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Life Returner RAW novel - Chapter 121
3 화
비록 최후의 장인 안식의 장만큼은 아니더라도.
1막도 후한 무대다.
본시 이전에는 최초와 차 순위에게 만 보상 박스가 지급되었으나,시작의 장 1막에선 99인 모두에게 포인트에 더불어 보상 박스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 실버 박스의 빛무리
가 쏟아지고 있던 시각.
선후는 핏물과 살점 그리고 털들로 온 얼굴이 범벅되어 있었다.
선후의 손에 들려 있던 불타는 검은 붉은 망토로 변하며 그의 어깨 뒤쪽으 로 내려앉았고, 선후의 눈앞에서도 골 드 박스가 연거푸 열려 댔다.
내용물 확인이 끝나자마자,정령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 벌써 퀘스트를 완료 하셨네요! 저 인도 관은 여러분들에게 감격했어요. ]선후는 메시지를 무시하며 몬스터
시체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선후가 찾고 있는 건 작고 검은 파편 이었다.
‘하필이면 크시포스 녀석들이라니.’
툴툴거릴 수밖에 없었다.
바클란 군단처럼 개체의 크기가 큰 녀석들은 마석 또한 큼지막하다.
그러나 1막 1장의 무대는 크시포스 의 영역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크시포스의 잡졸들이 몸 안에 품고 있는 마석은 선후가 찾고 있는 물건처 럼 동일하게 작았는데,감촉도 같았 다.
그 말인즉 선후가 원하는 물건을 찾
기 위해선 시체들을 일일이 다 뒤적거 려야 한다는 뜻이 었다.
그나마 태양검에 직접적으로 베어진 몬스터들은 살점까지 다 타 버려서 시 체 속의 내용물을 확인하기에 번거롭 지 않았지만.
등급이 하락된 스킬 등으로 처치한 몬스터들은,이렇듯 시체 속에 손을 집어넣고 휘저어 대야했다.
소환 둥지와 그곳을 지키고 있던 몬 스터들을 처치하는 데 들인 시간보다 시체를 뒤적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 었다.
드디어 였다.
[시공의 파편 (히든 아이템)시작의 장을 구현할 때,떨어져 나온 흔 적입니다.]
“네 놈이 먹었었냐.”
선후는 얼굴이 존재하지 않는 작은 시체에 대고 뇌까렸다.
그제야 선후는 오면서 봐 뒀던 응덩 이로 향할 수 있었다.
핏물보다도 구석구석에 낀 털들이 불쾌했다. 오죽하였으면 입 속에서도 그것들의 털이 씹힐까.
몸에 묻은 털들을 다 정 리한 후.
선후는 혹시나 싶어서 걸음을 옮겼 다.
그러나 꼼수는 차단되어 있었다. 영역이 분리되어 있어,이후의 웨이 브가 열릴 지역들에는 접근이 불가능 했다.
아직 편성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전투 자원도 분배하지 못했을 때였다.
“진정합시다!”
규범은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정령이 나타날 때마다 매번 혼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게,그동안 규 범이 생각해 온 바였다.
“우리를 죽일 거라면 진즉에 그렇게 했을 겁니다.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 겁니다. 다들 진정하시고,우리 군의 통제에 따라 주십시오!”
정작 사람들을 진정시킨 건 규범의 큰 목소리가 아니 었다.
각성 당시에 겪 었던 환상적인 광경.
박스가 열리며 쏟아진 빛무리가 그 렇게 만들었다.
그때 규범도 스킬 하나를 얻었다.
그가 얻었으면 했던 스킬은 한 민간 인 남자가 각성 보상으로 받은 스킬이 었다.
몬스터들의 시선을 잡아 끌며 신체 의 특정 부위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스킬이었는데,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스킬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후방의 탁상에서 전략을 짜야 하는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수색대대 휘하의 부하들 중 한 명이 라도 함께 진입했었다면 사정은 달라 졌겠지만,지금은 현장의 리더십이 필 요한 상황이었다.
최전선에서 적과의 교전을 두려워하 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규범은 다시 보상을 받는다 면 최전선에서 사용 가능한 스킬이어 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무참히 뭉개졌 다.
의무대에서나 다룰 법한 스킬이 주 어 졌다.
규범은 용기를 냈다.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작은 악 마에게 소리쳐서 물었다.
“스킬을 교환할 수 있습니까? 아니, 교환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까?”
정령은 규범에게 날아왔다.
규범은 정령의 오밀조밀하며 신비로 운 얼굴을 마주하면서 침을 꿀꺽 삼켜 넘겼다.
저 얼굴을 보면 경계심이 무너지기 마련이지만,정령이 만들어 놓은 시신 은 아직도 처리되지 못한 채 도로 정 중앙에 버려져 있었다.
[ 하지만 제게는 그럴 권한이 없어요. ]“그럼 누구에게 권한이 있습니까?”
[ 도전자. ]“도전자가 누구입니까?”
[ 조건을 달성하면 당신도 도전자가 될 수 있어요. ]“어떤 조건 말입니까?”
[ 그 조건을 알기 위해선 사전의 조건을 달성해야 하지요. ]“사전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 보셨지요? 모두 이 분의 적극적인 자세 를 본받아야 해요. 마음 같아선 이 분께 첼 린저 박스를 안겨 드리고 싶지만 그 또한 제게 허락되지 않아서 정말 슬프네요.(®’ 匕 I’서]
정령이 보내 오는 메시지도,정령이 작은 얼굴로 짓는 표정도 친근하기만 했다.
