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47)
347화. 악몽의 바다 (9)
물론 아이작이 호레이스의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이 그의 승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미 호레이스가 언데드가 된 이상, 죽은 십이월은 다시 또 언제고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만약 여기서 호레이스가 아이작과 맞서지 않는다면 ‘배교자’로 낙인찍힐 수 있다. 의지를 모두 빼앗기고 용서받을 때까지 노예가 되는 것이다.
배교자에게 관대하지 않은 것은 어떤 신앙이든 마찬가지다.
그리고 무엇보다 호레이스에게 그럴 생각이 없었다.
[생애에 배교는 한 번도 많다. 나는 불사 교단에 소속된 걸로 이미 소금 의회에 대한 맹세를 깨뜨렸어. 두 번은 없다.]어차피 소금 의회의 구성원이 아니게 된 이상 거짓을 말할 수 없다거나 맹세를 어길 수 없다는 강박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아이작과 처음 만났을 때 태연하게 거짓을 말하던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호레이스는 배교를 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미 언데드가 된 이상 불가능하기도 했고.
“배교하라는 게 아니야.”
[그러면?]“명예롭게 패배하라는 뜻이다. 자신이 상대에 비해 부족했음을 느끼고, 지나간 세월이나 신의 외면에 야속함을 느끼지만,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태연한 척 항복하라는 거다.”
호레이스는 그게 배교랑 다를 게 뭐냐는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차이점을 알아차렸다.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아이작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배를 넘기라고?]“전리품은 승자의 권리지. 엘릴은 그것이 신성한 절차라고 믿기까지 한다고.”
호레이스는 말없이 폭풍우 치는 수평선을 응시했다.
자신이 이 배를 넘기는 대신 그대로 좌초시켜 버리면, 아이작은 저 폭풍우를 뚫고 미르미아까지 도착할 방법이 없다. 그러면 아이작은 돌아가든가, 아니면 7차 여명군처럼 초죽음 당한 꼴로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런 꼴로 과연 소금 사막을 통과할 수 있을까?
호레이스는 7차 여명군의 의기와 사명감이 아이작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작이 꺾이지 않더라도, 그의 주변은 다를 것이다.
호레이스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정신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타륜을 놓고 커틀라스를 빼 들었다.
[감히 내게서 배를 빼앗으려고 하다니! 차라리 죽여라, 선장은 배를 떠나지 않는다!]아이작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 하나 들 힘도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장단을 맞춰 줘야만 했다. 소금 의회의 선장은 결코 고분고분하게 배를 포기할 수 없으므로.
***
호레이스의 유령선이 정지하자 에이단과 옌코스의 배도 천천히 접근했다. 그들은 이미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지만, 묘할 정도로 조용한 호레이스의 배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투할린이 그 땅딸막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훌쩍 뛰어 유령선 위에 올라탔다.
“아이작!”
유령선은 묘지처럼 조용했다.
투할린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당장 망치로 이 배를 내려쳐 박살 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랬다간 당장 주변에 있는 폭풍우가 밀려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성배기사님은 어디 계시죠? 호레이스 선장은?”
에이단과 옌코스도 배 위에 올라탔다. 그들이 아이작을 찾아 선체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갑자기 배 주변에서 물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곧바로 거센 물결을 헤치며 하나둘, 유령선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소용돌이에 휘말려 침몰하거나 박살 났던 유령선조차 그 형태를 복구해 어설프게나마 원형을 되찾은 상태였다.
투할린은 으르렁거리며 유령선들을 박살 내기 위해 망치를 높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선실 문이 열리면서 아이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저 너머의 색채에 휘감긴 두개골 하나를 들고 있었다.
아이작은 올라탄 선장들과 투할린을 보고 멍한 표정을 했다.
“뭐 하십니까?”
“아이작! 우리는 자네가 꼼짝없이…… 거기서 뭐 하고 있던 건가?”
“아, 오르카 함대에게 제독이 바뀌었다고 설명하고 인증 절차를 밟고 있었습니다. 유령선을 움직이는 유령들은 순하고 복종적이군요. 아무래도 별다른 자아 없이 ‘노예화’된 것 같습니다.”
그러다 아이작은 투할린이 들어 올린 망치와 주변에 솟아오른 유령선들을 발견하고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언데드는 없습니다.”
아이작은 배의 언데드들을 전부 바다에 내다 버렸다. 자아도 마모되고 의지도 희박해진 그들이 심해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는 알 수 없다. 고향으로 가고 싶어 했으니 걸어서라도 갈지도 모른다. 지금 불사 교단의 지배를 받고 있는 그들까지 챙겨 줄 수는 없었다.
어차피 그들의 명은 180년 전 미르미아에서 끝났다.
아이작의 말에 에이단이 입을 쩍 벌렸다.
“서, 설마…… 호레이스 선장의 오르카 함대와 7차 여명군을 복종시킨 겁니까?”
“정확히는 배뿐이지만.”
전대미문의 업적과 전리품이었지만 아이작은 담담히 말했다.
