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189
188화
-승격의 시간, 두 번째(2)
자신의 생존이 우선인 이현에게 던전 탈출 때까지 살아남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당연한 일이지.”
나진도 이현의 말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가끔 보면 넌 우리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자초하는 것처럼 보여.”
“그 정도는…….”
이현은 그 정도는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려 했다.
하지만 나진의 표정은 진지했다.
“우리끼리 이미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봤어. 그때 정결의 섬에서 다 모였을 때.”
쉬라고 휴양 섬에 모아놨더니 이현 몰래 모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처음에야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너한테 무작정 기댔지만, 이제 다들 던전이 어떤 곳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
“…….”
“여기가 언제라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곳이라는 거, 이제 다 알아. 아무리 대단한 너라도 우리 모두를 다 챙길 수는 없어.”
나진이 부러진 애각창을 든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네 덕분에 나는 이렇게 강해졌어. 그걸 보고 다른 사람들도 용기를 내겠다고 했어. 어때, 대단하지?”
어느새 여전사가 되어 있는 나진이 처음 원했던 대로 이젠 모두가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진은 이현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동안의 일은 튜토리얼이라고 생각할게. 이젠 우리를 믿고, 너 스스로를 더 챙겨.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누나…….”
이현은 양손으로 전해져오는 나진과 공원 사람들의 진심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하지만 제 여력이 되는 한에서는 도울 겁니다.”
“그건 사양하지 않을게.”
나진이 눈을 찡긋거리며 생긋 웃었다.
이현도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뭐야? 나도 충성의 맹세를 할까?”
“아뇨. 그건 됐어요.”
이현이 고개를 저었다.
이현은 그녀와 주종의 관계를 맺고 싶은 게 아니었다.
“저도 똑같아요. 누나도 자신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줘요.”
“그거야 쉽지!”
“라고 하기엔 그동안 전적이 많았던 거 알죠?”
“하, 하하…….”
이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지적하자 나진이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마코스의 칼에 베였을 때, 그리고 옹케스토스의 여관에서 찔릴 뻔했을 때 모두 이현은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공교롭게도 둘의 조건이 같네.”
“좋은 계약이 되겠어요.”
이현이 웃으며 나진의 손을 마주 잡았다.
[던전에 소속되지 않은 존재와 상호합의된 계약을 맺었습니다.] [조건이 포함된 파트너 계약이 성립됩니다.]익숙한 던전 알림 방송이 흘러나오며 이현과 나진의 쌍무적 계약이 성립되었다.
“이로써 누나도 정식으로 던전에 소속된 사람이 됐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해.”
“알겠습니다, 보스!”
장난스럽게 경례를 붙이는 나진을 보며 이현이 얼굴을 구겼다.
“보스라고 부르지 못하게 조건을 걸걸.”
“늦었습니다, 보스!”
나진이 싱글싱글 웃는 모습을 보니 한동안은 놀림 받을 모양이었다.
* * *
“민아는 이걸로 됐고.”
민아는 이미 승격만 3번째였다.
민아도 익숙하게 승과를 먹었고 이현은 그런 민아를 자연스럽게 동굴 바닥에 뉘었다.
미리 준비한 푹신한 침낭 위에 누운 민아 곁에는 민아의 부모인 장현수와 서민경이 그녀를 돌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먼저 승과를 먹고 승격에 들어간 디르케가 몸을 둥글게 만 채로 잠들어 있었다.
‘갑자기 비늘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을 땐 놀랐지.’
승과를 먹자마자 홀린 듯 구석에 몸을 말더니 그대로 돌처럼 굳어 버린 디르케를 보고 모두가 당황했었다.
하지만 티타니아가 [진단]으로 살펴본 결과 정상적으로 승격이 진행되고 있다는 걸 알고선 안심할 수 있었다.
이현은 긴장된 얼굴을 한 나진을 돌아보았다.
“자, 이젠 누나 차례에요. 준비됐어요?”
이현의 질문에 나진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파래졌다.
