에게 죄다 고자질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에스더 쪽에서 이의를 제기한다.
“잠깐만요. 고병도라고요?”
김기려가 한국마탑의 손을 빌려서까지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현 협회장과 관계가 있단 말인가?
에스더가 궁금증을 표현하니 소파에 앉은 남자는 설명했다.
“안 그래도 지금부터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에스더 헌터님, 제가 지난주에 그 협회장 때문에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아십니까?”
고병도와 자신 사이에 있던 마찰을 속사포로 일러바치는 김기려.
고병도가 외국의 심부름꾼을 보냈었다느니.
그리고 이 일을 다 알고 찾아가자 뻔뻔히 모른 척을 했다느니.
본래 F급 헌터라는 보잘것없는 존재는 지구의 권력자와 힘을 겨루기가 어려운 법.
따라서 지금 같은 때에 약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눈물의 하소연이었다.
물론 진짜 울음까지 시도한 것은 아니고, 그냥 최대한 감정을 담아 자신이 겪은 일을 구구절절 상급자에게 말한 거지만.
“맙소사! 고병도 그 사람이 해외의 각성자까지 써서 당신을 해코지했다고요?”
이내 에스더는 격노했다.
자국의 각성자를 누구보다 보호해야 할 헌터 협회라는 기관에서 어찌 이런 용납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를 수가!
“아니, 그런데 대체 그 연구원 친척은 왜 끌어들였대요?”
“살짝 복잡한 문제긴 한데…….”
기려는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사실 제가 헌터 협회와 개인적으로 계약을 한 게 좀 있어요. 그걸 이용해서 날 죽이려고 한 거예요.”
이내 협회장과 맺은 [기사의 맹약]을 밝혀버리는 김기려.
하지만 이는 그에게 있어서 크게 흠이 될 사안이 아니었다.
원래의 계획은 고병도를 겁박해 30억을 얻고 몸을 갈아타 도망가는 것이긴 했지만, 이쪽은 그간 본의 아니게 제 의무를 다해버렸으니까.
“굳이 이기적인 인간들의 간섭을 받긴 싫었어요. 어차피 저는 따로 명령이 없어도 제 할 일은 하는 헌터니 괜찮잖아요? 그래서 각성 등급이 밝혀졌을 당시, 협회에게 활동에 참견하지 말아 달라는 의미로 계약을 하나 했었습니다.”
날로 늘어가는 언어 능력……!
시민의 안전 따위는 생각해 본 적도 없으면서, 그는 실로 뻔뻔하게 주장했다.
세이렌과 가고시마 레이드 등의 건을 예로 들어 본인도 나쁜 의도로 그런 계약을 했던 건 아니라고 설명한 것이다.
“하, 게다가 저는……. 정말로 단지 협회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협회장을 해치지 않겠다고 해줬던 건데. 그때 받은 개인정보 손해배상이 아까워져서 갑자기 이러는 건지 뭔지.”
이쯤 되면 거짓말이 호흡보다 자연스러운 상황.
다행히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에스더는 기려의 발언을 신뢰했으며 곧 어떠한 결론에 달했다.
“그러게요! 감히 헌터의 배려를 이런 식으로 되갚다니! 그동안 기려 씨가 이 한국에 해준 것이 얼마인데!”
탁.
에스더는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하여간 터질 게 터졌네요. 이전 대의 협회장은 이러지 않았는데, 고병도 그 사람은 측근들에게 쓸데없이 각성자 혐오 사상을 드러내질 않나…….”
“네?”
“게다가 기자들을 써서 기려 씨의 여론을 선동했던 것도 충격적이었고.”
“뭐, 그건…….”
“취임식을 올린 지 얼마 안 됐을 때. 나한테 감히 ‘그런 말’을 한 것도 여태껏 그렇게 너그럽게 봐주었더니만.”
삼진아웃이네.
에스더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후로는 잠시 입을 닫았다.
침묵의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곧이어 결정을 내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기에.
“좋아요. 이 일은 저한테 맡겨주세요.”
“어떻게 하시려고요?”
“기려 씨의 말은 협회장이 또 이상한 횡포를 부릴까 봐 걱정된다는 소리잖아요? 내가 그러지 못하게 만들어볼게요. 기사의 맹약으로요.”
물론 좋은 계약을 위해서는 우선 상대방의 권위를 낮춰야 할 필요가 있겠고.
협회장이 허튼 짓거리를 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기실 재산에서 나오니, 그 더러운 돈에도 약간의 피해를 입힌 뒤에서야 원활히 약속이 진행되겠지만.
에스더는 고 회장이 앞으로 행패 부리지 못하게 만들 자신이 있다며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이에 기려가 잠시 걱정을 표한다.
