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Life Returner RAW novel - Chapter 171
18화
‘언제 오시는 겁니까.’
이태한은 생각에 잠겼다.
그분의 심복,권성일이 터줏대감처 럼 버티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권성일이 위엄을 떨치는 건 전장에서뿐.
협회 내 정치 싸움에 힘들어하는 기 색이 역력할뿐더러,무력도 그걸 상쇄
할 만큼 절대적이지 못했다.
제일 강한 남자면서도 정치적 공격 이 그에게 집중되고 있는 것은 결국 그가 자초한 일이 었다.
권성일은 인정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 왔다. 냉철하지 못한 판단들로 분쟁을 도리어 키워 버리는 일도 있어 왔다.
권성일은 약점이 많은 인사.
그렇다. 권성일은 그분처럼 구심점 이 될 수 없었다.
그분의 과거 업적들로 붙들고 있기 는 하다만 사실 협회는 뒤집어진 퍼즐 판처럼 조각날 수 있었다.
그분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이 은 밀히 돌고 있기도 하고.
협회의 영향력이 바깥까지도 이어질 거란 걸 다들 모르지 않는지라,권좌 를 도모하려는 움직임이 꾸준히 있어 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이 최종장에 1 진영으로 진입한 순간이란 거였다.
‘이제 와서 분열되어 봤자 위험할 뿐 이지.’
이태한은 내부에서 외부로 생각을 옮겼다.
거기서도 같았다.
[ 1진영: 레볼루치온 (12) – 92,991 명 2진영: 세계 각성자 협회 ⑴ – 74,555 명 3진영 : 투모로우 (21) – 73,002 명 4진영 : 레볼루치온 (30) – 69,800 명 5진영 : 투모로우 (19) – 54,252 명 6진영: 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 -43,901 명7진영 : 레볼루치온 (28) – 42,824 명 8진영 : 레볼루치온 (42) – 39,665 명 ]
모든 진영이 구(舊) 협회,그분에게 서 시작됐다.
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 또한 그분의 터전.
그러나 이태한은 여전히 불안했다.
그분 없이는 단지 혈통만 같은 것이 다.
본시 같은 혈통들 간의 싸움이 더 치 열한 법이지 않은가?
오래전.
이태한 본인도 진짜 칼을 겨누지 않 았을 뿐,그보다 더 날카로운 서류들 로 제 누이의 팔다리를 베어 버린 경 험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걸 탄생시킨 아버 지.
구원자 오딘이 복귀하지 않으신다면 골육상잔의 참극은 예정된 상황이었 다.
필시 몬스터 군단들과의 전쟁 이전 에 내전(內戰)을 치르게 될 것이다. 이태한의 생각이 깊어지고 있던 때.
“동상. 아직도 죽상인 거여?”
천막 안으로 체구 큰 중년인이 들어 왔다. 성일이었다.
이태한은 성일의 짜증 섞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군. 또 무슨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려고.’
“전비는 갖춰놓았습니까?”
“시킨 대로 하긴 했지만 그게 더 프 리야…… 고 쓰벌년에게 힘을 실어 주 는 짓이여. 엿 같은 소문들을 퍼트리
고 다니는 게 고년들이라니까. 걸리기 만 하믄 진짜 확 그냥.”
“권성일 씨. 못마땅해도 참고 넘어가 시죠.”
“사석이나 공석이나,그 짝이 그렇게 선을 그어 대니까 고것들이 우리 사이 를 허투루 보잖어. 어떻게든 틈을 비 집고 헛바닥 나불거리려 바쁘지. 아니 검은 눈깔 굴려 대는 건가.”
“언제는 안 그래 왔습니까.”
“이해는 하는디,화딱지나 뒤져 버릴 것 같아서 하는 소리여.”
“저도 구원자께서 살아 돌아오실 거 라 믿습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백번 준비해 놓아도 부족한 때입니다. 우리끼리 얼굴 붉히지 맙시다.”
“내 말이. 고년들도 ‘우리’라는 게 더 엿 같은 거여.”
성일은 이태한의 앞자리에 마주 보 고 앉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됐고. 서둘러야 않겄어? 길드명부 터 구리고 만만한 거 있잖어. 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 다른 진영들에서도 고것부터 노리려 들 거여.”
“고걸 시작으로 하나씩 먹어 들어가 자고. 동상. 오딘께 선물 드려야지. 내
말 믿지? 오딘은 돌아오신다. 반드 시.”
“그렇지 않아도 제가 직접 가려 했습 니다.”
“동상이 자릴 비우면 여긴 어짜고. 나대기 좋아하는 년 있잖으. 사람 홀 리는 게 고년 재주라는디,어디 한번 잘해 보라지.”
이태한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게 성일의 한계였다.
만일 프리야 군단장이 6진영 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의 리더를 포섭하는 데 성공하면 그녀에게는 더 큰 힘이 쏠리 게 될 것이다.
이태한은 심사숙고 끝에 프리야를 불렀다.
어쨌거나 최종장을 앞에 두고 최대 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무대를 통일해 야 한다.
그러나 자신을 제외하고 나면?
최종장까지 독자적으로 올라온 그룹 의 리더를 상대로,그녀만 한 적임자 가 없었다.
무대가 막 합쳐진 준비 기간들은 언 제고 날이 서 있기 마련이었다.
사소한 시비도 그룹 간의 전면전으 로 치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프리이는 그녀의 부 군단장 과 단둘이서만 떠났다.
“옛 생각 나게 만드는군요. 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이라니.”
부군단장이 말했다.
