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104
103화
-재앙이 된 이유(1)
쿠당탕!
자신의 호위병이 다리가 잘려서 돌아왔다.
거기에 두 번째로 진입한 병사들도 전멸했다.
그 사실을 확인한 파이오스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막사 안의 집기를 걷어찼다.
“물의 격류를 일으키고 안개를 일으키며, 신물인 도끼를 휘두르며 병사들의 목을 날려대는 인간이라니!”
헬레 역시 믿어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번 확인해 보려 해도 그 소식을 전달한 호위병은 이미 숨을 거둔 다음이었다.
잘린 다리에서 출혈이 너무 심해, 던전 게이트에서 내던져질 때부터 이미 목숨이 위험한 상태였다.
그래도 본인은 불명예가 아니라 대등한 정전 협상의 사절로 죽을 수 있어서 만족한 듯 눈을 감았다.
이현이 봤으면 어이가 없어 웃음밖에 안 나왔겠지만, 파이오스는 그의 장례를 전사답게 정중하게 치르도록 명령했다.
“정전 협상이라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헬레는 죽은 호위병이 전한 내용을 다시 한번 파이오스에게 전했다.
“분명 전에도 정전 협상을 제안했었지?”
“……그렇습니다.”
헬레가 주먹을 꽉 쥐었다.
디르케가 그 소식을 전달했었다.
헬레와 펠롭스도 말도 안 된다고 여겼고, 이스메이아의 지도자인 왕 역시 그 협상을 거부했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군. 던전의 몬스터와 협상을 하라고?”
파이오스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한번 막사를 뒤집어 놓았다.
정전 협상 자체가 굴욕이었다.
위대한 도시 이스메이아의 병력은 300명이 전부가 아니었다.
가장 위급한 전시에는 천 명이 넘는 병사가 동원될 수 있었다.
그것도 모두 중장보병인 호플리테스로만.
“이런 던전 따위가 무서워 정전 협상을 한다면 주변국의 웃음거리가 될 거야!”
파이오스가 이를 갈며 분을 터뜨렸다.
그러나 헬레는 자신의 동생을 떠올렸다.
‘분명 던전의 우두머리가 보통이 아니라고 했었어.’
그리고 그 말은 이번 전투의 참패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처음에는 리코스에 눈이 멀어 막무가내로 우기는 줄 알았었다.
하지만 눈앞의 결과를 놓고 보니 동생의 말이 맞았었다.
헬레는 파이오스가 분을 삭이는 동안 차분히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정전 협상을 하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헬레의 말에 뜻밖이라는 듯 파이오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저놈들이랑 협상하자고?”
“네.”
헬레가 고개를 끄덕이곤 자신의 의견을 꺼냈다.
“저번의 협상 제안에서 이 던전의 우두머리는 먼저 공격해오지 않는 이상 자신들도 저희를 공격하지 않겠다 했었습니다.”
“그게 말이 돼? 던전을 내버려 두면 터지는 게 당연한 진리야.”
“보통은 그렇지요.”
하지만 이 던전은 보통과는 궤를 달리했다.
비정상적으로 강력한 몬스터들부터 던전의 우두머리가 지능을 가지고 협상을 제안한 것까지.
“만약 그가 정말 약속을 지킨다면 우리에게 해가 될 요소는 없습니다.”
던전을 공략하는 이유는 자원을 채취하기 위함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던전 브레이크에 의한 피해를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던전의 몬스터 스스로가 브레이크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던전을 공략할 이유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최하급 던전의 자원 따위 없어도 그만이구요.”
“그건 그렇지. 이미 이 원정에 든 자원이 던전에서 얻을 자원보다 많이 들었어. 꼬리가 개를 흔드는 꼴이군.”
주객이 전도됐다며 파이오스가 씁쓸히 웃었다.
원정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이 던전은 적자였다.
“같은 선상에서 더 이상의 병사들을 이 던전에 희생시킬 수도 없습니다.”
최하급 던전에 이미 150명이 넘는 정규 병사와 200명의 병사가 희생되었다.
더군다나 싸울 때마다 희생이 늘어나고 있었다.
