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Life Returner RAW novel - Chapter 18
4 화
묘지조차들어오지 않았다.
그만큼 험준하다는 뜻이다.
우성하니 칼 선 잡풀들이 내 허리를 훌쩍 뛰어 넘었다. 이름 모를 가시나 무와 참나무들은 오르는 길마다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것들이 스치며 남긴 잔 상처들에 선 벌써 피가 얕게 배어져 나오는 중
이다.
또 땅은 어 지간히도 미끄러웠다.
눈이 녹고 언 땅에 다시 눈이 소복이 쌓였다. 지면의 위험함이 육안으로는 분간이 되지 않는다.
과거처럼 정부의 명령을 받은 군인 들이,우리 각성자들을 던전 입구 까 지 끌고 가는 일은 없었다.
수십 년 전의 여기는 그때와는 너무 도 달랐다.
본 시대에서 처음 이 야산에 들어왔
을 때에는 정부의 힘이 강력했던 때였 다.
더 이상이 없을 것만 같던 계엄령은 한층 더 강화된 상태였다.
그때 내 신분은 차출된 예비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시험의 장에서 생존 하고 돌아왔어도, 여전히 국방부 소속 으로 평 병사들보다 더욱 엄격한 기준 하에 관리되고 있었다.
우리 각성자들이 국방부의 전략 자 원처럼 다뤄졌던 해였다.
우리에 대한 연구 또한 부족한 시절 이었으며 정작 우리들 자신도 어디까 지 할 수 있는지 아는 이가 없었다.
누구도 우리의 성장 가능성을 몰랐 다.
그런 게 일찍이 밝혀졌다면 우리를 다루는 방법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 다.
총부리를 들이미는 억압에서 돈과 헛바닥으로 살살 달래는 회유로.
어쨌든 이 야산과 던전도 정부의 관 리 하에 있었다.
처음 여기로 이동되어졌을 때 우리 들은 마침내 정부의 연구 시설로 옮겨 졌다고 생각했었다.
꼼짝없이 실험 쥐 신세가 될 판이라 여기고 달아날 기회만 엿보았었다.
지금도 기 억하는데.
우리들이 눈빛으로만 서로의 담당을 정할 때.
내가 죽여야 할 녀석은 나를 인솔하 던 젊은 병사 셋이 었다.
부사관으로 임용된 지 얼마 되지 않 은 녀석과 상병 계급을 단 녀석 둘.
그 녀석들의 총구가 모조리 내게 향 해 있었다. 일전에 무슨 사건이 있었 는지,내 움직임 하나하나에 겁을 먹 는 게 훤히 보였었다.
신호라고 여겨질 법한 게 터지기만 을기다렸었다.
결국 나도 총 맞고 뒈지겠지만,연구
실에 끌려가서 실험 쥐로 평생 고통받 다 뒈지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었다.
우리가 여기를 정부의 비밀 연구 시 설이라고 오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
지금처럼 여기저기에 가시나무들이 뻗쳐 있는 악산이 아니라, 그때는 깔 끔하게 정돈되어 군사 시설까지 완비 되어 있었다.
심지어 던전 입구도 외벽을 세워서 가건물처럼 위장되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의심스러운 시설이었 디. 주인은 한국정부였다.
그런데 던전 입구를 감추고 있던 가
건물 안으로 옮겨질 때까지 기회가 통 나질 않았다.
그래서 예기되었던 소동은 미뤄지고 있었는데.
던전 입구.
그 앞에 세워지고 나서야.
우리는 실험 쥐가 아니라 군인으로 옮겨진 걸 깨달았었다.
“어디 있냐. 독수리 부리……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이렇게 잡풀과 가시나무들이 우거진
상태에서는 소용없었다.
길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이 넓은 야산 전체를 혼자서 벌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주 공사를 야산 밑,시골 마을 어 귀로 부른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 였다.
“아유. 찾아오기 힘들었네요. 안녕하 세요. 제가 최철민입니다.”
내비게이션이 없는 시절이라, 그는 물어물어 오다 보니 해질 무렵이 되어 서야 도착한 것 같았다.
그가 겨울바람에 벌게져 있는 내 얼 굴을 보더니 포터 안으로 들어가 손짓 했다.
따뜻한 히터에 몸을 녹이며 야산까 지 가는 길을 안내했다.
마을을 지나쳐 좁은 논길을 달렸다.
야산 중턱까지 위험천만하게 올라갔 다.
“여기부터는 차로 못 들어갑니다.”
사내가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잡으며 차를 세웠다.
올라올 수 있는 만큼 올라오는 동안 굽어진 길에,차는 여러 번 미끄러질 뻔했다.
잔뜩 얼굴이 굳어져 있는 그였지만 내게 건네는 목소리만큼은 밝았다.
야산 초입부터 이곳까지.
그러니까 지금까지 지나쳐 왔던 일 대가 모두 내 관리 하에 있다는 걸 밝 혔기 때문이었다.
“공사는 여기부터 시작하고,들어가 는 길을 새로 낼 겁니다.”
공사 지역을 대략적으로 가리켰다.
공사 규모는 사내의 기대보다 더 컸 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일감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이 IMF 시기에 들어온 의뢰였다.
그는 침을 크게 삼켰다. 성대가 꿀꺽 울렁이는 게 다 보일 정도로.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바로 시작
해야 할 건입니다. 겨울인 데다 보다 시피 규모도 좀 큽니다.”
이 지역의 생활 정보지에서 대충 보 고 부른 게 일주 공사였다.
보통 이정도 공사 규모는 수주 공모 를 하고, 시간을 들여 여러 업체들 중 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게 맞는 일이 다. 하지만 이런 저런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또 신속하게 처리하고 싶었다.
사내 의 당황하는 반응을 보건 대.
그는 이 정도 규모의 공사를 주도적 으로 진행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 다.
그럴 수밖에.
생활 정보지 귀퉁이에 이름 하나만 올리고 있는 소규모 업체이지 않은가.
때문에 이 공사는 그에게는 반드시 따내야 하는 대박일 수밖에 없었다.
급한 대로 그의 입에서 먼 지역의 사 투리가 튀어나왔다.
“하모요. 하모!”
사실 작은 업 체 라도 문제될 건 없다.
작은 업체가 힘든 것은 수주를 받지 못해서지,수주를 받기만 한다면 일시 적으로 몸집 부풀리는 것이야 일도 아 닌 것이 그네들의 시장이다.
엇그제 막걸리 한잔했던 최 사장 팀 부르고,지난번 같은 하청으로 만났던
박 사장 팀 부르고, 그 박 사장의 부탁 으로 어떤 팀을 더 끼워 넣는 식으로.
우리는 일단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갔 다.
가짜로 판 전일 인베스트먼트의 명 함을 건넸다.
회사원처럼 보이지 않는 차림에,덩 치만 크지 얼굴은 엣된 게 지금의 나 다.
신뢰가 가지 않는 모습임에 분명하 지만 가짜 명함 한 장에 사내의 태도 는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원래는 소유를 입증할 서류들을 보 여 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곧 내줘야 할 것들이 라,가방에서 서류 파일을 꺼냈다.
벌목과 개간은 아무 곳에나 허용되 지 않는다. 시군구청에서 나무 벌채 허가를 받아야 하며 사용 계획서가 통 과돼야 한다.
사내가 서류 파일을 확인하고선 나 를 조심스럽게 쳐다봤다.
꽤 애가 탄 눈빛이었다.
구태여 내가 공사 현장의 모든 권한 까지 쥐고 있다는 걸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사용 허가 신청까지 대리해 줄 업체 를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장님께
여쭤본 겁니다. 사장님께서 맡을 수 있을 만한 규모인지. 견적은 뽑으실 수 있으신지.”
“됩니다!”
사내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가 힘차게 내뱉었지만, 목소리라 고 다르지 않았다.
“시간은 많이 드리지 못합니다. 저희 로서도 급하게 잡힌 계획이라서, 지역 업체를 통해 공모 없이 진행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또 아무 업체 나 선정하겠다는 뜻은 아닙 니다. 아시
죠?”
“그렇죠. 그렇죠.”
그가 바로 맞장구쳤다.
“견적은 내일 받아 볼 수 있겠습니 까?,,
“이 번호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개간 작업은 최대한 원형을 유지하 는 것으로 진행하려 합니다. 거기에 맞춰서 견적 뽑아 주세요. 그런데 사 장님.”
“예!”
“혹시 건물도 올리십니까?”
