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rmacy RAW novel - Chapter 62
62화.
62화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지후는 한계를 호소하는 몸을 좌석에 깊이 묻었다. 생수 한 병 외엔 아무것도 서빙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비행을 시작한 후 스튜어디스가 가져다준 신문을 펼쳤다. 신문의 중간쯤 페이지에 ‘화제의 인물’ 섹션이었다. 이번 주 스페셜 인터뷰는, Y의대 김명환 교수와 권승준이었다. 지면의 반은 할애한 공동 인터뷰를 읽었다. 존스홉킨스 의대 잭 그라이더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권승준은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한국의 젊은 천재 의사라 설명되어 있었다. 그가 발전시킨 아이디어와 노력이 아니었다면 결코 가시적인 결과를 도출해 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김명환 교수의 칭찬에 젊은 천재, 게다가 미남인 의사는 과찬이시라며 얼굴을 붉혔다고 적혀 있었다. 기사를 읽는 여자라면 누구든 권승준은 순수한 열정과 섹시함이 공존하는 남자라고 인식할 터였다.
지후는 신문을 접어 넣었다. 더 이상 어떤 정보든 뇌에서 받아들일 여지가 없다.
지난 일요일, 통화 중에 찬후가 놀이공원에서 있었던 세영의 발작에 대해 이야기했다. 병원으로 바로 갔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라고, 대신 의사 선생님이 와 줬다고 했다.
‘놀이공원으로 ’
‘약사 선생님 친구라던데 세영이 발작 소식 듣고 왔어요. 세영이 주치의 교수님 제자 인 것 같았는데, 놀이공원으로 급히 왔더라고요. 괜찮을 것 같다고 지켜보고 추가 발작만 없으면 된다고 해서 의무실에서 쉬고 기사님께 부탁해서 세영이는 우리 차로 같이 왔어요.’
가흔과 그 전에도, 후에도 몇 번이나 통화했지만 권승준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말할 기회가 없었겠지.
지후는 들썩이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눈을 감았다. 격무와 스트레스로 긴장이 쉽게 풀어지지 않아 경련처럼 눈꺼풀이 자잘하게 떨렸다. 뇌가 간헐적으로 욱신거려 타이레놀을 삼켰다. 압박감 속에 짧게 잠 속으로 빠지다가 다시 눈을 뜨길 반복했다.
이어폰으로 막아 둔 귓구멍이 뻐근했다. 지후는 안대를 내리고 부신 눈을 찡그렸다. 기장이 곧 인천공항에 도착한다는 안내를 하고 있었다. 창 덮개를 올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름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물안개처럼 무겁고도 얕은 잠에 빠질 때마다 가흔이 생각났다. 웃는 얼굴, 부드럽고 흰 뺨, 포근한 향, 따스한 체온, 젤리 같은 입술, 다디단 숨결.
지후는 좌석에 기댄 몸을 뒤척였다. 모습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으스러지게 안고 싶어 저절로 팔에 힘이 들어갔다. 가흔을 안고 눈을 감으면 따뜻하고 깊은 물에 잠긴 것처럼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벨트 위를 돌아 나오는 여객 화물을 기다리는 동안 지후는 출장을 같이 했던 변호사 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민 변, 수고 많았어. 오늘 푹 쉬고 내일 보자.”
피로감에 삭은 얼굴로 어깨를 두드려 주는 선배 변호사에게 지후도 웃어 보였다.
“편히 쉬시고 내일 뵙겠습니다.”
다른 변호사들 가방이 지후 것보다 일찍 나왔다. 일행 중 제일 마지막으로 나온 캐리어를 끌어내리자 이제 드디어 출장이 마무리가 된 기분이 들었다. 지후는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 오랜 시간 비행으로 무거워진 다리를 움직였다. 가방 밑면에 달린 바퀴 네 개가 도르르 굴러가는 소리가 피곤하여 예민해진 귀에 더욱 크게 들렸다. 지후는 세관을 통과하며 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핸드폰 전원을 올리고 최근 통화 목록 제일 위에 있는 사람을 길게 눌렀다.
여보세요.
“가흔아.”
네.
“도착했어.”
네, 알아요.
