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154
154화 듣고 싶은 말
“내 생각에는 승우 군이 좀 오만한 거 아닌가 싶은데.”
3차 공연에 초청을 받은 나는 정만종 선생님의 지인이신 뮤지컬 연출가 배성진 씨의 말에 멍해졌다. 그분은 소주 한잔을 마시더니 다시 입을 여셨다.
“자네, 나이가 지금 25살인가? 아니지, 나이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지. 자네가 만종이 밑으로 들어간 지 얼마나 됐지?”
“아직 1년이 안 됐습니다.”
“그 전에는?”
“사진학과 나오고··, 취직을 못 해서 집에서 놀다가 가을쯤에 언론사로 들어가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을 여셨다.
“예술이라는 게 늘 그렇듯이 작가의 배설물이잖아.”
“··네?”
“아마도 우진이가 그런 말을 했던 거 같아. 딱 먹은 만큼 나오는 게 노래라고 말이지.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따라서 그대로 나오는 거라고 말이지. 본 거, 느낀 거, 들은 거, 그 밖의 다른 것을 얼마나 받아먹었는지에 따라서 작품이 나온단 말이지.”
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서 배설물이라고 말씀하시는 거구나 이해도 가고 말이다.
“승우 군은 사진이라는 세계에 발을 디뎠을 뿐이야. 앞으로 수많은 경험도 하고, 새로운 세계를 목격하겠지. 그런 게 몇 겹으로 쌓여야 겨우 자기작품이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게 나오는 거라고.”
“말씀하신 새로운 세계가 너무나 경이로워서 발걸음을 하기 힘들다고 할까요?”
배성진 선생님은 내 말을 듣더니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내게 잔을 내밀었다. 난 공손하게 술을 따라드렸다. 그분은 다시 술을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당연한 거 아닐까? 만종이는 사진 쪽에 있어서는 천재야. 그런 천재가 몇십 년 동안 경험하고 노력하면서 만들어낸 세계라고. 그게 얼마나 대단할지는 경험하지 못한 나라도 알 수 있어.”
“그런 건가요?”
생각해보니 이게 맞는 말이다. 그래, 선생님이 오랜 시간 동안 쌓아 올린 결과물을 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사진이 아니라 원래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점인데··.
“뭐 만종이한테 이런 얘기를 듣는 게 옳겠지만, 그 녀석은 지금 한국에 없지. 그 녀석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 사진만큼 어려운 게 없다고 말이야. 노래와는 다르게 번뜩이는 감성만으로 작업하기에는 그 한계가 크게 느껴진다고.”
“사진은 후천적 감성이 중요하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근데 제가 느낀 건 선생님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보는지에 대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같은 풍경도 선생님이 보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것도 경험과 노력의 산물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이런 식으로 생각해도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내가 본 세상도 노력의 결과인 거다.
“그 녀석도 처음부터 사진을 잘 찍어내지는 못했어. 우진이 첫 앨범 낼 때 그 녀석이 찍은 사진 까인 거 알고 있어?”
난 고개를 저었다. 이건 처음 듣는 얘기다.
“만종이가 얘기하길 그때 사진은 거칠고, 피사체를 제대로 못 담아서 그랬다고 했지. 근데 우진이 말로는 이게 나인가 싶을 정도로 흐릿하고 형편없는 사진을 들고 와서 거절했다고 하더라고.”
“선생님이요?”
“그때 만종이 나이가 스물여덟이었어. 사진을 잡은 지 팔 년째 되던 해였지. 그때까지도 그 녀석은 그냥 카메라 가지고 있는 친구였어. 당시에는 카메라가 귀했거든. 사진 찍을 일 있으면 불렀지.”
“선생님도 그러실 때가 있었군요.”
“사진을 모르겠다고 술 마시고 운 적도 많아.”
“아이고.”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다 때가 있으니 서두르지 말라는 거야. 만종이의 높은 벽을 봤다면 난 축하해주고 싶어. 지금까지는 그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거잖아. 실력이 쌓이고 나니까 그게 보인 거지.”
시스템 덕분이라고 생각하려다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특성은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착용할 수 있었다. 다른 식으로 생각하면 어느 정도 수준이 갖춰졌기 때문에 선생님의 시선으로 본 세상을 볼 수 있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시스템은 내 수준이면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해.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말을 하고 보니까 어느 날인가 만종이가 하던 말이 생각나네. 서른이 좀 넘어선 날이던가? 점차 사진작가로 자리를 잡아가던 그 녀석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 어느 날부터인가 세상의 섬세함을 볼 수 있게 돼서 행복하다고 말이야. 세상의 모든 존재가 숨 쉬는 모습이 보여서 사진을 찍는 게 행복하다고.”