프리야는 그에게서 다양한 감정을 느꼈다. 원한도 있고 동경도 있고 회 한도 있었다.
다만 너무 오래된 이름인 만큼,그 감정이 그렇게 진하지는 않았다.
“나는 조나단 그룹과 직접적인 접촉 은 없었다.”
“미국에 계셨을 때였겠군요.”
“그들의 계좌를 사용했었다는 것 정 도가 다였다. SOB(Sun of Bank),
“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은 탐욕스럽 고 무도덕한 집단입니다.”
“시작의 날에 보여 준 모습은 달랐 지. 그들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못 할 일이었고,할 수 있다고 해도 어지간 한 도덕 관념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 었으니까.”
“그래서 조나단 헌터를 시작의 날의 영웅이라 합니다만 제 생각은 다릅니 다. 프리야 님. 그들의 탐욕을 잊으셔 서는 안 됩니다. 돌아갈 날이 머지않
았습니다.”
“좋아. 옛날이야기를 하기엔 시기가 나쁘지 않다. 계속해 봐.”
곧 최종장이다.
최종장이 끝나고 나면 그 옛날로 돌 아간다.
돌아가서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조금 씩 준비해 둬야 할 때였다.
“조나단 그룹이 출혈을 감수하고 세 계 경제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은,그 정도로 지켜야 할 게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세계의 부를 질리언 그룹과 양분하 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거라면. 솔직
히 따분해. 새로운 걸 말해 봐. 나도 모를 만한 사실들을.”
“그들이 미 달러의 발행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떻습니까?”
미 달러를 발행하는 주체가 미국이 아니라 소수의 가문들이라는 건 유명 한 이야기였다.
“조나단 그룹이 그렇게 역사 깊은 회 사가 아닌 걸로 아는데?”
“08년 서브 프라임 사태 이후. 로트 실트 및 기타 가문들의 미 중앙은행 지분이 그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극 비에 부쳐진 일이라 대중들에게는 알 려지지 않았습니다.”
“조나단 그룹의 영향력이 질리언 그 룹을 압도하겠군. 이미 조나단 그룹의 이름을 쓰고 있는 자들이 최종장에 진 입한 것만 봐도,그들은 우리와 함께 신세계의 주역이 될 자격이 있지. 6진 영의 리더는 조나단 투자 그룹의 최고 이사 중 하나일 것이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저와 면식이 있는 자일 수도 있지요.”
“어쨌든 그들이 미 달러의 발행권을 차지했다고 해서 탐욕 덩어리라고 할 순 없다. 자본주의하에서 그 일은 꿈 에도 그리던 왕좌를 차지한 일이니.” “그 때문이 아닙니다. 국제자연기금
이라고 아십니까?”
“말해 봐.”
“개발도상국들의 환경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기금이라는 게 대외적으로 알려진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조나단 그룹의 탐욕성을 절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환경 보호라는 취 지하에 개발도상국들의 토지를 갈취 해 왔습니다. 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 이 전 세계 육지 면적의 3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어떻게 생각하십 니까. 거 기에는 모국의 토지도 있습니 다.”
“잘 아네. 관계자였던 모양인데,너
는 그걸 반대했었고?”
프리야는 부군단장이 모국 인도의 정부 부처에서 일했던 사실을 떠올렸 다.
그녀와 같은 브라만 계급 출신의 고 위 공직자였던 사실도.
“생명의 위협을 달고 살았던 시절이 었습니다.”
“조나단 그룹 대단하네. 나가면 조나 단 헌터를 죽여. 그럼 어느 정도는 해 결되겠지.”
“그들의 자본력에 넘어가지 않을 각 성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바깥은 결 국 돈으로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그게
조나단 그룹이 만들어 낸 탐욕의 결실 입니다. 자신들이 세운 질서를 지켜 냈지요. 6진영을 구축한 것을 제외하
고도……
“너는 그게 문제다.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질 못해.”
“죄송합니다.”
이후로도 프리야와 부군단장은 옛이 야기들을 간간이 나누며 계속 이동했 다.
그러던 며칠 후.
프리야는 6진영, 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의 영토에 들어섰다.
수도로 이용되고 있는 거주 지역 부 근에서였다. 프리이는 도무지 시선을 거둘 수 없는,경악스러운 파티를 목 도했다.
아시안 커플에 키가 멀대같이 큰 사 람한명.
그렇게 셋으로 이루어진 파티였다. 처음에는 아시안 여성이 안고 있는 크 시포스 졸개에 눈길이 갔었다.
그런데 키가 큰 사람의 정체가…….
네크로맨서 의 로브로 모습을 감추고 있던 까닭이 있었다.
그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껏 다른 이들의 눈은 속여 왔을
지 몰라도,자신의 감응 능력까진 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진하지는 않지만 몬스터에게서만 느 낄 수 있는 원시적인 흉폭성이 있었 다.
프리야는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렸 다.
로브 후드를 채우고 있는 어둠을 꿰 뚫어 봤을 때.
비로소 턱에 수염처럼 매달려 있는 촉수들이 로브 가슴 안쪽으로 늘어트 려져 있는 걸 발견하고야 말았다.
턱주가리 촉수. 이족 보행.
마루카 일족의 귀족이 아닌가?
“왜 그러십니까.”
“돌아다니지 말아야 할 것이 돌아다 니고 있다.”
부군단장은 프리야를 따라 시선을 멀리 가져갔다.
“마루카 일족이 !”
“아시안 여자는 크시포스 졸개를 안 고 있기까지 하지. 길들인 건가?”