“가,가리지 않고 다 합니다.”
“그럼 도로도 깔 수 있으시 겠군요.” 사내는 잠깐말이 없어 졌다.
놀란 눈을 낌벅거리면서 콧바람만
흑흑 내뱉는데.
그 소리가 꽤 커서 덜덜거리는 엔진 소리를 뚫고 나왔다.
산 하나를 쳐서 길을 새로 깔고 뭔지 는 모르지만 건물 까지 세운다?
분명히 그에게는 오늘이 그 날이었 다. 일생에 세 번 있다는 하늘의 기회. 더욱이 기회인지 아닌지 햇갈리지 않 는,너무나 선명한 황금 동아줄이 그 의 앞에 내려와 있지 않은가.
“사장님. 견적 내실 때 완공 시간을 최대한 앞당기세요. 다른 업체에게도 견적을 떼겠지만, 그분들께는 이런 조 언은 드리지 않을 겁니다. 저는 사장
님께서 이 공사를 따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보는 건 비용보다 시간입니 다.,,
그는 감격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의 트럭 운전석에서 끼워져 있는 사진이 보였다. 그와 그의 딸아이가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찍은 사진이었 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그 사진을 찍 어 준 사람은 그 자리에 없는 그의 부 인일 것이다.
“아버지들께 힘든 시기 아닙니까. 견 적 잘 뽑아서 올려 주세요.”
순간이었다.
아직 그로서는 결정된 것도 아닌데, 그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최 사장은 아주 의욕적이 었다.
머리와 수염도 깎고.
그의 곁에선 섬유 유연제 향기까지 났다.
다시 만난 일주 공사의 최 사장은 공 사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 장 황히 늘어놓았다.
일주 공사는 사정이야 뻔한 업체라, 그는 가감 없이 모든 걸 밝히는 것으
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장비를 어디서 임대하고 어떤 업체 들을 파트너로 들여올지.
“좋습니다. 계약하시죠.”
내 입에서 확답이 나왔을 때, 그는 눈을 힘껏 감았다가 떴다.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 였다.
이튿날부터 장비들이 들어갔다.
야산 초입까지는 무조건 작은 시골 을 지나야 했기 때문에,부스럼 나지 않도록 마을 사람들을 달래는 것도 최 사장의 몫이었다.
하나 다행인 것은 어제부로 눈이 멈 췄다는 것이다.
그래도 완공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올라갈 수 있는 길의 제설 작업도 동 시에 시작됐다.
내가 요구했던 것은 시간.
그렇게 동원된 사람들이 많아서 산 하나를 밀어 버릴 듯한 현장이었다.
한편 공사 현장을 구경 나온 마을 사 람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좋지 않았다.
최 사장이 마을 이장에게 떡값을 내 는 것도 봤지만,마을 사람들의 입장 은 또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야산 조입에는 마을 사람들이 허가 없이 밭으로 쓰고 있던 용지가 있었 다. 사실 야산 자체가 오래전부터 마
을 사람들이 버섯과 칡을 채취하고 양 봉하는 장소로 이용되어져 왔다.
사유지라고 해도 민원이 들어가면 귀찮아질 일이 많아진다.
현장에서 분주하던 최 사장을 찾아 불렀다.
“마을에 회관이 없더군요. 하나 올려 서 마을 사람들을 달랬으면 합니다.”
“회관을요? 그렇게까지 하실 것 없 습니다. 마을 이장하고는 이야기가 잘 됐어요.”
“제가 말씀 안 드렸군요. 산 아래 전 체를 철망으로 두를 겁니다.”
흉흉한 철망이 마을 한 한편에서부
터 크게 펼쳐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철망에는 위협적인 문구가 덕지덕지 붙어 있으며, 이따금씩 감시 카메라가 웽웽 돌면서 붉은 렌즈를 번 뜩인다.
어떤 마을이 그런 꼴을 보고 가만히 있을까.
민원도 민원이지만.
마을 사람들 중 누군가 산에 들어가 던전과 조우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여 기 전체를 말입 니까?”
“예. 출입을 완전히 통제할 계획입니 다. 마을 사람은 물론,누구도 산에 들 어갈 수 없도록 말입니다.”
군사 시설도 아니고.
일반 야산을 그렇게까지 하는 경우 는 거의 없다.
차마 거기까지 생각 못 한 최 사장은 딱히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당황하 는 눈치였다.
“우리 회사가 외국계라서 인정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마을에 회관까지 올 려주는데,불미스런 일이 일어난다면 분명히 송사까지 갈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새파랗게 어린 저 대신 최 사장님께서, 마을 어르신들께 사정 설 명 잘해 주세요.”
마저 덧붙였다.
“회관 올리는 것도 최 사장님께 맡기 겠다는 겁니다.”
그는 마을 회관 공사까지 맡긴다는 말에 눈시울을 또 붉혔다.
최 사장이 눈물이 많은 사람이라서 가 아니다.
경기가 너무나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나를 만나기 전까지 먹 고살 걱정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거 참……
최 사장은 못난 꼴을 보였다고 생각 했는지,부끄러운 얼굴을 빠르게 훔쳤 다.
당황한 대로 담배를 찾는 손이 그의
주머니 안을 부스럭거렸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같이 시내로 나가시죠. 따뜻한 데서 차 한 잔 하면 서 나머지 얘기를……
강화 콘크리트 장벽 및 이중 철망 작 업. 감시 카메라가 들어갈 전기 공사 및 보안작업.
여기를 준 군사 시설 급으로 만들어 야 한다. 무엇도 나갈 수 없고 들어올 수 없게.
최 사장에게 맡긴 기초 공사가 끝나 면 대형 건설 업체를 인수해서 제대로 말이다.
고 금리의 여파로 부도 처리된 기업 에 대한 소식들과 국내 대기업들의 구 조조정안발표.
그리고 대기업들이 모기업을 살리기 위해 해외 법인의 자산을 긴급 처분하 고 있는 상황 등이 뉴스를 시끄럽게 장식했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98년의 1
월말.
우리나라 한국의 심각한 금융 위기 를 기회로 여긴 일본은 어업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바야흐로 환율이 1500원대까지 급 락했다지만,IMF와의 협상에서 오는 일시적인 신기루일 뿐이란 사실은 감 추고 있었다.
하루의 일과는 빌딩 우편물 함에 꽂 혀 있는 신문들로 시작한다.
나의 개입으로 역사가 어떻게 달라 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일단 큰 흐름은 예전의 역사에서 크 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미세한 것들. 사적인 이득을 위한 것
이를테면.
외국 기업들의 국내 부동산 매입 시 기가 빨라지고 있었다.
전일이 대규모 투자를 대가로 부동 산 개방 시일을 반년이나 앞당겼기 때 문이기도 하지만,그러기엔 과거에는 국내 부동산 시장에 보이지 않던 이름 들이 눈에 띄었다.
「전일 인베스트먼트,DP 크럼프,저머 니 은행,GOA, 블루스톤 그룹 등 외국 금
융 사 社. 국내 부동산 사들인다.
GOA, ANG베어링,실버만삭스,스 탠다드맨 은행, 블루스톤 그룹 등은 국내 부동산 시장에서 기존의 역사에 서도 불난 밀림을 찾아 온 독수리 떼 로 군림하던 것들이다.
하지만 DP 크럼프와 저머니 은행 등 은아니다.
그것들은 부동산 매입보다도 기업 사냥에 열을 올렸던 것들로, 그것들이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활개 치는 시기는 올해 2분기부터 였다.
국내 기업들이 화마(火魔)로부터 생
존하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다 치고, 정부에서도 뻔한 살생부를 만들어 국 민 세금으로 살릴 놈과 버릴 놈을 판 별하며 시간을 끌고 있던 때에 말이 다.
그랬던 그것들이 1분기부터 열성적 으로 국내 부동산 시장에 진입 했다.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잃은 만큼 본전 생각이 나서다.
그것들의 공통점은 홍콩의 금리율을 두고 벌였던, 나와의 내기에서 크게 졌다는 데 있었다.
거기다 방콕과 홍콩의 선물 외환 시 장에서도 큰돈을 잃었을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아시아 금융 위기.
딱히 특별한 자료나 조사가 없더라 도 단언한 수 있는 게 두 가지 있다.
저 대형 금융사 모두가 아시아 나라 들의 공격자 편에 섰었을 거라는 것 하나와,거기에서 얻은 것보다 잃은 게 훨씬 컸을 거라는 것 하나.