그래도 규범은 이 악마가 사람 머리 하나 터트려 죽이는 걸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는 점을 상기하며 긴장을 놓지 않았다.
그는 사전의 조건에 대해서 다시 물 었다.
[ 준비 시간 이전에 퀘스트를 완료한 것 도 그렇죠.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자세에 감탄해서 저도 모르게 들려 드린 거지,원 래는 여러분들 스스로 알아내야 하는 비 밀이에요. 징계를 받을지도 모르겠네요. 아직까지 징계가 없는 걸 보면 다행이지 만…… 계속 절 곤란하게 하실 건가요? ]사람들 모두에게 메시지가 가고 있 었다.
그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규범과 정령을 바라보았다.
규범이 대답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퀘스트는 이 제 끝난 겁니까?”
[ 여러분들은 훌륭하게 완수 하였습니다. 축하해요. ]“그럼 1막 2장이 시작되겠군요. 몇 막 몇 장까지 존재합니까?”
그때 였다.
와직一
정령의 얼굴이 짓뭉개졌다. 푸른 빛 깔도 핏빛으로 변해서는,화가 잔뜩 난 정령의 얼굴이 규범의 시선에 가득
차 들어왔다.
퀘스트를 확인한 규범의 얼굴 또한 와락 일그러졌다.
마을로 들어가는 중간에 어설프게나 마 바리 게이트가 만들어 졌다.
건물 외벽을 부숴서 얻은 석재들을 쌓아 만든 것으로 군인 두 명이 보초 를 서고 있었다.
한데 둘의 표정은 불안하기만 했다. 일단 소대장의 지시대로 자리를 지 키고 있다만,마을에서 진행 중인 회
의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아무래도 마 음에 걸렸다.
문득 둘은 대화를 멈췄다. 어둠 속에 서 걸어 나오는 선후를 기다렸다. 선후에게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머리칼은 말랐지만 의복은 핏물이 제 대로 지워지지 않은 채 선후의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다.
“날 기다리고 있었나 보군.”
선후가 말하자 둘은 휘둥그레진 눈 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거,거기서 꼼짝 말고 있어!”
“미안해요. 우리 군의 통제에 따라 주세요. 소대장님을 모셔 올 때까지
가만히 계셔야 해요? 아셨죠?”
선후의 예상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 는 반응이 었다. 선후는 고개를 끄덕 였 다.
바리게이트라고 해 봐야 마을로 통 하는 진입로를 완벽하게 틀어막은 게 아니라서 양옆으로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지만,선후는 군인의 지시에 따 랐다.
잠시 후 규범이 나타났다.
그는 선후에게 바리게이트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 없이,그가 직접 바 리게이트를 넘어갔다.
“우리가 봤던 메시지와 퀘스트가 동
일하게 떴을 텐데,맞소?”
선후는 고개를 끄덕 였다.
“퀘스트 웨이브를 완료한 것도 맞 소?”
“그렇지.”
“설명해줄 수 있겠소?”
“준비 시간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어. 희생 없이,내가 처치할 수 있었으니 까.”
규범은 특수 훈련을 받은 자였음에 도 어둠 경계 너머로 들어가 볼 생각 조차 못했다.
한데 눈앞의 청년은 퀘스트가 뜨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어둠 너머로 진
입했으며,퀘스트도 완료하고 돌아왔 다.
그리고 그의 의복 전체에 묻어 있는 핏물들을 보건대 상당히 격한 전투가 있었던 것을 추정할 수 있었다.
누가 그렇게 대담할 수 있을까? 그걸 떠나서 청년은 어떻게 해야 준비 시간 이전에 퀘스트를 해결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규범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한 조직 외에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시작의 장을 예견한 조직이 있었다. 그 이름은 세계 각성자 협회.
“난 당신이 세계 각성자 협회의 일원
이었다고 확신하고 있소. 틀렸소?”
“맞아. 하지만 잘 들어. 이규범 중 위.”
“잠깐. 지금은 소대장이라 통일하였 소. 당신도 그렇게 불러 줬으면 하는 데.”
선후는 규범을 빤히 쳐 다보았다.
과거와는 달라졌다.
당시의 첫 무대에서 1막 1장을 주도 했던 자는 얼굴이 제법 알려진 여성 기업인이자 정치가로,그녀의 거짓말
과 속임수에 모두가 넘 어갔었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잘하 는 여자였으며,극적인 효과로 선동 또한 잘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많은 인사들이 그렇듯 사람의 감정을 주무르는 데 대 가였던 여자.
잘못된 일에 대해서 책임을 회피하 는 실력도 걸출했던 여자.
과거에 선후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항상 긴장을 유지해야 했었다.
몬스터보다도 그 여자가 더 두려운 존재였다.
그래서 선후는 그 여자와 또 다시 같 이 첫 무대를 치르게 된다면,그 여자 의 행태를 방관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바뀌었다.
첫 무대의 사람들은 과거에 겪었던 이들이 아니었고,사람들을 규합하여 조직을 만든 사람도 그 여자가 아니라 이규범이라는 현역 군인이었다.
선후가 말했다.
