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rmacy RAW novel - Chapter 67
67화.
67화
“처음에 듣고는 어디 북유럽 동화에 들어왔나 했어.”
“아, 맞아요. 유럽 여행 다녀오신 분이 선물로 주셨다고. 예전 약사할머니한테요.”
“그럼 어울리네. 유럽 동화풍 약국이잖아.”
“말도 안 돼.”
가흔이 낡은 흔약국을 떠올리며 푸훗 웃었다.
“아무래도 여기 옷은 나 못 입어요. 어울리지가 않아.”
“가흔아, 이번만 입어.”
지후가 그중 가장 장식이 덜한 투피스를 들어 보였다. 금사가 들어간 검정색 트위드와 목선이 올라온 블라우스가 매치되어 있었다.
“왜…….”
“유럽 귀공녀같이 입혀 보고 싶었어.”
지후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아빠를 잃고 가난해진 세라를 어떤 부자가 다시 소공녀로 만들어 주는 동화처럼, 먼 과거 어느 날에 소년이었던 지후가 품었을지도 모를 소망이었다. 어쩌면 소매 끝이 헤지고 닳은 가흔의 옷을 보면서……. 아마도 배가 고파 지후의 도시락을 먹고 잔뜩 눈치를 보며 독서실을 나눠 쓰던 가흔을 지후는 쉽게 지우지 못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자 가슴속 깊은 곳에 구슬처럼 동그란 응어리가 맺혔다.
귀공녀 같은 옷을 입으면 달라질까요.
아빠를 잃고 빠르게 추락하면서 가흔은 늘 흐르는 물살 같은 시간들에 가라앉지 않으려 애썼다. 언젠가부터 멀쩡해 보여야 한다는 것은 익숙한 두려움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손가락질받고 영원히 약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
패배자, 낙오자, 무가치함, 미달.
사람들은 쉽사리 한두 가지 기준으로 타인을 규정짓는다. 그런 편견을 일찍 깨우친 가흔에게 두려움은 불규칙적인 반동으로 튀어 오르는 공처럼 불안하게 가흔을 들쑤셨다. 가흔은 매일 조심스레 움직이며, 아무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흔한 사람, 사회의 평균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부력을 장착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고민은 어떤 속도로 나아가느냐에 있다. 힘을 빼고 물결 따라 흘러가거나, 힘을 쥐어짜 가속을 내거나. 그들은 그들 옆에 떠 있는 사람들 중 몇몇은 얼마나 필사적으로 발을 움직여야만 고작 가라앉지 않고 떠 있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들에게 최대치의 출력이 그의 휴식만 못한 결과임을 알 수가 없다. 최대치의 출력으로 성취한 모든 것들이 민지후 앞에서는 하잘 것 없게 느껴졌다. 늘 가흔은 안소니에게는 가난하여 돌봐주고 싶은 여자 아이로 머무를까 봐 서글퍼졌다.
약국에 도착했더니 할머니 세 분이 기다리고 계셨다. 세 분 다 버스를 타고 오시는 분들이다. 두 달에 한 번 받는 당뇨약과 혈압약을 조제받고 흔약국에서 만나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신다.
“늦었어요. 많이 기다리셨나요 죄송해요.”
“아냐, 아냐. 원래 약국 문 여는 시간인데요, 뭘.”
가흔이 전동 셔터로 문을 열자 할머니들이 “오마나, 샷다 바꿨네.” 하며 아는 척을 하셨다.
“네, 바꿨어요.”
“참말로 좋다.”
가흔이 웃으며 약국 유리문을 열었다. 댕댕, 북유럽 동화 같다는 종소리가 울렸다.
“약사님 오늘따라 너무 너무 예뻐 보이네. 옷도 예쁘고.”
“그르게요, 형님. 약사님 너무 곱네.”
이영희 할머니와 최문자 할머니가 번갈아 칭찬을 하자 가흔이 좀 부끄러워하며 웃었다.
“이거 진짜 비싸 보이는 옷이다.”
다가온 할머니는 배명자 씨다. 가흔의 코트를 만져 보며 촉감이 아주 병아리 털 같다며 감탄하자 두 분도 손을 뻗어 이리저리 쓸어 보았다.
“고맙습니다.”
가흔이 웃으며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코트를 벗어 걸고 약사복을 갈아입고서 개수대에서 손을 씻고 나오니 할머니들은 믹스 커피를 한 잔씩 타고 계셨다.