그것들이 공격적으로 굴렸던 많은 달러들은 현재 내 수중에 있다.
이러한 사정이다.
그러니 그것들은 오랫동안 공을 들 여 왔던 한국 땅에서 최대한 뽑아 먹 을 작정일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그것들에게 한국이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을 것이 나,현재로선 본전 생각이 날 수밖에 없는 곳이 되었다.
확실히 그랬다.
나라 전체가 대 폭탄 세일 중이었으 니까.
달러만 들고 온다면.
조대환은 원래도 박충식과 인연이 깊었다. 학연으로는 고등학교,대학교 까지 다이렉트로 연결되어 있는 데다 가.
장남을 박충식의 막내딸과 결혼시키 는 데 성공하여 혈연까지 다져 놓았 다.
사돈지 간이지만.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달리진 건 권 력층 주류로 편입되면서부터 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시대가 낳은 기형 적인 권력 구조라 할 수 있었다.
달러가 언제까지 권력의 중심에 서 있을지 모르는 일이나, 한국의 금융 위기는 하루 이틀 사이에 정리될 만큼 가벼운 게 아니었다.
사실 조대환이 박충식을 선배님이 아닌 박 이사님으로 부르게 된 결정적
인 사건은 대표 이사인 제이미의 경영 방침에 의해서였다.
그게 자연스럽게 사석에까지 이어졌 다.
“평동 건설 건 있지 않습니까. 민정 수석실에서 벌써부터 성화입니다. 김 철민 수석 그 양반,박 이사님 동기 아 니십니까?”
“맞아요.”
조대환과 박충식은 단골 룸에서 모 처럼만에 한잔 넘기고 있었다.
“오늘도 세 번이나 연락 왔습니다. 다음 달이면 내려가는 분께서 왜 그렇 게 열심인지.”
“허허. 좋게 봐주세요. 그 친구야 부 지런을 떨 수밖에 없어요. 다음 총선 에서 강남구에 출사표를 던질 거람니 다.,,
“여론도 그런데 좀 쉬시지 않고.”
“그러게 말입니다. 평동 건설은 어떻 습니까? 견적 나옵니까?”
조대환은 가만히 술잔을 기울였다. 대표 이사 제이미가 기업 인수까지 영역을 확장하기 이전에도, 평동 건설 을 비롯한 많은 대기 업들은 그와 밀접 하게 연결된 거래처였다.
국내 제일의 삼우 회계 법인 전무로, 평동 건설에서 80년대 말에 국제 종
합 건설을 인수할 때는 고문 형식으로 참여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사정이야 훤했다.
조대환의 곤란한 표정을 읽은 박충 식은,주름살이 자글자글한 눈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열었다.
“철민이 그 친구에게 빚진 거 없습니 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원칙대로 하세요. 요즘 같은 시기에 평동 건설 같은 곳이 어디 한두 곳입니까.”
“수석 그 양반,다음 총선에는 어려 워도 내각에 줄을 댈 줄 아는 분입니 다.,,
“허허. 그 친구 별명이 미꾸라지라는
거 아십니까?”
어떻게든 꾸물꾸물 올라간다고 해서 미꾸라지다.
조대환은 박충식의 목소리가 문득 밝아졌다는 걸 느꼈다.
겉으론 원칙대로 처리하라 했지만 저게 본심이다.
조대환이 물었다.
“그런데 왜 박 이사님 통하지 않고, 제게 다이렉트로 꽂아 왔을까요.”
“저한테 빚지고는 못 산다는 거 아니 겠습니까. 하하.”
“박 이사님과 제가 옛날부터 한 배를 탄 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말입니
다.”
“이제는 진짜 배를 탔습니다. 우리의 전일 인베스트먼트를 위하여 건배.”
술잔이 쨍하고 부딪쳤다.
그런 다음 조대환이 말했다.
“평동 건설 그룹 한번 살려 보겠습니 다. 김철민라는 사람,버리는 카드로 두기엔 아까운 분입니다.”
“흐음. 통과되기 어려울 텐데요. 되 겠어요?”
“대표 이사, 고 젊은 가시나는 제가 단도리해 보겠습니다. 이사님께서는 고 가시나가 데리고 온 노랑머리들 있 지 않습니까. 그 녀석들을……
“아이고. 큰일 날 소리. 여러 번 겪었 지 않습니까. 양놈들 사고방식이 꽉 막혀서는 우리가 해 왔던 방식대로 안 됩니다. 그리고 철민이는 그렇게까지 하면서 취할 카드가 아니에요. 하이 리스크,로우 리턴이란 말입니다. 김 철민이는.”
“그렇습니까?”
“조금 더 기다려 보면 철민이에게 성 과도 주면서,양놈들 입맛에 맞는 것 들이 나올 겁니다.”
조대환은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도 진짜 성과를 주려면 양놈들 마저도 꺼리는 부실 물건을 받아 주는
게 맞는 것이긴 했다.
문제는 그런 건들은 결제자,월셔 랜 드의 이력만으로 어마어마한 달러를 쥐고 있는 제이미의 결재를 통과하기 어렵다는 데 있었다.
조대환은 박충식의 표정을 흘깃 살 폈다. 박충식도 고민에 들어가 있었 다.
바로 그 때였다. 영감은 찰나에 온다.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음소거 상태로 켜져 있는 룸의 텔레 비전에서,대후 자동차의 광고가 송출 되고 있었다.
조대환의 눈동자에 대후(大厚) 그룹
의 로고가 맺혔다. 그 순간 룸 안의 조 그마한 소음 따위도,조대환에겐 들리 지 않았다.
“좋은 생각 있어요?”
박충식이 그렇게 물었어도, 조대환 은 대답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박충식은 그런 조대환을 가만히 내 버려 두었다.
한창때의 젊은이 같이, 생각에 잠겨 버리면 주변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 도로 집중해 버리는 그 모습이 정말로 보기 좋았다.
하기야, 이 나이 먹도록 저런 재능이
남아 있으니까 돈도 백도 없으면서 주 류층으로 생존하고 있는 거다. 자신의 사돈이 되기까지 했고.
이윽고 조대환의 입술이 열렸다.
“이사님. 우리. 2년짜리 임기가 아니 라, 이참에 다음 임기까지 보장받아 봅시다.”
“오호.”
“지금의 VIP도 이대로 임기 마치고 나면 욕은 욕대로 먹을 긴데,면죄부 하나 드리고. 수석 양반에게는 그 공 을 나눠 드리고. 양놈들 입에는 돈을 쑤셔 넣어 주는 겁니다. 이만하면 차 기 임기 보장 받고 말년에 선생님 소
리 들을 만하지 않습니까. 젊은 가시 나 콧대도 크게 꺾어 놓고 말입니다.”
“그만한 건수가 있습니까?”
“대후요. 대후. 거기 속이 곯을 대로 쳐 곯았다 아입 니까.”
여전히 회계 법인에 재직 중이라면 꿈도 못 꿔 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정•재계 모두 전일 인베스트먼트의 입만 쳐다보고 있다.
손에 칼을 쥐여 주면 한번 휘둘러 보 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 라고. 조대환이나 박충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게 망나니의 칼춤이 아니라, 숙련된 요리사의 절제된 도마질이라 는 점에서…….
조대환과 박충식은 프로였다.
오전에 제이미와 간신히 연락이 닿 긴했다.
그런데 겨우 성공한 그 통화도,그녀 가 시간이 없다면서 일방적으로 끊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우리나라 한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된 지 얼마 되지 않
았기 때문에 그 점을 두고 뭐라 할 생 각은 없었다.
그런데 화성 야산의 벌목 현장에 다 녀온 저녁 무렵에 그녀가 먼저 사무실 로 연락을 해 왔다.
사무실로 오고 있는 중이라 했다.
제이미는 오전에 일방적으로 끊었던 통화에 대해 미안하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렇다고 찾아올 것까진 없었습니 다. 그런데 혼자 오셨습니까?”
“그래야죠. 저도 눈치란 게 있는데.”
제이미는 말꼬리를 흐렸다.
“운동 중이셨나 봐요.”
고개를 끄덕이며 수건으로 땀을 닦 았다.
던전에 진입하기 앞서.
능력치를 손보기에 가장 좋은 건, 체 육관을 돌면서 현역 선수들과 스파링 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만화 같은 소문이 돌 기 시작해서 발길을 끊을 수밖에 없었 다.
