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177
176화
-시련의 길(3)
깡-.
숨 막히는 열기를 뚫고 들려오는 것은 금속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이현은 본능적으로 그 소리가 들리는 곳에 ‘모루의 시련’이라고 불리는 이 시련을 통과할 단서가 있다고 짐작했다.
깡! 깡!
이현의 짐작대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금속음은 커지는 반면, 피부를 익혀버릴 정도로 뜨거웠던 열기는 점차 식고 있었다.
그리고 낭떠러지 길의 끝에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사방이 용암지대였지만, 공터에는 이상하게 열기가 미치지 못했다.
‘분화구 바로 밑이구나.’
분화구에서 들어오는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용암지대의 열기를 식혀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터 한가운데에 금속음의 주인이 있었다.
‘이런.’
이현의 미간이 구겨졌다.
눈앞의 광경은 처참하다는 말로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커다란 넓적 바위 위에 사슬로 묶인 인간 사내의 배는 훤히 열려 내장이 주르륵 흘러나와 있었다.
배의 살가죽은 좌우로 사슬에 꿰어 벌려져 있어 누군가 일부러 그랬음을 짐작게 했다.
거기다 그런 꼴이 된 지 오래됐는지 사내의 머리와 수염은 길게 자라 서로 엉겨 붙어있었다.
깡!
사내는 유일하게 자유로운 한 손으로 돌을 쥐고 자신의 몸을 묶은 사슬을 내려치고 있었다.
“끄으아아아!”
하지만 사슬을 내려칠 때마다 뱃가죽에 꿰인 사슬이 울리면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이었다.
“헉, 헉.”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쉬던 사내는 다시 사슬을 내려치고, 비명을 지르는 것을 반복했다.
참으로 보기 끔찍하고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화상으로 온몸이 화끈거리고 고통스러운 이현이었지만, 눈앞의 사내가 겪는 고통을 보니 자신의 고통은 간지러운 수준으로 느껴졌다.
“괜찮으십니까?”
이현은 저도 모르게 사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막 다시 사슬을 내리치려던 사내의 고개가 힘겹게 이현을 향했다.
“자네는, 누구지……?”
“저는….”
이현은 자신을 소개하려다 잠시 멈칫했다.
자신이 시련의 길을 통과하는 중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저는 지나가는 여행객입니다.”
이현은 일단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로 하고, 대충 둘러대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
“그냥, 가게.”
이현의 물음에 사내는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벌이네.”
“어떤 일을 하셨기에 이런 벌을 받으신 겁니까?”
“자네가 알 것 없네. 하지만 나는 그 일을 후회하지 않아.”
고통으로 몸부림치면서도 사내의 두 눈은 또렷했다.
“내게 다시 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나는 그 일을 할 것이네.”
깡!
“끄아아, 으으윽!”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광경에 이현이 서둘러 달려가 다시 사슬을 내리치려는 사내의 손을 잡았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 겁니다.”
“그냥, 가라고 했잖은가!”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사내가 무서운 힘으로 이현의 손을 떨쳐냈다.
이현이 얼얼한 감각이 남아있는 손을 주무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다 죽어가는 양반 아니었어?’
그렇게 생각한 이현은 곧 다시 고개를 저었다.
‘저 상태에서도 사슬을 끊으려 하는 사람이니, 보통 사람은 아닐 게 분명하다.’
평범한 사람이 배가 갈라져 내장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팔을 움직여 사슬을 끊으려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숨이 조금 끊기긴 해도 말까지 하고 있었다.
“자네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네. 어서 가게.”
사내는 떠나질 않는 이현을 보며 재촉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이현이 아니었다.
‘이 사내의 정체와 사슬이 시련을 통과하는 열쇠일 거다.’
이현은 대충 사내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스 신화, 벌로 사슬에 묶인 남자, 그리고 내장.’
온갖 이야기가 가득한 그리스 신화 속에서도 이렇게 끔찍한 형벌을 받은 이는 드물었다.
최고의 권위를 가진 자에게 반항했다가 그 벌로 영원한 고통을 선사 받은 이.
이현은 확신을 담고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프로메테우스 님.”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사슬에 묶인 사내, 프로메테우스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어떻게 날 아는 거지?”