“이 소대장. 난 당신이 그룹에 어떤 룰을 세우고 그룹을 어떻게 운영할지 는 관심이 없어. 잘 이끌어 가기만을 바라지. 당신도 내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내가 먼저 당신의 룰을 침
범하는 일은 없다는 말이야.”
“……왜 선을 긋는 거요?”
당신이 먼저 그었잖아.
선후는 그런 눈초리로 규범의 어깨 너머,바리게이트를 턱짓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소. 하지만 당 신,계속 당신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 군. 뭐라고 불러 주면 좋겠소? 나는 소대장이고 당신은?”
“계속 당신이라고 해. 소대장과 얽힐 일은 많이 없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당신이 저지른 일은 어떻게 책임질 거요?”
“내가 저지른 일?”
“이건 내 뜻이 아니오. 사람들의 통 합된 의견으로 봐 주시오. 당신이 퀘 스트를 완료해 준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너무 빨랐소. 당신도 인 도관의 메시지를 봤을 거 아니오?”
“사람 한 명 낙오시켜 놓으라는 거 말인가?”
“낙오가 아니라 살인이오.”
“익숙해져야 할 거야. 그것은 기분 내킬 때마다 그럴 거거든.”
“……마을에 들어올 생각이오? 당신 을 위해서라도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더】. 정리가 되기 전까지는.”
“왜.”
“다수의 의견은 당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니까 그렇소. 인도관은 준비 시간이 끝날 때까지 한 목숨을 제물로 바치길 원하고 있소. 당신이 저지른 일이니,당신의 목숨으로 해결 봐야 한다는 거요. 다수의 의견이.”
“내가 몇 사람의 목숨을 살려 줬는지 는. 그래. 알 턱이 없겠지.”
선후는 실망도 분노도 하지 않는 목 소리였다. 낙담에 가까웠다.
선후가 마저 말했다.
“희생자를 어떻게 선별할지는 이 소 대장,당신이 알아서 해야겠지. 그리 고 그때에는 다수의 의견이니 뭐니 책
임을 회피하지 말아야 할 테고. 또 나 로 결정짓는 우를 범하지도 말아야 할 거야.”
그때 규범은 정령의 일그러진 얼굴 을 바로 앞에서 목도한 것보다,선후 의 눈빛이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조언 하나 해 주지. 웨이브를 계속 대비해.”
“퀘스트 웨이브는 당신이 끝냈지 않 소?”
당신이 너무 빨리 끝낸 덕분에 이러 한 사달이 발생한 것이고.
규범은 그 말만큼은 삼켰다. 그가 선 후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느끼는 건,
더 이상 선후를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앞으로도 꾸준한 협조를 구 해야하는 인사라는 것도.
규범은 선후를 바라보며 새삼 현실 과 다른 세상에 속해 버린 걸 실감했 다.
선후가 말했다.
“네 번째 웨이브까지는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군. 하지만 다섯 번째 웨이브부터는,당신들도 싸워야만 할 거야.”
스무 명이 평균적으로 약 일주일 분 의 식량과 물을 지참한 상태였다. 하지만 98명이 이를 나눈다면 하루 반이었다.
하루 세 끼에서 한 끼로 줄이고 물도 아낀다 해도,길어야 오 일을 버틸 수 있는 분량이 었다.
다섯 번째 이상의 웨이브가 존재한
다는 걸 듣게 되었을 때.
규범은 그 문제부터 떠올랐다.
식량이 없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는 규범이 라고 모르지 않았다.
그는 선후의 젖은 옷을 바라보며 물 었다.
“저기에 물이 있소?”
규범의 시선은 어둠의 경계 면으로 향했다.
식량이 떨어져도 물만 있다면 어떻 게든 버틸 수 있다.
버티고 버텨서 1막 2장이 펼쳐지는 동시에,식량을 확보하길 바라는 것이 다.
“물이야 있지. 하지만 욕심이 과한 것 아닌가? 저긴 내가 클리어해 놓은 곳이다. 정확히 하자고. 이 소대장. 당 신이 바리게이트를 치고 나를 막아선 이후부터,저기는 내 소유가 된 거였 어.”
규범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그때 선후의 냉정하던 입꼬리가 자 연스럽게 올라갔다.
선후는 웃었다.
“앞으로는 그런 소리를 듣게 될 거 야. 내가 아니라,이후의 새로운 막과 장들에서 조우하게 될 각성자들에게 서. 물론 당신이 그때까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규범은 속으로 안도했다.
휘하에 97인의 각성자가 있지만 본 능이 말해 주고 있었다.
최대한 이 청년과는 척을 지지 말아 야 한다. 가능하면 사람들을 달래고 정리해서,마을 안으로 들여야 하는 중요 인물이다.
“같이 가 줄 수 있소? 마을 사람들은 내가 잘 다독거 려 놓겠소.”
“따라와.”
규범은 어둠을 통과하며 새로운 스 킬을 습득했다.
‘개안’이라고 하는 것인데,어둠 속
에서도 가시거리를 약 7미터 정도 확 보해 주는 스킬이 었다.
새로운 스킬을 익히며 살짝 들떴던 마음은 곧 어둠이 자아내는 공포 속에 서 짓뭉개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기괴한 식물들이 발에 밟히거나,그것들의 가시가 전투 복을 할퀴어 댔다.
규범은 스스로도 겁이 없다고 자부 하는 남자였다.