상처뿐인 전쟁이었다.
“돌아온 그 호위병이 카타스트로페, 재앙이라고 그를 칭했지요.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재앙이라…….”
“재앙은 피해 가는 겁니다. 굳이 맞설 이유는 없습니다.”
헬레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파이오스는 턱 뿔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하지만 걸리는 점 역시 있었다.
“시민들의 반발이 클 거야, 헬레.”
파이오스가 침중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을 시민들은 당장 들고일어날 게 뻔했다.
“곧 판가이온의 제전이 열립니다.”
“……그렇군. 벌써 그런 시기지.”
모든 사우레노르들이 판가이온에 있는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판가이온의 제전 기간에는 일체의 전투 행위가 금지됐다.
축제이자 엄숙한 제례의 기간이 지나면 사우레노르들의 기억 속에서 이 사태는 잊힐 게 분명했다.
“도시의 자존심과 실리. 어느 게 중요한지는 뻔하군.”
시민들의 반발이 크겠지만, 파이오스는 스트라테고스로써 이스메이아의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해야 했다.
“헬레, 네 의견을 받아들이지. 협상을 준비하자.”
파이오스와 헬레는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던전의 우두머리는 최대한 빨리 들어올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꾸물대다간 협상 자체가 날아갈 수도 있었다.
준비가 끝나자 파이오스는 이틀 새에 초췌해진 얼굴로 말했다.
“던전 안에는 너와 나만 들어간다.”
“장군님! 너무 위험합니다. 하다못해 호위병들이라도.”
헬레의 만류에도 파이오스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300명이 들어가도 살아나오지 못했던 던전이었다.
10명의 호위병 함께 들어간다고 안전이 보장될만한 곳이 아니었다.
헬레는 그가 초대받지도 않은 하데스의 저택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장군님이 목숨을 거시는 데 혼자 살겠다고 남는 병사들은 없을 겁니다. 저를 포함해서.”
단호한 그녀의 모습에 파이오스는 화를 가라앉히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에게 살기 위해 남는 것은 비겁한 일이겠지. 하지만 그럴 걱정은 없다. 그들은 해주어야 할 일이 있어서 들어갈 수 없는 거니까.”
파이오스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아마지 두루마리에 급히 서신을 쓴 뒤, 막사 밖의 호위병을 불렀다.
“너희는 지금부터 이스메이아로 귀환한다. 이 서신과 함께 정보를 상부에 전달하고 다음 전투를 준비하라 일러라.”
호위병은 파이오스의 서신을 받아 소중히 품에 집어넣었다.
“장군님?”
그런 그의 행동에 당황한 헬레가 이유를 묻자 파이오스가 적의에 타오르는 눈으로 던전 게이트를 노려보았다.
“그쪽의 제안대로 전쟁은 중단한다. 하지만 복수를 중단한다고는 안 했어.”
* * *
“명심해라. 지금은 전쟁 상황이다. 빠르고 확실하게 귀환해야 한다.”
고개를 끄덕인 호위병이 재빨리 막사 밖으로 나갔다.
한밤중이라 체온이 떨어진 병사들이었지만 그들은 서둘러 채비를 하고 귀환할 것이다.
횃불을 들고 뜨겁게 데운 물을 마셔가면서 억지로 몸을 데워서 가면 해가 뜨기 전에는 도시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파이오스는 호위병이 나가자마자 헬레를 향해 말했다.
“정전 협상이라지만 함정일 수도 있고, 협상이 결렬될 수도 있다. 병사들은 돌아가서 그 뒤를 대비해야 해.”
“대비라고 하신다면…….”
“스트라테고스의 권한으로 왕께 국가적 비상사태임을 알렸다. 그리고 승격의 관문을 넘은 분들을 소집해달라는 요청을 함께 써서 보냈지.”
승격의 관문을 넘은 자.
이른바 ‘승격자’라 불리는 이들은 격을 쌓고 닦아 사우레노르에서 승격한 이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승격하면서 맹독을 신체에 품고 다양한 비술(秘術)을 사용하는 에키드나.
