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worldly Illusion Hunter RAW novel - Chapter 57
55화. 지친 마음 (3)
정하성의 악몽은 언제나 지각으로 시작된다.
그날도 그랬다.
늦잠을 자서 우연히 등교를 하지 못한 날.
던전 쇼크가 일어나 모교의 친구들이 전부 죽는 비극이 벌어졌으니까.
하성은 가끔 생각했다.
만약 그때 내가 학교에 갔더라면 모두를 구할 수 있었을까?
각성 현상은 보통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일어나고는 했다. 자신도 그렇게 각성한 경우였고 말이다.
그러니 아마, 그날 늦잠을 자지 않았더라면….
친구들과 함께 몬스터에 노출되어 보다 빠르게 각성했을 수도 있는데.
“…….”
하성은 아직도 종종 학창 시절 친구들의 꿈을 꿨다.
그럴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아쉬움이 들곤 했고.
과거의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사실 이 몸뚱어리에는 S급 헌터가 될 잠재력이. 요컨대 친구들을 지켜낼 능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자기 미래를 알겠나.
인류의 각성 확률은 예나 지금이나 극히 낮았다.
그래서 정하성도 설마 자신이 그 희소한 각성자가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고.
그는 던전 쇼크 이후로 한동안 안전을 중시하며 살았다.
정부의 재난 알림에 귀 기울이며, 대피 연습은 철저히.
나름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것도 결국, 몇 년 전에 만난 크라켄에 의해 끝났지만.
정하성은 어느 날 각성했다.
무려 한국의 첫 S급으로.
각성 직후에는 그야말로 정신이 없었다.
뉴스에 대서특필되고, TV에서만 보던 청와대의 높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러다 어영부영 헌터가 됐는데.
처음에는 갑작스럽게 주어진 감투에 부담감이 몰려왔지만, 막상 일을 해보니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각성치가 워낙 높아서 그런가. 사냥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았던데다, 마수를 잡으면 잡을수록 모두가 자신에게 고마워했으니까.
“아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진짜 헌터님 덕분에 살았어요!”
자부심? 자신감?
그런 게 생겼던 것 같다. 한때는.
하지만 어느 날.
그 사건이 터졌다.
“와~ 송로버섯 냄새.”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정하성은 한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다.
20대 중반에 억대의 돈을 만지게 됐는데 이걸 썩혀서 뭐 하겠는가.
그는 간만에 어머니와 함께 외식을 나왔고, 방금 막 한 접시에 15만 원 하는 파스타를 주문한 참이었다.
-띠리리리리리.
그런데, 이제야 음식을 한술 뜨나 싶은 그 순간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협회에서 연락이 왔으면 이유는 대개 한 가지.
“아, 게이트요? 급은? 아아. B 정도.”
블루 게이트 처리 의뢰가 들어왔다.
발견이 늦어서 던전 브레이크가 임박한 게이트가 하나 있으니 닫아달라는 요청이었는데.
“네.”
이 당시에는 아직 던전 브레이크 조건이 제대로 소명되지 않은 상태였다.
많은 과학자는 ‘시간’이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밀도’가 더 중요했지.
“하루 정도면 터져요? 알겠습니다. 바로 갈게요.”
진실을 모르는 협회와 정하성은 던전 브레이크 시기를 착각하게 됐다. 어찌 보면 이것이 시발점이었다.
‘밥만 먹고 가자.’
정하성은 접시에 담긴 파스타를 먹어치웠다.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 후식은 뭐로 시킬…….”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다시 전화가 울렸다.
[협회장님☎]정하성은 별생각 없이 두 번째 통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어진 대화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게이트가? 지금요?”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다. 불과 그 몇 분 만에.
황급히 도착한 현장은 예상대로 처참했다.
무너진 건물, 사람들의 비명, 공기에 섞인 철 냄새.
그러나 무엇보다도 끔찍했던 건. 바로 거리에 발을 딛자마자 본 저 광경이었다.
“아아악!”
순간, 검은 괴수가 사람을 물었다.
정하성은 이를 발견하고 곧장 달려갔다. 섣불리 스킬을 썼다간 시민마저 불꽃에 휘말리고 말기에.
“케엥!”
그는 놀라운 속도로 접근해, 괴물의 주둥이를 붙잡았다.
이윽고 깔끔한 인상의 청년이 맨손으로 몬스터를 찢어발긴다는 장관이 벌어졌지만.
터져 나오는 것은 환호가 아닌 비명이었다.
“아아아악!”
헉.
뒤를 돌아본 정하성은 순간적으로 숨을 삼켰다.
