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rmacy RAW novel - Chapter 63
63화.
63화
지후는 카드키를 인식시켜 유리로 된 출입문을 열고 할로겐 조명을 받아 반짝거리는 대리석 바닥을 빠르게 걸어갔다. 가방은 조금씩 균형을 잃고 삐뚜름하게 움직였지만 지후는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오직 가흔의 손만 쥐고서 앞만 바라보았다. 금빛 엘리베이터 가장자리는 거울처럼 매끄러운 흑색 대리석 장식으로 삼면이 둘러져 있었다. 대리석에는 지후의 모습만 비쳤다. 한 걸음 뒤쳐져 서 있는 가흔의 얼굴은 반만 잘려 비추었다. 무표정한 지후는 화가 난 것 같았다. 아니, 다만 피곤해하는지도.
고등학교 1학년 봄, 송설희가 괴롭혀서 몰래 촬영했던 등굣길 안소니의 얼굴도 그랬었다. 답답하여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소리를 지르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지후의 오피스텔은 33층 가장 꼭대기 층이었다.
“무언가가 가로막힌 느낌이야.”
지후가 둘만이 있는 엘리베이터에서 말했다. 시선은 바뀌는 디지털 숫자에만 두고 있었다.
“무슨 말이에요.”
“너와 나.”
지후가 가흔을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긴장감으로 목이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가흔이 크게 숨을 삼켰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가흔은 한 발 앞서 걸어가는 지후를 따랐다. 호실 앞에 서서 현관 키패드를 느리게 누르고 지후가 가흔을 돌아다보았다.
“외웠어 ”
가흔이 고개를 저었다.
“안 봤어요.”
지후가 손짓을 했다. 가흔이 한 발 다가서자 제 앞으로 당겨 세웠다. 문과 지후 사이에 서게 된 가흔이 고개를 돌려 지후를 쳐다보았다.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가흔의 턱을 받쳐 들었다. 시선이 정확히 마주치고, 지후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런 키스라 가흔이 움칫 긴장하며 입을 꼭 다물었다. 그런 가흔을 알아챘는지 지후는 꾹 누르듯 입을 맞추고서 떨어졌다.
전자키에서는 다시 자동 잠금이 되었다는 신호음이 울렸다. 지후가 뒤에서 손을 뻗어 가흔의 손등을 감쌌다. 까만 키패드 위에 가흔의 손을 올리게 하자 연푸른빛 숫자들이 떠올랐다. 지후가 가흔의 손등을 감싼 채로 가느다란 검지를 쥐었다. 툭툭 가흔의 검지가 하나씩 느리게 번호를 눌렀다. 등 뒤로는 체온이 전달될 만큼 지후가 닿을 듯 붙어 서 있었다.
띡, 띡…….
하나씩 신호음이 날 때마다 가흔은 심장이 점점 더 크게 뛰어올랐다. 여덟 번째 숫자를 눌렀을 때, 심장이 목으로 옮겨 간 듯 숨이 막혔다. 열림음이 경쾌하게 울리자, 가흔은 숨을 몰아쉬었다. 지후가 여전히 손을 잡은 채로 말했다.
“넌 하나씩 짚어서 가르쳐 주는 걸 편안해했지. 이제 외웠어 ”
“……네.”
지후가 가흔의 손등을 잡았던 손을 놓고 문고리를 잡았다. 바로 앞에서 문이 열리자 가흔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툭, 지후의 가슴에 등이 닿았다.
“들어가.”
지후가 말했다.
가흔이 현관에서 신발을 벗기 전 지후가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 창가에 섰다. 널찍한 거실을 가로지르는 동안 넥타이 매듭을 잡아당겨 늘어뜨리고 와이셔츠 단추를 풀었다. 다가선 가흔에게 손을 내밀었다. 올려진 가흔의 손을 잡고 다른 손은 가흔의 팔 아래로 허리를 가볍게 둘러 안았다. 지후가 걸음을 움직이면 가흔이 뒤로 물러섰다.
“4분의 3박자. 타다다, 타다다. 간격을 유지하며, 한 걸음 나가면 상대는 뒷걸음으로 가야지.”
지후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 웃었다.
“너랑 나 왈츠 스텝을 밟는 것도 아니고, 왜 거리가 도무지 좁혀지지 않지 ”
지후가 스텝을 멈췄다.
“가흔아. 왈츠는 그만하자.”
