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490
489화
-마지막 한 수(3)
[뭐?] [넌 내 밥이라고. 귀가 막혔냐?] [……주제 파악도 못 할 정도로 격락해 버렸나.]농구공만 한 크기의 곰벌레가 태양계쯤은 간식 삼아 잡아먹는 대사도를 업신여기고 있는 상황에 이븐 자토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얼마나 격이 떨어졌으면, 현실 감각조차 사라진 걸까.
벌레 신의 첫 번째 자식이자 가장 위대한 사도로 불렸던 사피오 사트라의 처지에 이븐 자토스는 동정심마저 들 정도였다.
[옛정을 생각해서 고통 없이 삼켜주지.] [저게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네. 어휴.]한숨 쉬는 곰벌레의 모습에 이븐 자토스는 일말의 동정심조차도 싹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끔찍한 죽음을 자초하고 싶다면, 그 소망을 들어주도록 하지.]우르릉!
―――!
이븐 자토스의 분노가 전해진 수천 마리의 용이 분노의 괴성을 내지르며 꿈틀대기 시작했다.
한 마리로도 새로운 지구를 박살 낼 수 있는 용 수천 마리가 지구를 향해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나진을 비롯한 모든 존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죽어라!]절대적인 죽음의 명령.
전성기의 표사트라면 몰라도 규격 외의 힘을 모두 이현에게 전수해준 그로서는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 죽음 앞에서 표사트는 실실 웃고 있었다.
[네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자기 분수를 모르고 있어.] [뭐?]자신의 죽음 앞에서 조금도 겁을 먹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조롱하는 표사트의 모습에 이븐 자토스가 불쾌함을 드러내며 물었다.
그러자 표사트가 곰벌레의 작은 발들을 꼬물대며 이븐 자토스를 가리켰다.
[네가 가진 그 무한한 지식이 과연 어디서 나왔을까?] [무슨 소리지?]뜬금없이 내뱉은 표사트의 질문에 이븐 자토스가 공격을 덜컥 멈추었다.
[당연히 나의 심오한 지식은 절대자가 정한 우주의 진리이자 모든 것의 근원이다.]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말이야.]표사트가 킬킬대며 이븐 자토스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는 너는 멍청하기 그지없는 일개 사도에 불과했는데 언제 어떻게 그런 지식을 손에 넣었을까?] [당연히 그건 내가…….]표사트의 말에 이븐 자토스는 당연히 자신의 능력으로 얻었다고 말하려다 멈추었다.
‘언제부터였지? 내가 우주의 지식을 손에 넣은 게?’
단 한 번도 떠올려 본 적 없는 질문이 이븐 자토스를 휘감았다.
표사트의 말대로 아직 어린 시절, 이븐 자토스는 몇 마리의 용이 얽혀 싸움밖에 모르는 바보에 가까웠다.
그런 그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심오한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 벌레 신의 책사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것인지 감도 잡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오래된 일이었다.
‘잠깐, 내가 기억을 못 한다고?’
우주의 모든 진리를 알고 있는 자신이 기억을 못 할 리 없었다.
당황하고 있는 이븐 자토스를 향해 표사트가 히죽 웃어 보였다.
[내가 사라졌을 무렵부터지?] […….]이븐 자토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말로 하지 못한 거였지, 표사트의 말이 사실임을 깨닫고 있었다.
표사트가 티타누스에게 구함을 받고 우주 밖 차원으로 사라진 이후,
정확히는 티타누스에게 규격 외의 힘을 전해 받고 규격 외의 지혜를 손에 넣은 이후, 이븐 자토스는 똑똑해졌다.
[이제야 알았나 보네. 네가 아는 그 지식과 정보? 내가 퍼뜨린 거야.]차원 밖에 있던 표사트가 어떻게 원래의 우주에 있던 일들을 알게 되었을까?
표사트가 자신이 지닌 규격 외의 지혜를 우주-1에 자신도 모르게 퍼뜨린 결과였다.
우주-1 전체에 규격 외의 지혜가 네트워크처럼 퍼지게 되었고 몇몇은 그 네트워크에 접속해 격을 초월하는 지식을 얻게 되었다.
이븐 자토스는 그 혜택을 가장 크게 받은 이였다.