“탈 것으로 취급되지 않는 이상에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그건 그렇고 마루카 귀족을 저대로 놔둘 순 없다.”
“진정하십시오. 어떻게 저런 게 가능 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분명한 건 6
진영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란 겁니다. 저희 둘만으로는 위험합니 다.”
“마루카 귀족이 부랑자 둘과 동행하 고 있다. 교류를 하고 있다는 거다. 사 고를 유연하게 가져 봐. 저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채가 떠오른 프리야의 두 눈이 반 질거 렸다.
탓시
그녀는 부군단장이 말릴 틈도 없이 달려 나갔다.
인간과 교류하고 있는 보스급 몬스 터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가까이 접근해도 다짜고짜
공격해 올 일은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 문이었다.
원시적인 흉폭성이 왜 그렇게 진하 지 않았나 했더니, 몬스터에게서는 느 낄 수 없는 온순한 감정이 이를 짓누 르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믿기지 않게도 사회화가 진행 된 몬스터가 있다니. 그것도 보스급 몬스터가!
횡재 였다.
그 이면에 깔린 비밀을 들춰낼 수만 있다면 첼린저 박스에서도 내놓지 못 하는 힘을 얻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 었다.
프리야는 아시안 커플에게 접근하면 서 대화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대화보다 그들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게 확실했다.
마루카 귀족과 어떻게 동행하게 되 었는지.
물론 이는 엄연한 공격 행위지만 마 루카 귀족과 동행하고 있는 아시안 파 티는 별 볼 일이 없는 자들이 었다.
운이 좋았다.
설사 마루카 귀족이 돌발 행동을 보 여도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거기까지가 프리야의 처음 계획이었 다.
하지만 목전까지 거리를 좁혔을 때 였다.
프리야는 아시안 여자가 안고 있는 크시포스 졸개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 을 받았다.
자연스럽게 그 졸개와 눈이 마주친 순간.
흡!
프리야는 들여 다보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건 그녀가 의도한 일이 아 니었다.
겪어 왔던 모든 몬스터를 통틀어 가 장 공포스러운 감정을 전해 왔던 것은 직전의 네크로맨서 였다.
그러나 고작해야 크시포스 졸개 따 위에서 전해져 온 감정이 그 이상이었 다.
그렇게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그 안으로 던져진 것이었다.
‘안 돼……
기 억을 들여다본다는 건 대상의 1인 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사실 기억을 들여다본다는 표현보다는,대상의 눈으로 그 기억이 품고 있는 당시를 관찰한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크시포스 졸개의 단편 기억 하나는 거대한 얼음 성채를 배경으로 시작됐 다.
주위는 그야말로 얼음뿐인 대지였 다.
이상한 건 모든 사물들이 작았다는 점이다.
살짝 발을 들었다가 놓기만 해도,깔 려 죽을 만큼 거기에 군집해 있는 생 명체들도 작았다.
곧 깨달았다.
그것들이 작은 게 아니었다.
기억의 주체가 보통 이상으로 거대
한 것이었다.
굽어 내려 본 아래에서 오는 것이라 곤 겁 먹은 시선들뿐이다.
크시포스 군단의 모든 생명체들이 떨고 있었다. 그리고 기억의 주체는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얼어붙어 있는 거목들을 밀쳐 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쿵쿵!
프리야는 견딜 수가 없었다.
기억의 주체가 품고 있는 포악한 감 정은 언제라도 폭발하여 세상을 찢어 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억을 들여다보는 것인데 감정까지
전해져 온다?
그 정도가 어찌나 파괴적으로 끝까 지 치달아 있었는지,프리이는 결국 한계에 도달했다.
뇌리에서 뭔가가 뚝 끊기는 느낌과 함께 육체적인 고통까지도 바로 부딪 쳐 오는 것이었다.
“으악!”
평상시와 달랐다. 몬스터와 감응이 끝났다면 그 폭력적인 감정을 전투에 서도 활용할 수 있을 만큼 달고 나오 는 게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공백이었다. 프리이는 온몸이 떨렸다.
“너,정신계군.”
프리야는 그렇게 말하는 아시안 남 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도 익히 아는 한국어였다.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자신이 정신계임을 알아보고 도태연해?
이것들의 정체는 대체 뭐란 말인가. 프리야는 마루카 귀족은 물론 크시 포스가 있는 쪽으로도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그녀가 집중한 것은 아시안 남자의 두 눈이 었다.
원래는 마루카 귀족과 관련된 기억 을 쫓아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무슨 까닭에서인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프리야는 남자의 수많은 단편 기억 중 하나로 흘러 들어가 버 렸다.
“자자. 지방 방송 꺼줄래?”
어느 교실 안이었다.
전체적으로 들뜬 분위기였다.
기억의 주체는 창가 쪽,제일 뒷자리
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교단에 서 있는 여선생의 얼 굴이 낯익었다.
그럴 수밖에 없게도 바로 직전에 본 얼굴이었다.
공포스러운 크시포스를 껴안고 있던 아시안 여자. 체구가 작은 것도 같았 다.
추정해 보자면 기억의 주체인 아시 안 남자는 학생 신분이었고 여자는 선 생이었다.
아시안 커플은 바깥 시절에 이미 인 연이 있었던 사제 관계였던 것이다.
“계속 떠들면 반 배정된 거 안 알려 준다?”
아시안 여자가 교단 위에서 종이 하 나를 흔들고 있었다.
그러자 한국의 어린 학생들이 금세 조용해졌다.
