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155
154화
-알 구출대(2)
“근처에 물을 쓸 수 있는 곳이 있어?”
이현의 물음에 이아코스가 실레노스의 집 뒤편의 우물을 가르쳐주었다.
이현은 [통로의 뿔]을 들고 우물가로 향했다.
“분명 발동하는 데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했지.”
이현은 사념 에너지 결정을 꺼내어 잔처럼 깊숙이 파인 뿔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결정은 얼음이 녹는 것처럼 작게 갈라지며 순식간에 녹아 들어갔다.
“제대로 되는 거 같은데?”
이현은 연이어서 결정들을 집어넣었고, 열 개가 조금 넘는 결정이 녹아서 뿔 안에 가득 찼다.
그리고 뿔을 가득 채운 사념 에너지 액체가 찰랑거리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걸 게이트를 설치할 물 위로 부으라고 했었지.”
이현은 네레우스가 가르쳐준 설명대로 우물 안으로 사념 에너지 액체를 쏟아부었다.
‘과연 연결이 될까?’
같은 행성 안에서라면 몰라도 지구와 이곳은 전혀 다른 행성이었다.
머나먼 우주 공간과 던전이라는 벽을 뚫고 게이트를 여는 것이 가능할까?
‘지금은 믿는 수밖에.’
이현은 워터게이트가 열릴 던전의 계곡을 간절히 떠올리며 뿔 안의 액체를 모두 쏟아부었다.
그러자 은색 기름 막 같은 액체가 우물물 위를 덮더니 크게 빛을 뿜어내었다.
“윽!”
갑자기 눈을 찌르는 빛에 이현이 당황하며 눈을 가리려던 순간이었다.
“어?”
우물물 위로 뜬 은막은 어느새 어딘가를 비추는 화면이 되어 있었다.
계곡이 흐르고 목책이 세워진 낯익은 장소.
이현의 던전이었다.
“제대로 연결된 건가?”
이현은 주변에 굴러다니는 돌 하나를 집어 우물 안으로 던져넣었다.
당연히 들려야 할 첨벙 소리는 나지 않고 돌멩이는 그대로 은막을 통과해 던전으로 날아가 버렸다.
“아야!”
그리고 하필 운도 없게 지나가는 누군가의 머리에 직격 했다.
“누구야! 감히 이 던전의 지배자 티타니아 님께 돌을 던진 게!!”
갑자기 던전에 알 수 없는 게이트가 생기자 서둘러 달려온 티타니아는 던전에 생긴 이상 현상을 확인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날아온 돌에 머리를 얻어맞다니?
티타니아가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분통을 터뜨렸다.
“누군지 몰라도 걸리기만 해 봐! 아주 사지를 분질러 요절을 내줄 테다!”
“티타니아?”
“그래! 이 몸이 바로 이 던전의 일인자 티타니아 님이시다!”
씩씩대며 돌이 날아온 방향을 두리번거리던 티타니아의 눈에 잔잔한 계곡물 위에 뜬 은막이 눈에 들어왔다.
“오냐! 거기로구나. 딱 기다려!”
하지만 당장이라도 몸통 박치기를 할 기세로 날아온 티타니아가 은막 안에서 본 범인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주, 주인님? 주인님이 왜 거기서 나와요?”
탐험을 하겠다며 던전을 떠났던 사람이 왜 계곡 한가운데서 보이는 걸까?
“오, 티타니아, 꽤 잘 지내나 보다? 이젠 막 일인자도 되시고 팔자 좋은가 봐?”
“마, 말이 그렇다는 거죠. 저는 주인님의 도우미인걸요. 헤헤헤.”
이현은 금세 태도를 바꾸는 티타니아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너 당장 이쪽으로 건너와 봐.”
반가운 마음에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지금은 워터게이트가 제 역할을 하는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쪽으로요?”
의아해하는 티타니아에게 이현은 간략하게 통로의 뿔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아니, 이 양반이 또 어디서 그런 귀한 걸 주워와선…….”
