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rmacy RAW novel - Chapter 66
66화.
66화
“말씀하세요.”
“집 말이다.”
“네.”
“신도시는 영 그래. 우리 그래도 서울에서만 살았는데. 나는 새 아파트라 좋다고 하는데 아부지가 화를 버럭 내시네.”
승준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눈을 감았다.
“너 그 논문, 신문에도 계속 나고 아주 난리들이야. 의사만 해도 열쇠 서너 개씩 가지고 줄을 선다는데 너는 이제 보통 의사도 아닌데. 울 아들 인물은 또 좀 좋아. 못 먹여 키웠지만 키도 쑥쑥 물 뿌리면 크는 콩나물같이 자라 줘서 내가 얼마나 고마웠는데. 그런데 서병원같이 대단한 집에서…….”
승준이 눈을 찡그리며 바라보자 엄마가 시선을 피했다.
“말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난…….”
10년을 입어도 물도 빠지지 않고 닳지도 않는 싸구려 화학 섬유 옷을 걸치고 누덕누덕 들러붙은 피로와 만성 통증으로 늘어진 몸을 추스르며 엄마가 승준의 눈치를 보았다.
“난 좋아. 이 좁아터진 집구석 벗어나면 얼마나 좋겠어. 그런데 아부지 주변이 난리인가 봐. 신도시 아파트 명의도 누구거래더라. 아버지가 떼어 보더니 그거 수현이 엄마 오빤가 남동생 건가 그렇대. 그러면 나가라 하면 말없이 또 나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동네 개처럼 이리 가고 저리 가고 이사를 어떻게 그렇게 하냐고.”
“그런 거 아니에요. 엄마, 임시로…….”
“그러니까, 또 이사 가야 하는 거면 두 번 일하지 말자. 아부지 딱 잘라 거절하라고 어떻게나 나를 볶는지 내가 죽겠어. 직접 서병원 부원장 만난다는 거 내가 떼 말렸어.”
“아버지, 제발!”
승준이 소파 팔걸이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승준의 엄마가 흠칫 놀라며 심장을 움켜쥐었다.
“죄송해요.”
“……미안하다.”
“제가 좀 생각해 볼게요.”
“그리고 아부지 말이다.”
승준이 시선을 외면한 채 앉아 있자 우물우물 반은 삼키며 승준의 엄마가 말했다.
“번듯한 일자리 하나만 부탁해 보면 안 될까. 그 양반이 그래도 인물도 훤하고 머리도 좋고 어디 앉혀 놓으면…….”
승준이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세게 쓸어내렸다. 손바닥에 한숨이 부딪혀 되돌아갔다.
“아니면 자꾸 사업하겠다는데 승준아. 니 아부지 요즘 집에도 잘 안 들어와. 만날 사람이 무슨 그리도 많은지 매일 니 신문 기사 오려 들고 나가는데……. 난 읽어도 도통 무슨 소린지 외국어마냥 이해를 못 하겠던데 아버지는 아주 줄줄 꿰고 있더라. 머리가 남다르잖아. 그게 투자만 잘 받아서 사업하면 떼돈 벌 수 있는 거라며, 맞아 ”
승준이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팠다.
“아버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세요. 아무도 만나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아예 집 밖을 나가지 말라고! 제발!”
“얘, 너 말을 어떻게. 니 아부지가 시체니 너 그래도 니 아부지랑 내 아들이야. 우리 아니면 너 안 나왔어. 아부지 닮아 머리 좋은 덕 본 거 모르고.”
승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외투를 껴입는 걸 보고 승준 엄마가 소리를 높였다.
“어디 가 ”
“병원 가요.”
“너, 너 잘나간다고 부모 무시하고 형제 무시하고 그건 사람이 아니다. 나한테 그러면 너 진짜 불효막심한 놈이야.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안 그래요. 엄마.”
승준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손으로 엄마의 어깨를 감쌌다.
“병원 갈 일 잊고 있었어요. 정신이 없어서. 가 볼게요.”
현관문을 닫고서 승준은 우두커니 차가운 계단에 쭈그리고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 밖으로 승지와 엄마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혜아가 목이 터지게 울었다.
승준은 핸드폰을 열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받지 않는다. 승준아, 하고 다정하게 불러 주는 녹음한 목소리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13년을 붙어 있으면서 음성 녹음 하나 남겨진 게 없었다. 다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흉곽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기분이다. 심장도, 폐도 없어 피가 돌지 않고 숨을 쉴 수 없는 시체처럼.
