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rmacy RAW novel - Chapter 68
68화.
68화
“민지후.”
“네.”
“무슨 스토리이길래 이렇게까지 입을 다물어.”
“죄송합니다.”
“1년치 사과를 오늘 다 하는구나. 그런다고 받아 줄 것도 아닌데.”
“아버지.”
민경국이 부드러운 미소를 만들었다.
“나와 서 병원장을 기만하고, 중간에 자문 재계약이 맞물려 있었고, 게다가 이번엔 언니가 아닌 동생이라니. 민경국 아들 민지후가 서병원 자매를 오가는 꼴이 되었어. 지후야, 나로선 쉽게 넘어가 줄 수가 없구나.”
여전히 열리지 않는 지후의 입만 바라보다가 경국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나의 사건 추론 능력을 시험하는 중이야 ”
예리한 빛을 감추는 민경국의 웃음이다. 그럴 때면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는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중이었다.
“두 번째 만난 날, 서지현 실장이 저에게 들킨 후에 부탁했습니다. 언니에게 시간을 조금만 벌어 달라고 했습니다. 다른 남자와 다시 선을 본다면 서 병원장님이 억지로 결혼까지 진행시킬 수도 있다고……. 저는 그들의 사정을 굳이 알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장녀든 차녀든 이후로 사적인 만남은 일체 없었습니다.”
“지후야.”
“네.”
“그림에 빠진 부분이 있어. 자문 재계약도, 서지현이 마음에 든 것도 아니라면 네가 나에게 이런 질타를 받을 일을 묵인을 했을 리가 없어. 넌 그 정도로 무른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불쾌해하며 냉정하게 굴었겠지. 그렇다면 빠진 연결 고리, 내내 나한테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 필사적으로 감추고 싶은 사람, 자매와 연관되어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누굴까.”
민경국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꽤 유능한 검사였고, 정치인이었고, M&P 대표 변호사야. 그런데 그건 지금은 모두 필요가 없구나. 논리적 추론은 걷어치우고 아버지로서 아들에 대한 직감.”
지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경국이 물었다.
“민지후, 네가 지금 빠져 있는 사람이야 ”
지후는 민경국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답했다.
“맞습니다. 아버지. 그 사람이 연관되어 있어서 그랬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는 싫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사람 사적인 부분이 있어 그렇습니다.”
어차피 경국이 상황을 눈치를 채었다 하더라도 제 입으로 가흔의 실연을 시시콜콜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경국의 입매가 느슨해졌다.
“그 사람을 잡고 싶어서 네가 서병원 원장 장녀의 사랑을 도와줬구나.”
“그랬던 거…… 같습니다.”
“자신 없는 대답까지.”
지후를 바라보는 민경국이 약간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내 아들이 천하에 제일 잘난 녀석이라고 믿는데 너를 사각, 오각 관계에 밀어 넣고 이렇게까지 눈치를 보게 만들다니……. 허허. 홍영은이 들었으면 무어라 말했을까.”
기울어지던 고개를 들어 지후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마, 예쁜 내 아들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엄마가 응원한다. 화이팅! 그렇게 말했겠지.”
“아…….”
지후가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낮추었다.
“기억하니 ”
“……그럼요, 아버지.”
“네 엄마는 늘 나와는 다른 접근을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경국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손을 내밀어 지후를 일으켰다. 잡은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며 한 번 두드리고는 놓았다.
“어떤 사연이든 누구든 나는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구나.”
“아버지, 그 사람은 이 일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경국이 지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알게 된다면 어떨 거 같으니 ”
“그런…….”
지후가 낮게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인연이라는 단어 뒤로 숨어야겠지.”
데스크의 전화벨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경국이 지후에게 이만 나가 보라는 손짓을 하였다.