티타니아는 기막혀하면서도 순순히 이현의 말을 따라 게이트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던전 도우미의 던전 이탈이 감지되었습니다.] [24시간 동안 던전으로 복귀하지 않을 경우, 던전 도우미의 파견이 취소됩니다.]워터게이트로 잠시나마 던전과 연결이 되어서 그런 걸까, 이현에게 오랜만에 던전의 알림 방송이 들려왔다.
“우왁! 진짜 던전 밖이었잖아? 근데 저 이거 근무지 무단이탈인데…….”
티타니아가 우물 밖으로 튀어나와 주변을 확인하곤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현은 씨익 웃을 뿐이었다.
“24시간이면 충분하네.”
병력만 옮길 생각이었는데, 티타니아도 나올 수 있다면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은 더욱 많아진다.
이현은 티타니아에게 작전을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그 왕궁에 있는 우물에서 다시 한번 이 워터게이트를 열겠다는 거죠?”
“그래. 그때까지 모든 사우레노르 구울 부대가 움직일 수 있게 준비해놔.”
“알겠어요. 금방 준비해놓을게요.”
[워터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한 이현은 다시 실레노스의 집으로 돌아왔다.그리고 그 사실을 일행에게 설명했다.
“나진 씨는 여기 남아 디르케를 지켜주세요.”
“알겠어요.”
나진도 함께 싸우고 싶어 했지만, 치료 중인 디르케를 지킬 사람도 필요했다.
“리코스는 내가 말한대로 준비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보스.”
모든 준비는 끝났다.
“그럼 알을 되찾으러 가보자고.”
* * *
이현은 작전대로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우물을 찾아 물을 마시는 척하면서 워터게이트를 열었다.
“어떻게 됐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게이트에서 티타니아가 빠져나왔다.
“준비 완료예요!”
“좋았어. 정확히 10분 후에 모두 나오라고 해둬.”
이현은 명령을 마친 티타니아를 품에 숨긴 채로 돌아왔다.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뒤에 돌아온 자신을 미심쩍게 보는 수비병을 상대로 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 보는 형태의 우물이라서. 물을 마시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수비병은 이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이현이 무서웠던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다.”
세멜레가 머무는 곳은 우물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건물이었다.
“나, 나는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럼 이만…….”
“됐으니 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수비병은 제일 안쪽에 있는 방에 세멜레가 있다고 하곤 서둘러 떠나 버렸다.
“현이 어지간히도 무서웠나 봐.”
이아코스가 헐레벌떡 사라지는 수비병을 보고 이현에게 귓속말을 해왔다.
“아니면 수비 병력을 모으러 가는 걸 수도 있지.”
이현은 차가운 눈으로 수비병이 떠난 곳을 보았지만, 곧 고개를 돌렸다.
“그런 것보다는 당장 눈앞의 복수를 하러 가자.”
“응.”
이현의 말에 이아코스가 비장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둘은 세멜레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들어와.”
마치 뱀이 속삭이는 듯한 소름 끼치는 목소리.
쾌활한 수다쟁이인 척하던 이노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와 말투였다.
이현은 문 건너편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격의 기운에 놀라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승격에 가까워지면서 더 강해졌습니다. 솔직히 저도 승패를 장담하기 힘들 정도로요.’
리코스의 말을 떠올리며 이현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문고리를 잡았다.
“티타니아, 준비됐어?”
“걱정하지 마세요. 저한테만 맡기라구요.”
“그럼 연다.”
이현이 문을 열자, 그곳엔 한 손으로 알을 쓰다듬고 있는 세멜레가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인간과는 전혀 다른 파충류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요염함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이현이 문을 열고 일부러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들어서는 동안, 티타니아가 눈에 띄지 않게 방 안으로 잠입했다.
“네가 세멜레군.”
“내 경고가 잘못 전달된 걸까? 왜 둘이서 온 거지?”
세멜레가 뒤따라온 이아코스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알을 쓰다듬는 손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이자 이현이 서둘러 대답했다.
“이 아이의 권능이 없으면 난 너와 대화를 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흐음.”
세멜레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아코스를 보았다.
“권능이라니. 내가 그걸 믿어야 해?”
“믿기 싫어도 그게 사실이야. 그게 아니라면 인간인 나와 사우레노르인 네가 이렇게 말이 통할 리가 없지.”