[모루의 시련– 목표 : 인간의 힘으로 사슬을 끊어내 프로메테우스를 해방하라.
– 추가목표 : 프로메테우스에게 전해지는 고통을 최소화할 경우 보상이 존재.]
이현은 그에게만 들리는 알림 소리를 듣고선 미소를 띄웠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 * *
“필멸자인 자네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는지는 몰라도, 내 경고를 허투루 듣지 말게. 어서 떠나.”
이현이 프로메테우스를 묶은 사슬을 한참 살피는 와중에도 그는 이현에게 떠날 것을 종용했다.
“이건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사슬이야. 인간인 자네가 끊을 수 없어.”
“그건 해봐야 아는 겁니다.”
이현은 프로메테우스의 만류에도 사슬을 꼼꼼히 살폈다.
‘그나저나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사슬이라니. 모루의 시련과도 연관이 있는 건가?’
헤파이스토스는 불과 화산, 그리고 대장장이의 신이었다.
만약 모루의 시련이 그가 내린 시련이라면 시련을 해결하는 것도 그와 관련이 있을 터였다.
‘일단 청동은 아닌 것 같은데.’
거무튀튀한 사슬의 색을 보아하니 청동처럼 보이진 않았다.
청동이 아니라면 최소 철이나 그걸 뛰어넘는 금속이리라.
이현이 이 사슬을 어떻게 끊어낼지 고민하던 중에 프로메테우스가 간곡한 목소리로 그를 말렸다.
“곧 제우스가 보낸 독수리가 내 간을 쪼아 먹으러 올 것이네. 그 독수리는 자네를 가만히 두질 않을 거야.”
“아, 그 독수리.”
이현이 혀를 찼다.
프로메테우스가 말하는 건, 불멸의 신이라 재생하는 그의 간을 쪼아먹는 제우스의 독수리였다.
“서둘러야겠네요. 아프더라도 조금만 참으세요.”
이현이 일단 시도라도 해보기 위해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을 때였다.
“이미 늦었네. 숨게!”
퍼드득.
강하게 홰치는 소리와 함께 거센 바람이 몰려왔다.
“읏!”
이현이 서둘러 고개를 위로 들자 분화구를 가리는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사람쯤은 발로 움켜잡고 납치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독수리가 그들에게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 저주받을 제우스의 독수리! 내가 여기 있다! 어서 매일 그랬듯이 내 간을 쪼아먹어라, 간사한 미물아!”
독수리가 나타나자 프로메테우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신음도 흘리지 않고 얌전히 간을 빼 먹히던 프로메테우스의 색다른 반응에 독수리가 순간 멈칫했다.
이현은 그 모습을 보고 프로메테우스의 의도를 알아챘다.
‘날 위해서 유인을 해주는 거구나.’
이현은 그를 구해주려다 오히려 도움을 받게 된 상황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의 희생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다행히 이현이 서둘러 프로메테우스가 묶여 있는 바위 뒤로 숨은 덕분에 독수리에게 발각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건, 방, 진.]제우스의 신수라서 그런 걸까.
독수리는 말까지 하며 평소와 다르게 반항하는 프로메테우스를 노려보았다.
“크핫핫핫! 내가 언제까지고 얌전히 당하기만 할 줄 알았느냐? 언제고, 언젠가는 너와 제우스도 파멸을 맞이할 것이다.”
[다, 물, 어.]프로메테우스의 도발에 격분한 독수리가 위협적으로 부리를 쪼았다.
프로메테우스의 머리 옆 바위가 으스러지며 불똥이 튀었다.
그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프로메테우스는 광기에 찬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흐흐흐, 내게는 보인다. 미증유의 위기가 오고 있어. 제우스는 파멸할 것이야!”
[후, 회, 하, 게, 해, 주, 마.]“크흐흐, 크아아악!”
독수리의 부리가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았다.
억지로 웃음을 이어가던 그의 입에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바위 뒤에서 비명을 듣는 이현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제길, 제길,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이현은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고 있는 독수리의 존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네레우스가 제우스는 적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했는데.’
지구를 침공한 미증유의 존재들 앞에 항복한 제우스는 그들의 편으로 넘어갔다고 했다.