하지만 사방이 어둠으로만 가득 차 있는 공간과 뜬금없는 괴식물들이 뛰 쳐나오는 상황에서는,마치 악몽을 헤 집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규범의 심장은 좀처럼 안정되지 않 았다.
두두두.
작은 박동질이 가슴 벽을 계속 때려 댔다.
“지금부터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 해.”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했다. 곧 규 범은 선후의 상냥한 설명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들은 내장 덩어리였다.
혹은 아무렇게나 찢어발겨진 살점 덩어리였다.
가는 길마다 깔려 있었다.
확보되는 가시거 리마다 그것들이 새 롭게 눈에 차 들어오고 있었다.
규범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이 이렇게 만든 거요? 이걸 전 부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뻔한 물음이었다.
규범 본인은 많은 환경에 노출되었 던 탓에 속을 게워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생존 훈련을 한 번도 받지 못 해 본 사람이라면,여기에 들여보내기 전에 단단히 주의시켜 놓아야 할 것 같았다.
규범의 시선은 선후의 뒤통수로 고
정되 었다.
‘얼마나 강한 거지?’
자신 같은 특수 훈련을 받은 사람의 느낌이 나기도 했고.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의 느낌이 나 기도 하는,분간할 수 없는 분위기의 소유자였다.
규범은 바로 세계 각성자 협회에 대 해서 묻고 싶었지만 다른 화제로 이야 기를 시작했다.
“웨이브 때 이것들이 다 몰려오게 되 어 있는 거였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어떤 준비를 해 놨어도 소용이 없었을 것 같았다.
“그랬다면 1막 1장부터 다 전멸이었 겠지. 이것들은 단지 이 지역에 서식 하고 있는 것들이고,소환 둥지가 따 로 있다.”
“소환 둥지?”
선후의 대답은 잠시 후에나 나왔다. 선후가 소환 둥지 앞에 도착해서 말했 다.
“시스템은 악랄하지만 그래도 풀지 못할 퍼즐을 내놓진 않지. 내 생각엔 여기에서 소환된 채로 대기하고 있던 녀석들만,웨이브의 공격 부대인 것 같더군. 지금까지 거쳐 온 시체들? 그 것들은 단지 이 지역에 서식하고 있던
녀석들 같고.”
“그럼 소환 둥지란…… 이것을 파괴 해 두는 게 낫지 않겠소?”
“손끝 하나 대지 마.”
순간 선후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상냥하게 설명해 왔던 것과는 판이 하게 달라진 태도였다.
“소대장. 당신에게 내가 알고 있는 정보들을 풀어 주는 건 한 가지 이유 밖에 없어. 곧 다른 경계 면들이 차례 대로 열릴 거다. 그 지역들을 탐사하 고 말고는 내 알 바 아니지만…… 더 말해야 하나?”
“여기뿐만 아니라,다른 곳에서도 이
런 것을 발견하면 절대 건드리지 말라 는 것 같소만?”
소환 둥지가 거대 괴수의 일부분이 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선후가 유일했 다.
선후는 거기까지 들려 줄 이유가 없 다고 판단한 한편.
첫 무대를 점거한 세력이 군인 조직 이고,어느 정도 힘을 갖추면 새로운 지역들을 주도적으로 탐사할 가능성 이 높다고 생각했다.
물론 식량과 물이 떨어지면 어떤 무 대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 었다.
그런데 혹 소환 둥지를 필요 이상으 로 건드리는 참사가 벌어진다면?
“건드리는 즉시. 당신의 그룹은 전멸 이야. 명심해.”
“이왕이면 웨이브만 신경 써. 그것만 으로도 위험하고 보상은 충분하니까 여기서 확보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 봐야 한 마리당 몇 포인트밖에 없으니 까.”
언제부터 였을까.
규범은 대화의 주도권뿐만 아니라, 그 이상까지 선후에게 넘어갔음을 깨 달았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선후를 살피는 규범의 시선은 더욱 섬세해졌다.
‘세계 각성자 협회의 조직원이라는 것 외에는 신분이 명확하지 않지만 당 장은 위험 요소로 보이지 않는다. 협 조적이기도 하고. 하지만 이자가 돌변 하게 되면 말은 달라지지. 여기는…… 무법 지대야.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이 근 백 명이나 된다. 이자와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되 경계를 늦추지 말아 야겠어.’
선후를 마을 안으로 들여야겠다는 생각은 그 순간에 증발되 었다.
규범은 정중하게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계속 가시죠.”
선후가 계산했을 때.
소환 둥지가 단지 통로가 아니라,거 대 괴수의 진짜 몸체로 지하에서 몸을 일으킨다면.
그리고 그것이 시스템의 보호 체계 를 넘어서 웨이브의 보스 몬스터로 등 장한다면.
처치할 수는 있겠지만 사람들의 안 전을 도모하면서까지 싸울 수 있는 여 유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웅덩이를 제공할 것 없 이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하면 되는 일 이었지만,1막 1장의 공략법이 바로 웅덩이에 있었다.
공포를 이기고 어둠에 진입.
동시에 응덩이까지 탐사를 마칠 수 있는 전력을 갖춰야만 사람들은 끝까 지 생존할 수 있는 거 였다.
그것은 웨이브를 방어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선후는 웅덩이를 제공하고 위험 요 소를 알려 준 것으로 마을 일에서는 관심을 완전히 꺼 버렸다.