자신이 구한 시민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고 있다.
괴수에게 물렸던 상처 때문에 아파서 저러는 거겠지. 하지만 치료를 하기에는 이미…….
“끄으으…….”
“괘, 괜찮으세요? 잠깐, 분명 제가 회복약이.”
정하성은 손을 벌벌 떨면서도 애써 포션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비싼 약을 시민의 배에 콸콸 부었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흑, 흑…….”
이런 포션으로는. 몸이 반으로 끊어진 인체를 고칠 수 없었다.
결국 시민은 몇 초 버티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그래. 고작 몇 초 사이에.
“…….”
정하성은 스멀스멀 커지는 피 웅덩이를 보고 행동을 멈췄다.
눈앞에서 누군가 죽었다. 방금 막.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단 몇 초만 일렀더라면.
아마 이 사람은 살았을까……?
“어.”
식은땀이 왈칵 났다.
다행히 뒤따라온 협회 직원들에 의해 쇼크 상태에서는 벗어났지만, 그게 뭐 어쨌단 걸까.
부랴부랴 던전 브레이크를 수습한 후.
정하성은 피해자들의 합동 장례식에서 이런 소식을 듣게 됐다.
자신의 눈앞에서 불과 몇 초 차로 죽은 그 남자가…….
만삭의 아내가 먹고 싶어 하던 붕어빵을 사려고 잠시 거리에 나온 인물이었다는 것을.
‘내가.’
이름 모를 여자가 부른 배를 움켜쥐고 영정을 향해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왠지 숨이 막혔다.
‘내가 미쳤지. 미쳤다고 그때 밥을 먹어서. 전화를 받자마자 일어났었으면 지금쯤.’
단 몇 초.
그 아쉬운 틈새가 비수로 꽂혔다.
돌이켜보면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 것도 이맘때부터였다.
그래도 뭐. 적어도 악몽의 마지막만은 시간과 관련이 없었지.
“분명 대피령이 떨어졌는데.”
이 장면이 꿈에 가장 자주 나온다는 게 문제지만.
“왜 건물에 사람이…….”
S급 각성자의 힘은 흔히 파도에 비유된다.
아무리 깎고 정제해도 예기치 않은 잔물결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 S급이 던전 브레이크 수습에 나설 때에는, 철저히 시민을 대피시키거늘.
“대체 왜.”
그 일반인은 자신이 이런 일로 죽을 거라는 걸 알았을까?
고작 지갑 하나 때문에 피난 경보를 무시하다니.
명품도 아니었잖아. 제발 정부 사람들이 말을 하면 좀 들어.
제발 좀…….
“악!”
너른 병실에 젊은 남성의 비명이 울렸다.
“……헉.”
흉몽에서 깬 정하성은 가쁜 호흡을 내뱉었다.
몸이 정말 좋진 않나 보다. 그사이 또 잠깐 잠들었나.
“부재중 통화가…….”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딱히 추가로 온 연락은 없었다.
그럼에도 심장의 두근거림은 멈추질 않았다.
요즘 들어 매일 그랬다.
‘차라리 게이트 안에 들어가 있는 게 편해.’
던전 도는 기계. 그거 좋지.
적어도 일을 하는 동안만은 정말 기계처럼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
이 별명이 생긴 뒤에는 신기하게도 마음도 점차 무뎌졌다.
그래서 이렇게 격한 분노를 느껴본 게 오래간만인데….
‘오전 9시.’
정하성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 후에는 바로 외투를 챙겨입었다.
***
서울 모 실내체육관.
던전 테러 이재민 구호소.
‘흥미로워!’
결론만 말하겠다.
김기려의 집이 무너졌다. 다는 아니고 반쯤.
어쨌든 언제 추가 붕괴가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니 졸지에 부랑배 신세가 됐는데 말이야.
다행히 나라에서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임시 숙소를 마련해줬다.
‘이게 텐트라는 거구나.’
어디 보자.
집주인 말로는, 각성한 건설업자를 불러온다 해도 복구에 시간이 꽤 든다고 했으니까….
‘한동안 마법 연구는 글렀군.’
풀썩.
나는 텐트 안에 드러누웠다.
결정했다. 당분간은 지구의 정보 수집에 무게를 두자.
‘어차피 난 외계인이라 궁금한 일은 넘친다고. 항상 시간이 부족할 뿐이지.’
그런데 그때.
갑자기 스마트폰 화면이 전환됐다. 상단에는 익숙한 이름이 흰 글씨로 떠올랐다.
“어.”
선우연 헌터의 연락이다…….
이런 이른 시간에? 드문데.
“여보세요?”