그때 아시안 여자는 만족스러운 미 소를 지으며 기억의 주체와 시선을 마 주쳐 왔다.
아시안 여자가 교단에서 내려온 건 그 직후였다. 동시에 교실 내 한국 학 생들이 이쪽을 향해 몸을 돌리는 것이 었다.
틀에 찍어 붙여 놓은 것처럼 모두가 무표정인 얼굴이 었다.
그래서 사람 같이 보이지 않는 얼굴 들이다.
표정도 기이했지만 더 기이한 건 그 들의 움직임이었다.
미동조차 없었다.
눈 하나 깜박거리는 것 없이 이쪽을 쳐다보는데 그대로 시간이 정지되어 버린 듯한 광경이다.
소리도 없었다.
그러던 문득.
“즉. 즉즉……환장하겠군.”
기억의 주체가 흘리는 웃음소리만이 퍼지기 시작했다.
시선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아시 안 여자에게 맺혀 있었다.
교단 위에서와는 달리,아시안 여자 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무표정보다 더한 살의로 응어리져 있 었다.
그 눈빛만으로도 목이 날아가 버릴 듯한데, 기억의 주체는 여전히 웃음만 을 흘리고 있었다.
무슨 기억이 이따위란 말인가.
이게 현실에서 이뤄질 수 있는 일이 란 말인가.
뭔가 잘못됐음을 확신했을 때 아시 안 여자가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살의는 직전,크시포스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것보다 강렬했다.
아시안 여자가 이쪽을 내려다보며 뇌까렸다.
“어디서 죽을래?”
그녀의 목소리가 요동쳤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프리야는 깨달았다.
“묻고 있잖아. 여기야,바깥이야?”
그 목소리는 비단 여자의 입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모든 학생들 의 입에서 다양한 목소리로 나오고 있
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겹쳐진 목소리들이 라 기괴한 느낌이 다분했다.
공포스러운 악몽으로 가득 찬 공간 이다. 여긴!
프리야는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으윽
그러나 아시안 여자의 시선이 자신 을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갇혀 버린 것이었다.
지금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 머리로 는 이해가 되지만 마음으로는 아니었 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 인가.
기억의 주체가 한 마디 뇌까렸다.
“기다려. 내 진영 쪽에서 온 것 같다. 확인가능하지?”
그렇게 남자의 말이 흩어지던 순간 이었다.
이쪽을 노려보는 아시안 여자의 눈 동자가 새까매 졌다.
그런 현상은 프리야 자신도 익히 알 고 있는 바였다.
아니나 다를까,아시안 여자도 정신
계였던 것이다.
그것도 자신을 압도할 수 있을 정도 로 강력한 정신계!
배경에 균열이 생겼다. 유리창 깨지 듯 단번에 깨져 버렸다.
한국의 국기가 걸려 있던 벽이 가죽 천막으로.
나무 바닥은 오래된 핏물들을 머금 은 땅으로.
한국의 어린 학생들의 얼굴은 구울 의 것처럼 시든 근육들을 멸어트렸다. 그러고는 이내 그 위로 새로운 얼굴을 드러냈다.
협회장 이태한과 권성일을 비롯해
협회 지도층 인사들의 얼굴.
순간에 변해 버린 장소는 떠나기 직 전에 가졌던 회의 속이었다.
‘역으로 내기억에 들어왔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런 게 가능하다고?’
하지만 모든 게 멈춰 있다.
이 기억의 주인은 자신이지만 통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시선은 진입 된 그대로 협회장 이태한을 향해서만 고정돼 있는 것이다.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단 두 사람뿐 이다.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아시안
남녀 둘뿐.
둘은 시간이 정지되어 버린 듯한 그 안을 돌아다녔다.
협회 지도층들의 얼굴을 하나씩 확 인하는 거로 보였다.
여자가 말했다.
“이자가 리더인 것 같은데 누구야?” “이태한. ”
“어쩐지 낯이 익어.”
“바깥에서도 유명했던 자였으니까. 기억에 남아 있을지도. ”
“연예인? 아아…… 일성 그룹?”
“그래. 그자다. ”
“다행이지 않아? 성일이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무장 상태들이 좋아. ”
“괜한우려였군.”
“그렇다니까.”
자신을 묶어 두고는 속 편하게 하는 소리들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항변하기에는 정신이 난도질당하는 느낌 이 찌릿찌 릿했다.
남자 쪽의 언행에는 크게 자극받는 게 없었다. 그러나 여자가 움직이거나 말을 할 때면 끔찍했다.
갈고리로 뇌리를 긁어 대는 듯한 고 통이 일어 댔다.
하지만 그 고통을 표현할 길이 다 차 단되어 있는 게 더 고통스러운 일이 다.
짓늘려 있는 그대로 속으로만 으아 아아악,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 댈 뿐.
가상의 공간에서도 자신은 다른 형 상들처럼 멈춰 있는 채였다.
고문이었다.
정신계로 군림해 오면서 기존의 각 성자들과는 다른 영역의 존재라 자부 해 왔으나,정작 자신의 정신 세계 안 에서 이런 지경에 이르렸다는 것이 믿 기 어려웠다.
프리야의 비명 소리가 그녀 안에서 만 맴돌았다.
“그럼 이년은 어떻게 할까? 네 진영 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던 것 같은 데.”
아시안 여자의 시선이 프리야에게로 돌아섰다.
그때도 프리 는 속으로만 아우성쳐 대고 있는 중이었다.
정황상 떠오르는 이름은 하나였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 이름.
오딘!
