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424
423화
-영령의 후계자(4)
“드세요.”
조자룡의 한바탕 소란이 끝난 후, 고풍스러운 중국식 저택의 응접실에 앉아 있는 이현에게 성이경이 차를 내왔다.
영령이 둘이고 이현은 손님이기에 차를 내올 사람이 그녀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천하의 황룡 길드 마스터가 차를 내오는 신세라니.
거기다 마치 자신은 시중을 드는 사람인 양 테이블에 앉지 않고 뒤에서 서서 대기하기까지 했다.
‘불편하네.’
성이경의 지위도 지위였지만, 지구-1의 그녀를 기억하는 이현에게 친절한 성이경은 영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다른 영령 둘은 당연하다는 듯이 차를 마셨다.
아니, 한 모금 마시고 바로 내려놓았다.
“넌 어떻게 영 차를 우리는 실력이 늘지를 않느냐?.”
“길드 관리하는 것도 바빠요. 불만 있으시면 S급 헌터를 비서로 고용하세요.”
“에잉, 쯧쯧.”
이 저택으로 향하는 비밀 통로는 S급 헌터 이상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영령의 시중을 들 사람 역시 S급이어야 했다.
‘S급 비서라니.’
이현은 헛웃음을 지으며 차를 마셨다.
아까는 성이경을 믿지 못해서 마시지 않았지만, 그녀와 대화를 나눈 지금은 어느 정도 신뢰할 수는 있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차 맛에 이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쁘지 않네요.”
“차 맛도 모르는 놈이 내 후계자라니.”
페르세우스가 마치 괴상한 놈을 본다는 듯 이현을 쳐다보았다.
‘이래 봬도 입맛은 까다로운 편인데.’
나름대로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만큼, 이현의 입맛은 저렴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고대 그리스 출신인 페르세우스에게 차 맛을 모른다고 구박을 받다니.
이현은 살짝 억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르신들이 너무 까다로우신 거예요. 봐요, 도이현 헌터는 괜찮다고 하잖아요.”
“얘 표정은 안 그런데?”
성이경은 이현의 칭찬이 기쁜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작 그 모습을 본 이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지만.
‘적응 안 되네.’
이현은 아무리 다른 사람이라는 걸 되뇌어도 적응이 안 되는 지구-2의 성이경은 잠시 제쳐두기로 하고, 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이거 귀한 겁니다.”
조자룡과 페르세우스의 잔에 넥타르를 쪼르륵 넣자 이 세상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향긋한 향이 올라왔다.
영령 둘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허겁지겁 차를 입에 가져다 댔다.
“기가 막힌 맛이군!”
“넥타르인가. 신들의 음료로구나.”
무릎을 탁! 치며 기뻐하는 조자룡과 아련한 표정을 짓는 페르세우스를 보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성이경도 향긋한 넥타르의 향에 관심이 동한다는 표정이었지만, 이현은 그녀를 무시하고 병을 품에 넣었다.
덕분에 이경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한테 이걸 줄까 봐.’
지구-2의 성이경에게 쪼잔한 복수를 완료한 이현이 입을 열었다.
“대체 왜 저를 공격하신 겁니까?”
“반은 자네의 실력을 시험해보기 위한 연극이었네.”
“나머지 반은 진심이셨단 소립니까?”
“자네가 네임리스의 던전에 도전할 거라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어쨌든 내 딸과 싸울 건 분명한 거 아닌가.”
뻔뻔하게 대답하는 조자룡의 모습에 이현이 기가 차서 입을 벌렸다.
삼국지 속의 영웅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위대한 장군인 조자룡치고는 쪼잔하기 그지없는 심보였다.
이현의 얼굴을 본 조자룡은 민망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더니 헛기침을 했다.
“큼, 흠! 어쨌든 자네는 내 시험을 통과했네. 아니, 나보다, 우리보다 더 강한 자이니 시험은 의미가 없었군.”
“그러니까 내가 진즉에 말했잖아. 이놈은 할 수 있을 거라고. 역시 내 후계자다.”
