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30)
130화. 브란트 공작가의 고민 (3)
아이작이 헤사벨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루주베르크에 도착할 무렵에서였다.
아이작은 언젠가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자신이 노르덴 항으로 가 있는 동안 헤사벨에게 붉은 살점의 선지자에 대해 조사하고 대비책을 마련해 두도록 했다.
그런 그녀가 이곳에 벌써 도착해 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또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부린 수작인가?”
“예에, 뭐 그렇지요. 아무래도 살점까지 뜯기고 추방당한 여파가 작지 않은지라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는 못하고 이런 수작질을 부리는 것 같네요.”
그녀는 이솔데를 보자마자 기겁하며 물러났다.
“우와, 이거…… 엄청 진하게 숙성됐네요. 감금된 거 아니면 이렇게 되기도 힘든데. 아니, 사실상 감금된 거 맞구나.”
“숙성?”
“보통 이 정도가 되기 전에 남자든 여자든 사랑의 결실을…….”
“아니, 그 얘기는 됐어.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왜 이런 짓을 했지? 아니, 지금은 그게 급한 게 아니군. 해주할 방법은 알고 있나?”
이솔데의 명치를 찌른 단검은 붉은 성배의 EX급 성물, 분열 예식이었다.
천사도 찢는 단검이지만 평범한 사람을 상대로는 식칼만도 못한 이 단검은, 이솔데의 살갗도 뚫지 못하고 살짝 상처 입혔을 뿐이었다.
하지만 붉은 성배의 저주든 축복이든, 이를 건드리기 위한 의식의 촉매로서는 최상급이었다. 그리고 그 의식을 도울 사람은 왈라이카 왕국의 3대 가문 중 하나인 굴마르 공작가의 후계자다.
상대가 천사라 해도 해제 못 할 이유가 없었다.
헤사벨은 이솔데의 상태를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간단하고 뒤끝 없는 방법과 어렵고 고달픈 방법이 있는데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보통 이런 경우 어렵고 고달픈 방법이 해결책이 되던데. 간단한 쪽부터 말해 봐.”
헤사벨은 실실 웃었다.
“사실 밑에서 공작이 했던 이야기가 맞아요. 이 아가씨에게 걸린 건 ‘갈애(渴愛)의 교리’라고 불리는 기적이에요. 보통 촉매를 섭취해 작용하기 때문에 사랑의 묘약이라고도 불리죠. 다만, 이야기와 달리 기적이 걸린 쪽이 사랑받는 입장이 되지만.”
“그래서?”
“해결책도 간단하죠. 다른 사람과 이어지는 것.”
아이작이 얼굴을 감싸 쥐는 사이 헤사벨은 설명을 이어갔다.
“다만 이야기와 달리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나 상관없긴 해요. 애당초 그런 목적으로 사용되는 기적이고. 하지만 여기 공작은 딸을 ‘아무나’랑 이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나 봐요. 당사자가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면 후다닥 처리한 다음 어디 파묻어버리는 편이 깔끔할 텐데, 아이작 님을 굳이 공들여 모셔온 걸 보면 어디 파묻힐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아이작은 헤사벨의 말을 끊었다.
“어렵고, 복잡하고, 고달픈 방법이나 말해봐.”
“축복에 걸린 당사자의 심상세계에 침입해 기적과 승부를 벌이는 거죠. 이 정도 강력한 축복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성질이 있으니까.”
헤사벨은 모처럼 진지하게 말했다.
“다시 말해, 붉은 살점의 선지자와 다시 싸워야 할 수도 있어요. 아이작 님,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건대 이쪽은 함정일 가능성이 농후해요.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왜 굳이 저도 아니고 이 아가씨에게 축복을 걸었겠어요?”
악마 들린 사람을 엑소시즘 하는 것쯤으로 생각했던 아이작은 의외로 쉽지 않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축복 자체가 사람을 매개로 한 부비트랩 같은 것이라면.
하지만 아이작은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쉬운 길 쪽이 함정일 가능성이 높겠지. 심상세계에 침입할 방법을 준비해.”
헤사벨은 투덜거리면서도 의식을 치를 준비를 했다.
무려 천사가 건 축복이었기에 원래라면 준비가 많이 필요했겠지만, 분열 예식 하나만 있으면 모든 조건을 생략할 수 있다.
헤사벨도 의식 수행자로서 최고의 기량을 가지고 있다. 문제가 생길 여지는 거의 없었다.
‘나만 똑바로 정신을 차리면 말이지.’