온몸이 금속처럼 단단해지고 강인한 육체의 힘을 얻게 되는 오피디온.
이들 승격자의 공통점은 일반 사우레노르들의 두 배나 되는 수명을 산다는 점과 일신의 무력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는 점이었다.
이스메이아의 왕과 여왕은 모두 승격자였고, 5대 가문에도 극히 소수지만 몇 명의 승격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모인다면 던전의 몬스터가 얼마나 강력하다 하더라도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분들이 오실지도 의문입니다만…….”
하지만 승격자들은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 은둔하며 새로 얻은 자신의 삶을 즐기며 사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헬레는 그들이 소집에도 불구하고 오지 않을 것을 걱정했다.
“감히 그분들에 비하면 내 위치나 식견이 많이 모자라지만, 그래도 스트라테고스인 나의 보고를 무시하진 않으실 거다.”
이스메이아의 몇 안 되는 장군이자 최고 군사 지도자 중 한 명인 파이오스였지만 승격자들 앞에선 그저 범인에 불과했다.
“내가 이 자리를 걸고 부탁드리면 적어도 한 분은 움직여주시겠지.”
파이오스는 이스메이아의 스트라테고스 자리마저 포기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군대가 움직이지 않으면 전쟁이 아니지. 승격자들의 원정대가 복수를 대신할 거다.”
던전 하나에, 그것도 최하급 던전에 승격자가 움직이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파이오스는 사태의 심각성이 크다고 판단했고 자신의 직위를 걸어서라도 승격자를 움직이는 것을 선택했다.
과연 이스메이아의 스트라테고스다운 판단력과 실행력이었다.
‘그가 던전에서 목숨을 잃는 것은 이스메이아의 큰 손실이야.’
설령 승격자들에 비하면 작은 존재라 하더라도 그는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헬레는 주먹을 꽉 쥐었다.
도시뿐만 아니라 그녀에게도 파이오스는 잃어선 안 될 존재였다.
그래서 그녀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럼 장군님 대신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헬레!”
그녀의 말에 파이오스가 대경실색하며 외쳤다.
하지만 헬레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저 몬스터들이 스트라테고스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 있을 리…….”
“날 겁쟁이로 만들 셈이냐!”
용기 없는 군인, 사랑하는 자를 대신 죽게 만드는 자.
모두 파이오스에게는 겁쟁이였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헬레는 그걸 알았다.
“내가 들어간다. 함부로 나를 대신하려 하는 행위는 하극상으로 알겠어, 행정관.”
헬레는 자신의 설득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알겠습니다, 장군님. 하지만 마지막까지 제가 보필하겠습니다.”
파이오스는 각오를 굳힌 군인의 얼굴이 되어있는 헬레를 보니 설득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그녀를 돌려보내려 했던 파이오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너를 죽음으로 몰고 홀로 도망칠 리가 없다는 걸 알잖니.”
“저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아시잖아요, 오라버니.”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던전에 들어가기 전,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 * *
“우웨엑!”
이현이 속을 게워냈다.
티타니아가 얼른 물병을 가져와서 건넸지만, 입을 헹굴 기력도 없는 이현이었다.
“주인,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네 동족이야. 그래도 너에게 이런 일을 시킬 수는 없지.”
리코스가 도우려 했지만, 이현은 맥없이 손을 흔들어 거절했다.
이현은 곧 방문할 적의 대표들을 환영하기 위한 협상장을 만드는 중이었다.
단지, 그 협상장을 장식하는 것이 사우레노르의 피와 살점이라는 게 특이할 뿐이었다.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으신 겁니까?”
리코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현을 만류했다.
동족의 사체를 유린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라 격의 보호를 받는 데도 힘겨워하는 이현을 걱정해서였다.
이현은 겨우 물로 입을 헹궈낸 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우리 쪽 인간의 역사에는 ‘꿰뚫는 자’라는 이명으로 불렸던 블라드 3세라는 자가 있었어.”
이현은 그의 사례를 참고해 겁주기 용 사체 장식을 만들어내기로 했다.
다시는 던전을 쳐들어오지 못하게 경고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