때문에 규범이 선후에게 조심스럽게
여러 가지를 물었지만 들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도 없었다.
둘은 어느 순간부터 말없이 걷기만 했다.
규범이 할 수 있는 건 선후의 뒤를 따르면서, 이정표로 삼을 수 있게끔 가지를 쳐 나가는 게 전부였다.
어둠의 경계 면에서 나왔을 때였다.
바리게이트 쪽으로 적지 않은 사람 들이 규범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한 남자가 바리게이트를 훌 쩍 뛰어 넘어 냅다 달려왔다.
성일이 었다.
“니미,난 찬성 못 혀!”
성일이 규범에게 다짜고짜 소리를 높였다.
“무슨 일입니까?”
성일은 선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몇 번이나 말했지 않소. 내 말은 귓 구녕으로 쳐 들은 거요? 각성 보상에 대해 알려 준 게 이 짝이란 말이여!”
“니미럴 퀘스트를 끝내 준 것도 이 짝인디,사람 없다고 마음대로 죽이니 살리니 그러는 거! 참말로 양심도 없 는 거여! 몬스터한테 진짜로 뒈져 봐 야 알랑가 모르겄네. ”
성일은 선후에게도 말했다.
“그 짝 목숨을 내놓으라고 아주 지랄 염병들 떨고 있구만!”
“권성일 씨. 그리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규범이 선후와 성일 둘 모두에게 말 했다.
특히 선후를 향해서는 미소를 띤 건 아니었지만,거짓이 담기지 않은 눈빛 으로 하소연하듯이 했다.
이 사달의 원인은 제한 시간까지 한 명의 목숨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임의 로 한 명을 낙오시 키겠다는 작은 악마 의 경고가 있어서 였다.
선후는 피식 웃어 버 렸다.
그러고는 규범에게 아무 감정 변화 없이 말을 내뱉었다.
“결정은 언제나 어렵지. 하지만 이 소대장. 그걸 해 왔던 게 당신의 이전 직업이기도 하였으니,다른 사람보다 어렵진 않을 거야.”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사태를 진정시키기 전까지 바리게이트 안으 로 접근하지 마십시오.”
“열불이 좀 뻗쳐야 말이지. 내볼 때 는 그 개…… 큼큼. 인도관이 장난치
고 있는 거여. 그 짝 곤란하게 맹글려 고,안 그려?”
“마을로 안돌아갈 거요?”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라고. 저 기에 있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 르겄어. 다들 지 대가리 소중한 것만 알지. 눈깔 돌아서는. 씨벌.”
성일은 씩씩거렸다.
선후와 규범이 어둠 지역에 있던 동 안에도 회의는 계속됐었다.
한 명의 제물을 어떤 기준으로 판별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공통적으로 선후가 지목됐지만,선 후를 어떻게 도모할 것인지를 두고 말
들이 많았다가 새로운 기준 이야기가 나왔다.
가장 나이가 많은 자.
물자를 하나도 내놓지 않은,그러니 까 가진 것 없이 맨몸으로 진입하면서 두 개의 보상에서도 모두 스킬을 얻은 자.
혹은 제비뽑기로 하자느니,비밀 투 표에 부쳐 보자느니.
성일의 표현에 따르자면 규범이 없 던 그 회의는 아무 말 대잔치에,지랄 난장판이었다.
그러다 결국에는 처음의 결정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단독 행동으로 이 사달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 다.
“그래도 소대장이 사람이 됐네. 글 치? 막아 주고 있잖어.”
성일은 선후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성일의 예상보다 선후는 분 개하지 않았다.
선후를 처음 봤을 때,그 기분 나쁜 표정이 전부로 한 번씩 피식거리는 게 다였다.
“준비는 해 둬야 할 거여. 소대장도 마음 바꿔 먹으면,그 짝 목숨이 위험 혀. 소대장도 사람이잖어. 봐봐. 그것
들이 달려들면 저 안으로 도망쳐 야…… 겠지?”
“그럴 일은 없을 거요. 당신이야말로 이해가 안 되는 사람입니다. 공동 표 적에게 합류하면,당신도 표적이 된다 는 거 모릅니까?”
“그러니까 전 여편네도 이 성질을 못 이겨서 도망쳤지. 흐흐. 사람이 성질 다 죽여 가면서 살 수는 없는 거여.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 내 지론은 그려. 나는 권성일. 알고 있지?”
“스킬이나 들어 봅시다. 특성은 아직 뜨지 않았겠고.”
“특성이 뭔지는 모르겠고 스킬도 없
어. 아이템하고 인장이 떴었는디 군인 들이 다 가져갔으니께. 그래도 저쪽 사람들 통틀어 근력 수치는 내가 제일 높던디? 근력 수치가 힘이잖어. 남자 는 힘 아녀?”
“큭큭. 나는 나선후요.”
“아따,그 짝이름 참 비싸구만.” 선후의 기분 나빴던 표정이 한결 풀 어지고 있었다.
선후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권성일 씨의 생각보다 비싼 이름 맞 습니다. 다시 묻겠는데 정말 날 따라 다닐 거요? 목숨이 매 순간 위험해질 텐데도?”
“말이 좀 거시기 하긴 한데. 그려,따 라 댕길 거여. 저 짝에 있는 것보단 그 짝이 훨씬 믿음직스럽구만. 아까는 혼 자 튀어서 미안혔어”
“그럼 나도 그 표현 좀 빌립시다.”