그녀가 위장이라고 눌러쓴 후드를 걷으며 발개진 손을 흑흑 불었다.
그녀는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진 것 같았다.
피곤에 찌들 법한 일정이었지만, 오
히려 일과 세간의 관심을 즐길 줄 아 는 여자였다.
“차 타고 오신 것 아니 었습니까?”
“이 근방에 미팅이 있어서 바로 오는 길이에요.”
제이미는 경제 수석과 만나고 왔다 고했다.
푸른 지붕 아래서가 아닌 사석처럼 꾸민 일식집에서,오전부터 내내 붙잡 혀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녀가 오전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이유가 그 때문이 었다.
자리를 잡고 앉은 그녀가 뜬금없는 이름을 내뱉었다.
대후.
“대후 그룹이라고 아세요?”
왜 이 시기에 그녀의 입에서 대후 그 룹의 이름이 나오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후 그룹에 IMF의 화마가 작렬하 는 시 기는 세기말인 99년 하반기다.
그 전까지만 해도 대후 그룹은 재계 2위의 재벌로 우리나라 경제의 중심 에 있었다.
실상 외국에서도 가장 유명한 우리 나라의 재벌은 재계 1위의 대현보다 도 대후였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라며 훗
날의 일성만큼의 인지도를 쌓아 올렸 던 게 대후 그룹이다.
“대후 그룹을 왜 모르겠습니까. 설마 대후 그룹을 리스트에 올린 겁니까? 이 나라 정부에서 반드시 살려야 할 게 대후와 대현 그리고 일성입니다.”
내 말에 제이미는 의미심장한 미소 룰지었다.
“대후 그룹 회장, 오늘 밤에 구속 영 장이 떨어질 거예요.”
놀라기 보다는 당황스 러 웠다.
왜 갑자기?
대후 그룹이 해체되기까지는 IMF의 영향만 있었던 게 아니다.
이미 대외에 넓혀 두었던 온갖 사업 들이 초기 계획부터가 어긋나고 있었 다.
사방 군데의 것들이 복합적으로 엮 여져서 터지는 게 내년이다.
그런데 당장 오늘 밤부터 그 일들이 시작된다니?
“그 건으로 상담할 게 많아요.”
제이미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 다.
대후 그룹이 금년도 상반기에 매각 된다라.
나비의 날갯짓을 시작한 건 내가 맞 는데, 대체 어디서 돌풍으로 변해 대
후 그룹을 때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 다.
“뜬금없이 구속 영장이라니. 무슨 일 들이 있었던 겁니까. 자세히 듣고 싶 군요.”
당시에 대현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 다.
재계의 2인자 자리를 두고서 벌여 왔 던 일성과 대후의 라이벌 구도는 98 년에 대후의 승리로 끝난다.
대후가 겉으로나마, IMF의 심각한 위기 상황을 기회로 활용하는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다.
쌍호 자동차를 인수하여 자동차 사 업에 풀라인업을 완성시키고, 해외로 확장하는 공세를 취했다.
그렇게 해외 현지 법인의 수는 그룹 전체를 조각조각 내는 칼질이 시작되 기 전까지 무려 약 400곳에 육박하기 에 이른다.
나의 유령 회사들과는 다르게 서류 상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 라, 실제로 그 법인 전체가 가동되고 있었던 것이 다.
이 시절.
나는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대후 그룹의 해체가 무엇을 의미하
는지 이전에, IMF부터도 학원에서 만 나는 이성 친구들보다 관심 없던 개념 이었다.
그랬던 내가 대후의 위상을 깨달은 건 대학 시절 때였다.
그 시절의 많은 교수들이 그랬듯,내 담당 교수는 대후 쪽 라인이었다.
대후 그룹에 고문으로 이름이 올라 가 있었고 그쪽에서 물어다 주는 연구 과제만으로도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던 인사였다.
당연히 대후에 대한 담당 교수의 입 장은 편향적 일 수밖에 없었다.
대후가 해체된 것은 방만한 기업 운
영이나 IMF 때문이 아닌, 정권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고.
대후의 해체로 우리나라 경제력이 20년 이상 뒤처지게 되었다는 당신의 지론을 신앙처럼 여겼던 사람이었다.
하긴.
내 담당 교수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 은아니다.
이 시절.
특히 내가 다녔던 대학에 아니 그런 교수들이 얼마나 있었겠냐마는.
친재벌적 성향이 강한 교수들,그러 니까 보수 쪽 교수들이 진보 인사들을 공격하는 데 요긴하게 써먹은 게 대후
그룹의 해체였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것이 꽤 잘 먹힌 게 현실이었다.
“말씀드렸었죠? 대표 이사로 들어오 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이, 한국인 이사 두 명을 고용하는 거 였죠.”
삼우 회계 법인과 김앤박 법무 법인 의 전무급 인사랬다지.
“조대환,박충식.”
내가 두 사람의 이름을 내 뱉자,제 이미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흘러가듯 잠깐 들려 주었던 이름들 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냐는 것인데.
그녀 나름대로는 내가 전일을 꼼꼼 히 주시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을 고용한 건 능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나라가 가진 특수성 때문이 었죠.”
제이미를 영입한 건 좋은 결정이었 다.
주름살이 없는 팽팽한 피부답게 머 리가 홱홱 돌아가는 젊은 여자다. 전 일에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스스로 물 어 답을 찾았다.
어디에서 어떻게 부동산 투자 자문
을 구할지는 차 순위 였고.
전일에 들어온 정체불명의 핫머니를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는지부터 생각 해 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제이미를 영입한 게 좋 은결과였듯이.
제이미에게도 두 사람을 영입한 게 그랬다.
“두 한국인을 사내 이사라는 큰 권한 을 주면서까지 들인 이유는 아시잖아 요. 일 때문이 아니었죠.”
그녀의 말이 계속 이어지도록 가만 히 있었다.
“그런 그 둘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아세요? 정치를 하고 있어요.”
제이미가 말했다.
“명목상이나마 일을 하라고 앉혀 놓 은 자리에서, 정치를 하고 있는 거예 요. 본인들은 정치인이 아니면서도 말 이죠.”
거물급 정치인들과의 미팅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고 했다.
거기에 대해 반박하려는 찰나, 제이 미가 선수 쳤다.
“그런데 이 나라에선 일을 그렇게 해 야 하는 거였어요. 그 둘에게 많은 걸 배우고 있어요. 덕분에 대후 그룹을 리스트에 올릴 수 있었죠.”
“제이미. 이건 짚고 넘어가죠.”
“네?”
“부패는 전 세계 어느 나라에나 만연 해 있습니다. 북미야 로비를 합법화시 켜서 양지로 끌어올렸다 뿐이지,근본 은 같다는 겁니다. 그렇게 편향적인 시야를 유지하고서는 이 나라에 적응 할 수 있을지 의문입 니다.”
잠깐 들떴던 분위기가 빠르게 식어 버렸다. 제이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래도 이 나라가 특수하다는 건 맞 습니다. ‘재벌’이라는 단어가 존재하 니까요.”
마무리 지었다.
“미안합니다. 하시던 말씀,마저 하 시죠. 제 고객분들도 대후를 리스트에 올린 걸 긍정적으로 볼 겁니다. 문제 는 인수 자금이겠지만.”
내 기에 짓눌린 제이미는 미간을 긁 적이면서 마음을 추슬렀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열리기 시작 했다.
요약하자면 이거였다.
대후 그룹을 IMF의 희생양으로 삼 는다.
임기가 끝나기 직전인 정권에서는 세간의 지탄을 책임질 건수가 필요한
상황이 었는데, 그 대상으로 대후만 한 게 없다는 것이었다.
제이미의 말마따나 정치인이 아니면 서도 정치인들을 규합하고.
극본 감독 촬영까지 도맡고 있는 사 람이 전일의 사내이사 조대환과 박충 식이었다.
아무리 면죄부가 필요한 상황이 었어 도,정권에서 과연 대후를 버릴 수 있 을까?
재벌은 괜히 고유 명사로 다뤄지는 게 아니다.
그들이 가진 독특한 힘.
문어발식 확장은 당연하고, 일개 기
업이 정계 권력에도 곁다리를 걸치고 있기 때문에 재벌인 것이다.
이 시절 정계에는 대현맨,대후맨,일 성맨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 즈음 나는 대후 그룹 회장의 구속 영장이 통과되었었다는 사실을 떠올 렸다.
필시 험난한 과정이었을 터.