카운터에 올려 둔 처방전을 보니 문득 저번에 이영희, 최문자 할머니가 오셨던 날이 승준과 헤어지고 열흘쯤 지난 날이었다는 기억이 났다. 그때는 죽도록 무거운 몸과 마음으로 억지로 약국 문을 열고 웃고 이야기하며 하루하루를 버텨 나갔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안소니와 재회했었지. 잔잔한 물결처럼 흐르던 가흔의 인생이 예상치 못하게 굽이쳐 흘러갔다. 고작 두 달 반도 안 되는 시간에.
가흔은 감상적 생각을 지우고 할머니들을 향해 방긋 웃었다.
“이번에 왜 늦으셨어요 두 달 넘어 오셨네요 배명자 님은 제 기억으로 두 달 일주일 정도, 두 분은 두 달 반 만에 오셨어요.”
“아, 그게 약이 저번에 받은 게 남아서.”
이영희 님이 작게 변명했다.
“안 돼요. 꼬박꼬박 빠트리지 말고 드셔야 해요.”
“관절약 먹으니까 약이 너무 많아서 깜박했어.”
“저도 중간에 감기 몸살해가지고.”
“저도요. 요즘 감기가 유행이라서.”
최문자 님과 배명자 님도 같은 변명을 하였다.
가흔이 약을 거를 때는 의사 선생님과 꼭 상의하시라는 말을 덧붙이고 처방전을 들고 조제실로 들어갔다. 세 분이 두 달치면 한참 동안 조제를 해야 한다. 가흔이 혼자 있어 바쁜 약국 사정 때문에 다량으로 약을 짓는 분들은 오늘 오신 할머니들처럼 아침 시간에 따로 와 주시기도 한다. 종합 병원 앞 약국은 더 복잡해서 다음날 여기로 일찍 오는 게 편하다고 말씀하시는데 가흔으로선 감사할 따름이다.
조제실에서 홀로 오랫동안 약을 조제하면서 가흔은 어젯밤 열이 끓는 몸으로 찾아왔던 승준이 생각났다.
‘왜, 고등학교 때 이미지 관리하느라고 너랑 제대로 연애 못 해 아쉬웠대 ’
승준의 말이 가흔의 얄팍한 포장지를 날카로이 찢었다. 얼기설기 가려 두었던 불안이 틈으로 흘러나왔다.
‘이제 민지후는 고등학교 때처럼 명문가 집안 출신 국회의원 아들 정도가 아니야. 거대 로펌 M&P 오너의 아들이지. 그 남자랑 연애해서 뭐 할 건데, 민지후가 너 M&P 민경국 대표 며느리 시켜 준대 ’
가흔은 승준의 말을 떨치려 고개를 저었다.
‘연애해서 뭐 할 건데.’
그러게. 너무 좋아 상처만 깊어질 텐데…….
조제실 밖에서는 할머니 세 분의 수다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가흔은 가슴이 저려 와 잠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절정에서 휘어지던 목을 받쳐 주던 손길이 떠오른다.
나, 어떡해 이제…….
눈물이 귓바퀴로 흘러내렸다.
***
민경국 대표의 방에서 지후는 그간 진행했던 프로젝트 참여에 대해 보고하고 서병원 서진국 원장과 저녁 약속을 컨펌하였다. 같이 가겠냐는 민 대표의 제안을 지후는 부드럽게 거절했다.
“K전자 관련 미팅이 저녁에도 수시로 잡혀서요.”
민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서병원 관련해서는 석연찮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후가 서병원 장녀와 선을 본 후 두어 번 더 만난다고 들었는데 지후에게 정확한 답을 들은 기억이 없다. 서병원 장녀가 맘에 썩 들지도, 그렇다고 끊어 낼 만큼 싫지도 않은 상태라 짐작하였는데 중간에 소개한 사람은 두 사람 모두 일이 바빠서 자주 만나지는 못 하지만 서로 호감을 지니고 있으니 시간을 주시라는 말을 전했다.
그러고서도 시간이 상당히 지났다. 이번 자문 계약 갱신을 위해 만남을 가지는 서 병원장은 예의상 하는 말이라기엔 여러 번 강조해서 지후를 같이 보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민경국은 서 병원장을 만나기 전에 지후의 뜻을 확실히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후의 표정을 읽으며 다시 운을 떼었다.
“네가 거절할 줄 알았는데 서 병원장이 거듭 말하기에 한번 물어봤지. 서 병원장 장녀와는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까.”
지후가 잠시 망설이다 돌리지 않고 말을 꺼냈다.