“응?”
“거시기 하긴 한데,앞으로는 날 오 딘이라 부르십시오.”
“오…… 딘?”
“내 실명은 지금 듣고 잊어버리는 겁 니다.”
성일은 몹시 피곤했다.
하지만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불도 없이 노숙해야 하기 때문이 아 니었다.
작은 악마가 띄워 놓은 제한 시간 때 문도 아니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아들 녀석의 얼굴 이 아른거리는 게 가장 컸다.
전 여편네야 이혼 당시 자신의 호언 장담과는 달리,동네 마트에 취직하면 서 거기에 있던 노땅과 연애도 하고 용돈도 받으면서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 녀석은 아니 었다.
사춘기였고, 자신은 이혼 뒤에 해방 감을 느끼기보다는 이들 녀석에게 그 간 신경 써 주지 못한 것이 계속 마음 에 걸려 왔었다.
그러던 통에 난리가 난 거였다.
“거시기 말이여.”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
또 말이 짧았다. 본인을 오딘이라고 부르라고 한 뒤부터 줄곧 그래 왔다.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던 어린 아그 의 반말도,몇 번 듣다 보니 썩 거슬리 지 않았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앞으로 생사고 락을 함께할 사이인데 나이가 무슨 상 관일까.
그러고 보면 어설프게 이것도 저것 도 아닌 사이로 있는 것보단 이편이 나은 것 같았다.
그래,친구 먹는 거다.
“바깥 시간이 멈춰 있다는 거 말이 여. 그 짝들이 그렇게 말했잖어. 텔레 비에서도 봤구만.”
“봤으면 준비를 했어야지.”
“했어도 군인들한테 다 됐겼을 텐 디?”
“그거야 결과론적인 이야기고.”
“가만 보면 그 짝은 가방 끈이 참 긴 것 같어. 세계 각성자 협회인지 머시 기인지 말고,사회에서는 뭘 했어? 직 업이 있을 것 아니여.”
“펀드매니저.”
“내 오딘을 딱 보고 그럴 줄 알았당 께. 그런데 무슨 얘기하다 여기까지 왔지?”
“시간이 멈춰 있다는 것까지. 가족이 신경 쓰이지?”
“왜 안 그러겄어. 머리에 피도 안 마
른 아새끼들까지 데려다 놓았잖어. 다 른 곳에 기철이가 있을지도 모르는 거 아녀. 권기철. 내 아들이여.”
선후는 고개를 끄덕 였다.
시작의 장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사들,즉 정장을 입은 독사들의 생 존률은 꽤나 높았다.
그들에게도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 긴 하다.
하지만 그들은 가족이 아닌 본인 위 주의 삶을 살아온 자들이 었고,그들의 대단한 생존 욕구는 오로지 자신에게 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보통의 아버지와 어머니들
은 성일과 같았다. 남겨진 가족에게서 힘을 얻었다.
‘그리고 정장 입은 독사들에게 이용 당하기 일쑤였지.’
부하 직원을 협박하고 자기에게 이 득이 되는 상관에게는 아첨하는 것에 능한 자들이 권력을 쥐었을 때,그들 은 군부 독재의 것보다 더한 짓들을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잘도 저질러 댔었 다.
그래서 선후는 군부에 억한 심정이 남아 있을지언정.
이규범 중위가 첫 무대의 권력을 잡 은 걸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극한의 상황에선 사람들이 뭉쳐 그룹을 만들기 마련이었고,누군 가는 권력을 쥐기 마련이니까.
선후는 상념에서 빠져나오며 성일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자식 걱정이 가득한 여느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각성자로 선택되는 가능성은 매우 낮다.”
“알어. 아는디.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거잖어.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시스템은 대체 무슨 기준으로 선별한 거여. 이 소대장 같은 치들이나 싸그 리 데려다 놓지.”
“더 궁금한 점은?”
“그러니까 이 지랄을 다 통과하고 나 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여?”
“그래.”
“……거참 부럽구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몬 나도 진작 각성됐으면 오죽 좋아.”
“늦지 않았어. 조금도.”
나지막한 그 목소리에 성일은 어쩐 지 불안함이 엄습했다.
선후가 마저 말했다.
“매 순간 목숨을 걸기에 말이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씨벌. 잠 도 안 오는디 가자고!”
성일이 경계 면 너머의 어둠을 응시 하며 침을삼켰다.
“아직은 아니야. 그러니까 시간 났을 때 어떻게든 자 둬.”
“근디 자도 괜찮을까? 제한 시간 안 에 마무리되지 않으면 우리도 머리 터 질 수 있는 거 아녀?”
선후는 알림 창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제 제한 시간까지 1시간 남짓 남았 다.
30분까지는 기다려 볼 생각이었다.
그러고도 소대장이 상황을 정리하지 못한다면,선후는 직접 끝내 놓을 생 각이 었다.
당연히 집행 대상자는 그룹의 리더 인 소대장이다. 그래도 그룹은 처음에 만 혼선을 빚을 뿐 곧 문제없이 돌아 갈 것이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 퀘스트 ‘제목 없음’ 이 완료 되었습니다. ]‘정리됐군.’
퀘스트 이름부터가 성의 없는 데다 보상 또한 없는,문자 그대로 장난질
에 불과한 퀘스트였다.