그가 살아 있는 것이나,여기에서 조 우하게 된 일도,그리고 악마적인 능 력으로 자신을 압도하고 있는 아시안 여자도.
기존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만 일어나고 있었다.
어찌 됐든 프리〇는는 준비가 되어 있 었다.
이 구속이 풀린다면 아시안 커플에 게 바로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할 준비가.
하지만 가능할까?
지금껏 들어 온 오딘은 도전을 용납 하지 않는 자였다.
또한 알고 했든,알지 못하고 했든지 간에 도전의 빌미가 되는 것은 남겨 두지 않는 자였다.
사실 그게 맞는 일이었다. 하나하나 사정 봐주면서 다 눈감아 주다간, 결 국엔 그러한 사건들이 맞물려 역풍으 로 돌아오기 십상이니까. 인간은 그런 족속들이다.
그래서 자신도 화근은 결코 남겨 두 는 일이 없지 않았던가.
‘그래도 제발.’
이윽고 오딘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제 앞에 섰다.
피곤이 찌든 이태한의 얼굴을 쳐다
보던 시선이 자신에게로 돌려졌다.
“너,이태한이 제법 공# 들여 왔던 것같군.”
그때 처음으로 프리야는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들었다.
그것도 잠깐.
남자의 서늘한 눈빛이 변함없는가 싶더니 남자와 여자가 몇 마디 주고받 는 것이었다.
마침내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기 시 작했을 때,그때 프리01는 그녀의 눈 동자 속에서 교수대를 보고 말았다.
그건 환상이 아니었다.
배경이 또 바뀌기 시작했다.
‘안 돼에에에……
스르르一
사람들은 먼지처럼 흩어져서 사라지 고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어둠만이 채 워졌다.
이윽고 프리ofe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밧줄을 느꼈다. 아슬아슬하게 발 판을 딛고 서 있는 와중에서도,벌써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밧줄이 숨통을 막고 있었다.
여자는 당장에라도 발판을 차 버릴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었다.
더 소름 끼치는 것은 발판을 차고 싶 어 안달이 난 여자의 시선이었다.
그 목소리도.
“네 입으로 직접 말해봐. 진실을. ”
숨통을 틀어막고 있던 밧줄이 살짝 풀렸다.
프리야는 뜨거운 숨을 확 내뱉으며 황급히 입술을 뗐다.
“정신 지배만 통한다면 산 오 딘이든 죽은오딘이든,알게뭔가.”
‘어? 어?’
프리야는 두 눈부터 허둥댔다. 갈피 를 잃고 순간에 흔들렸다.
언젠가 머릿속에만 담고 있던 생각 이었지,자신이 하려 했던 말은 그게 아니었다. 프리야가 변명을 하려던 그 때였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작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밧줄이 목을 죄어 오는 동시에 여자 가 발판을 차 버 리는 광경이 눈앞에서 번뜩였다.
중심이 아래로 확 쏠렸다. 전신의 무 게가 밧줄에 턱 걸렸다.
그러며 점점 멀어지는 소리 하나.
“건드릴 사람을 건드려야지.”
아시안 여자의 분노 치민 목소리였 다.
정신세계에서 빠져나왔을 때. 처음 들어온 광경은 계집의 눈동자가 위로 말려 가는 움직임이었다. 그러고는 힘 없이 무너졌다.
“응? 아는 년이었어?”
연희가 내 시선을 따라오며 물었다.
“그럴지도.”
목숨이 붙어 있다.
눈도 깜박거리고는 있으나 이지를 상실해 버린 눈이었다.
나는 그 눈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최종장에 군단장으로 진입한 여자 정신계라면 이악일 가능성이 높 지 않을까.
이악(그惡)은 원체 알려진 게 없었 다. 이미 연희가 ‘이지스의 시선’을 차 지한 마당에 다시 출현할 가능성도 전 무했다.
다시 출현한다면 한 가지 경우밖에 없는 것이다. 연희가 죽은 이후에나 등장하는 것 말이다.
어쨌든 계집이 이악이라면,팔악팔 선 열여섯 중 다시 대면하지 못한 인 사는 이제 아홉이 남는다.
팔선 진영에서는 일선,삼선,오선, 육선 넷.
팔악 진영에서는 삼악,사악,오악, 육악,칠악,팔악 다섯이다.
그것들 모두 하나로 이어진 이 땅 어 딘가에 있는 것이다.
특히 일선과 육선의 경우,주력인 스 킬을 내게 선점당한 상황에서 어떤 모
습으로 나타날지 가 궁금하다.
과연 많은 변화가 있었던 지금에까 지 살아 있기는 한 것인지.
애초에 2막 1장 당시. 상위 무대로 찍힌 곳에 속해 있거나 지휘하고 있었 다면 그것들도 함께 증발되 었겠지만.
그때 연희의 시선이 반대편으로 돌 아갔다.
“저쪽에 꼬리가 달려 있어. 알고 있 지?”
계집의 동행인은 멀리서 사태만 주 시하고 있었다.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 지 않았다.
감각을 조금 더 끌어올리자.
쏴•아악-
마치 빠르게 질주하는 듯한 속도감 과 함께 녀석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눈 에 들어왔다.
녀석도 나를 바로 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느낌을 받고 있는지,신중하게 계산하고 있는 눈빛이 었다.
녀석의 시선이 우리 뒤쪽으로 이동 하기 시작했다.
녀석이 몸을 돌려 버린 그때는,한 무리의 각성자들이 빠르게 접근해 오 고 있던 때였다.
“Chida?”
