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238
237화
-고블린 갱(4)
던전 게이트에서 나와 폐허가 된 언덕 위의 저택을 빠져나오자 일행을 반긴 건 걸걸한 말투의 마부였다.
“댁들이 맥도일 씨가 모셔오라는 고블린들이군. 얼른 타쇼.”
마부는 평범한 고블린이었지만, 일행을 놀라게 한 건 마부가 아니라 마차를 끌고 있는 ‘것’이었다.
“증기 엔진?”
칙칙대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김을 뿜어내고 있는 건 분명히 증기 엔진이었다.
“증기 엔진 처음 보쇼?”
이현과 나진, 이아코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쩍 벌리자, 마부가 촌뜨기를 다 보겠다는 듯 킬킬댔다.
“처음이라면 처음이긴 하지.”
나진이 신기하다는 듯 마차를 이끄는 엔진부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현이나 나진에겐 옛날 영화나 사진으로만 접한 유물이었고 이아코스에게는 아예 처음 보는 신기술이었다.
“걱정하지 마쇼. 이래 봬도 튼튼한 놈이니까. 중간에 터지고 그런 일 없을 거요. 이크!”
마부가 무쇠로 만든 증기 엔진을 텅텅 두드리자 요란한 굉음이 안에서 울려 나왔다.
몹시 못 미더운 모습이었지만, 일단 이현 일행은 증기 엔진 마차에 올라타기로 했다.
평범한 마차를 바퀴 달린 소형 증기기관차가 끄는 형태였다.
“50년이나 된 놈이지만, 아직 달리는 건 끄떡 없수.”
마부가 굴뚝 달린 거대한 가마솥처럼 생긴 증기 엔진을 작동시키면서 히죽 웃어 보였다.
그는 곧 주머니에서 한 줌의 가루를 꺼내더니 엔진의 화실, 즉 아궁이를 향해 뿌렸다.
그러자 화르륵, 불꽃이 힘차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에이, 이것도 새로 사야겠네.”
이현은 마부가 화실에 뿌린 가루가 뭔지 눈치채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사념 에너지 결정?’
마부가 뿌린 건 저급의 사념 에너지 결정 즉, 마석을 가루 낸 것이었다.
지구의 증기 엔진이 나무나 석탄을 원료로 작동했던 것과 달리 이곳에선 마석 혹은 마석 가루를 이용하는 듯했다.
“그럼 출발하겠수.”
쾅! 쾅! 대는 폭발음과 함께 증기 엔진 마차가 출발했다.
“……느리네.”
덜컹거리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리는 증기 엔진 마차는 차라리 뛰는 게 나을 정도로 느긋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 느린 시간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언덕을 내려가 도심으로 향하는 동안 수다스러운 마부에게서 정보를 꽤나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 그럼 이 동네 출신이 아니란 말이요? 하긴, 요즘엔 온갖 곳에서 이민자들이 넘친단 말이지.”
마부는 킬킬대며 품에서 납작한 양철 술병을 꺼내 목을 축였다.
진하게 풍기는 알콜 향을 보니 꽤 도수가 높아 보였다.
음주 운전을 하는 마부의 모습에 나진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서 마차가 전복되어도 죽을 사람은 없으니까.’
이미 평범한 인간을 넘어선 이현 일행의 스펙으로 봤을 때, 아마 마차가 폭발해도 다들 멀쩡할 터였다.
“원래 이 도시의 터줏대감은 앙글리아에서 온 오거들이었지. 지금은 죄다 성공해서 도시 외곽에서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지.”
마부는 영 불만스럽다는 듯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그것들도 시작은 범죄자나 거지나 다름없는 빈민들이었는데 말야.”
“범죄자였다고?”
이현이 반문하자 마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 하잘것없는 출신이었지. 그런데 여기 와서 도시를 세우고 돈을 벌기 시작하더니 제깟 것들이 다 귀족이라도 된 양 거들먹거리고 다녀. 빌어먹을 것들.”
마부는 거칠게 운전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다음에 이 도시에 온 게 우리 에이랜드 고블린들이요. 우리도 먹고살기 힘들어서 온 건 마찬가지지만, 서로를 보살필 줄 아는 족속들이지.”