조대환과 박충식이 제이미에게 보고 할 수 없었던 비밀들도 여러 개 깔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조대환과 박충식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주었다.
그 두 중년인은 일명 난놈들이 었다. 어떻게 대후를 칠 생각을 했을까.
이 시절,아직 건재한 대후를!
예전에도 말했듯.
시험의 장에서 속칭 상류층 인텔리 들의 생존율은 꽤나 높았다.
그들의 머릿속은 평화의 시대에도 항상 그런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굴 쳐야 자신에게 이득이 될지,자 신보다 더 강한 자들을 어떻게 공략해 야 할지,생존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
요한지,자신이 지닌 힘을 어떻게 활 용해야 하는지.
그러한 생존과 전투가 일상이 었다.
박충식과 조대환의 대후 공략도 그 일환이었다.
전일을 200% 활용하고 있었다.
“현 정부에서 쥐고 있던 대후 자료들 이 법원에 들어갔어요.”
“때 아닌 피바람이 불겠군요. 그것도 임기 말기에.”
현 정권에서는 금융 실명제를 통과 시키던 당시보다 힘든 한 달이 될 거 란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통 과시켰다.
뼈를 내주는 만큼 얻는 게 있기 때문 이다.
“그들이 무엇을 요구합니까?”
“두 가지예요.”
“추가 투자와 현 상태로의 일괄 매각 이겠군요.”
“네. 최소 50억 달러 이상의 추가 투 자와 대후 그룹 전체를 떠안길 원해 요. 부채까지도요.”
추가 투자는 문제될 게 없다.
급하게 들어오는 만큼 자금 이동 경 로가 불안하긴 한데,그 정도는 현 정 부 선에서 떠맡고 뒤처리까지 해 줄 일이다.
그러나 제이미가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건,대후 그룹 전체를 인수하는 건 실익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알짜배기 계열사가 있는 반면 부실 계 열사도 당연히 많았다.
코앞의 돈만 본다면 대후 그룹 전체 가 완전히 쪼개지기 전까지 기다렸다 가 핵심 계열사만 골라 먹는 게 좋을 것이다.
제이미도 그런 경우를 의식하고 있 는 것 같았다.
“대후 그룹은 어떻게든 정리될 거예 요. 우리가 중간에 손을 놓는다고 해 도 말이죠. 하지만 이대로 손 놓기엔
너무도 아까운 일이에요.”
제이미가 모르는 게 있었다.
일을 여기까지 진행하고 나서, 우리 만 빠져나가면 전일은 정권과 완전히 척지게 된다.
제이미는 정권 임기가 다음 달에 끝 나는 걸로 크게 경계하지 않는 것 같 지만. 다음 정권은 민주 내각이 다.
그리고 금융 위기가 어느 정도 해소 되면.
우리 회사에 강력한 세무조사가 들 어올 확률이 크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조대환과 박대한, 두 중년인을 내 앞
에 꿇어 앉혀 놓고선 박수 쳐 주고 싶 었다.
제이미는 우리나라 정재계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리겠으나,둘은 아니다.
둘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대후 그룹 을 사냥감으로 골랐다.
제이미와 두 한국인 이사와의 차이 점이 무엇일까.
그건.
제이미가 ‘재벌’ 을 너무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두 한국인 이사가 보고 있는 것은 대 후 그룹 계열사들의 자산이나 매출 따
위의 숫자가 아니다.
우리나라 재계의 삼대 재벌 중 한 곳.
삼대 재벌의 지위를 사려는 거다.
그룹 대후가 아닌.
재벌 대후가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인지도뿐만 아니라 인프라 전체를 보 고 있는 거다.
이 시절에 감히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 대후가 망한다고.
“제이미. 대후 그룹을 감당할 수 있 겠습니까? 만일 인수에 성공한다 쳐 도,외국에서 전문 경영인을 들여올 생각은 설마 아니시 겠죠?”
제이미는 정곡이 콱 찔렸는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새로운 그룹 회장은 현 임원들 중에 서 알아보세요. 총수 일가를 제외한, 회장의 최측근들 중에서.”
“조대환과 박충식. 두 이사를 가까이 두고 많이 배우셔야겠습니다. 둘이라 면 왜 이런 결정이 나왔는지 바로 알 겁니다. 아니겠군요. 그들부터가 그렇 게 요구하고 나올 겁니다.”
실제로 거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었 던 모양이다. 제이미의 예쁜 얼굴이 한 번 더 딱딱해졌다.
“그럼 인수를 허가하는 건가요?”
“호구 잡히지만 마세요. 갑은 우리 입 니다. 부실 계열사와 그룹 부채를 최 대한 이 나라 정부에 넘기세요.”
“정부에서 강력히 요구하는 조건 이……
나는 제이미를 창가로 유도했다. 내 가 움직이자 제이미가 뒤따라 왔다.
“요즘 이 나라 정부가 맨날 떠들고 있는 말이 뭔지 압니까?”
제이미의 시선이 내 손가락을 따라 창밖,거리로 향했다.
그쪽 거리는 여전히 금반지를 쥐고 나오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
었다.
금 모으기 운동의 현수막은 오늘도 찬바람에 펄럭이는 중이기도 했다.
“고통 분담입니다. 그 목걸이 금이지
요?”
제이미가 목걸이를 더듬었다.
“광화문 쪽이 언론에 잘 탑니다. 과 도하지 않으면서도 고급스럽게 챙겨 입으시고,사연 적당히 만들어서. 음. 어머니의 유품이면 좋겠군요. 두 이사 들도 같이 데리고 가세요.”
제이미는 영특한 여자라 내가 무엇 을 요구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명분이 중요하다는 건 잘 알고 있어
“그리고 제이미.”
“네.”
“추가 투자금이나,사업 방향은 걱정 하지 마시고 공격적으로 진행하세요. 지천에 널린 게 먹을 거라지만, 한 점 도 뺏기지 않겠다는 투지를 가지고 진 행하란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전일 인베스트먼트는 이 나라의 위 기를 독점해야 합니다. 그만한 돈을 줬지 않았습니까. 땅이든 빌딩이든 기 업이든. 절대 뺏기지 마세요.”
이렇게 시끄러워도.
결국 초중 교과서에 IMF가 발생한 이유는 국민들의 과소비로 기록될 것 이다.
IMF가 발생한 가장 큰 원인은 국내 기 업들의 무분별한 달러 차입이고,세 부적으로는 꾸준한 경상 수지 적자와 엔화의 영향 그리고 국제 투기 세력들
의 공격까지 깊게 들어가야겠으나 그 것들은 꼭꼭 감춰질 것이다.
대후 그룹 회장의 첫 공판 소식을 끝 으로 전원을 꼈다.
조나단도 평소의 제이미만큼이나 통 화가 어려웠다. 연락 받을 수 있는 시 간을 이메일로 남기고,가능한 빠르게 연락을 달라고 적 었다.
그리고 이튿날 연락이 닿았다.
바쁜 그에게 하나만 요구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한국에 들어 와달라고.
조나단 첫 방한,역시 ‘그분’
「조나단 “장기적 관점에서 한국의 투 자 가치 여전. 투자 검토차 들렀다.”」
23일 어제,조나단 인베스트먼트의 그 ‘조나단’이 서울을 방문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월 가에 그를 부르는 별칭은 무려 ‘투자 의 신’이다.
그는 작년도부터 아시아를 전역을 휩쓸고 있는 금융 위기에 감추고 있던 천재적 투자 재능을 과감끼 드러내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세계적인 투자가 다.
그가 4백만 달러의 투자금을 220억 달러로 만들기까지,그의 초대박 신화 는 단 반년도 되지 않아서 일어난 일 이었다.
O 할리우드 배우 같은 조나단. 국빈 급 예우.
김철민 경제 수석과 육일 경제 부총 리 등의 일명 ‘영접 인사들’은 김포 공 항의 하늘을 걱정했다.
눈이 내릴지도 모르는 기상 발표에,
조난단의 전용기 착륙이 불가해질지 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나단은 검은색 정장 차림 의 멋진 모습으로 손을 흔들며 예정된 시간에 입국했다.
이날 조나단이 입국한 김포 공항에 는 100여명의 취재진이 몰렸다. 첫 방 한을 환영하는 대형 현수막만 중심부 세 곳에 걸려 조나단의 명성을 실감케 했다.
그는 간단한 간담회를 가진 후 경찰 들의 에스코트를 받아 청와대로 떠났 다.