가흔이 지후를 올려다보았다.
“씻고 나올게.”
지후가 거실에 가흔을 남겨 두고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흔은 천천히 걸어가 거실에 있는 유일한 가구인 푸른색 가죽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맞은편엔 벽의 반 너머 차지할 만큼 커다랗고 테두리가 없는 곡면 티브이와 얇고 매끈한 오디오 스피커만 있었다. 소파 위에 걸린 청색과 녹색의 커다란 점화가 집 전체의 분위기를 주도하였다.
가흔은 고개를 비틀어 청록의 물결처럼 아른거리는 점화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초점이 흐려질 때면 어느 먼 바다의 청록빛이, 다시 눈을 깜박이면 눈이 시린 청색의 점이 보였다.
김환기.
난생 처음 갔던 고급 호텔 로비에 시리즈로 걸려 있어 감탄했던 그의 작품을 민지후의 오피스텔에서 감상하는구나.
가흔은 손바닥을 들어 시린 눈동자를 눌렀다. 승준에게 실연당했던 날이었다. 최고의 날에서 최악의 날로 처박혔던 오후가 떠올랐다.
드르륵 가흔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코트 주머니에서 꺼내어 확인하니 승준이었다. 가흔은 수신 거절 버튼을 눌렀다. 주머니에 도로 넣자마자 다시 전화가 왔다. 수신 거절. 세 번을 반복하고 호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 넣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울리는 진동 소리 때문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오기처럼 핸드폰을 수신하고는 말했다.
“왜.”
논문, 학술지 통과되었어.
“알아. 기사 봤어.”
며칠을 기다렸는데……. 축하 인사 한마디쯤 해 줄줄 알았어.
“권승준.”
가흔은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 축하해. 네가 고생한 거 내가 제일 잘 알아. 성과가 있어 다행이고 진심으로 잘되었다고 생각해.”
승준이 수화기 너머 낮게 웃었다.
미친 새끼인거 아는데.
잠시 말을 멈추었다. 승준이 무언가를 꾹꾹 삼키며 말했다.
나도 이런 내가 미치겠는데, 부모님도 가족 누구도 친구도 아니야. 가흔이 너 외엔 이 걸 나누고 싶은 사람이 없어. 오후에 내가 그쪽으로 갈게. 잠시라도 좋아. 한 번만 만나 줘.
“승준아.”
가흔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지 마. 그리고 나 이제 전화 안 받아. 하지 마.”
가흔은 핸드폰을 무음으로 만들고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지금부터는 확인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사진으로만 봤던 대서양 바다빛을 품은 청록 점화를 보는 눈에 눈물이 고였다.
기척이 들려 고개를 돌려 보니 지후가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서 있었다. 가흔이 시선을 피해 눈가를 닦아 냈다. 맨발에 트레이닝 팬츠, 겨울인데도 짙은 색 반팔 라운드 셔츠만 입고 머리에 남은 물기를 다 털지 않고서 지후는 똑바로 서서 가흔을 내려다보았다.
가흔의 무릎 위에 툭 쇼핑백을 올려놓았다.
“뭐예요 ”
“열어 봐.”
속에 든 박스를 열고 얇은 포장 용지와 핑크색 커다란 리본을 풀었다. 크림색 코트가 보였다. 가흔이 손으로 코트를 가만히 쓸어 보았다.
“이런 건 왜.”
지후가 가흔의 무릎 위에 놓인 박스를 들어 올렸다. 옆으로 내려두고 가흔을 일으켰다. 여태 입고 있던 낡은 코트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소파 위에 헌 코트를 떨어뜨리고 크림빛 코트를 들어 입혀 주었다. 소매와 품은 넉넉하고 길이도 무릎 아래까지 길게 내려오는 코트였다. 목선이 높아 속단추까지 채우면 바람이 들어올 틈이 없을 것 같았다. 지후는 허리끈을 꼭 맞게 묶어 예쁘게 리본을 만들어 주었다.
“이런 옷은 나 안 어울려요. 입을 데도 없고.”
솜털을 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너무 가볍고 따스해 세상에 이런 재질의 옷이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대체 이런 코트는 얼마쯤 하려나.
“잘 어울리고, 아무 데나 갈 때 다 입으면 되고.”
지후가 코트 깃을 올려주며 말했다.
“사 놓은 지 꽤 되었는데 거절할까 봐 주지 못했어.”
“맞아요. 나 이런 거 부담스러워요.”