“자, 잠깐만.”
승격을 앞두고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기에 이현은 나진을 이해했다.
‘눈앞에서 디르케가 딱딱하게 돌로 굳어 버렸으니 그럴 만도 하지.’
거기다 외형이 거대하고 흉악하게 변해 버린 리코스의 예도 있었다.
나진이 겪을 승격은 그런 방식의 것이 아니었지만, 긴장되는 건 무리가 아니었다.
이현이 잠시 그녀를 기다려주는 동안, 심호흡을 마친 나진이 고개를 들었다.
“후, 이제 됐어. 가자.”
여전히 새파란 얼굴이었지만, 각오를 굳힌 듯 멋진 표정을 하고 있는 나진을 보며 이현이 씩 웃었다.
“티타니아.”
“하, 원래는 던전 보스 말고는 던전수에 손 못 대는 거 알죠?”
“예외란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지.”
“정말 주인님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티타니아가 나진을 이끌고 던전수로 다가갔다.
“자, 나진 양. 저를 따라 던전수에 손을 대 봐요.”
“이렇게요?”
이현이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나진이 던전수를 통해 심상 공간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서 이현이 보기엔 나진의 고개가 푹 숙이는 것이 다였지만, 아마 나진의 정신은 지금쯤 던전 속 심상 공간에서 새롭게 구현되고 있을 터였다.
‘3성까지는 무리 없이 도달하겠군.’
이현의 경우 1성의 격을 얻는데 100의 격이, 2성은 200의 격이 필요했다.
그리고 3성이 되는 데에는 그 두 배인 400의 격이 필요하니 3성까지 도달하는 데 도합 700의 격이 드는 셈이었다.
때문에, 이현은 720의 격을 가지고 있던 나진에게선 격을 받지 않았다.
나진이 몹시 미안해했지만, 다른 일행에게서 받는 격으로도 2천의 격은 충분히 모을 수 있었다.
‘누나도 이젠 제대로 한몫을 해야지.’
그동안 뛰어난 재능과 역천강기라는 특수한 스킬 덕분에 나진이 활약을 해오긴 했지만, 나진의 몸은 평범한 인간인 채였다.
그래서 이현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급박한 현장에는 나진을 되도록 보내지 않으려 했었다.
승격을 통해 나진이 강해지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게 뻔했다.
앞으로 나진이라는 인재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선 그녀에게 투자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그럼, 여기는 티타니아에게 맡기고.”
이제는 이아코스에게 격을 양도할 시간이었다.
이현은 다시 [워터게이트]의 은막을 넘어 판가이온의 신전으로 돌아왔다.
“별일 없었지?”
“네, 보스.”
석상처럼 은막 앞을 지키고 있던 리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위대한 아레스께서 돌아오시는 대로 만나겠다고 하셨습니다.”
“위대하긴, 무슨.”
“하, 하하…….”
신한테 쌓인 게 많은 이현이 구시렁댔지만, 사우레노르에게 아레스는 가장 위대한 신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지?’
이현은 일행의 승격이 끝나는 대로 이아코스에게 격을 양도하겠다고 말해놓은 터였다.
그런데 이렇게 부른다는 건 무슨 이유가 있다는 소리였다.
이현은 리코스와 함께 서둘러 신전 중앙, 신들의 알현실로 향했다.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항상 밝게 이현을 맞이해주던 헤르메스가 자리에 없고 대신 헤스티아가 정겨운 인사로 이현과 리코스를 환영했다.
‘바쁜 일이 있나?’
이현이 의아해하고 있자, 그걸 눈치채고 헤스티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헤르메스는 지금 곤란한 일을 해결하러 갔어요.]“곤란한 일이라면?”
[그게…….]헤스티아가 난처해하며 말끝을 줄일 때였다.
[모두 이 멍청한 새가 저지른 일이지!]쩌렁쩌렁 울리는 아레스의 고함이 신전을 가득 채웠다.
“윽!”
이현과 리코스가 귀를 울리는 아레스의 소리에 비틀거렸다.