어차피 유령선은 이 바다를 통과하고 나면 쓸모가 없다. 빛의 법전 영역으로 끌고 가면 당장 불살라질 것이고, 성지 루아는 내륙 중에서도 강조차 없는 깊은 내륙이다. 그러니 딱히 가게 느껴지진 않았다.
자아를 확보한 언데드는 물론이고 노예화된 언데드조차 아이작은 확보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불사황제의 소유니까.
하지만 유령선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성물에 가까웠다. 그것은 ‘선장’의 의지에 동조해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열쇠는 전대 선장의 영혼이 깃든 머리통이다.
“호레이스 선장입니다. 마지막에 제게 패배하고 배를 넘겨주는 데 동의했지요.”
에이단은 놀란 눈으로 아이작이 든 두개골을 바라보았다.
“설마 호레이스 선장의 두개골입니까?”
“그래. 이제는 자아를 잃었지만.”
함대를 넘겨준 것은 배교한 게 아니라 ‘패배해서 빼앗긴’ 것이다. 호레이스에게는 그렇게 항변할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에게는 벌이 정해져 있었다. 호레이스의 영혼은 이제 이 작은 두개골 안에 자아 없이 속박되었다.
이제는 오르카 함대를 움직이는 성물이나 다름없었다.
아이작은 별거 아닌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물론 소금 의회인 에이단과 옌코스는 달랐다. 그는 호레이스 선장의 두개골을 핥을 것처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그들이 ‘침 바르면 내 꺼’ 같은 헛소리를 하기 전에 슬쩍 등 뒤로 호레이스의 두개골을 숨겼다.
투할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두개골을 보면서 ‘죽은 자의 유해를 삿되게 사용하여 영혼을 움직이는 짓은 좀 리치 같은데 이단인가 아닌가’ 같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곧 복잡한 고민은 뒤로 젖혀두고 세상의 화로 장인답게 ‘유용한 도구’를 얻었다고 판단하기로 했다.
“좋아.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어떻게 하기는요.”
아이작은 호레이스의 두개골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일제히 오르카 함대가 북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폭풍 밖에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이사크레아 함대를 향해서.
“우리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이번에야말로 성지를 수복해야지요.”
***
아버지는 아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벽이며 경쟁자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좌절과 권위를 배우며 성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를 꺾는 순간 아들은 비로소 진정한 아버지가 될 준비를 마친다.
다만 그것은 환생에 환생을 거듭하는 올칸 규율에서는 미묘해진다.
대부분 오크들은 부친의 혈통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부족 단위 사회에서는 혈통이 분명한 모계 사회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가장 명예로운 약탈자들, 칸의 군대에 속하게 되면 다르다. 칸은 유일무이한 아버지이자 권위의 상징이다. 칸을 보면서 오크들은 부족하게나마 아버지에 대한 개념을 배운다. 하지만 올칸 규율의 케식, 아틀란은 드물게도 아버지가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바로 현재 칸, 사훌란 칸이다.
[아틀란, 앞을 봐라.]만생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아틀란은 고개를 들어 평원 반대편에 서 있는 아버지, 사훌란 칸을 응시했다. 사훌란은 지난 이사크레아 영지에서의 패전 이후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그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적어지자, 대약탈의 진도 또한 지지부진해졌다.
패전의 충격이 큰 건지, 그가 아끼던 애마가 죽은 충격이 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오크들은 서로 속삭이고 있었다.
사훌란 칸이 더 이상 황천을 쏠 수 없게 되었다고.
[황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칸을 뽑는 것은 오로지 황천의 권한이니까. 하지만 이사크레아 영주에게 패배한 이후 사훌란 칸이 황천을 쏘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 무슨 말인지 아느냐?]“예.”
[가서 사훌란 칸을 죽여라. 그가 황천을 쏠 수 없다면 차기 칸은 네 자리다.]만생자는 담담하게 올칸 규율의 최고 지도자를 죽이라고 말했다.
충격적인 말은 아니었다. 올칸 규율은 원래 그런 식으로 칸을 교체해 왔다. 대부분의 칸들은 황천을 쏠 수 없게 되면 자결하여 자발적으로 자리를 내려놓았지만, 그렇지 못한 칸들도 있었다.
사훌란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가 아직 황천을 쏠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 마나 한 질문이다. 하지만 만생자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죽어야지. 하지만 죽더라도 앞을 보고 죽어라. 그게 케식이었음에도 칸의 명령을 거스른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다.]아틀란이 암암리에 사훌란과 노선을 달리 하고 있다는 것은 오크들 대부분이 아는 사실이었다. 아틀란이 당장 암살당하거나 처형당하지 않은 이유는 단지 만생자가 그를 아끼기 때문이었다.
아틀란은 한숨을 내쉬며 앞발굽으로 땅을 긁었다.
땅이 무르고 굴곡져 있다. 뛰기에 좋은 지형은 아니다. 사훌란이 황천을 쏜다면 두 번은 쏘고도 남을 거리다. 아틀란은 두 번이나 황천을 피하고 사훌란을 죽일 자신은 없었다.