“조금만 기다려. 집에 들러 짐 풀고 내가 데리러 갈게.”
좀 쉬어야 하지 않아요
지후가 멈춰 서서 소리 없이 웃었다.
“비행기 안에서 많이 잤어.”
웃으니 좀 나아 보이네요.
“응 ”
많이 지쳐 보이는데.
지후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들이 기다리는 대기선 밖 제일 첫 번째 줄에서 가흔이 손을 흔들었다.
“아.”
가흔이 어서 오라는 듯 양팔을 벌렸다. 내내 질질 끌려오던 가방이 두두두둑 세차게 바퀴 소리를 내며 굴렀다.
일요일 공항에는 사람들도 많은데 가흔에게 손만 뻗어 아주 약간만 쓰다듬어야지. 머리칼만 만져 봐야지. 지나치게 빨리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지후는 다짐했다. 하지만 예의 바르고 매너 있는 민지후는 가흔에게 조심스레 손끝이 닿고, 이어 가흔이 눈을 맞추고 핑크빛 입술을 열어 웃어 주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 어깨를 끌어 손바닥으로 쓰다듬고 멈춰야지, 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어 약간만 서양식 인사처럼 허그만……, 결국엔 작은 몸을 완전히 끌어안고 말았다.
“어떻게 왔어.”
가흔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물었다.
“보고 싶어서.”
“금방 갈 텐데.”
“빨리 보고 싶어서.”
지후는 가흔의 손을 잡아 깍지를 맞물렸다. 제 손가락 사이사이 가늘고 부드러운 가흔의 것이 들어왔다.
택시를 타기 위해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먼저 간 줄 알았던 동료 변호사가 한 발 늦게 공항 건물에서 나와 어, 하는 표정으로 지후를 바라보았다. 지후보다 가흔과 먼저 눈이 마주쳤다. 빠르게 살피는 시선을 느끼며 가흔은 마치 지후와 일행이 아닌 듯 한 발 뒤로 떨어져 섰다. 핸드폰을 꺼내어 읽었던 메시지를 다시 확인하며 시선을 피했다.
“민 변.”
지후는 별다른 말없이 고개만 숙여 목례했다.
“안 그래도 전화할까 했는데 김무영 팀장님에게 이메일로 송고했던 정리 자료 말이야.”
“네.”
“제일 마지막에 검토했던 시장 분석 자료 업데이트가 안 된 거 같아. 기내에서 훑어봤는데……. 그거 이 변이 민 변한테 안 넘겼어 ”
“확인해서 제가 다시 수정하고 재송고하겠습니다.”
“그래, 월요일 아침 회의 전까지만 하면 되지 않을까.”
초록빛으로 불이 바뀐 뒤에도 대화를 이어 가던 남자가 깜박거리기 시작하는 신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먼저 가십시오. 저는 확인부터 해 보겠습니다.”
지후가 핸드폰을 꺼내어 이메일 창을 띄웠다. 남자는 지후의 어깨를 툭 두드리고 잘 들어가라는 인사를 하고 서둘러 횡단보도를 건넜다.
가흔은 지후가 이메일을 열고서 확인을 마칠 때까지 좀 떨어져서 일없이 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공항까지 온 건 생각이 짧았던 것 같다고 후회하였다. 지후가 동료 변호사를 보았을 때 표정이 어땠더라, 그 사람은 가흔과 지후의 관계를 눈치 챘을까. 혹시 놓친 부분은 없는지 하나하나 떠올리려 애쓰자 가슴 뒤편이 무거워졌다. 익숙한 느낌이어서 슬펐다. 그래, 13년 전에도 이런 게 지겨웠었지. 안소니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가흔은 늘 주위를 살피고 눈치를 보고 숨고 주뼛거렸었다.
택시 대기선에서 지후와 가흔은 나란히 줄을 섰다. 겨울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지후가 가흔의 목도리를 여며 주었다. 코트를 손바닥으로 쓸어 보는 지후에게 가흔이 물었다.
“왜 그래요 ”
“응 ”
“좀 찡그린 것 같은데.”
“아니.”
지후는 택시 대기선 주위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부쩍 차가워진 날씨에 다들 두툼한 파카나 코트 차림이었다. 가흔이 톡톡 발을 까닥였다. 지후의 시선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던 가흔이 짐짓 밝게 말했다.