***
수현이 카모마일 티를 받아 자리에 앉은 후 승준이 내려오기까지 옆 테이블에 사람은 두 번 바뀌었다. 시간을 내기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왔으니 기다림에 불만은 없었다. 핸드폰을 열어 뉴스 기사를 읽고 이메일을 열어 업무적인 처리를 하였으니까 시간을 딱히 낭비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수현은 커피 전문점이라고는 하나 병원 안에 있어 특유의 무거운 분위기가 주는 피로감에 지쳐 있었다. 피로감이 더해지자 며칠 내내 극도로 예민해진 신경이 팽팽히 당겨져 끊어질 것만 같았다. 또 달갑지 않은 전화가 들어왔다. 자리에 앉아서도 벌써 세 번째다. 수현은 운전 중이라는 메시지를 보내며 수신을 거절했다. 뒤이은 길고 긴 메시지도 확인하지 않았다.
승지의 욕심은 애교 수준이었고 받아 줄 만했지만 승준의 아버지까지 포함시키자면 도무지 상대할 수 없는 저급한 가족들이었다. 불쌍한 승준을 가족에게서 분리시켜야 했다. 아니라면 앞으로 얼마나 더 평생도록 시달려야 할지 모를 일이다.
수현이 조금 찌푸리며 고개를 드는데, 푸른색 수술복 위에 가운을 입고서 승준이 테이블 앞에 섰다. 수현을 향해 조금 무뚝뚝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미안해요. 바쁜데…….”
“아니.”
두통이 있는지 자리에 앉으며 승준은 이마를 주먹으로 눌렀다.
“차, 뭐 마실래요.”
“괜찮아. 시간이 없어서.”
승준이 늘어선 대기줄을 흘끗 보고는 거절했다.
“미리 시켜 놓을 걸 그랬어요.”
수현이 제 컵을 승준 앞으로 밀어 놓았지만 승준은 손을 뻗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수현이 일어서서 한쪽에 비치되어 있는 물병에서 생수 한 잔을 따라 왔다.
“괜찮은데.”
“마셔요. 목말라 보여요.”
“고마워.”
승준이 물 컵을 단숨에 비웠다.
수현이 용건을 먼저 꺼냈다.
“승준 씨, 아파트요.”
“응 ”
“신도시 아니고 서울에 하나 구하고 있어요. 제 명의예요. 엄마가 명의는 아직 그렇게 하실 수 없다고.”
승준이 수현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야.”
“그제 승준 씨 아버지 서병원 다녀가셨는데……. 못 들었나요 ”
승준이 억장이 막혀 잠시 멈췄던 숨을 낮게 터트리고는 손을 벌려 이마를 쥐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외부에 계셔서요. 엄마가 급히 만나셨어요. 괜찮아요. 이야기 잘 되었고 엄마도 괜찮다고 하시고. 대신에 이사가 조금 더 늦어지네요. 최대한 빨리 이사할 수 있는 조건으로 찾는데 오늘 보여 드린 아파트는 맘에 안 드시나 봐요.”
수술에 들어가느라 끼니를 거른 승준의 뱃속에서 터질 듯한 짜증과 분노가 뜨겁게 솟았다.
“그래서 말인데요, 난 상관없어요. 이사는 순전히 엄마 생각이세요. 승준 씨 부모님께선 이사가 많이 번거로우신가 봐요. 기분 상하신 것 같기도 하고. 계속 전화하시고, 메시지 보내는데 저는 부동산 아파트 시세 그런 거 몰라요. 실은 나도 좀 귀찮네요. 아파트 이사한다고 뭔가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데 엄만 괜한 자존심을 세우고……. 그렇지 않아요 ”
“그래, 내가 처리할게.”
승준이 딱딱하게 말했다. 잔뜩 굳은 승준을 풀어 주려는 듯 수현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참, 원피스요. 기억해요 ”
“무슨 ”
“저번에 매장에서요. 지현이.”
한 벌밖에 안 들어 왔다는 원피스를 지현이 원하는데 누군가가 여자 친구 선물로 주문했다는 이야기였다. 서지현……. 승준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게 왜 지현 씨가 선물로 받기라도 했어 ”
“맞았어요. 그렇더라고요. 지현이 드레스 룸 갔더니 걸려 있었어요. 선물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하는데 내 눈은 못 속여요. 괜히 나 보기 미안해서 그러는 것 같은데…….”