‘그런 제우스가 지구도 아닌 이 행성, 그것도 위대한 다섯 신이 있는 판가이온 산에 있다고?’
앞뒤가 맞지 않는 사실에 이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실제인가, 아니면 시련의 일부분인가.’
이현이 고민하고 있을 때, 프로메테우스의 비명이 멎었다.
[참, 회, 해.]부리에 신의 피를 덕지덕지 묻힌 독수리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홰를 쳐 허공으로 사라졌다.
“프로메테우스 님, 괜찮으십니까?”
이현이 서둘러 바위 뒤에서 나와 프로메테우스의 상태를 살폈다.
독수리가 헤집어 놓은 그의 내장은 처참하게 뭉개져 있었다.
“나는, 괜찮네. 그러니, 어서, 가…….”
프로메테우스의 의식은 거기까지였다.
말을 끝마치지도 못하고 그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신화대로라면 죽지는 않았을 거야. 기절한 사이에 다시 간이 재생되겠지.”
필멸자라면 누구나 원하는 불멸의 신체였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이 바로 그가 영원히 고통받는 원인이었다.
이현은 일단 기절한 프로메테우스를 놔둔 채로 사슬을 끊기로 결심했다.
‘우선은 이 사슬의 정체부터 확인하자.’
이현은 분석의 안약을 눈에 넣었다.
「[헤파이스토스의 사슬(복제)]
– 죄지은 신을 가두기 위해 헤파이스토스가 제우스의 명으로 만들어낸 사슬.
– 올림포스산의 철을 신성한 숯불 위에서 일주일을 달구어 만든 강철 사슬.
– 원본은 누구도 끊어낼 수 없는 신의 사슬이지만, 시련의 길에서는 격이 하락해 그 정도의 강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현은 사슬의 재질이 강철인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평범한 강철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겠지.”
다름 아닌 대장장이의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강철 사슬이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강철과는 차원이 다른 품질임을 고려해야 했다.
“일단은 강도부터 확인하자.”
이현이 도끼를 들어 힘껏 사슬을 내리쳤다.
깡! 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었지만, 사슬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이거 쉽지가 않겠는데.”
단련된 이현의 힘으로도 멀쩡한 걸 보니 보통 강철은 아니었다.
“거기다 계속 내리쳤다간…….”
프로메테우스의 몸이 사슬에서 전해지는 충격을 견디기 힘들 터였다.
다행히 지금은 기절한 덕분에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여러 번 내려칠수록 고통스러워지는 건 프로메테우스였다.
“죽지는 않는다지만, 너무 고통을 주면 위험해.”
이미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혀서 극심한 고통을 느낀 프로메테우스였다.
더 고통을 주었다간 시련을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단번에 간다.”
이현은 도끼를 집어넣고 하르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강한 공격 스킬을 사용했다.
“[페르세우스의 검술].”
이현이 눈을 감고 집중하자 규격 외의 격이 움직여 하르페의 날에 검기를 만들어냈다.
‘벤다!’
이현이 사슬을 베어내겠다는 의지를 담고 검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경고! 인간이 가진 육체의 힘으로만 사슬을 끊어낼 것.] [스킬 발동이 강제로 취소됩니다.]갑자기 들린 알림 소리와 함께 검기가 검날에서 사라졌다.
“육체의 힘으로만 하라고?”
이현은 검기가 사라진 하르페를 멍하니 보다가 혀를 찼다.
“이럼 나가리인데.”
검기가 문제인 걸까, 아니면 [페르세우스의 검술] 스킬이 문제인 걸까.
중요한 건 어느 쪽이든 사슬을 끊어낼 방법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힘이라 이거지?”
오기가 솟구친 이현은 사념 에너지 결정을 꺼내 들었다.
“근육만 쓰면 인간의 힘이라고 할 수 있겠지!”
결정이 이현의 손안에서 부서지며 뱉어낸 사념 에너지가 이현의 몸 곳곳에 스며들었다.
“[사념 에너지 강화-공격].”
인간을 뛰어넘는 힘이 단련된 이현의 근육에 차올랐다.
“오냐, 반으로 갈라 끊어주마.”
한계까지 힘을 끌어올린 이현의 도끼가 사슬을 향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