“에스더 헌터님. 그런데 혹시 물리적으로……. 뭐 어떻게 그러실 생각은 아니죠?”
“하하. 왜요. 그러면 안 될까요?”
“그야 협회장의 직책이 직책이다 보니까.”
“흠.”
“어설프게 건들면 시끄럽게 될 게 뻔하고. 솔직히 부탁드리면서도 마음이 복잡하긴 하네요.”
하지만 자줏빛 머리카락의 여인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할 뿐.
“흠. 확실히 형이 확정된 범죄자를 다룰 때와는 다르니 이번엔 수단을 가리긴 해야겠지만.”
탁.
그녀는 다 마신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활짝 웃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이 나이 먹고 그러고 싶진 않았는데, 사실 여차하면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면 그만이라서요.”
할아버지?
금발의 남자는 갑자기 나온 주제가 의아하다는 듯 행동을 멈췄다.
그러자 에스더가 설명을 덧붙였다.
“어머, 모르셨군요. 그럼 혹시 저번에 조난됐을 때 제가 했던 그 이야기는 기억나시나요?”
“어떤?”
“안타깝게도 저희 집이 좀 사는 편이었다고 했던 거요. 그런데 사실 그게 금전적인 의미만은 아니거든요.”
기려는 충분히 식혀둔 커피를 꿀꺽 삼키다가 이어진 말을 듣고 그만 사레가 들려버렸다.
“이제 와서 밝히자면 우리 할아버지는 국회의원이에요. 그것도 고병도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경력의. 그래서 아마 전면전을 시작해도 협회장이 날 쉽게 묻어버리진 못할걸요.”
이 순간 기려는 깨닫는다.
“예?”
단순한 초능력자가 아닌, 불세출의 권력 기반.
아무래도, 자신이 일을 맡길 사람을 아주 제대로 찾아와버린 것 같다는 사실을.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까.
한국 헌터 협회의 2대 회장. 고병도.
그는 요즘 들어 원인을 알 수 없는 불행에 시달리고 있었다.
갑자기 협회의 치부가 연이어 기사화되질 않나. 하루 종일 두통에 시달리질 않나.
아무튼 재수가 없다고 표현할 만한 일이 늘어났으니.
정밀 검진을 해봐도 병원에서는 몸에 이상이 없다는 말을 할 뿐.
그런데 이렇게 이상한 일들에 시달리는 와중에, 갑자기 저런 인물이 찾아왔으니 그의 기분이 어땠겠는가.
“안녕하세요, 협회장님! 유선상이 아니라 실제로 뵙는 건 오래간만이네요.”
어느 날.
한국마탑의 길드장인 서에스더는 돌연 고병도와 면담을 하고 싶다며 협회에 요청해 왔다.
“하하, 그래요. 우리 S급 헌터님이 오신다는데 아무렴 내가 당연히 시간을 빼야지요.”
물론 협회장은 그런 상대를 능숙히 응대했다.
방금 말한 대로 에스더의 각성치는 S등급이라, 여타 헌터들처럼 편하게 하대할 수는 없었으니까.
고병도 협회장은 맞은편의 자리를 가리키고 상석에 풀썩 앉았다.
“흠, 시간이라.”
하지만 그 직후, 에스더가 소파에 앉자마자 꺼낸 한 마디란.
“그런 거 말고, 사실 저는 회장님께 슬슬 자리나 빼달라고 하려고 여길 온 거였는데.”
“뭐, 뭐라고요?”
“어찌 된 게 아직 아무것도 모르시나 봐요.”
나른한 인상의 여자는 파문이 없는 물가 같은 얼굴로 이내 말했다.
“요즘 들어서 나오고 있는 협회 관련 보도요. 그거 제 쪽에서 풀고 있는 거였거든요.”
어떻게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제 입으로 당신의 뼈를 할퀴었노라 밝힐 수가 있을까.
에스더의 말투는 그 후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지부에서 일어난 마정석 평가 조작. 이건 분명 댁도 써먹고 있는 방법이 아니냐.
본부의 감정사와 손잡고 멋모르는 헌터들을 등쳐서 그 차액을 비자금으로 조성하고 있는 걸 누가 모르는 줄 알았느냐.
‘뭐야? 그, 그걸 저 헌터가 어떻게…….’
이건 예상하지 못한 건데?
여태 여유로웠던 협회장의 시선이 일순 흔들린다.
하지만 이는 상대의 각성 속성을 생각해 보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짝꿍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서에스더는 태생적으로 앙심을 잊지 못하는 존재였으니.