옆. 검은 후드 안에서 오르까의 목소
리가 흘러나왔다. 계집이 연희의 공격 에 뇌사나 다름없는 지경이 되어 버리 기 직전의 사건 때문이었다.
오르까뿐만 아니라 크시포스의 본능 또한 건드린 것 같았다.
오르까가 딛고 선 주변이 습기를 머 금기 시작했다.
질척거리는 오염 정도가 급속도로 확산되며 기포들이 툭툭 터져 올랐다.
한편 크시포스도 연희의 품을 박차 고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나단이 없을 수도 있어.”
우려와 함께 결단이 선 목소리였다.
연희의 무대에서는 그랬다.
레볼루치온이 라는 이름을 달고 있기 는 했지만,정작 그룹의 현 리더는 레 볼루치온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인사였 다.
6진영,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도 그 럴 상황일 경우엔 바로 점거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미 끌어올려진 감각이 다가오고 있는 공격대장의 모습을 확 잡아당겼 다.
이마를 덮고 있는 억센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어서 그녀의 얼굴 이 제대로 보였다.
얼굴뿐만이 아니다.
연희와는 반대로 길쭉길쭉한 골격에 글래머러스한 모습도 기억과 일치했 다.
당시의 네임드들이 다 그랬듯,이름 대신 진이라는 코드명으로 알려졌던 여자.
오악(五惡).
그녀를 떠올리는 순간.
그녀보다도 언제나 그녀의 앞을 가 로막고 있던 강력한 소환물부터 생각 나는 것이었다.
조나단의 생사가 걱정됐다.
타닷!
오악을 향해 달려 나갔다.
가만히 서 있어도 좁혀질 거리라지 만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오악이 본 시대와 마찬가지로 강력 한 소환물을 얻었을지언정,나는 그것 과 함께 오악의 목을 쳐 내 버릴 준비 가 끝나 있었다.
가까워진 오악의 면전에 대고 이를 갈았다.
“조나단 헌터…… 살아있어야할 거 다.”
오악에게서 대답이 나오는 그 잠깐 의 시간이 참 길게 느껴졌다.
“저는 올리비아라고 합니다. 오딘이 시지요?”
본 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공손한 태도였다.
그렇다고 대답한 순간 오악에게서 후광이 비치는가 싶었다.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새 로우신 주인님.”
그렇지 아니한가. 누구의 친우인데, 오악에게 당했을 리가.
바로 그때였다.
날다시피 빠르게 거리를 좁혀 오는 또 하나의 기척이 있었다.
화르르륵!
화염으로 휘감아 도는 선풍을 동반 하고 있는 사내 였다.
서로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 리에서 였다.
一썬…… 오래 기다렸다.
그가 동반하고 있는 화염만큼 뜨거 운 전음이었다.
내 가슴 속 깊은 구석까지 뜨겁게 채 워 들어오는 것을 보면.
조나단은 굉장한 무게감을 달고 왔 다.
시작의 장 이전과는 물론,본 시대와 비교해도 달라져 있었다.
전성기를 조금 지난 사자 같은 풍모 였다. 지배에 익숙해진.
그의 입가에 머금어진 희미한 미소 에서 우리가 함께하지 못했던 세월들
이 체감됐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이 추억을 쫓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렇게 보였을 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내게 향하는 얼굴에서만 그랬다.
제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릴 때의 표 정은 냉혹했다.
거기에서 나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본 시대의 고독한 야수가 지금에 이르 러서는 공포의 군주로 군림하고 있던 것이다.
一조나단. 마지막이 돼서야 만나게 되는군.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
一긴 시간이었지.
조나단의 시선이 내 어깨 너머로 넘 어갔다. 그는 연희에게도 눈인사를 건 넸다.
둘은 첫눈에 서로를 알아보는 것 같 았다.
지금의 연희가 과거의 연희가 아니 듯이 조나단도 마찬가지로.
시작의 장은 둘 사이에 공감할 수 있 는 이 야기 가 많은 공간이 었다.
조나단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돌려 졌다.
과묵했지만 눈빛만큼은 수다스러웠 다.
안다 알아.
내게도 들려줄 이야기가 많겠지.
한편 주변이 술렁거 렸다.
왜인가 했더 니 오르까 때문이 었다.
마스터 구간에 진입하지 않았다면 오르까의 위장,네크로맨서의 그 로브 안을 꿰뚫어 볼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실제로 조나단 그리고 오악과 그녀 를 보좌하고 있는 사내 외에는 오르까 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러나 오르까 주변으로 오염된 습 지가 녀석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 을 시사하고 있었다.
다들 경험이 많은 자들 아닌가.
툭툭 터지고 있는 저 기포 안에서, 언제라도 마루카 일족의 사생아들이 태어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 다.
“주인님?”
오악이 다소 긴장된 목소리로 조나 단을 불렀다.
조나단 역시 해후의 감정을 깨고 나 왔다. 그는 사냥꾼의 눈빛을 띠기 시 작했다.
공략 여부를 가늠하는 눈초리 였다.
一네 일행처럼 다뤄지는 것으로 보 이는데,아닌가?
-일행이 아니다. 펫이지.
-마루카귀족이?
조나단은 나와 오르까를 쳐다보더 니 소리 없이 웃었다.
一특전? 마리의 공능?
一둘다 아니야.
-그럼?
-두들겨 패서 굴종시켰다.
-……여기에 진입한 후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깨닫게 되었지. 썬,너와 마 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는지 말이 다.
우리들에게 천대를 받아서 그렇지 오르까는 엄연히 마루카 일족의 귀족 이다.