사실 선후는 조금 뜻밖이 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어쨌거나 이 퀘스트를 완료 했다는 점이었다.
한 명의 희생자를 선출해서 이를 집 행한다는 것은 어지간히 마음을 독하 게 먹지 않고서는 못할 노릇이다.
정장을 입은 독사들은 개의치 않고 감행하겠지만,선후가 보고 판단했던 소대장은 그런 싸이코패스가 아니었 다.
지금 당장은…….
다른 하나는 희생자를 선별하고 집
행할 때까지 한 번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은 점에 있었다.
만약 제비뽑기로 선별했다면 제비뽑 기에서 자신과 성일을 제외한 것을 들 며 이런저런 요구를 해 왔을 일 아닌 가.
잠시 후.
바리게이트 너머에서 규범이 젊은 군인 한 명을 대동한 채 나타났다.
얼굴에는 고통스런 감정이 끈적끈적 하게 달라붙어 있었고,입은 평소보다 악물려 있었다.
선후는 희생자를 선출한 방법이나 집행 과정이 궁금하지 않았다.
선후는 이미 규범의 전투복에서 몇 방울의 핏물이 튀어 있는 걸 발견했 다.
선출 방법이 무엇이든 집행은 규범 이 직접 한 거였다.
“하나 협조를구할게 있소.”
“뭐지?”
규범은 대동해 온 젊은 예비군에게 눈짓했다.
해병대 붉은 명찰에 써진 이름은 한 대주였고,그의 명찰에도 핏물이 튀어 있었다.
한대주.
전역하자마자 사달이 일어났고 예비 군 동원령이 떨어졌었다.
대주는 그때 소집에 응한 것을 천만 다행으로 여겼다.
만일 소집에 응하지 않고 탈영병 신 분으로 낙인찍혔다면, 직전에 집행당 한 건 자신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살려 달라고 울고 짜는 그 녀석의 얼 굴이 계속 생각났다.
아직도 그 녀석의 체온이 손아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을 비롯한 3인이 녀석을 건물 뒤 쪽으로 끌고 갔고,그것의 목에 단검 을 찔러 넣은 건 소대장이었다.
대주는 무서운 소대장을 힐끔 쳐다 보며 당부를 상기했다.
“대주야. 또래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고 높임말을 써. 알겠지?”
바로 직전에 사람의 목에 칼을 찔러 넣은 사람의 목소리라기엔 꽤 침착하 고 상냥했었다. 그래서 더 무서운 목 소리였다.
대주는 소대장에게서 선후에게로 시 선을 옮겼다.
“그건……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뭐지?”
선후가 대답했다.
“웨이브 말입니다. 이게 디펜스 게임 과 비슷하다면 처음에는 쉬운 난이도 가 아닙니까?”
“게임?”
“예.디펜스게임.”
“차라리 ‘F1’을 누르지 그래.”
“예에?”
선후는 규범에게 데려온 예비군을 치우라고 말했다.
대주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멀어 지자,규범이 먼저 말했다.
“다섯 번째 웨이브가 아니라,다음
웨이브부터 우리 군에게 맡겨 줬으면 하는 겁니다. 우리 군에도 실전이 필 요합니다. 그리고 꼭 그 이유만이 아 닙니다.”
선후는 진득하게 설명해 주려다가 그만두었다.
“피차 개입하지 않으면 서로 얼굴 붉 힐 일없어. 소대장.”
“정중하게 협조를 요청하고 있는 겁 니다.”
“이런 건 협조 요청이 아니라 통보라 고 부르는 거다. 소대장. 다시 말해 주 지. 우리는 서로에게 개입하지 않는 다. 나는 당신의 그룹에,당신은 내 그
룹에. 서로에게 관심 끄고 다음 장까 지 가자고.”
[ 첫 번째 웨이브 만큼은 아니지만 이번 에도 준비 시간을 넉넉하게 드렸답니다. 전에 보여 주었던 모습을 기대하고 있을 게요. 아참, 북쪽의 건물에 있는 분들은 안 전한 곳으로 대피해 주세요. ] [ 2차 웨이브까지: 19시간 59분 59초. ]북쪽의 건물들이 소리 없이 증발했
그 자리로 기존에 없던 도로가 확장 되며 새로운 경계 면이 나타났다.
선후가 성일을 데리고 바리게이트를 넘어 마을로 들어온 것도 바로 그때였 다.
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적 나라했다.
적대시하는 마음이 노골적으로 드러 나있다.
몇몇 예비군이 둘에게 접근하려 들 자, 규범이 그들을 저지하며 선후에게 뛰어왔다.
“말이 다르지 않습니까. 예고도 없이 불쑥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겁니다.”
선후는 걸음을 그치지 않으며 말했 다.
“남쪽은 당신들에게 양보해 주지. 그 대가는 이번 웨이브가 끝나고 다시 이 야기하도록 하고. 일단은 바랐던 실전 준비나 잘해 두는 게 좋을 거야.”
“걱정할 것 없어. 북쪽 하나 정리해 놓는다고 해서 웨이브가 중단되는 일 은 없으니까.”
곧 선후와 성일은 북쪽의 경계 면 속 으로 사라졌다.
규범은 골치가 아픈 얼굴로 그쪽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군인들을 모았다.
건물을 더 부숴서 남쪽의 바리게이 트를 확실하게 만들어 놔야 했고.