마부가 코끝을 쓱 문지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고블린끼리는 누구나 서로 돕는다오. 나도 맥도일 씨의 부탁을 받고 당신들을 태워주는 거고.”
그렇게 한참 동안 고블린 자랑을 늘어놓던 마부는 돌연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 우리가 힘겹게 자리 잡은 이 도시를 어느 순간 더러운 영혼을 가진 트롤 놈들이 탐내기 시작하고 있소. 더러운 돈의 노예들.”
마부의 불평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거기다 거지 중의 상거지였던 시켈리의 오크 놈들이 이젠 우리 구역을 빼앗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지. 말세야, 말세.”
계속 이어지는 마부의 수다에 나진과 이아코스는 벌써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이현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마부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면서 상당한 정보를 얻어냈다.
‘도시를 오거, 고블린, 오크, 트롤 이 네 종족이 나눠 가진 모양새군.’
도시의 사정을 들으며 이현은 생각에 빠졌다.
‘꼭 고블린들이랑 손을 잡을 필요는 없겠는데.’
도시를 지배하는 건 결국 오거들이었고, 돈이 제일 많은 건 트롤들이었다.
만약 던전을 지킬 용병을 구한다면 숫자가 제일 많고 인건비가 싼 오크들과 손을 잡는 게 나을 터였다.
그에 비해 고블린은 딱히 장점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서로를 끔찍이 챙긴다는 거?’
하지만 그들의 민족 정신과 동포애가 이현의 던전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현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무렵, 증기 엔진 마차가 도심으로 들어섰다.
“와, 영화에서 본 것 같은 풍경이네.”
샛노란 전기등과 싸구려 아스팔트, 시멘트 건물들이 숲처럼 빽빽이 늘어서 있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거리에는 술에 취한 고블린과 오크가 비틀대고 있었고 트롤 매춘부가 손님을 부르는 모습도 보였다.
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저자들 다 벌레 신의 역병에 감염된 자들이야.”
이아코스가 구린내가 진동한다는 듯이 코를 감싸 쥐었다.
“조금만 참아.”
“알았어. 현이 하는 부탁이니깐 참는 거야.”
그런 이아코스의 모습에 이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대화가 통하려면 어쩔 수 없이 그가 필요했다.
그동안 마차는 도심을 지나 구석진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스팔트가 끝나고 흙길이 나오고 전기등 대신 희뿌연 가스등이 설치되어 있는 곳에 도착하자, 낯익은 얼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깁니다!”
이현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건 리처드 맥도일이었다.
“여, 맥도일네 아들. 말한 대로 손님 데려다줬으니 난 가볼게. 아버지께 안부 전해드려.”
“그럴게요.”
리처드 맥도일은 마부에게 인사를 하곤 마차에서 내린 이현 일행을 바라보았다.
“호, 혹시……?”
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처드가 놀란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빠르게 속삭였다.
“세상에, 그런 모습으로 오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오면 이목을 너무 끌 테니까.”
“잘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소문이 퍼지면 어쩌나 싶어서 지붕 있는 마차를 보내드린 거였는데.”
뛰는 게 나을뻔한 속도의 마차를 왜 보낸 건지 이현은 의문이 갔었는데, 리처드도 나름 생각이 있던 듯했다.
“그나저나 일주일만이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일주일?”
이현이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다.
이현 일행이 던전을 나온 것은 리처드 맥도일이 던전을 나간 바로 다음 날이었다.
이현이 그걸 설명하자 리처드가 짐작이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던전의 안과 밖이 시간 흐름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즉, 던전의 하루가 밖에선 일주일이란 소리였다.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에 놀라며 이현 일행은 리처드의 안내로 맥도일의 집으로 향했다.
2층의 응접실에는 패트릭 오도일과 아버지 맥도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이자들이야?”
패트릭이 이현 일행을 보고 불만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고블린이잖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이현 일행 앞으로 다가왔다.
“릭, 너 진짜 마약 한 거 아니지? 이것들이 인간이라고?”
마치 품평이라도 하듯이 이현 일행 주변을 돌면서 패트릭이 비아냥댔다.
“……열 받게 하네.”