보통 소리도 아니고 분노한 신의 격이 잔뜩 실린 음공이나 마찬가지인 소리였다.
이현이 얼른 자세를 바로잡고 아레스의 발치를 보니 얼마 없던 깃도 다 빠진 채로 아레스의 발치에 엎드린 부엉이 하나가 보였다.
‘아테나의 부엉이잖아?’
실수로 자신들을 시련의 길로 보내버린 아주 괘씸한 부엉이가 엉엉 울면서 아레스의 발치에서 싹싹 빌고 있었다.
하지만 아레스의 분노는 가실 기색이 없었다.
[누이의 안타까운 최후를 어여삐 여겨 그동안의 실수에도 봐줬건만, 이런 사고를 쳐!]쾅!
아레스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힘껏 발을 구르자 판가이온 신전 전체가 크게 뒤흔들렸다.
‘윽, 역시 신은 신이구나.’
이현은 신전의 기둥을 잡고 지진도 무시 못 할 흔들림을 버텨냈다.
리코스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신의 분노 앞에 넙죽 엎드릴 정도였다.
[요, 용서를! 켁!]애처롭게 빌던 부엉이는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1m는 넘게 떠오르더니 철퍼덕 땅에 떨어졌다.
아레스는 그걸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검을 뽑아 들었다.
전쟁의 신의 검은 황금빛으로 빛나며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크기만이 아니라 그 예기도 상당해서 말 그대로 빌딩도 잘라낼 것 같은 무기였다.
그걸 본 부엉이가 사색이 되어 머리를 땅에 내리박았다.
[아이고, 살려주세요, 아레스 님!] [오냐, 큰아버지도 여기 계시는 데 단번에 저승으로 보내주마. 그게 내 용서다!]아레스가 진짜 검을 내려치려 하자 옆에 있던 헤파이스토스가 그를 막았다.
[진정해.] [형님!]자신을 막는 헤파이스토스를 아레스가 씩씩대며 노려보았다.
옆에서 보는 이현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인데, 헤파이스토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표정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아테나가 남긴 유일한 흔적이야. 저것마저 사라지면 누가 그녀를 기억하겠어.] [에잇!]쓸쓸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하는 헤파이스토스의 만류에 아레스는 뿔을 잔뜩 드러내며 욕설을 내뱉고는 검을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본 부엉이가 다시 머리를 연신 바닥에 박아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이 일련의 촌극을 보며 어안이 벙벙해진 이현이 헤스티아를 바라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갑자기 오라고 하더니 순례길에 있던 아테나의 부엉이가 용서를 구하고 있고 아레스가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실수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대와도 관련이 있는 일이군요.]“예?”
헤스티아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부엉이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레스는 이아코스를 데리고 오는 그대들을 위해 부엉이에게 명령을 하나 내렸었죠.]그 명령은 이현이 헤르메스에게 들어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대들은을 시련의 길을 통과하지 않아도 판가이온 신전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아레스의 손님으로 초대하라고.]“네. 불운하게도 저희는 시련을 겪어야만 했지만요.”
그 힘겨웠던 시련을 떠올리자 이현은 속이 다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레스께서 그냥 칼을 내려쳤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런 모진 말은 하지 말아요. 그래서 얻은 것도 있잖아요?]헤스티아의 말에 이현이 입을 잠깐 삐죽 내밀었다.
그 덕에 아티팩트도 얻었고 격도 올랐다지만, 고생은 고생이었다.
“어쨌든 그게 저와 무슨 관련입니까?”
“누군지는 몰라도 그거참 편하게 왔겠군요.”
누구는 용암 지대에서 구르고 도끼질하다 겨우 올라왔는데.
이현이 콧김을 훅 뿜으며 물었다.
“그래서 그게 누군데 이러는 겁니까?”
[그대도 잘 알고 있는 이예요.]헤스티아가 골이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세멜레라는 아이죠.]“……X발.”
신 앞이라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로 이현이 욕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