〇 조나단의 공포 투자론. “공포에 투자하세요.”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한 기자가 “저도 초대박이 나고 싶은데 어떻게 투자해야 할까요? 하나만 찍어 주세 요.” 라고 물으며 웃음꽃을 자아내자.
조나단은 “공포에 투자하세요.”라며 그의 투자론을 펼쳤다.
조나단은 천문학적인 수익률을 기록 한 명불허전 투자의 신이다.
그런 그가 펼친 공포 투자론은,IMF 의 극심한 공포에 꽁꽁 얼어붙은 국내 외 투자가들뿐만 아니 라 우리나라 국
민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컸다. 왜냐하면 그가 “한국은 금융 위기를 극복할 저력이 충분하며, 장기적인 관 점에서 최고의 투자처다.”라고 방문 목적과 그가 예기한 우리 한국의 비전 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미리 대절해 두었던 주점으로 향했 다.
열쇠는 주인과의 계약대로 화분 속 에 숨겨져 있었다.
주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문했던
대로의 온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주점 출입구에 금일 휴업한다는 펫 말이 걸려 있었기도 하지만 한낮이라 서,오랫동안 주점 안은 인적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그러던 정적이 깨진 건 조심스런 노 크 소리가 나면서부터였다. 큰 키의 그림자가 유리창 너머에서 어슬렁거 렸다.
조나단은 당연히 혼자였다.
그가 인사보다도 먼저 뒷길을 확인 하고서 들어왔다. 내가 시키지 않아도 문부터 잠그고 보는 그였다.
“아무도 없어?”
조나단이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 였다.
“산업 스파이가 된 기분이네.”
그가 테이블 옆에 서류 가방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이럴 때면 유명세가 꼭 좋은 것만도 아니죠.”
“그러게. 겨우 빠져나왔다.”
그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서 들어온 우리나라인데,우리나라의 사정은 그 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했다.
그도 설마하니 국빈급 예우까지 받 으며 입국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했다.
포브스지가 선정한 세계 20대 부자 에 올랐다고 해도.
세계적인 금융 기관들이 근대사에 한 획을 그은 수백 년 역사를 지니거 나 전 세계에 전략 지부를 둔 글로벌 회사인 반면.
그가 대표 이사로 있는 뉴욕 회사는 작디작은 규모의 투자 회사였다.
아직은 16평짜리 사무실 하나면 족 할 뿐더 러, 조나단 부터가 스물 중반 의 청년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런 외국인 청년 한 명을 세 계 정상처럼 모셨다. 물론 회사 규모 와는 달리 달러가 미어터질 만큼 들어
가 있기 때문에.
“현재 이 나라의 시국이 그만큼이나 절박하다는 겁니다.”
“그래도 희망적이잖아. IMF에서 원 조 자금이 들어오기로 했고,네가 달 러를 수혈해 주고도 있고.”
외국인인 조나단이 볼 때에는 그 정 도 평이 당연했다.
하지만 한국 국적을 가진 금융계 사 람이 라면 나올 말은 하나였다.
수치도 이 런 수치가 없다고.
일제 강점기와 비교해도 과하지 않 다.
IMF에서 떨어지는 명령에 벌벌 빌
어야 했고, 나라의 재산들은 대외로 수탈당한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조나단을 부 른 게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IMF를 빠르게 극복할 겁니다.”
기존의 역사보다 더.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다. 이젠 남 의 나라 같지가 않으니까. 그런데 말 이야. 썬. 그거,네 작품이야?”
“대후 말입니까?”
“맞네. 듣고서도 믿겨야 말이지. 네 나라에서는 대후를 버리기로 한 거
야?”
한국에서 몇 개월 살아 본 적이 없더 라도,조나단은 월가의 금융인이었다. 대후는 해외의 많은 기업들과 얽혀 있 었다.
그리고 그게 다 그 기 업들의 주가 변 동으로 나타나는 중이 었다.
“대후는 계획에 없었습니다. 저도 이 나라 정부에서 대후를 버릴 거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너라도 말이야? 네 작품이 아니라 면?,,
“제 계획은 아니지만,우리들의 수중 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아. 전일 인베스트먼트?”
“칼을 쥐여 주니 알아서 잘 휘두르고 다니더군요. 기특하게도.”
조나단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데 왜인지 힘이 빠져 있었다.
“인수할 만한 여유는 충분히 되고?” “이 나라에선 지금 1달러로도 살 수 있는 사업체가 넘쳐 납니다.”
부채를 감당할 능력만 있다면 말이 다.
“그때가 오면 다들 환장해서 달려들 거야. 네 나라 정부와는 얘기가 끝난 거야?”
조나단은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협의 중이랍니다. 하지만 결국엔 그 렇게 될 겁니다. 다른 곳에선 전일만 큼 이 나라 정부의 입맛을 못 맞춤니 다. 대후가 탐나긴 해도 대후 전체를 탐내는 건 아니니까요.”
“전체를 인수하는 건가?”
“비슷합니다. 하지만 구조조정하고 계열사 정리가 바로 이어질 겁니다.”
“그건 앞뒤가 바뀐 거 아닌가? 내가 어디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 는데.”
“잘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이후에 쪼개서 팔 예정도 없고,경영도 현 회 장의 측근들로 기존 방식에서 크게 벗
어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언제까지나 달러가 권력이 될 순 없 죠. 이 나라는 IMF 졸업과 함께 정상 궤도로 빠르게 진입합니다. 그 다음을 준비해야죠.”
조나단의 눈가에 열은 미소가 피었 다.
“썬,가만히 보면 너는 네 나라를 참 아끼는 것 같아. 너는 아니라고 하지 만, 애국은 부끄러운 게 아니야. 나는 네가 대후에서 뭘 보고 있는지 모르겠 지만 돈이 크게 안보인다는 것은 확실 해. 그런 노력을 다른 곳에 기울이는
게 더 큰돈이 되지. 네 나라는 지금 그 렇잖아. 안 그래?”
“돈이야, 두고 보시면 알게 될 겁니 다.”
“애국심 말고도 뭐 더 있는 것 같은 데. 내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 같은 건 가? 가르쳐 줄 생각은 없고? 그러지 말고……
“100억 달러.”
“ 〇 ?,,
“반입 예정이었던 150억 달러에 추 가로 100억 달러. 대후 인수 시기에 맞춰 총 250억 달러를 이 나라로 반입 할겁니다.”
흡!
조나단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자신과 상의도 없이 그런 큰 결정을 내 렸다는 게 아니 다.
그는 애초부터 역외 자금에 대해선 관심 없다고 선언했다.
대후 전체를 인수하겠다고 해도 크 게 요동치 지 않았던 그의 눈동자가 흔 들리기 시작했다. 조나단이 한겨울에 냉수를 찾았다.
그가 단 숨에 잔을 비운 다음,부쩍 소리를 낮췄다.
“잘 생각해. 이러다 정말 1억 년짜리 종신형이야. 네가,아니 우리가 해 놓
은 작업들을 다 믿어선 안 돼. 까다롭 고 어려울 뿐이지 세무국에서 작정한 다면 못할 게 없다는 거 알잖아. 시간 이 문제지, 그만한 정체불명의 거액이 움직이면……
“급한 건 우리가 아니라 이 나라 정 부입니다.”
“지금 뭐라고 했어?”
그제야 조나단도 깨달은 게 있었던 것이다.
“250억 달러를 완전히 깨끗한 돈으 로 만들 수 있는 기회라는 겁니다.”
“그걸 네 나라 정부에게 맡긴다고? 어떻게?”
“그건 이 나라 정부에서 알아서 하겠 죠. 우리는 숫자만 보여 주면 됩니다.” “썬. 너는 어떻게 된 게…… 한 나라 를 설거지거리로 쓸 생각까지 할 수 있냐.”
조나단이 질린 얼굴로 말했다.
작년 하반기.
홍콩발 충격이 전 세계에 강타했을 때, 우리는 오히려 돈을 벌었다.
그 결과가 조나단 인베스트먼트에 유보금으로 쌓여 있는 220억 달러와,
세계의 조세 피난처에 들어가 있는 430억 달러다.
전 세계가 조나단과 조나단 인베스 트먼트에 주목하는 건 당연했다.
초대박, 투자의 신.
그런 뻔한 말들을 떠나서 유보금으 로 220억 달러나 쌓아 둔 회사가 얼마 나 있을까.
유보금 그대로 뉴욕 회사의 순수익 이 220억 달러였다.