페르세우스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이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여전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제가 만약 시험에 불합격했다면 어떻게 되는 거였습니까?”
“네임리스의 던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해야지.”
이현은 여전히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장군님은 제가 네임리스의 던전을 공략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시험하신 거죠?”
“그렇다네.”
“역시 이해가 잘 가지 않는군요. 윤나진 헌터를 딸처럼 아끼시던 것 아니었습니까?”
“……그것도 맞아.”
조자룡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기다렸던 거네. 나진이를 확실하게 끝내줄 수 있는 실력자를.”
조자룡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하며 이현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내 딸을, 나진이를 해방시켜주게.”
그 엄숙하고 비통한 목소리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조자룡이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자리에 앉은 뒤에야 이현은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던전 보스가 되는 것은 몹시도 비참한 일이지.”
조자룡의 중얼거림에 현직 던전 보스인 이현의 눈썹이 꿈틀댔다.
하지만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지구-2의 던전은 지구-1의 던전과 다르니까.’
이현은 우연히 던전 현상에 휘말려 던전에 소속되었고 업적을 달성해 총관의 눈에 들어 보스가 되었다.
덕분에 인간인 채로 남아 있을 수 있었고 총관이 제시한 할당량을 채우면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처지였다.
하지만 지구-2의 던전과 던전 보스들은 달랐다.
‘이곳의 던전 보스와 몬스터들은 말 그대로 괴물에 불과해.’
이성이 없고 오로지 살육의 본능만 좇는 몬스터들.
고대 흡혈종처럼 지성이 남아 있는 존재들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눈에 보이는 대로 죽이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
던전에 종속되어 움직이는 그들은 인형이나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해서 이현은 지성을 가진 던전 보스와 접촉해보기도 했었다.
‘던전 시스템에 대해서 아나? 도우미는? 총관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죽어랏!’
이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던전 보스는 오로지 그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고, 함께 공략에 참여했던 헌터들의 손에 끝장이 났었다.
이현은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었다.
지구-2의 던전은 이현이 있던 던전과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곳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지구-1의 던전을 어설프게 베낀 것 같은 곳이 지구-2의 던전이었다.
‘지구-2의 나진 누나는 그런 던전의 보스가 되었다는 소리네.’
그러니 그녀를 딸처럼 생각하는 조자룡이 비통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할 수 있었다면 내가 들어가서 그 아이를 해방시켜 줬을 테지.”
“하지만 우리 영령들은 던전으로 들어가지 못해.”
조자룡의 한탄에 페르세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던전 공략은 인류의 위기를 구원하기 위해 소환된 영령들의 임무가 아니었다.
던전은 인류가 감당하지 못할 위기가 아니었기에 영령들은 던전 브레이크가 터져 재앙이 일어날 때만 간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공략이었어요. 상대가 바로 그녀인걸요.”
이경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상 최강의 헌터 윤나진이 사상 최강의 던전 보스가 되었다.
그녀가 던전 보스가 된 이후로 5년이 지났지만, 그녀를 뛰어넘는 S급 헌터는 나오질 않고 있었다.
“그나마 예린이 고것이 가능성이 있어서 지켜보는 중이었지. 그러던 중에 네가 나타난 거다.”
페르세우스는 갓 헌터가 되어 등급 테스트를 하던 이현의 실력을 확인하고 바로 조자룡에게 알렸다고 했다.
“시베리아에서 불곰 떼를 잡던 창잽이 놈한테 네 이야기를 했더니 얼마나 놀라던지. 껄껄.”
영령과 맞먹는 실력을 가진 이현의 소식을 들은 조자룡은 바로 성이경에게 연락을 넣었다.
“제가 그 회담 자리에서 네임리스의 던전을 공략해달라고 했던 건 어르신의 부탁 때문이었어요.”
성이경이 모두가 무리일 거라고 생각했던 네임리스의 던전 공략을 억지로 내세웠던 것은 뒤에 조자룡의 부탁이 있었던 탓이었다.
“그리고 네가 그걸 허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널 시험하려 했던 거다.”