가흔이 허리 매듭을 풀고 코트를 벗은 뒤 가볍게 접어 열린 박스 속에 넣었다.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는 낡은 코트를 집어 드는데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가흔과 지후가 주으려 동시에 손을 뻗었다. 바닥 위에서 핸드폰이 반짝였다.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보며 지후가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액정 위에 표시된 다섯 번도 넘는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 표시를 보며 지후가 핸드폰을 가흔에게 내밀었다.
[빌라 앞에서 기다릴게.]팝업으로 떠오른 메시지를 두 사람이 동시에 읽었다. 지후가 딱딱해진 표정을 억지로 풀었다.
“가흔아.”
“네.”
“우리 왈츠의 간격 속에 다른 남자가 있어 ”
가흔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공항엔 왜 왔어.”
“보고 싶어서.”
“내가 ”
지후의 물음에서 가흔은 오후 시간을 승준에게 내어 주기 위함이었냐는 오해를 읽었다. 윗니로 아랫입술을 물어뜯으며 가흔은 답하지 못했다. 지후의 전화를 끊고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뒤척이며 오로지 한 사람만 생각하고 그 사람 때문에 마음이 저렸다. 열일곱 정가흔은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그래서 여기까지 왔는데……. 안소니와의 간격은 여전히 벌어져 있었다. 잘생기고 돈 많고 매너 좋은 남자와 잠시 꿈같은 연애, 그런 연애의 상대를 하기엔 안소니는 가흔에게 너무 깊고 오래된 사랑이었다. 덮어 두었던 추억은 상처 입은 자존심과 사춘기의 좌절을, 그리고 사무치는 짝사랑과 감당하기 버거웠던 열등감을 같이 불러 일으켰다.
어떤 종류이든 안소니에 대한 감정은 예전에도 지금도 질량이 너무 높아 굴러떨어지는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찔한 속도감에 가흔은 늘 무서웠고 움츠러들었다.
가흔은 조금은 냉담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후와 눈을 맞추었다.
“마음이 미어질 만큼 보고 싶었어요. 이렇게까지 보고 싶어 해도 되나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공항에 가면서 내내 물어보고 싶었어요. 민지후 씨, 내가 이렇게까지 보고 싶어 해도 되나요.”
“무슨…….”
가흔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요, 안소니를 한 번도 맘껏 보고 싶어 해 본 적도 없어서 그걸 모르겠더라고요. 아직도 난 교복을 입고 있는 것 같아요. 제대로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을까 막막하던 열일곱 살.”
지후가 가흔의 어깨를 잡았다. 가슴에 고인 물이 흘러내리는지 쉴 새 없이 눈물이 뺨을 적셨다.
“그래서 나는 선배한테는 뭘 줘야 하는지도, 어디까지 줘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알아요. 나 선배한테만 제일 옹졸하고 야박한 거. 받기만 하는 거 알아요. 그래도 난 진짜 모르겠어요. 다 모르…….”
눈물이 흘러내린 입술이 더운 입술에 삼켜졌다. 가흔은 팔을 벌려 민지후를 꽉 끌어안았다. 발꿈치를 들어 지후의 입술을 빨아들이고 턱을 핥았다. 목에 입을 맞추자 지후가 가흔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상체가 반쯤 휘어진 채로 입술이 맞닿고 혀를 빼앗겼다. 기교 없는 흡입이었다. 마치 소유권을 증명하듯이 깊이 빨아들이고 다시 깊숙이 밀어 넣었다. 으읍, 숨이 먹혀 들어갔다.
무릎 뒤로 팔이 닿나 싶더니 그대로 가흔의 몸이 덜렁 들어 올려졌다. 그런 채로 입술을 받았다. 가흔이 숨이 가빠 할딱이자 혀를 잠시만 놓아주고는 턱부터 귀까지 길게 핥아 올렸다.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가 떠 보니 침실 안이었다. 가흔을 바닥에 내려 주고는 지후는 손을 들어 가흔의 머리부터 뺨을 지나 턱 그리고 어깨와 팔까지 길게 쓸어내렸다. 손이 닿는 정수리부터 손목까지 솜털까지 모조리 일어서는 기분이었다. 스웨터를 하단부터 벌리며 손이 들어왔다. 배꼽 주위를 가볍게 쓰다듬고 허리선을 따라 등 뒤로 손이 움직였다. 긴장감에 가흔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벗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