승준은 머리를 감싸며 계단에서 일어섰다. 무거운 머리를 비우려 찬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걸었다. 걷다가 보니 지하철역이 눈에 띄었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자 역에서 끼치는 훈기에 얼었던 뺨이 쓰라렸다. 등도, 다리도 얼어붙었는지 말단 부위부터 조금씩 저려 왔다. 기침이 나와 손으로 입을 가리자 주변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한 발씩 떨어져 섰다.
독감 유행이 시작되었나.
승준은 가라앉지 않은 두통 때문에 정수리를 쥐었다.
지하철에서 손잡이를 잡고서 팔에 이마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흔들림에 빈속이 울렁거려 입을 틀어막았다. 내리고 싶은 역을 두 번 지나치고서야 내려 환승을 했다. 그러다가 출발한 역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같은 경로를 밟아 갔다. 지하철 열차에서 서기도, 가끔 앉기도 하는 동안 머리는 텅 비어 버린 것만 같았다.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던 승지, 곤혹스러움을 감추는 수현, 신문 기사를 오려 투자금을 받는다는 아버지, 불효자식이라 꾸짖는 엄마의 핏대 선 얼굴이 툭툭 머리를 한 번씩 두드리며 지났다. 현관문 너머 들리던 악을 쓰며 싸우는 소리, 혜아의 울음소리가 귀를 쟁쟁 울렸다. 승준은 출구를 못 찾아 뱅뱅 도는 미로 속에 갇힌 실험용 쥐처럼 거미줄 같은 지하철을 따라 움직였다. 한참을 돌다가 정차역을 안내하는 방송에 문득 승준은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지하철에서 완전히 내렸다.
오랜 시간 지하철을 타서 그런지 팔다리가 무거웠다. 무거워진 다리를 억지로 들어 천천히 지하철역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역이 더웠는지 찬바람이 닿자 땀에 젖은 등과 목덜미가 선득했다. 승준은 추위에 몸을 웅크리며 걸어갔다.
궁전빌라 앞에 누군가가 내다 버린 의자 위로 승준은 털썩 주저앉았다. 핸드폰을 꺼내어 확인하니 디지털 숫자는 9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을 가리켰다. 몇 시간 동안 쌓여 있는 통화 기록을 살폈다. 병원에서 온 부재중 전화들, 아버지로부터 온 문자, 엄마, 승지. 누구에게도 리턴 콜을 하지도, 메시지 내용을 읽지도 않았다. 승준은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손을 올려 욱신거리는 이마를 감쌌다. 누군가가 통화를 하며 승준을 스쳐 지났다.
“네, 잘된 일이네요.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학술지 테마 기사 봤습니다. 자문 계약 연장은 저는 잘……. 네, 감사합니다. 병원장님 뜻은 오늘 아버지 뵙고 전달해 드리죠. 서병원 담당 파트너 변호사 이탈은 저희 측에서도 유감으로 생각하는데, 하지만 저희 로펌 다른 인력 풀도 훌륭합니다. 지현 씨도 아시겠지만 이미 서병원 자문 경력이 5년이 넘는 실무 담당 변호사들이 유럽과 미국 측 사업 확장과 인수에 대해서 사전 준비를 많이 진행시킨 상태이고요.”
남자가 잠시 멈추어 서서 웃었다.
“저는, 네……. 병원장님께 그렇게 전해 주십시오. 그럼 내주 중으로요. 좋아요, 대표님 일정 확인하고 곧 연락드리도록 할게요.”
기사, 자문 계약 연장…… 일정. 대화 내용이 전부 들리지는 않았지만 민지후가 가흔의 집에서 나오며 서병원 수현의 동생 서지현과 통화를 한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결혼식장에서도 두 사람은 친밀한 분위기였는데……. 민지후가 지현을 향해 웃던 얼굴이 기억났다.
승준은 두통이 심해 이마를 감싸고 머리를 아래로 깊이 기울였다. 민지후의 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멀어졌다. 마치 배를 타고 있는 듯이 바닥이 울렁거리는 기분이다.
피곤하다. 좀 쉬고 싶어. 아무도 없는 섬으로 데려다주는 배가 있다면 기꺼이 지갑에 있는 돈을 다 털어 뱃삯을 치를 텐데.