[마, 말도 안 된다. 이 지식은 내가 스스로 얻어낸 거야! 내 거라고!] [내 규격 외의 지혜에 접속해서 얻어낸 거겠지. 즉, 너는 내 지식에 기생하며 자기 힘을 뽐내던 기생충에 불과하다는 소리다.] [거짓말!]자신의 가장 위대한 힘이 송두리째 부정당하자 이븐 자토스가 냉정함을 잃고 절규했다.
가장 위대한 지식을 깨우친 이븐 자토스가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지 못하고 영겁의 세월을 보내왔다는 굴욕에 이븐 자토스는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굴욕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쓸 만큼 썼으니 이제 돌려받아야겠어.]자신에게서 지식을 거두어가겠다는 표사트의 말에 이븐 자토스가 발광하기 시작했다.
[인정할 수 없다. 이 지식을 잃느니 여기서 모두 소멸시키겠어!]미쳐 날뛰려는 이븐 자토스를 향해 표사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표사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몸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이븐 자토스의 몸이 시간이 멈춘 듯 굳어 버렸다.
아니, 실제로 그의 사고가 멈추어 버렸다.
[네 지식과 지능은 이미 내 지배하에 들어와 있다니까.]사라져 버린 곰벌레가 아닌 이븐 자토스의 입에서 표사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현이 소중히 여기는 새로운 지구를 파괴하러 왔던 이븐 자토스는 그가 남겨놓은 마지막 한 수에 의해 자신의 몸을 빼앗기는 비참한 꼴이 되어 버렸다.
우주 전체에서 모략을 펼치며 우주 대전쟁을 이끌어가던 벌레 신의 책사 이븐 자토스의 허무한 몰락이었다.
* * *
이븐 자토스의 몸을 강탈한 표사트가 새로운 지구를 떠날 무렵, 옛 지구 터에서는 십이선과 대사도 간의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퀴에에에에엑!]“멈추지 말고 몰아쳐! 승기는 우리에게 있다!”
[파괴하고, 죽이고, 물어뜯어 집어삼켜라!]“총관님을 위하여!”
오래 이어진 두 진영 간의 싸움으로 인해 양측 모두 피해가 심각했다.
“마란륵!”
오랜 전투 속에서 지친 탓일까.
순간의 방심을 놓치지 않은 대사도의 공격에 마란륵이 튕겨 나가자 반려인 적라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그녀의 자랑이자 모든 격이 담겨 있던 마란륵의 뿔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처참하게 부서져 흩어져 버린 뒤였다.
뿔의 소멸은 곧 격의 소멸.
흰 사슴 마란륵의 육체가 회색으로 변하며 생기를 잃었다.
“크아아아악! 마란륵! 마란륵!”
반려를 잃은 적라의 눈이 붉게 변하며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용서치 않겠다. 네놈들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광기에 이성을 잃고 싸우는 적라의 푸른 털도 이미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로 붉게 물든 지 오래였다.
“태경군! 정신 차리게!”
“부오오오오!”
본신의 형태인 거대한 우주 고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태경군이 사도가 아닌 같은 십이선을 공격하고 있었다.
[크킬킬킬, 십이선도 내부의 기생충을 막을 수는 없는 모양이지?]기생충의 대사도가 심어놓은 기생충이 태경군의 뇌와 심장에 파고들어 그를 조종하고 있는 탓이었다.
“부오오오!”
“꺄아악!”
고래의 꼬리가 스쳐 지나가자 연화성모의 꽃잎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로 흩날렸다.
연화성모가 치명상을 입자 그녀의 앞에 서서 태경군을 막아선 이는 목염 선사였다.
“미안하네. 하지만 자네가 동료를 해치게 놔둘 수는 없으이!”
거대한 나무 거인의 모습을 한 목염 선사가 자신의 뿌리와 줄기를 뻗어 태경군을 묶기 시작했다.
목염 선사는 행성마다 존재하는 세계수의 일족 중에서 우주적 존재가 된 유일한 개체.
모든 던전에 존재하는 던전수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런 존재가 뻗어 내는 줄기 다발은 아무리 태경군이라 할지라도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하게 그를 옭아맸다.
“조금만 더 버티게! 옥청이 자네 몸속의 기생충을 없애 줄 거야!”
“부오오오! 부오오오!”
또 다른 십이선인 옥청 도인이 유동체로 구성된 자신의 육체적 특징을 살려 태경군의 몸속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옥청 도인이 제때 기생충만 제거하면 태경군의 정신도 다시 돌아올 터였다.
[그렇게 둘 것 같으냐?]“부오오오아아악!”
하지만 천운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대사도가 기생충을 조종하자 태경군이 더는 참지 못하고 온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목염! 안 돼!”