“실은 서수현 씨랑 제대로 선을 본 것도 아닙니다.”
“그래 ”
“서병원 원장님도 지금은 상황을 제대로 아실 듯합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혼사가 이루어질 만큼 진행되었다고 생각하시진 않으셨으니 특별히 달라질 건 없습니다.”
민경국의 숱이 많고 곧은 눈썹의 앞머리가 단단하게 굳었다. 민경국은 각이 선 이마나 딱딱한 콧날까지 지후보다 훨씬 강한 선을 지니고 있어 웃음기를 지운 얼굴은 상대에게 압박감을 주곤 했다. 경국이 그런 얼굴을 하고서 아들을 불렀다.
“지후야.”
“네.”
지후가 민경국의 부름에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맞추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해서 확인하는 말이다. 너 서 병원장 차녀와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있어 서 병원장이 저녁 약속에는 서지현 실장을 데리고 나온다던데.”
지후가 당황스러워 답을 하지 못하자 민 대표가 의문을 지우지 않고 지후의 얼굴을 응시했다.
“모르는 사이야 ”
경국의 시선에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선 자리에 서지현 실장이 언니 대신 나왔습니다. 언니인 척하고 두 번 만났고 그 후론 알면서 눈감아 줬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난 적은 없습니다.”
“왜.”
지후가 다시 답을 하지 않자 민 대표가 짧게 물었다. 노여워하는 음성이었다.
“장녀는 사귀는 남자가 있어서 그랬다 하면 너는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혹시 자문 계약 갱신이야 ”
“아닙니다, 대표님.”
“아버지. 대표가 아니라.”
지후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설명하고 날 이해시켜.”
지후가 고개를 숙인 채 답을 하지 못했다.
“민지후.”
“네.”
민 대표가 고개를 조금 뒤로 젖혔다. 우아한 눈매가 날을 세우며 가늘어졌다.
설마 했던 일이었다. 지후가 자문 계약 갱신을 놓고서 서 병원장과 부모를 기만한 것도 모자라 이제 서병원 자매 사이를 오간 모양새가 되었다. 선 자리에 장녀가 나왔든, 차녀가 나왔든 민지후는 장녀와 선을 보고 일정 기간 만남을 유지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차녀라니…….
“서 병원장은 학자에 가까운 사람이라 부모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서지현 실장이 병원 경영에 대해서는 실권을 가지고 있지. 자문 재계약을 조건으로 그런 일을 같이 벌였다면 계약은 내가 하지 않으마. 나는 그런 몰염치한 거래로 계약을 유지하고 싶지 않아. 부끄럽구나.”
“아버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짓 하지 않습니다.”
민경국이 조금 더 차갑게 물었다.
“그렇다면 서지현 실장이 맘에 들었어 ”
“아닙니다.”
이번에는 민 대표가 입을 다물었다. 커다란 데스크를 사이에 두고 침묵이 흘렀다. 지후는 아버지를 알고 있다. 민 대표는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은 채 쉽사리 이 일을 덮을 수 없다. 그날 애프터눈 티를 마시던 라운지에서 알게 되었던 사실을 말해야 했다. 그러자면 서수현에게 오래된 남자 친구를 빼앗긴 정가흔을 알려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가흔이 오랜 남자 친구가 있었다는 것도, 서병원 딸과 얽힌 것도……. 그리고 그런 비참한 장면이 고스란히 서병원 자매에게, 이제는 민지후 부자에게까지 까발려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후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후의 스케줄도 그렇지만 민 대표의 스케줄이 어긋나고 있다. 침묵을 깨며 비서로부터 전화가 들어왔다. 지후가 데스크 위 통화 버튼을 눌렀다. 팀장들이 회의실에서 기다린다는 메시지였다.
“연기하라고 알려 줘.”
지후가 지시를 전하고 다시 몸을 똑바로 폈다.
“앉아서 이야기하겠니 ”
민경국이 의자에서 일어서 응접세트를 향해 걸어갔다.
“괜찮습니다.”
“목 아파. 앉아.”
민 대표가 1인용이 아닌 기다란 3인용 소파에 앉으며 툭툭 옆자리를 두드렸다. 비슷한 체격의 부자가 나란히 앉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창 너머 풍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유려한 능선과 거리를 두고 자그맣게 보이는 경복궁은 언제나 고요하고 서늘한 정기를 품고 있어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민경국이 손을 들어 지후의 등을 쓰다듬듯이 툭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