승준아,
권승준. 승준아!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승준이 눈을 억지로 떴다.
“너 열이…….”
쓰레기봉투를 옆에다 던져두고서 가흔이 잔뜩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권승준. 왜 이러고 있어. 밤에 기온이 얼마나 떨어지는데, 일어나. 병원 가.”
승준이 손을 뻗어 가흔의 볼에 대었다. 편도가 부어올라 거칠거칠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 학술지에 논문 통과됐어.”
“알아, 아까도 말했잖아.”
“가흔아, 내가 아이디어도 냈고, 내가 임상 시험 설계도 했고, 내가 미국 대학과도, 존스홉킨스 교수랑 다 내가 중간에서 연락하고 조율하고 나,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너 제대로 만날 시간도 없었고.”
승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래, 너 대단해. 진짜 대단해. 권승준.”
가흔이 승준의 기울어진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비웃는 거 아니고 진심. 그러니 이제 병원 가. 독감이야 예방 주사 맞았잖아.”
“아마도 몸살. 하루 자고 나면 나아.”
열 때문에 붉어진 눈을 보고 가흔이 핸드폰을 열었다. 화면을 몇 번 두드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택시 불렀어. 너네 병원 응급실로 가. 택시비는 내 카드로 나갈 거야.”
승준이 기운 없는 웃음을 지었다.
“가흔이 너 민지후 만나 ”
“응.”
“만나서 뭐 하는데.”
“평범한 연애.”
승준이 비딱하게 가흔을 올려다보았다.
“그 자식이 그래 너랑 연애하며 놀자고.”
“승준아.”
“왜, 고등학교 때 이미지 관리하느라고 너랑 제대로 연애 못 해 아쉬웠대 ”
가흔이 승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지 마. 내 눈엔 네가 한심하니까. 정신 차려. 이제 민지후는 고등학교 때처럼 명문가 집안 국회의원 아들 정도가 아니야. 거대 로펌 M&P 오너의 아들이지. 그 남자랑 연애해서 뭐 할 건데, 민지후가 너 M&P 민경국 대표 며느리 시켜 준대 ”
“그건 내가 사양이고.”
“그래, 그럼 연애하며 잘 놀아 봐.”
승준이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너 병원에 가야 해.”
“안 그래도 갈 거야. 내가 갈 데가 또 있나.”
“택시 오는 중이야.”
“취소해 줘. 미안해.”
승준이 떨어져 있는 쓰레기봉지를 들어 수거함에 툭 던져 넣었다. 가흔에게 인사도 없이 승준은 등을 돌리고 걸어갔다.
***
가흔은 지하철역부터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어젯밤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도통 이루지 못했다. 동이 트고서야 깜박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지각이었다. 급히 옷을 껴입고는 파카를 집어 들다가 의자 위에 걸어둔 크림빛 코트 앞으로 다가갔다. 어제 오후가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지후에 대한 묵은 그리움을 고백하고서 엉망으로 울어 버리는 가흔을 지후가 안았다. 지후를 기억하는 몸이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가흔은 망설이다가 크림색 코트를 입고 집을 나섰다. 이런 옷 입을 데도 없다고 거절하려했지만 약국에 꼭 입고 가라고 했다. 지후는 어젯밤 코트를 들고서 5층 계단을 올라와 의자 위까지 걸어 두고서 본가에 서둘러 갔다. 코트 외에도 지후는 어제 가흔을 데리고 저녁이 다 되어 백화점까지 갔었다. 주눅이 들어 걸음도 잘 떨어지지 않는 매장에 들어서서 지후가 골라 놓은 원피스를 보며 가흔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소녀예요 ”
“응.”
“나 좀 더 성숙해보이고 싶은데요.”
지후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매장 매니저와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가흔이 사는 원룸 크기 만 한 드레스 룸으로 원피스와 투피스 몇 벌을 넣어 주었다. 가격표를 보면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흔은 너무 비싸서 현실감이 없는 옷을 잔뜩 긴장하여 입고는 드레스 룸을 나왔다. 디자인마다 여성스럽고 사랑스러워 스스로 이런 옷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지후는 모든 옷을 다 마음에 들어 했다.
“귀공녀나 입을 옷인데…….”
“약국에 종 말이야.”
지후가 드레스 룸에서 나와 어색해하는 가흔을 향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