“어머, 여기 모범택시 줄이에요.”
“응.”
“으아, 인천인데.”
지후가 조금은 허탈하게 웃었다.
“회사에 청구할 거야. 출장이었으니까.”
“그런 것도 줘요 ”
“그럼. 얼마나 부려 먹었는데.”
가흔이 고개를 들어 지후를 살폈다.
“집에 가서 쉬어요. 잠도 푹 많이 자고.”
아, 가흔이 메고 있던 제법 큰 가방을 벌려 무언가를 꺼내었다. 제약회사 로고가 있는 자그마한 쇼핑백이었다.
“잊을 뻔했어요.”
“뭐야 ”
“비타민. 먹는 거 특별히 없으면 하루 한 알만 먹으면 돼요. 비타민 C는 따로 더 추가해도 되고요. 피로감도 적어지고 근 긴장감도 풀어져요. 숙면에도 좋고.”
“만병통치약이네. 약사님, 이거 진짜 비타민 맞아 설마 눈도 좋아지고, 피부도 하얘지고 그러는 거야 ”
“맞는데……. 원래 비타민이 그런 건데.”
“이건 뭐야 ”
지후가 비타민 박스 옆에 있는 각진 파우치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저번에 출장 가기 전에 전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못 만나서요, 여행용으로 비상약 좀 챙겼어요.”
가흔은 어쩐지 민망해서 파우치만 쳐다보며 말했다.
“증상이랑 용법 다 써서 넣었으니까 다른 거 따로 안 챙기고 파우치만 들고 가도 괜찮을 거예요. 다음번에 가져가요. 이번 일 끝날 때까지 미국은 자주 가지 않아요 ”
시선이 느껴져서 위로 올려다보니 지후가 파우치를 손에 쥐고서 가흔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 선물을 주면서 얼굴을 안 봐 ”
“이게 무슨 선물이에요. 약이지.”
“뭐든.”
“약사가 약을 주니 너무 자연스러워 진부하네요. 난 장미도 받았는데.”
“아, 장미. 안소니가 장미를 주는 것도 자연스러웠지.”
지후의 농담에 가흔이 그제야 웃었다.
“선배한테 나도 뭔가 선물해 주고 싶었는데 뭐가 필요한지 모르겠고, 어휴……. 내 감각으로는 무리였어요.”
“자랑해야겠다.”
“네 ”
“다음번 출장 가면 파우치 흔들면서 자랑해야지. 예쁜 약사님이 직접 챙겨 주신 비상약 선물이라고.”
“아우, 그러지 말아요. 약국 오는 손님들 찾으시면 다 챙겨 드리는 별거 아닌 평범한 비상약. 게다가 예쁜은 무슨. 백 년치 오글거려요.”
어느덧 두 사람이 대기선 제일 앞에 서게 되었다. 가흔이 다가오는 검은색 택시를 보며 말했다.
“타고 가세요. 오늘 봤으니까…….”
가흔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선배는 집에서 그냥 쉬어요. 나는 여기서 지하철 타고 서울역까지 가서 버스타면 바로 집 앞이에요.”
“싫은데.”
지후가 가흔의 손을 꽉 쥐고는 대기하고 있는 택시를 향해 걸어갔다. 내려서 짐을 받으려는 기사님께 괜찮다고 말하며 지후가 직접 트렁크에 캐리어를 올리고 다시 가흔의 손을 잡았다.
“같이 가.”
지후는 열린 뒷문으로 가흔을 먼저 타게 하였다.
택시 안에서 눈을 감고 있던 지후의 손을 가흔이 가만히 두드렸다.
“도착했어요.”
오피스텔 앞에서 내려 지후가 가흔에게 말했다.
“잠깐이면 돼. 가방 올려다 놓고 씻고 옷 갈아입으려고.”
“네.”
“올라갈래 ”
가흔은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 있는 지후의 손만 쳐다보았다.
“근처 카페에서 기다릴래 ”
가흔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요……. 그냥…….”
“안 되겠다.”
지후가 가흔의 말을 끊으며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마치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손을 얽고는 말했다.
“올라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