전신을 동원해 태경군을 옭아맸던 목염의 육체가 그의 발버둥으로 처참하게 끊어져 버렸다.
“태…경…… 정신… 차…ㄹ….”
장작처럼 쪼개져 버린 목염의 육체도 회색빛을 띠며 생기를 잃었다.
벌써 두 번째 십이선의 사망이었다.
[크하하하,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꼴이 아주 보기 좋구나!]“네 이놈!”
[크아아아악!]번쩍!
뇌전과 화염이 뒤섞인 용의 숨결이 태경군과 목염의 자중지란을 보며 웃던 기생충의 대사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네놈만큼은 용서하지 않겠다!”
티타니아를 제외하면 십이선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포뢰선의 브레스는 강력했다.
[크퀴에에에엑!]기생충의 대사도는 사도의 사기를 살라 먹으며 더더욱 타오르는 포뢰선의 브레스에 속수무책으로 타들어 갔다.
대사도의 고통의 비명이 우주 멀리까지 퍼져 갔다.
[그만! 그만!]“그만두길 원하면 어서 태경군의 기생충을 없애라!”
[뭐? 없애? 크흐흐, 크흐아아악!]기생충의 대사도는 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우는 듯, 웃는 듯한 소리를 내뱉으며 포뢰선을 비웃었다.
[저 기생충은 없어지지 않아. 내가 죽는다고 해도 말이지. 퀴힛힛힛!]보통의 권속은 주인인 사도가 죽으면 같이 죽는다.
하지만 태경군에게 심어진 기생충은 다른 사도의 권속들을 조합해서 만든 별개의 개체.
여기서 기생충의 대사도가 죽는다고 해도 태경군은 여전히 동료를 공격할 터였다.
그것을 말하는 대사도는 절망에 빠진 포뢰선의 표정을 보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
“살릴 방법이 없다면….”
포뢰선의 싸늘한 눈빛이 기생충의 대사도에게로 향했다.
“그럼 죽어라.”
[크아아아악!]화르륵.
다시 한번 쏟아진 뇌전과 화염의 숨결에 대사도가 버티지 못하고 사도의 알로 되돌아갔다.
“건방진 인간! 사도의 알을 부탁한다!”
포뢰선은 이현의 분체에게 사도의 알을 맡기고 서둘러 태경군에게로 향했다.
“부오오오!”
기생충의 대사도가 죽었건만, 태경군의 상태는 더 심각해져 있었다.
기생충이 안에서 증식한 모양인지, 태경군의 피부를 뚫고 수천 마리의 기생충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기생충의 전염은 물론, 태경군의 공격에 십이선 중에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올 수도 있었다.
“옥청! 거기서 나와라! 더는 태경군을 방치할 수 없다!”
“대사형! 하지만!”
“어서 나와!”
포뢰선의 재촉에 기생충을 제거하려 애쓰던 옥청이 어쩔 수 없이 태경군의 입 밖으로 뛰쳐나왔다.
옥청이 안전하게 밖으로 나온 걸 확인하자 포뢰선이 이를 악물었다.
‘미안하다, 태경군.’
티타누스가 죽고 티타니아가 유배당한 후, 십이선의 실질적인 수장은 포뢰선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동료를 해치려고 하는 태경군을 그대로 놔둘 수가 없었다.
“날 원망해라.”
“부오오오!”
화르륵, 번쩍!
기생충의 대사도를 태웠던 포뢰선의 숨결이 태경군의 몸을 불태웠다.
동료를 제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는 비극 앞에서 언제나 냉소적이고 괴팍했던 포뢰선의 눈에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편, 대사도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여덟 대사도 중 느아타와 이븐 자토스로 변장했던 사도는 이현의 손에 소멸했다.
그 외에도 십이선의 분투로 세 명의 대사도가 목숨을 잃고 사도의 알로 되돌아간 상태였다.
[지켜라! 알까지 소멸하는 일만큼은 막아라!] [크퀴이이잇!]이현이 사도의 알을 소멸시키기 위해 어떻게든 접근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대사도들이 필사적으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제 셋밖에 남지 않은 대사도와 세 명의 희생을 겪은 십이선.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가 공멸하는 결말뿐이었다.
서로의 피와 살을 파먹는 소모전의 끝은 다름 아닌 절대적 존재의 강림이었다.
[다 먹히기 싫으면.]모든 일의 원흉, 벌레 신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