이현의 설명에 세멜레가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에키온 가문의 가주씩이나 되는 사우레노르가 하찮은 인간의 언어를 알 리 없었다.
“그것도 그렇네. 만약 너 혼자 왔으면 큰일 날뻔했겠어.”
세멜레가 손뼉을 짝 치며 키득키득 웃었다.
“원래는 너만 데려가려 했는데, 저 아이도 데려가야겠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승격의 비밀을 알아낼 수도 없으니까.”
세멜레는 혀를 날름거리며 이아코스의 위아래를 슬쩍 훑어보았다.
“예쁘장하게 생긴 게 장식용으로 데리고 다녀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세멜레의 눈빛에 소름이 돋은 이아코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현이 서둘러 이아코스의 앞을 가로막으며 격을 뿜어냈다.
“헛소리하지 말고. 알이나 내놓으시지?”
“어머, 내가 이 알을 순순히 돌려줄 거라고 생각했어?”
세멜레는 쓰다듬고 있던 알을 다시 부화함에 넣고는 문을 닫았다.
그러자 부화함 주변을 에키온 가문의 전사들이 둘러싸고 철통같이 지켰다.
“순진하긴, 이 알은 그냥 미끼야. 이곳에 온 순간, 넌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세멜레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그와 동시에 방 구석구석에서 왕궁 수비병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얌전히 항복해. 손발이 잘려도 말은 할 수 있겠지만, 굳이 피 흘릴 필욘 없잖아?”
완벽하게 포위된 상황.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오히려 이현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글쎄, 피 흘리는 쪽이 누가 될지 모르겠네.”
이현이 손가락을 딱 튀기는 순간이었다.
가문의 전사들이 지키고 있던 부화함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뭐야, 저건?!”
인질인 알이 보관된 부화함이 갑자기 허공으로 떠오르는 걸 본 세멜레가 뾰족한 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이들은 없었다.
가문의 전사들도 왕궁 수비병들도 이해하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막아!”
세멜레의 외침에 전사와 수비병들이 허공으로 손짓을 했지만 부화함은 이미 그들의 손에 닿지 않는 곳까지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유유자적 허공을 가로질러 이아코스의 품 안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세멜레가 뿔을 잔뜩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무슨 마법을 부린 거지?”
“마법은 무슨. 그냥 간편한 도우미 하나만 있으면 되는 일인데. 안 그래, 티타니아?”
그리고 이현의 부름에 몰래 부화함에 빙의되어 있던 던전 도우미, 티타니아가 포로롱 날아오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위기 속에 주인공이 나타나는 법! 변신 마법 도우미 티타니아 등장!”
괴상한 등장 대사와 함께 마법 소녀의 포즈를 취하는 티타니아를 보며 이현이 얼굴을 구겼다.
“야, 그런 것 좀 하지 말라니까.”
“흥!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하, 진짜 너는…….”
이현이 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티타니아는 헤실헤실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세멜레를 비롯한 적들은 그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님페?”
세멜레의 놀란 목소리에 티타니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우레노르들은 꼭 나만 보면 님페라고 하더라. 그런 하등한 정령들이랑 비교되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말이죠.”
이현은 티타니아의 푸념은 한 귀로 흘리곤 이아코스에게 말했다.
“이아코스, 곧장 돌아가.”
“응! 현도 조심해야 해.”
부화함을 소중히 품에 안은 이아코스가 방을 서둘러 빠져나갔다.
그 역시 직접 복수의 현장을 눈에 담고 싶었지만, 이 알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지 않으면 복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 인간 소년을 잡아!”
그제야 알을 완전히 빼앗겼음을 깨달은 세멜레가 서둘러 명령했다.
하지만 방 밖으로 나가는 문은 이현이 한 손에는 도끼, 한 손에는 하르페를 들고 막아선 채였다.
“죄 없는 실레노스를 죽인 죄, 소중한 알을 훔쳐 간 죄, 그리고 감히 내 부하들을 건든 죄. 그 죄를 지금부터 묻겠다.”
이현은 도끼를 들어 세멜레를 가리키며 차갑게 쏘아보았다.
“그러니 딱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