“어떻게 어르신께 데려가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도이현 헌터가 직접 어르신을 만나고 싶다고 찾아오시더군요.”
덕분에 성이경은 일사천리로 이현을 이곳, 조자룡의 저택으로 데려올 수 있던 것이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요.”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된 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자룡은 이현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내 딸을, 나진이를 그 비참한 운명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겠는가?”
“…….”
이현은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나진 누나를 죽일 수 있을까?’
아무리 다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진은 나진이었다.
이현은 고개를 돌려 이경을 바라보았다.
똑같은 외모,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지구-1의 성이경과 달랐다.
그렇다면 이곳의 윤나진 역시 자신이 알고 있는 나진 누나가 아닐 터였다.
이현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딸처럼 생각하는 아이의 목숨을 끊겠다는 이현의 선언에 조자룡의 주름진 눈가에서 아버지의 눈물이 한 방울, 비가 되어 떨어졌다.
* * *
이현은 그 뒤, 조자룡의 저택에서 머물며 성이경과 조자룡에게 윤나진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원래 황충 길드의 마스터는 나진 언니였어요.”
이경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나진의 과거를 이야기해 주었다.
“최초의 헌터이자 각성부터 S급이었던 언니가 아니면 누가 황충 길드를 세울 수 있었겠어요.”
던전 사태가 시작되고 각성하는 헌터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오자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던전을 공략하는 헌터들도 존재했지만, 범죄를 저지르는 블랙 헌터들 역시 생겨났고 사람들은 헌터를 두려워하고 배척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선 사람이 나진 언니였어요.”
고작 14살. 중학생에 불과한 여자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무서운 실력으로 던전을 공략하고 던전 브레이크로 튀어나온 몬스터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하자 모두가 그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언니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죠. 본인도 쾌활한 성격이었고요. 속된 말로 핵인싸라고 하던가요.”
그리운 추억을 떠올리는 이경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모두가 언니를 따랐어요. 창해 길드의 여사용 마스터와 백록 길드의 설명지 마스터도 언니를 딸처럼 여기며 예뻐했죠.”
그렇게 한국 헌터의 중심이 되어가던 나진이 영령까지 소환하자, 누구도 더는 그녀가 한국을 대표하는 헌터임을 부정하지 못했다.
“블랙 헌터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고 사람들이 헌터를 두려워하기 시작하자, 나진 언니가 정부와 협상을 했어요.”
윤나진은 당돌하게도 정부를 직접 찾아가 블랙 헌터들을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소리쳤다고 했다.
10대 소녀의 헛소리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나진은 대한민국 헌터의 의견을 대표하는 헌터였다.
결국, 정부는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블랙 헌터를 관리하기 위한 황충 길드가 만들어졌다.
“황충(蝗蟲). 곡식을 갉아먹는 못된 벌레들을 뜻하는 말이죠. 하지만 동시에 그 벌레들은 새들의 먹이가 돼요. 무조건 없애면 오히려 재앙이 찾아와요.”
나진은 블랙 헌터들을 적절히 관리한다면 범죄를 막고 던전 공략에 도움이 되게 쓸 수 있다고 믿었다.
10대 소녀의 이상적이고 치기 어린 소리였지만, 나진은 실제로 그걸 해냈다.
“모두가 언니를 따랐기에 할 수 있던 일이었어요. 그 블랙 헌터들도 언니 앞에서는 얌전해졌거든요.”
반항하는 블랙 헌터들을 힘으로 누르고 인덕으로 감화시키면서 나진은 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거기까지 말한 이경의 얼굴이 자책감에 물들기 시작했다.
“언니가 사라진 이후에 제가 황충 길드를 맡았지만, 저는 언니처럼 할 수 없었어요. 도이현 헌터도 알다시피 안 좋은 방법을 택해야 했죠. 언니가 알면 얼마나 슬퍼할까요.”
결국, 참지 못하고 주륵 눈물을 흘리는 이경을 보며 이현은 알 수 있었다.
지구-1과 지구-2의 성이경이 다른 이유는, 다름 아닌 윤나진이 그녀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