인장과 아이템 등의 전투 물자들을 배분해 놓은 것에 이상이 없는지 검토 해야 했으며.
비전투원들에게도 전투 발생 시의 명확한 지침이 필요했다.
바쁘게 상황을 통제하고 있던 규범 은 문득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전투원이고 비전투원이고 상관없이 그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황급히 고개를 돌리기 일쑤 였다.
예비군들 사이에서 돌았던 이야기가 어느새 모든 사람들에게 퍼져 있었다.
괴물과 싸우지 않아도 될 일을 소대 장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놓았다고 말이다.
실제로 규범의 귀에 그런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규범은 단호했다.
사람들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사람들이 환호할 일이라고 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민간인으로서 그리고 전역한 예비군 들의 마음가짐으로는 그것이 당연하 니까.
지금부터라도 다시 만들어 나가는 거다.
시간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 2차 웨이브까지: 0시간 5분 00초. ]정확히 오 분이 남은 시각.
바리게이트 뒤쪽.
전투원들이 대열을 끝낸 곳에서였 다.
원거리 스킬들이 있지만 재사용 시 간이 길어서,사실상 백병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
규범은 제일 선두로 걸어 나왔다.
치유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지만,현 장의 지휘관으로서 충실하게 전투에 개입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거라는 판 단 하에서였다.
전투 쪽으로는 누구보다 준비가 되 어 있는 자신이 아닌가.
육신도 정신도.
모두의 시선은 시간이 빠르게 줄어 드는 알림 창으로 향했다.
이윽고 준비 시간이 전부 소진되었 다.
“너 희들은 할 수 있다!”
[2차 웨이브가 시작 됩니다. ]‘온다!’
어둠 속에서 몬스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공처럼 살이 찐 모습으로 털 을 날리며 달려오는 그것들은,영상 매체에서 봤던 그 끔찍한 모습과는 판 이하게 달랐다.
달려오는 속도도 그렇게 빠르지 않 았다.
토실토실. 뒤뚱뒤뚱.
애완동물로 삼아도 이상할 게 없는 귀여운 모습이었다.
규범은 아차 싶었다.
심혈을 기울여 고조시켜 놓았던 분 위기가 흩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규범이 소리쳤다.
“이 새끼들아! 긴장 풀지 마!”
하지만…….
규범은 이 불길한 느낌을 잘 알고 있었다.
선후와 성일이 경계 면에서 걸어 나 왔다.
전투가 막 끝나 있었다.
수습하지 못한 시신이 크시포스 시
체들과 아무렇게나 뒤섞여 있었고,죽 은 사람들의 시신은 처참했다.
얼굴이고 몸이고 죄다 뜯겨서 온전 한 시신을 찾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성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만 지옥을 겪고 나온 게 아니었다!
부상자들이 자아내는 신음 소리와 피비린내가 작은 마을 하나를 통째로 지옥 구덩 이 속에 처박아 놓았던 것이 다.
생존자들은 선후와 성일을 향해 넋 이 나간 눈만 끔벅 거 려 보였다.
그 광경을 본 성일의 두 눈에 눈물 이 핑 돌았다.
동시에 다리도 휘청거렸다.
그가 보상으로 띄운 둔기로 몸을 지 탱하며 선후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성일은 어둠 속에 서 선후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대부분 선후는 성일의 가시거리 밖 에 있었다.
하지만 성일은 사방에서 쉴 새 없이 들려왔던 몬스터들의 비명 소리만으 로도 선후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 었다.
그렇기 때문에 드는 생각이다. 소대 장이 마지막 순간에 오딘을 붙잡았다 면?
그랬다면 이 생지옥이 펼쳐질 일은 없었다.
“도와줘야겄어.”
선후는 거기까지 말리지는 않았다. 선후 또한 제대로 몸을 눕히지 못한 부상자와 시신을 수습하는 데 한 손 걷어붙였다.
그래도 전사자는 당장의 처참했던 첫 인상보다 적 었다.
“흐미. 그나마 다행이구만.”
비전투원으로 배정됐던 사람들은 급조한 대피 시설 안에서 멀껑했다.
그들도 성일이 부상자들을 돕고,선 후가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하자 건물
밖으로 나오며 각자 할 일을 찾아 나 섰다.
선후가 수습한 시신은 총 열세 구였 다.
죽은 시신 모두가 전투복을 입고 있 었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 해 싸웠던 자들이 정말로 목숨을 잃었 다.
선후는 생존자들의 시선이 자신에 게 쏠리던 시점에서 성일에게 다가갔 다.
“이만하면 할 만큼 했다. 지금 가야 돼.”
새로운 경계 면이 새로 하나 열린
상태였다.
그 지역을 정리하고,나머지 두 곳 에 소환된 채로 다음 웨이브를 기다리 고 있는 몬스터를 정리하려면 지금 떠 나야 했다.
성일은 선후의 시선을 쫓아 새로운 경계 면을 바라보다가,문득 든 생각 이 있었다.
시신이 수습되어 있는 쪽으로 뛰어 갔다.
“이렇게 가 버릴 거 뭐 그리 빡시게 사셨소. 당신 가족들이 참 불쌍허요.”
성일은 코를 훌쩍이면서 등을 돌렸 다.
그의 등 뒤에는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있어도,중위 계 급장만큼은 원래 모습 그대로 전투복 에 부착되어 있는 시신이 가지런히 눕 혀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