최소 마스터 구간의 각성자를 리더 로 한 정규 공대가 전력을 다해야만 맞설 수 있는 몬스터 .
첼린저 구간의 각성자일지라도 능력 이 충만치 않은 초입이라면,단 일인 만으로는 힘에 부친 것이 바로 오르까 인 것이다.
그런 것이 인간의 영토 안에 버젓이 들어와 있다. 충분히 소란스러울 만했 다.
하지만 곧 조용해졌다.
조나단이 천막을 걷으며 들어올 때, 바깥에서 이쪽을 홀깃 쳐다보는 오르 까의 얼굴도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 다.
조나단이 안고 온 철함에서 꺼내 보 인 것은 위스키 한 병이었다.
탁!
조나단이 위스키를 탁상에 내려놓았 다.
이 진영의 사람들이 오르까를 본 것 처럼,연희와 나는 그것을 그렇게 바 라보았다.
연희가 먼저 말했다.
一조나단. 당신이 첼린저에 진입한
것보다도 놀라운 일이야. 바깥 것이 아직도 남아 있어?
一오늘이 올 거란 걸 믿어 의심치 않 았다. 덕분에 횡재했잖아.
-다른 방향으로 섬뜩한 구석이 있 구나?
-누가 할 소릴.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작 둘의 표정 에는 좋은 기분이 서 려 있었다.
그때도 위스키가 또다시 내 시선을 잡아 끌었다.
해진 상표가 유독 그랬다.
남아 있는 부분들은 거떻게 굳어진 핏물들로 더럽혀져 있다.
구태여 한 병에 3만 달러를 호가하는 최고급 위스키라서가 아니다. 조나단 이 무슨 의미로 이것을 간직해 왔는지 알 것 같았다.
본 시대에서 내가 품에 끼고 다녔던 아버지의 통장처럼 조나단에게는 이 것이 그의 부적이었던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시작의 장을 꾸준히 준비하고 A급 아이 템들로 풀세 팅 하고서 들어 왔을지 라도. 누구나 그렇듯 조나단도 매 순 간이 투쟁의 연속이 었을 것이다.
얼굴이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었기 에 특히.
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에 원한을 가 진 자들이나 그렇지 않은 자들도,그 를 다양한 방법으로 시험해 왔을 것이 다.
一드디어 까게 되는군.
조나단이 위스키를 개봉했다.
이 세계의 곡주에서는 나올 수 없는 향이 금방 터져 나왔다.
一레이디 퍼스트.
다음 차례가 나고 그 다음이 조나단 인 순으로 술이 한 바퀴 돌았다. 의도 하지 않은 바였지만 레벨 순서대로였 다. 연희 559레벨,나 551레벨,조나 단 482레 벨.
그렇게 위스키가 몇 바퀴 더 돌았다.
그러면서 진행된 이야기가 꽤 있었 다.
조나단이 연희에게 말했다.
一그럼 너는 2회차에 도전하지 않은 거로군.
一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수 도 있어. 개자식들이 어지간히 많아야 지.
-그 계집도 그중에 하나인가? 완전 히 병신으로 만들어 뒀던데.
프리야를 말하는 거 였다.
— 뭐 하려고 수습했어? 객사하게 내 버려 두지. 개 쓸모없는 년이야.
“홋.”
조나단은 육성으로 짧은 웃음을 뱉 었다.
그러고는 연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과 함께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마리. 너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나 버렸다. 하지만 너도 그렇고 나도 그 렇고,여기는 우리를 어지간히도 피로 물들여 버린 것 같군.
수사자의 갈기와도 같았던 긴 금발 이 뒤로 넘어가며,그의 두 눈을 분명 하게 드러냈다.
이런 우리가 나가서 적응할 수 있을 까? 그런 말을 토해 내는 눈이었다.
조나단은 위스키를 한 모금 더 삼켜 넘긴 후 내게 건넸다. 거부하지 않았 다.
점점 자신을 풀어 버리는 조나단을 말리지도 않았다.
연희와 나는 이런 시간을 많이 가져 왔었지만,그는 수십 년 만에 처음이 다.
언제나 공포의 제왕으로만 자신을 억눌러 올 수는 없는 법.
그에게는 오랜 친우에게 푸념할 시 간이 절실해 보였다.
연희부터가 느낀 게 있었던지,그에 게 충분히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
었다.
그런 것이다.
조나단은 이 시간을 위해 지금껏 버 려 온 거다.
그래서다.
오늘 하룻밤쯤은 내 친우를 위해.
일부러 취하려고 노력했다.
성일처럼 무턱대고 양으로 승부하려 하지 않았다. 고작 한 병이라서 한 모 금 한 모금에 집중했다. 우리는 얼큰 하게 취해 버렸다.
홍조가 피어오른 연희의 얼굴에는 어느덧 농염한 여인의 색기를 동반하 고 있었다.
조나단은 중심이 기운 자세로 낄낄 댔다. 나와 연희를 번갈아 보면서 박 수도 치면서 말이다.
술기운에 주위 풍경은 물에 빠진 수 채화처럼 이지러졌다.
참지 못하고 연희와 키스를 나눠 버 리자,조나단은 더 크게 웃어 젖혔다.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축하한다! 축하해! 크하하하핫- !”
얼마나 큰 소리였던지 오악이 우리 를 확인하러 들어올 지경이었다.
조나단이 말했다.
“꺼져라. 올리비아.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다.”
그의 주력 스킬.