“아니, 잠시만요. 에스더 헌터. 내 뒷조사 따위를 당신이 대체 왜 해둔 겁니까? 예?”
사실 에스더는 3년 전의 취임식장에서부터 저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전 대의 협회장. 즉, 이 기관의 첫 수장을 맡았던 정치인은 작금의 협회 시스템 전반을 세운 장본인인 만큼 맡은 소임에 성실했고.
그렇게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 어느 날 책임자로서 재난 참사 현장에 방문했다가, 그만 숨어 있던 마물에 물려 숨지는 사고가 벌어졌으니.
에스더는 전대 기관장의 허망한 죽음에 나름 인간다운 슬픔을 느끼고 있었는데.
-나는 윤 협회장 그 고지식한 여자랑은 달라요. 융통성이 있으니까. 우리 앞으로 참 잘 지내봅시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한국마탑 길드장님.
그렇기에 에스더는 현재 마주 보고 있는 인물을 싫어하게 된 것이다.
전임자의 비참한 죽음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모두가 그 자리에 오르길 꺼렸을 때.
이때다 싶어 권력을 탐한 고병도가 감히 취임식장에서 부정한 공조를 입에 담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협회의 회장으로서 한국마탑 길드의 여러 가지 뒤를 봐줄 테니, 당신도 나를 모쪼록 잘 대해달라나 뭐라나.
하지만 에스더는 저주술사 치고는 사회성이 크게 떨어지지 않았기에 이내 모든 걸 감내했다.
‘그래도 일은 평범하게 해냈으니까.’
고병도가 횡령하는 액수는 솔직히 귀엽다고 봐도 될 수준이고.
가끔 업무 시간에 골프를 치러 나간다는 게 단점이긴 하지만, 그래도 상대는 나름 기관의 수장으로서 중심은 잘 잡았었다.
가고시마 레이드 같은 때에는 S급 헌터를 끝내 보내지 못하더라도 외교적인 문제가 되지 않게 조율도 했다니. 저 쥐새끼가 곳간을 파먹어도 지금까지는 문제 삼지 않았거늘.
“헌터 협회의 장이라는 인간이 정작 그 헌터를 등졌는데, 상식적으로 그 자리를 무사히 유지할 수가 있을까요?”
에스더가 이런 언급을 하자 고병도는 어렵지 않게 진상을 파악했다.
생각해 보면 미필연한 악성 사건 때에도 그들의 친분은 언뜻 드러난 바가 있었으니 말이다.
“혹시 김기려 그 친구가 당신에게도 헛소문을 퍼트리덥니까?”
김기려가 박사의 결백을 믿고 최종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데에는 분명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의 각성 능력이 사실은 심문에 유리한 속성이었다든지.
하지만 정신 계열의 스킬 따위는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개인의 힘이지 않던가?
“이보세요, 에스더 양. 놈한테 뭘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오해요. 나도 정말 억울해 미칠 지경이라고요.”
헌터 협회의 현 회장은 애절한 호소로 상황을 모면해 보려 했다.
김기려가 어떤 스킬을 가졌든 간에 에스더가 그것을 믿지 못하게 만들면 끝이었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아서 방금 영국에 [유스티티아]의 대여 신청을 넣고 오는 길이랍니다. 그것도 무려 담보로 에픽급의 아이템을 2정이나 인질 잡혀서요.”
그런데 설마, 상대방이 이렇게 나와버릴 줄은.
“그러니 지금부터는 최대한 신중히 주장을 펼쳐주셨으면 하는데요.”
“….”
“이런, 회장님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기려 씨가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네요? 사실 여기에 오기 전까진 저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긴 했었어요.”
그때였다.
고병도는 에스더의 말을 끊고 급하게 끼어들었다.
“잠깐! 일단 내 말 좀 들어보시오. 나라고 어디 귀한 자국민을 향해 그런 짓을 하고 싶었겠습니까?”
“…….”
“자, 김기려가 뭐라고 속살거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도 다 사정이 있었어요. 설명할게요.”
여자의 얼굴이 순간 싸늘해졌다는 것도 모르고 말을 잇는 고병도.
“이게 사안이 사안인지라. 나는 그 사기꾼 자식이 이 나라에 해를 끼칠까 걱정돼서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뿐입니다.”
“사기꾼?”
“놀라지 말고 내 말을 잘 들으세요. 놈은… 진짜 S급이 아니라고요!”
그런데 어째서일까.
분명히 상대의 마음을 돌릴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고 생각했거늘.
“김기려가, S급이 아니다?”
하하하하!
마탑의 길드장은 상대방의 동기를 듣자마자 아래턱이 드러날 정도로 고개를 젖혀 웃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