이게 어느 정도의 규모인가 하면.
먼 미래에도 세계의 정상급 기업들 이 최고 전성기 때에나 기록할 수 있 는 수치 였다.
그런데 조나단 인베스트먼트의 조나 단과 성명 불상의 존 도는 불과 둘이 서 고작 400만 달러의 투자금으로 그 것을 해낸 것이다.
성명 불상 존 도의 신원은 비밀에 감 싸여 있으니,존 도의 명성과 관심까 지 조나단에게 집중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하물며 430억 달러는?
말이 430억 달러지.
마치 해커들이 제 정체를 숨기기 위 해 IP를 수없이 꼬아 대듯이,우리의 430억 달러도 수없이 쪼개졌다가 합 쳐지고 또 쪼개지는 과정에서 조세 피
난처들을 넘 나들었다.
그렇게 총 유동 금액은 조 달러 단위 를 가뿐히 넘었을 것이다.
세계 금융계 항간에 의미심장한 소 문이 돌기 시작한 건 무리도 아니였 다.
냉전 시기 구소련의 자금이라는 소 문은 너무도 멀리 간 것이고.
아시아 금융 위기로 말미암아 피해 국들의 정,군, 재계의 비자금들이 쏟 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제법 신빙성 있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그런 자금들 이 지금도 돌고 있을 테니까.
한편 조나단은 뉴욕의 회사에 들어
가 있는 자금 외에는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내 설명을 다 들은 그가 거기에 욕심 을 내지 않겠다는 둣,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도무지 현실감이라곤 눈곱만큼도 들지 않는단 말이지.”
“장부가 없으면 저도 어디에 얼마큼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장부를 잃어버리면?”
“다른 말이 필요합니까. 장부와 함께 영원히 묻혀 버리는 겁니다.”
“소름끼치는군.”
조나단이 두 팔로 온 몸을 감쌌다.
“그러니까 기회가 될 때마다 깨끗하 게 만들어 둬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일로 나를 부른 거였어? 말했잖아. 뉴욕 외의 자금은 관심 없 다고. 뉴욕에 들어가 있는 자금만으로 도 벅차.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렇지 않아도 그 고민. 덜어 드리 려고 부른 겁니다. 거기에 들은 게 포 트폴리오 아닙 니까?”
조나단이 가지고 온 서류 가방을 턱 짓으로 가리켰다.
“브리핑 시작해 보세요.”
조나단은 내가 스타트 버튼을 누르 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 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탁.
서류 가방이 테이블에 올려지는 소 리가 무겁게 났다.
2017년.
구골의 면접 중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다고 한다. 통칭 100만 원 게임이 다.
「1. 모르는 사람과 둘이서 방에 있다.
2. 당신은 100만원을 둘이 나눌 것을 명 령 받는다.
3. 당신은 자유롭게 금액을 결정할 수 있
지만, 100만임을 상대방도 안다.
4. 상대 방과 직 접 대화할 수 없다.
* 제시한 금액에 상대방이 납득하면 협 상 성립. 둘 다 돈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 다.
* 제시한 금액을 상대방이 거절하면 협 상 불성립. 전액 몰수.
* 당신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얼마의 금 액을 제시할 것인가?」
70:30, 50:50, 51:49, 30:70, 1:99
등
면접자마다 다양한 대답을 내놓았을 건인데, 사실 답이 정해져 있다기보다
는 면접자가 답을 어떻게 도출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는 면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질문 자체로는 행동 경제학 에서 다뤄지는 물음이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인간의 욕심’ 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다.
하지만 질문의 단위가 1〇〇만 원이 아니라,100억 원이라면 어땠을까.
거기에서도 화폐의 단위가 원이 아 니라 달러로 100억 달러라면 어땠을 까.
단 1% 배분율이라고 해도 그것이 1 억 달러가 될 수 있는 게임으로 변한
다.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다는 건,수백 억 달러짜리 파이 앞에선 틀린 말이 다.
조나단은 가상의 그 게임을 계속해 온 모양이었다. 우리가 벌어들인 돈 650억 달러를 두고 말이다.
일찍이 확정되어 있는 우리의 지분 상황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혼 자서 책정한 자신의 배분금은 일백억 달러였다.
그는 일백억 달러짜리 포트폴리오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금액이 금액인지라, 공격적인 투자 보다 안정성을 열변했다.
그래서 내놓은 게 현재 다우지수에 편입되어 있는 업체에 대한 직접적인 투자였다.
쉽게 말해서.
미국에서 잘나가는 대기업 30개를 투자 종목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이름만 대도 모두가 다 아는 글로벌 회사들.
나쁘지 않다.
다우 지수는 불패의 신화니까.
지수 자체로 평균 5%의 수익률을 기 록해 왔으며,현재의 8000포인트는 시작의 날 이전까지 2만 포인트를 돌 파한다.
중간 거 래 없이 묻어 두기만 해도 은 행 금리 이상의 수익률이 따라오게 된 다.
그런데 문제는 특별히 좋지도 않다 는 것이다.
20세기까지는 제조와 에너지 분야의 기업들이 주도했던 반면에, 21세기는 IT 기 업들의 세상이 된다.
그러나 조나단이 투자 종목으로 삼 은 30개 기업 중 IT 업종은 5개뿐이었
다.
그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말했 다.
“벌써 몫을 나누기엔 이르지 않습니 까? 몫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은 나중에 따로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 닙니다.”
“썬. 650억 달러야. 650억 달러. 이 대로 멈춰도,미친 듯이 써 대도 계속 불어날 돈이야.”
“그 가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해 보시죠. 로……
말해 놓고도 아차 싶었다.
역사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어느 가
문의 이름을 언급해 버린 것이었다. 급히 뒷말을 삼켜 냈지만 조나단은 그 짧은 찰나에 들어 버린 모양이 었다.
황급히 쳐다본 조나단은 아니나 다 룰까,동그래진 눈으로 입을 뻐끔거리 고 있었다.
결국 그가 내뱉고야 말았다.
“지금 뭐라고 했어?”
금융인들에게 그 가문의 이름은 신 격(神格)이나 다름없었다.
조나단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도 세계 대형 은행들의 이름으 로 같은 시간대에 존재하지만, 그 가
문은 전설에서나 다뤄질 환상 같은 것 이었다.
추경 자산이 자그마치 5경이라 했던 가.
그들이 전성기 때 보였던 힘은 명백 했다.
한 나라를 건국했으며, 세계 대전의 향방을 뒤바꿔 놓았다.
“아……
조나단은 할 말을 잃었다는 듯이 멍 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왜인지 고개를 끄덕거리기 시작한 조 나단이었다.
반면에 나는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그럼 무엇이 겠는가.
회귀 시간대를 시험의 장에 돌입하 던 순간이 아니라,태어나는 날로 고 른 이유가!
역경자 특성 때문에?
이후에 다시 개발할 능력치들 때문 에?
팔악팔선만 고려했다면 시험의 장에 돌입하던 때를 고르는 게 정답일 것이 다.
시험의 장에서도 나를 새롭게 리빌 딩할 기 회들은 상당히 많았으니까.
이쯤이면 눈치했을 것이다.
내가 이 시간대를 다시 살고 있는 이
유는, 팔악팔선이 튀어나오기 전에 있 었던 일들 때문이다.
인류에게는 수습할 시간이 분명히 있었다. 쌓아 왔던 문명을 유지하면서 몬스터들을 상대할 수 있는 기회가 여 러 번 있었다.
그 기회들을 놓치지 않았다면 인류 의 문명은 처참하게 무너지지 않고 현 체계 상태에서의 대응이 가능했을 것 이다.
누구나 썼던 인터넷과 각종 전자 기
기들이,우리 능력자들의 특권으로 전 락하지 않았을 거라는 거다.
하지만 전 인류는 초자연적인 대상 과 사건 앞에서 공포에 질려 버렸다.
하지 않아야 할 짓들로 기회를 날려 먹었을 뿐더러,더 악화시켰다.
그래서 무너졌고.
그 다음에 팔악팔선이 튀어나와서 더 지옥 같이 변했다.
“목표는 무슨. 아직도 배가 고프다는 겁니다.”
“……배가 고프다,좋은 표현이네.”
그러고 보니까 내 인생에서 즐겁기 로 손꼽히는 순간까지 4년이 남았다.
2002년 월드컵은 고작 스포츠 게임 따위가 아닌 희열 그 자체였다.