잠깐 한눈을 팔면 흐트러진 이솔데의 모습에서 야릇한 상상이 떠오를 지경이었다. 이전에 역병에 걸린 몸을 간호할 때에도 이런 감정이 안 들었는데, 기적이란 것이 처음으로 겁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다른 남자들은 무슨 짐승처럼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던데 그 정도는 아닌 것 같군. 이것도 이름 없는 혼돈의 영향인가?’
뭔가 특정한 방향으로 감정이 쏠리거나 의식이 무너질 것 같을 때면 상태창의 알림음이 들리면서 그의 의식을 바로잡아 주었다. 자신이 이 매료의 축복에 저항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일 수 있었다.
문득 듣기로는 여자도 주의해야 할 정도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헤사벨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너는 괜찮나?”
“예? 아, 뭐. 저는 천사의 과실도 이겨 냈는데요, 뭘.”
헤사벨은 실실 웃으며 답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내밀었던 그 살점을 천사의 과실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그때 느꼈던 유혹에 비해 지금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는 걸 보니, 아이작은 그녀가 얼마나 큰 유혹을 이겼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때 거울 시녀가 욕망을 제어하는 것을 도와주긴 했지만.’
그제야 아이작은 또 다른 천사를 떠올렸다.
도와주겠다면서 동맹을 제안해 놓고도 맹랑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게으른 존재.
거울 시녀에게 밥값을 요구할 시간이었다.
***
헤사벨이 의식을 준비하는 사이, 아이작은 다른 방으로 거울을 모조리 다 가져왔다. 사방이 거울에 둘러싸인 방에 서 있자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것 외에 거울 시녀를 불러낼 방법을 알 수 없었다.
“네가 날 지켜보고 있다는 거 다 안다.”
아이작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지금 이 사태도 너와 무관하지 않겠지. 할 말이 있으면 지금 나와서 이야기해.”
그러자 거울 너머에 있던 아이작의 상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다른 거울에 비치는 아이작의 상들도 제각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손톱을 다듬기 시작하고, 누군가는 의자에 앉아 몸을 느긋하게 뉘기도 했다.
똑바로 정면을 주시한 채 아이작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우리 성배기사 나으리께서는 또 무슨 일로 이렇게 배배 꼬이셨을까?”
“모르는 척하지 마. 네 놈들이 저지른 일을 수습하러 온 거니까.”
음모와 암살이 주특기인 붉은 성배 클럽에서는 천사들끼리도 모르는 계획을 서로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결국 붉은 성배의 계획 아래 굴러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녀의 의지를 대변한다 여겨지는 거울 시녀가 이 사태를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예상대로 거울 시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솔데 브라트. 아름답고, 능력 있고, 야심도 있고, 배경도 좋은 아가씨지. 왜?”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그녀에게 갈애의 교리인가 뭔가를 걸었나?”
“그 이상이지.”
거울 시녀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아이작 본인의 얼굴이었기 때문에 그 동작은 대단히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살점 일부를 먹였다. 덕분에 끊임없이 주변에서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지.”
아이작은 말문이 막혔다.
단순히 축복 이상이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또다시 자신의 힘 일부를 잃을 것을 감수하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안 할 이유가 있나?”
오히려 거울 시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솔데 브란트는 브란트 공작가의 외동딸이다. 그녀를 쟁취하는 남자는 제국을 지참금으로 가지게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지. 그녀를 조종할 수 있다면 헨드락 영지 따위보다 백배는 가치 있는 투자야.”
“헛소리 집어치워. 이솔데는 붉은 성배 클럽의 신도가 아니야. 조종하는 건 불가능할 텐데? 단순히 엿 먹이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수작이잖아.”
그 말에 거울 시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맞아. 그 말대로다.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
거울 시녀는 팔짱을 낀 채 미소 지었다.
“하지만 아이작, 네가 분노할 이유를 모르겠군. 지금 이 상황에 네가 불리할 게 있나?”
“뭐?”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너를 엿 먹이기 위해 이솔데에게 살점을 먹인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그게 그녀 혼자 생각하고 진행한 계획일 것 같나? 내가 유도한 거다. 약속한 대로 네게 선물을 주기 위해서.”
아이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선물이라고?
“말한 대로 이솔데는 배경 좋고 아름다운 아가씨야. 그리고 너는 떠오르는 영웅이자 성배기사지. 둘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수 있어. 그럼 거부할 이유가 대체 뭐지?”
아이작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이솔데를 아이작에게 ‘선물’하기 위해 이 수작질을 부렸다는 뜻이다.
심지어 정신을 잠깐 빼놓고 들으면 그럴싸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이대로 아이작이 이솔데를 취하고, 순서가 조금 바뀌긴 했지만 공작 부부의 인정을 받고, 사태를 잘 수습하기까지 하면 그가 원했던 완벽한 ‘성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붉은 성배가 권력을 취해 왔던 방식이었다.