-김기려 헌터님,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통화를 받자마자 든 생각은 한 가지였다.
“드디어 공원 습격 범인이 잡혔나요?”
나는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되돌아온 선우연의 말투는 생기가 없었다.
-아뇨. 그건 경찰이 따로 연락 줄걸요.
“예?”
-아무튼, 당신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예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갑자기 무슨 말씀을…….”
-정하성이요. 정하성! 그 사람, 아침 댓바람부터 협회에 찾아와서 난리를 피우고 있어요. 당신 집 주소를 알아내려던 걸 방금 간신히 말렸다고요.
이런.
-완전히 눈이 돌아갔던데.
“음.”
-게다가 헌터님 탓에 저도 한 소리 들었습니다. 갑자기 재검사를 물고 늘어지면서 노발대발…….
올 것이 왔군.
“나중에 차차 설명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정하성이 지금 협회에 있다는 거죠?”
-아, 네.
“알았어요.”
충분히 상상한 일이다.
상대를 기절시켰을 때부터 각오는 했으니 말이다.
‘그 인간, 예전에 줬던 내 번호로 연락하지 않는 걸 보니…. 직접 찾아와서 패고 싶어 하는 건가?’
나는 곧바로 나갈 채비를 했다.
현재의 정하성은 불씨 그 자체니까.
될수록 빨리 응어리를 풀어야 했다.
“하아, 처세술에는 자신 없는데…….”
그나저나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전생에선 대부분의 문제를 힘으로 해결하고는 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인제 와서 설득이란 걸 잘할 수 있을까?
‘지구인들은 싹싹 빌 때 보통 어떻게 하더라.’
그래.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일단 정하성을 보자마자 머리부터 박자!
나는 굳은 다짐을 마치고 텐트를 나섰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오전 10시. 헌터 협회 별관.
‘언제 오는 거야!’
선우연은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출근하자마자 랭킹 1위의 꾸중을 듣질 않나. 심지어 하성의 뚜껑을 열리게 한 게 그 F급이라고?
‘상황이 심상치 않아.’
머리가 지끈거린다.
일단 당사자가 사태를 수습하러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는 하지만.
“으음.”
선우연은 흘깃 시선을 옮겨 후문을 살폈다. 그곳에선 랭킹 1위가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저게 과연 수습될는지?’
큰 사고라도 터질까 봐 함부로 자리를 뜰 수도 없는 상황.
그때였다.
별관 인근 골목에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이어서 뒷문에서는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내렸다.
“기려 씨!”
선우연은 상대에게 곧장 달려갔다. 그리고 작게 귓속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요?”
그러자 금발의 헌터는 묵례를 멈추고, 덤덤히 말했다.
“사실 어제 정하성을 강제로 기절시켰거든요.”
“당신이요?”
“대충 그렇게 됐어요.”
별일 아니라는 양 건조한 읊조림.
하지만 선우연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S급 헌터, 정하성을 기절시켰다니…….
문득 과거의 기사가 떠오른다.
“또요?!”
그러고 보니 이 양반 초범이 아니잖아!
선우연은 자신도 모르게 높은 소리를 냈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각성자는 권태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훑을 뿐. 침묵을 지켰으니까.
‘아.’
이윽고 김기려는 S급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선우연은 점점 가까워지는 그들을 주시하며 생각했다.
자신이 그동안 본 바로는, 두 남자 모두 성격이 무던한 편이었으니 말이다.
아마 지금부터 서로 진중히 대화를 나누지 않을까. 잠깐은 그런 희망을 품었다.
-휘이익!
그러나 이 직후.
별관의 좁은 뒤뜰에 광풍이 불어닥쳤다.
“윽!”
정하성의 공격이었다.
그는 김기려가 눈앞에 나타나자마자 그대로 참격을 날렸다.
선우연은 허공에 남은 붉은 궤적을 보며 섬뜩함을 느꼈다. 검을 뽑는 걸 보지 못했는데, 도대체 어느 틈에?
하지만 더욱 놀라운 건 바로 상대의 반응이었다.
B급 헌터가 인지조차 못한 급습을…….
김기려는 빈틈없이 대응했다.
그 짧은 순간에 자세를 낮췄다니!
“그걸 피했다고……?”
무릎을 반쯤 꿇고, 머리를 숙인 모습.
김기려는 그 상태로 잠깐 멈춰 있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실력 확인차 힘을 빼긴 했지만 설마 스치지도 못할 줄은. 당신 대체 뭡니까?”
이만한 공격이 있었는데도 동요하는 기색은 전혀 없다.
김기려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정하성을 주시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