“왜 수현 씨 보기가 미안한데 ”
“그게요. 좀 꼬였는데…….”
수현이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몇 달 전에 선보러 나가야 한다고 울었잖아요.”
“응.”
“결국 지현이가 대신 나갔어요. 그 남자 지현이인 거 알았는데 덮어 줬어요. 매너가 좋기도 하고, 혹시 지현이가 맘에 들었나 그랬는데 맞더라고요. 그날…….”
수현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무언가 아주 재미있는 장면을 떠올리는 듯이, 어젯밤 한참 웃으며 봤던 연예 프로그램을 이야기하듯이 말했다.
“우리 너무 바빴어요. 호텔에 룸 잡고서 옷 바꿔 입고 지현이가 라운지로 내려갔거든요. 중간중간 나랑 몰래 전화하면서 상황 보고하고요. 나 흉내 내면서 애프터눈 티 세트 우아하게 먹느라 고역이었대요. 걔 나랑 성격 딴판인 거 알죠 ”
“애프터눈 티 ”
설마.
승준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그날 라운지를 떠올리려 애썼다. 가흔에게 이별을 이야기해야했다. 마치 취한 사람처럼 혹은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해 감각이 둔해진 사람처럼 정신이 아득하였다. 흐르는 강 속에 잠겨 있는 듯 주위에서 울리는 소리는 먹먹하고 눈앞은 흐렸었다. 그 라운지에 지현이 수현 대신 있었나. 수현과 수시로 했던 통화 내용에 승준과 가흔도 포함되었나.
“내가 갔던 W호텔 말이야 ”
승준이 얼굴이 무섭게 굳으며 물었지만 수현은 승준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래요. 애프터눈 티. 영국 황실 셰프가 기획한 애프터눈 티.”
그날, 가흔이 바랐던 애프터눈 티를 마지막으로 꼭 사 주고 싶었다. 승준이 예약을 하려했지만 웨이팅에 올리는 것조차 실패하자 수현이 대신 예약을 해 주었다. 그때 거절했어야 했다.
승준이 고개를 저었다.
“수현아.”
“왜 그렇게 굳어서 뭐가 아직도 그렇게 힘들어요 ”
승준이 윗니로 바싹 마른 아랫입술을 긁었다.
“지현 씨 옷, 그 남자 혹시 민지후야 ”
“네, 어떻게 알아요 ”
수현의 눈에 분노가 스쳤다. 아직도 정가흔 주위를 맴돈다는 거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너 일부러 같은 시간에 예약했어 그래서 헤어진 거 말 안 해도 알았고 그래서, 두 번 확인도 안 했어 그래, 끝없이 보채다가 어느 날부터 신기하게 딱 끊어 묻지 않았지.”
승준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수현을 노려보았다.
“만약 승준 씨가 못 하면 내가 직접 알려 드리려 했어요. 너무 불쌍하잖아요. 같은 여자로서도 마음 안 좋았고요. 그건 그 여자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니까요.”
“예의.”
승준이 아랫입술을 긁으며 웃었다.
“그래서 우리 이별 장면을 니 동생과 민지후가 봐야 했어 ”
“우리라…….”
수현이 쓰게 되뇌었다.
“……민지후 씨는 예상에 없었어요. 잘 아는 사이인지 몰랐죠. 고등학교 2년 후배 여자를, 게다가 그렇게 평범한데.”
“민지후와 가흔이가 잘 아는 사이인 건 어떻게 확인했고 ”
수현이 고개를 옆으로 까닥했다.
“아마……. 아, 맞아요. 지현이 그랬어요. 민지후 씨가 그 여자분이 두고 간 다이어리를 들고 있더래요. 이름을 정확히 말하며 잘 안다고 그래서 지현이 더 잘되었다, 도와 달라, 그렇게 말했다고 하던데요 ”
승준이 기가 막혀 웃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