“네 말대로 우리는 이솔데를 조종할 수 없다. 하지만 브란트 공작 가문은 강력한 가문이지. 그리고 너와 우리는 동맹이다. 그럼 네가 공작 가문을 움켜쥐게 되면 곧 우리 힘이 강해지는 것이기도 한데, 쌍방 모두 이득 아닌가?”
순간 아이작은 정면의 거울을 발로 차버렸다. 거울이 산산조각 나면서 흩어졌다.
딴청을 부리고 있던 거울들이 일제히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나를 너희 따위와 동급으로 보지 마라.”
***
거울 시녀는 잠시 말하지 않고 아이작이 분노를 가라앉히길 기다렸다. 부서진 파편 속에서 파편 수만큼 많은 아이작들이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작이 더 이상 분노를 드러내지 않자 입을 열었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듯한 태도를 보였다면 미안하구나. 평소 말투로 보아 너는 이런 식의 논리를 좋아할 줄 알았다.”
“…….”
“그럼 이렇게 말해보지. 이솔데 브란트는 네게 마음이 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너도 이솔데에게 마음이 없잖아 있어.”
“개소리…….”
“네가 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애착이 가는 장기말 정도로 보고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솔데만큼은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해. 나는 연애 전문가다. 적어도 너보다는.”
아이작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 말이 잃었지만, 거울 시녀는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이 덜떨어지는 남녀 한 쌍이 죽어도 제대로 이어질 것 같지 않았단 말이다. ‘맺어지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는 저주’가 걸리지 않는 이상 말이야.”
“헛소리 집어치워라. 내가 이솔데를 어떻게 생각하든 네가 알 바 아니야. 그럴 마음도 그럴 생각도 없어.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아이작의 완고한 거부에 거울 시녀는 한숨을 내뱉었다.
“너의 그 거부감은 비정상적이다. 알고 있지?”
“너희들 논리가 이상한 거야. 난교파티나 즐기는 흡혈귀 식인종들아.”
“그래. 네가 끝까지 싫다면 이 상황을 해결할 다른 방법을 알려주지.”
거울 시녀는 다른 방법에 대해 조언해 주기로 했지만, 그녀라고 간단 간편하게 이 상황을 한 방에 해결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가 아이작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느낌을 주어야 했다.
“이솔데가 살점을 흡수하게 해라.”
“……천사의 살점을?”
아이작은 거울 시녀가 개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가 하며 의심했다.
이전에 헤사벨에게 붉은 살점을 먹여서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뻔히 알고 있는데, 같은 짓을 이솔데에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거울 시녀는 코웃음치며 말을 이어갔다.
“완전히 제거하지 말고 약화시키라는 뜻이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사념은 제거하고 힘만 남도록. 그렇게 하면 이솔데 스스로가 살점의 힘을 흡수할 거다. 그러면 또 이런 ‘개수작’에 휩쓸리지 않도록 내성이 생기겠지.”
“그것뿐인가?”
“뭐, 미용 효과가 좀 있긴 하겠지. 재생력 강화나 힘이 생기는 건 덤이고. 하지만 붉은 성배에 대한 믿음이 티끌만큼도 없는 상태니 딱히 우리가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할 거다.”
아이작은 거울 시녀의 조언이 또 다른 수작질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또 수작을 벌여서 그녀에게 좋을 게 없었다.
거울 시녀는 어쨌든 아이작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으니까.
“그럼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또 힘을 잃겠군. 그건 상관없나?”
“분노하기야 하겠지. 그렇다고 어쩌겠어?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어차피 두고두고 씹기 좋게 나눠서 네게 줄 선물이다. 붉은 성배의 계획에 있어선 소모품에 불과하지.”
순간 거울 시녀는 똑바로 아이작을 응시하면서 속삭였다.
“그만큼이나 무희께서는 너를 좋게 보고 계신다, 성배기사. 그러니 부디 우리 관계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면 해.”
아이작은 그 말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원래 신들은 이름 없는 혼돈을 꺼려야 하지 않나? 물론 그에게 호감을 보이는 신이나 천사는 붉은 성배가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 상황이 줄곧 이어지자 자신이 아는 것과 괴리감을 느꼈다.
“붉은 성배는 혼돈을 싫어하는 게 아닌가?”
“정확히는 좋아할 이유가 없었지. 그것이 남겨온 역사를 돌이켜보면.”
거울 시녀는 눈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너라면 구분을 지을 수 있을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