그저 발사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
[가라.]아틀란의 거체가 튕겨지듯 앞으로 내달렸다. 콰두두두! 쏜 살과 비교해도 느리지 않은 속도였다.
사훌란은 민첩하게 황천을 들어 올렸다. 노쇠하고 주름져 보이던 팔뚝이 나이에 맞지 않게 근육질로 부풀어 올랐다. 철시가 걸린 활시위가 팽팽해졌다. 아틀란은 이를 악물었다.
거리는 반. 한 발밖에 못 쏠 거리까지 줄어들었음에도 사훌란은 좀 더 확실한 기회를 노리는 것인지, 더 가까워지기를 원하는 것인지 활시위를 놓지 않았다.
아틀란은 기합을 내지르며 황천이 겨냥하는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서로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
서로의 눈동자를 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
결국 활시위를 놓기만 해도 아틀란의 몸을 꿰뚫을 거리까지 치달은 순간.
아틀란의 만곡도가 사훌란의 어깨부터 명치까지 단숨에 갈라 버렸다.
“……!”
사훌란은 짧은 신음을 토해 내며 주저앉았다. 그의 손에서 팽팽해졌던 활시위가 빠져나갔지만, 화살은 발사되기는커녕 한걸음만큼도 날아가지 않았다. 주변에 지켜보는 시선은 많았지만 경악하거나 분노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올칸이시여, 방랑을 마치고 당신이 마련한 누런 들판으로 돌아갑니다.”
무릎 꿇은 칸은 고개를 들고 조용히 기도를 이어갔다.
“그러나 제 말이 없는 그곳은 어디든 제 천국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훌란은 짧은 유언을 마친 뒤, 몸 안의 숨을 모두 길게 토해 냈다. 그것이 그가 남긴 말의 전부였다. 이제 칸이 될 아틀란에게 남기는 조언이나 분노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이내 땅에 떨어진 황천이 그 숨결을 모두 흡수하면서 은은한 황색으로 빛났다. 역대 모든 칸들이 그러했듯, 칸은 죽으면 환생하지 않고 황천에 흡수된다. 그리하여 후대에 황천을 쥐게 되는 칸에게 힘과 지혜를 보태준다.
아틀란은 거센 숨을 토해내며 사훌란이 남긴 말을 되새겨 보았다.
‘어머니가 없는 세상으로 가고 싶지 않아서 칸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생에 미련을 가진 겁니까? 다른 신앙이 말하는 저승이라는 곳으로 갈 방법을 찾으려고?’
올칸 규율에게 우르반수스는 그저 신앙과 지혜를 약탈하기 위한 공간이다. 올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약탈하는 영광을 누린다는 이미지는 있을지 몰라도, 그곳이 영적인 안식처라는 생각은 없다.
그들에게 진짜 가치는 이 땅에 있으므로.
즉, 황천에 흡수당한 사훌란 칸은 죽어서도 그가 사랑했던 말과 만날 수 없다.
사훌란의 연인이자 아틀란의 어머니였던 그 말은 다른 천국에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아틀란의 몸에 묻은 피를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사훌란을 보좌하던 장군무당 테헤르마였다. 그는 아틀란의 어깨에 황색 담요와 묵주를 감아 주고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그제야 아틀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오크들이 그 앞에 오체투지하며 새로운 칸의 탄생을 경배하고 있었다. 아틀란은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그때 만생자가 속삭였다.
[황천을 들어.]아틀란은 시키는 대로 황천을 들어 올렸다.
[이제 칸으로서 네 첫 번째 약탈을 명해라.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황천을 쏴.]약탈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국정 운영 방향을 결정하라는 뜻이다.
유목민에게 ‘어느 방향으로 이동하는가’는 언제나 중요한 문제다. 그 방향에 일족의 생사가 걸려있으므로.
아틀란이 황천을 서쪽을 향해 쏜다면 ‘대약탈’을 계속한다는 뜻이고, 동쪽을 향해 쏜다면 다시 그들의 고향인 만 사하르 평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어느 쪽이든 쉽지 않은 길이다.
아틀란은 그 와중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아이작 이사크레아. 성배기사. 그와 칸의 군대에 패배를 안겨 준 자.
아틀란은 잠시 생각하다가 황천을 가볍게 퉁겼다.
거대한 장궁인 황천은 칸이 아니면 드는 것조차 어렵다. 활시위를 당기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하지만 아틀란이 황천을 들어 가볍게 당기자마자 유연한 갈대처럼 휘어졌다. 비어있는 활시위에 황천이 담은 힘이 느껴졌다.
그 방향에 오크들이 눈을 크게 떴다.
퉁! 활시위를 놓은 순간 굉음과 함께 빛나는 줄기가 하늘을 향해 포물선을 그렸다.
오크들은 멀어지는 빛을 응시하다가 걱정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새 칸께서 방향감각이 없는 사람은 아닌가 걱정하던 때에, 아틀란이 그들을 안심시키는 말을 꺼냈다.
“남쪽으로 간다.”
남쪽. 빛의 법전과 불사 교단이 충돌하는 땅.
성지 루아가 있는 그곳.
올칸 규율의 새로운 대약탈 방향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