염마왕의 강림이 그의 손아귀에서 활활 타올랐다.
내 스킬,염마왕의 길과 같은 신의 이름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조나단의 주력 스킬은 첼린저 박스에서 띄우고 성장시킨 만큼 상위 호환 격인 성향이 강했다.
5레벨의 숙련도에도 불구하고 세계 가 파멸할 때 일어난다는 불,그 겁화 (却火)처 럼 잘도 이글거 렸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그는 오악이 나간 후에도 불길을 거 둬들이지 않았다.
휘아아악一! 획획!
광대의 능수능란한 묘기처럼 천막 내부에 휘감아 돌렸다.
“이 런데도 구려? 흐흐홋.”
“구려. 구려. 한참 모자라.”
내가 말했고.
“꺄하하핫. 구리대. 안된다니까. 아 무리 졸라도 소용없어. 나도 안 되는 걸,조나단 네가?”
연희가 맞장구쳤다.
혀 꼬부라진 소리들이 얽혔다. 이처 럼 들뜬 분위기는 정말이지 오랜만이 었다.
시간이 흘렀다.
연희는 비틀거리는 몸으로 내게 쓰 러져 왔다.
그때도 일부러 그러는 거였다. 조나 단의 시선 따위를 의식할 연희가 아니 었다.
연희가 내 무릎에 앉았다. 어느새 낚 아챈 술병을 수직으로 기울이며 떨어 지는 마지막 방울에 혀까지 날름거리 면서 였다.
조나단도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취기에 흔들리는 중심을 즐기려는 것 같았다.
흐느적흐느적. 그의 목소리도 그렇 게 나왔다.
“이게 진짜 파티지. 구골 녀석들은 우리한테 한참을 배워야 해. 기껏해야 콜걸이나 불러 댄 것으로 파티가 빛날 줄알어?”
“구골이라니. 대체 언제 적 얘기야. 그걸 다 기억하고 있는 거냐.”
“으음…… 콜걸은 또 무슨 얘기일까. 아주 재미나게 노셨나 봐요?”
연희는 날 골려 먹으려는 눈빛을 띠 었다.
장난기로 범벅진 눈매는 머지않아 헤픈 웃음으로 실실거 렸다. 나도 따라 서 웃었다.
조나단은 일부러 그걸 언급한 게 분 명하게도,술기운으로 가늘어진 눈을 연신 껌벅거리며 박수 치고 좋아했 다.
전쟁이 끝난 것 같았다.
옛날,평화의 세계로 돌아간 것 같았 다.
흐릿해진 시야.
그리고 얼룩처럼 번져 있는 다양한 사물들 사이.
거기로 들어오는 두 사람의 웃음 띤
얼굴이 그렇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어지간히들 하지. 애인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어?”
“왜. 올리비아,예쁘던데. 너하고 잘 어울려 보였어.”
“흐흐흐.”
“그나저나 우리 염마왕께서 위엄을 갖춰 놓아야 할 때가 아닐까?”
연희가 말했다.
“위엄은 개나 줘.”
우리 모두는 뇌리를 거치지 않고 나 오는 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연희의 그 말이 끝났을 때였다.
미간을 좁혀 들어가자 천막 입구에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이 보다 확연해졌 다.
충격에 휩싸인 오악이다.
그녀는 풀어진 조나단의 모습을,둠 카소의 화신을 처치한 일악처럼 쳐다 보고 있었다.
당시 카메라에 잡혔던 표정이 딱 저 거였다.
다 죽어 가는 와중에서도 둠 카소의 화신이 도망치는 것을 보고 저렇게 경 악했었다.
그런 얼굴이 그녀의 주인에게 향해 있었다.
조나단이 그녀를 돌아보자,오악은
얼굴에서 황급히 표정을 지우며 고개 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급히 전해 드 릴 일이 있습니다.”
나만이 아니었다.
연희도 조나단도 파티를 끝내야 할 시점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둘의 피부가 드러난 곳. 그러니까 특 히 얼굴에서 약간의 증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알콜 냄새가 잔뜩 스며들어 있는 증 기다.
나한테서도 마찬가지인지라,증기가 아래에서 위로 시선을 뿌옇게 만들며
사라졌을 때.
좋았던 기분도 날아가 버 렸다. 흔들리던 중심은 바로 섰다.
연희는 내 무릎에서 내 려왔다.
조나단 또한 위스키를 들고 오기 전 으로 돌아왔다.
공기 가 무거 워 졌다.
순간 오악은 거기에 짓눌린 듯 얼굴 이 경직되었다.
“상황은?”
“다양합니다. 대규모 병력을 대동해 온 곳도 있고, 길드장 본인이 소수의 공격대만 이끌고 온 곳도 있습니다.” 오악은 그 사실을 몹시 분하게 여기
는듯했다.
모든 진영 중 가장 만만하게 여겨진 세력이 자신들이라는 것이.
반면에 조나단은 태연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오악의 시선이 조나단을 따라 내게 로 왔다.
“올리비아.”
나는 그녀의 실제 이름으로 불러 주 었다.
오악이나 진대신.
“예.새로우신 주인님.”
그녀가 조나단을 의식하며 대답했 다.
“네가 본래 내 휘하에 속해 있었던 것처럼 그것들에게도 예정된 운명이 있다. 네가 할 일은 어렵지 않다. 그걸 다시금 깨우쳐 주는 것이지. 오딘의 이름으로 각 진영의 리더들을 여기로 소집 시켜라.”
“오딘의…… 이름으로 말씀이십니 까?”
“그래. 나, 오딘의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