나진의 입에서 짜증에 가득 찬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본 리처드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저, 저 그, 그게 용서해 주십쇼!”
“엉? 너 뭐 하냐? 나한테 왜 사과해?”
“멍청아, 네가 아니라 저분들한테 하는 거야!”
리처드가 사색이 된 이유를 모르는 패트릭은 잔뜩 얼굴을 구겼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어디서 이상한 고블린 놈들 데리고 와서 사기 치는 거 아니지? 야, 너 얼굴 좀 보자.”
패트릭이 짜증을 내며 고블린으로 변한 나진의 후드를 훽 들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윽!”
어느새 나진의 손에 들린 부러진 애각창이 패트릭의 목젖에 닿아 있었다.
“손 조심하시지?”
나진이 으르렁대듯 중얼거리자 패트릭은 즉시 양손을 들어 올리며 사과했다.
“보통이 아닌데? 사과하지. 내가 실례를 범했어.”
그의 사과에도 나진의 창은 그대로였다.
리처드도 패트릭도 몰랐지만, 나진이 역천강기를 뽑아내는 순간 패트릭의 목은 순식간에 잘려 나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누나, 일단은 대화부터 할게요.”
“흥!”
이현의 말에 나진이 콧바람을 불며 창을 치웠다.
“고맙군.”
패트릭은 창끝이 겨눠졌던 목을 문지르며 이현을 보고 인사했다.
방금의 상황으로 누가 더 위에 있는지 알아차렸던 것이었다.
“당신이 던전의 보스요? 인간이라고 들었는데?”
“인간이고 아니고가 중요한가?”
이현의 대답에 패트릭이 잠시 고민을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사실 아니어도 상관없어. 애들 동화 속에나 나오는 인간에 관심 가질 나이도 아니고.”
패트릭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더니 자리에 앉았다.
“중요한 건 당신이 던전의 보스냐 아니냐 하는 거지.”
그의 말이 끝나자 후드 밑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던전의 보스가 맞아.”
이현은 후드를 걷어 올렸다. 동시에 나진과 이아코스도 후드를 걷어 올렸다.
“회색 피부에 검은 머리? 어디 출신이지?”
패트릭은 이 도시의 고블린들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거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는 갱단의 보스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회색 피부의 고블린은 처음 보았다.
의아해하는 그에게 이현이 피식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지구.”
“거긴 또 어디야?”
“인간들의 행성이지.”
이현은 거기까지 말하고 [셰이프시프터]를 해제했다.
그러자 세 명의 고블린은 사라지고 훤칠한 키의 인간 셋이 그 자리에 있었다.
“세상에, 정말 인간이었어.”
지금껏 말없이 있던 아버지 맥도일이 감탄을 터뜨렸다.
밝은색 피부에 큰 키를 가진 인간이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그들의 눈앞에 있었다.
“반갑다, 고블린들. 너희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나 하도록 하지.”
자신들을 향해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고블린들을 향해 이현이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정말 그러면 이길 수 있는 건가?”
고블린 구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빈민가.
그곳에는 오크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이 살고 있었다.
작은 시켈리라고 불리는 그 구역의 한 식당 주방에서 오크 둘이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래, 그녀가 준 선물이라면, 그 재수 없고 비겁한 고블린들을 다 쓸어버릴 수 있어.”
“돈 모렐로의 의견도 마찬가지야?”
“어이, 엔리코.”
엔리코라 불린 오크가 움찔거렸다.
그는 한때 작은 시켈리를 주름잡는 마피아의 보스였다.
하지만 지금은 패트릭이 이끄는 고블린 갱단에 밀려 몰락한 처지였다.
지금 운영하고 있는 식당도 북부 맨튼의 할렘을 지배하는 오크 마피아, 돈 모렐로의 지원으로 겨우 유지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돈 모렐로는 네게 은혜를 베풀었어. 그렇다면 너는 그걸 갚아야지. 그게 옳은 거고. 안 그래?”
모렐로의 부하 오크가 으르렁대자 엔리코가 결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돈 모렐로에게 알겠다고 전해드려.”
“보스는 너의 용기를 기억하실 거다.”
모렐로의 부하가 격려하듯이 엔리코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 그 인간 여자가 준 선물의 효과는 확실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