최근에 쓸어 담고 있는 돈들로도 얻 을 수 없었던,열광(熱狂)이 광화문 네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때와 같은 즐거움을 느낄 수 없을 거 다.
결과를 다 아니까.
그것만큼은 안타까운 일이다.
과거의 붉은 함성에서 벗어나며 조 나단에게 똑바로 말했다.
“그러면 더더욱. 은퇴 같은 건 두 번 다지 꺼내지 마십시오. 아시겠습니 까.”
조나단의 얼굴이 순간 억울하게 변 했다. 하기야 그는 직접적으로 은퇴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제시하고 있는 투자 방향이 고스란히 대변해 주고 있었다.
우리 금융인들은 입이 포트폴리오였 다.
조나단은 자신이 준비한 포트폴리오 를 쳐다보면서 말이 없어졌다.
잠시 후 그의 고개가 조용히 끄덕여 지기 시작했다.
“그건 잘 간직하고 있다가 고객용으 로 쓰시죠.”
“고객?”
“중소 투자 회사들을 합병하라는 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제야 조나단은 실없이 웃음을 지 어 보였다.
지금까지의 태도로 보건대 당연히 보류 중일 터.
그를 탓하기에도 뭐한 게,최근의 그 는 너무도 바빴다.
마치 우리나라의 정재계 인사들이 제이미를 괴롭히는 것처럼, 일약 스타 덤에 오른 그를 주변에서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여러 매체들에서 그의 얼굴을 본 게 열 번을 넘 었다.
“인터뷰,행사. 전부다다 거절하세 요. 작은 물에 몸담고 있으니 물이 넘 치고 생각도 다른 데로 새는 겁니다.”
“돌아가는 대로 덩치를 키우라는 거 지? 할 수는 있지. 그런데.”
“모두가 조나단만 쳐다보고 있지 않 습니까. 개장하는 즉시 고객들이 몰려 들 겁니다.”
“고객층은? 자산 운용사를 경영한다 는 건 쉽게 볼 일이 아냐.”
“그렇죠. 합병할 투자 회사를 잘 선 별해야 합니다.”
“운용 자산보다는 매니저들 역량 위 주로? 나보다 잘난 녀석들로 득실대
겠군. 그거 생각보다 스트레스가 심한 일이야. 통쾌하거나 즐거운 일이 전혀 아니었단 말이지.”
“제프리 케이 말이죠?”
일전에 뉴욕 회사에서 고용한 전문 기업사냥꾼이다.
“그래. 최대한 녀석을 피하고 있어. 혹 마주치면 입을 절대 열지 않지. 전 부 들통날까 봐.”
조나단이 자조적인 쓴 미소를 지었 다.
“……조나단은 저를 만나지 않았어 도 크게 성공했을 분입니다.”
“지금만큼이나?”
내가 입을 열려 하자,조나단은 조용 히 그러나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게 어떤 격려도 하지 말라는 거였다.
그는 우리의 성공에 자신이 기여한 게 크게 없다고 여기고 있었고 사실이 기도 했다.
조나단이 도와줬던 트레이딩은 주니 어 명찰을 땐 월가인이라면 반드시 갖 춰야 할 기본기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나는 조나단의 심경을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투자 회사를 확장해 나가서면서 그 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안에 잠들어 있는 굶주린 야수
그건 꼭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야 만 나오는 게 아니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한계치까지 치닫 다 보면, 자신도 모르고 있던 내면의 얼굴이 튀어나오고 만다.
투자 회사 확장은 조나단에게 그런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이다.
전투적인 확장을 요구할 테니까. 그 는 총성과 칼질만 없을 뿐이지,더 날 카롭게 벼려진 돈들로 전쟁을 치러야 한다.
잠깐 끊겼던 투자 회사 합병 건에 대 해 이야기를 이어 갔다.
“제가 눈여겨보고 있는 곳은 블루스 톤 그룹입니다.”
세계 최대의 사모 투자 회사. 월가의 사람인 조나단이 모를 리가 없는 이름 이었다.
그런데 조나단의 표정을 보니 뭔가 더 있었다. 조나단은 우리나라에 오기 전 블루스톤 그룹의 끈질긴 구애를 받 았다고 털 어놓았다.
“하지만 우리 회사의 지분 중 상당량 이 내 소유인 걸 알고 바로 떨어져 나 갔지.”
현재 조나단은 블루스톤 그룹의 창 업주보다 부자였다.
당시를 회상한 조나단의 표정이 한 결 풀어졌다. 그러고는 반문했다.
“설마 블루스톤 그룹을 인수하겠다 는건 아니지?”
“가능하겠습니까?”
조나단은 무기력한 모습 그대로 흐 느적거리듯이 대답했다.
“블루스톤도 아시아 금융 위기에 뛰 어들었다면 가능했겠지. 네게 몇 방 얻어맞고 비틀대고 있었을 테니까. 하 지만 아니야. 기존의 펀드들도 흥하고 있는 데다가, 금년도에만 40억 달러
규모의 새로운 자금을 추가로 모집하 는데 성공했어.”
“Bluestone Capital Partners III 펀 드 ”
조나단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정말이지…… 모르는 게 없군. 맞 아. 블루스톤은 그들의 세 번째 상품 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지. 그런데 대 체 왜. 그런 재능으로 그림자 속에만 숨어 있으려는 거냐. 네 나라의 관심? 나이가 어려서? 차라리 이민을 와. 나 를 내세우기보단 네가 전면에서 나서 는 게 맞아.”
조나단은 꾹 참고 있던 말들을 일거
에 쏟아 냈다.
그런 다음 뭔가 못마땅한 얼굴이 되 어서 자신의 콧잔등을 긁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쌓 였어. 내 상황이 그렇잖아.”
“그러니까 운동을 하시란 말입니다. 전보다 배가 더 나온 거 아시죠? 그리 고 제가 전면에 못 나서는 건 저번에 도 설명드렸을 텐데요.”
“세무조사가 크게 걸리지?”
“맞습니다. 그리고 이건 별개인데 아 까 했던 얘기,진심이었습니다.”
“뭐?”
“조나단은 저를 만나지 않았어도 크
게 성공했을 분이라고 했잖습니까.”
“아. 그거.,,
조나단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 지만 사실이었다.
“거기서 스트레스 받으면 이번에 능 력을 보여 보세요. 투자 관련해서는 아니지만.”
“뭔데?”
“블루스톤의 핵심들이 이 나라에 들 어와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기업 사냥꾼들의 전쟁터다.
블루스톤에도 기업 사냥팀이 있다. 명함에는 ‘특수 상환 펀드 운용팀’이
라고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있어도, 그 들이 하는 일은 기업과 부동산을 사서 쪼개 파는 일이다.
그러한 작업으로 고객들의 자산에 수익을 보탠다.
“뉴욕 회사에 그 팀부터 포섭해 넣으 세요.”
“진심이었어?”
“당연히요. 아래부터 흔들어 놓으세 요. 그들이 없으면 블루스톤의 새 펀 드 상품은 무용지물입니다. 거기서부 터 시작하는 겁니다.”
자산 운용사 중에 가장 탐났던 건 블 루 록이었다. 블루스톤 그룹 자체도
전 세대부터 글로벌 투자 회사로 대단 한 명성을 쌓아 왔지만.
그들 속에 웅크려 있었던 블루 록에 는 엄청난 비전이 예정되어 있었다.
블루스톤 그룹의 산하 회사였던 블 루록.
단언컨대 그들은 잠룡(潛龍)이었다.
95년도. 그룹에서 독립하면서부터 승천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20년 후에는 김청수, 질리언,제시카와 함께 세계 글로벌 투자 회사 중 한곳으로 폭발하고 마는 데.
당시 그들이 관리하는 자산 규모는
자그마치 4조 달러였다.
그때 환율로 약 5000조 원 말이다. 그들의 프로세스를 따르고 있는 자금 들까지 합치면 조 단위의 금액은 경 단위로 훌쩍 변한다.
하지만 내가 탐내는 블루 록은 미래 의 블루 록이지 현재의 블루 록이 아 니다.
지금은 업계 순위 20위에 간신히 진 입한 상태.
모회사였던 블루스톤 그룹에도 치이 고 있다.
그나마도 블루 록의 최전성기는 내 뇌리에서만 기억될 일이었다.
「세계 경제를 장막 뒤에서 주무르는 새 도 뱅크의 총재들」
그 명함은 다른 이의 차지가 될 것이 다.
더 크게 포장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