그러니까 선생님도 처음부터 이런 눈을 가지고 계신 건 아니었다. 수많은 경험을 하고 노력을 하면서 이뤄낸 거다. 세상이 숨 쉬는 모습이 보인다라··, 그게 내가 본 풍경이겠지.
“만종이가 자네를 귀여워했어. 사진에 대해서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게 분명한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었지. 자, 한잔하게.”
난 고개를 돌리고 앞에 놓인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선생님을 좀 더 알게 돼서 행복한 기분과 동시에, 앞으로 내게 펼쳐질 길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그동안 좀 이상했지.”
“많이 이상했어. 말도 없고, 매일 멍청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고.”
오늘은 오랜만에 에브리아의 사진을 찍기 위해 나왔다. 사실 슬럼프가 처음 왔을 때 에브리아부터 찍고 싶었지만 무서웠다. 그녀마저 사진에 제대로 못 담아내면 사진에 대한 자신감이 완전히 무너져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작가님, 여기 가방이요. 미안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보영 씨가 가방을 들고 숨을 헉헉거리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분기마다 있는 성태 여자친구의 쇼핑몰 촬영 날이었다. 쇼핑몰을 운영하는 성혜 씨는 에브리아의 몸값이 처음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올랐지만, 그녀가 쇼핑몰의 아이덴티티라며 오른 몸값 이상으로 돈을 지급 했다.
“저 때문에 촬영날짜 미뤄져서 죄송합니다.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정말 괜찮아요. 작가님 아니면 우리 쇼핑몰이 이렇게까지 뜨지도 못했을 텐데요. 맞다, 요즘 패션 화보로 핫하시잖아요. 우리 쇼핑몰 전속 사진작가님이 길승우 씨라는 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에요.”
“전 아직 멀었습니다. 제 이름 석 자를 제일 앞에 걸어놓기에는 많이 부족해요. 쇼핑몰 여신이 앞에 있는데.”
“헤헤, 우리 겨울 공주님도 예상대로 점점 뜨고 계시네요.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오랜만에 에브리아의 사진을 찍으려니 조금 긴장이 된다. 오랜만에 풀메이크업을 하고 예쁘게 차려입은 그녀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난 심호흡을 하고 카메라를 들었다.
“에브리아, 뭘 생각하고 있어? 시선 여기로.”
피사체가 되는 인물의 눈에 초점을 맞추고 클로즈업하는 건 내 나름으로 인사다. 이상하게 눈을 보면 인물에 대한 기준이 정해진다. 짧은 촬영 시간 동안, 내가 찍을 수 있는 경계선이 정해진다고 해야 할까?
가장 그 범위가 넓은 건 내 앞에 있는 에브리아다.
“지금 표정 아주 좋다, 포즈만 조금 바꿔볼까?”
좋은 사진은 피사체가 되는 인물과 얼마나 소통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 그 깊이가 달라진다. 그녀와 나는 작업을 할 때 항상 서로 듣고 말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실제로 소통을 하기 시작하면 작업은 좋은 방향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 옷 입어보니까 어때?”
“목이 답답하지 않아서 좋아.”
“그럼 좀 편안한 표정으로 가볼까? 지금 좋다. 오른발만 살짝 내밀어줘요.”
뮤즈란 게 재능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에브리아는 내 뮤즈가 맞다. 그녀와 작업을 할 때, 내가 경험했지만,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어딘가에서 끌려 나온다는 느낌을 받는다.
“분위기에 빠진 건 좋은데, 중간중간 카메라 좀 봐줘요.”
그런 것들이 끌려 나오면 뭔가 새로운 사진이 나온다. 지금까지 찍어보지 못한 그런 거.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나온 사진을 근거로 새로운 면을 찾아내서 발전시키는 재미도 있다.
“어휴, 그냥 없는 우아도 생겨날 판이네.”
보영 씨가 옆에서 보며 한마디 했다.
내게 에브리아는 그냥 헤어메이크업과 스타일링이 됐을 때 가만히만 있어도 그림이 되는 모델이다. 게다가 예쁜 외모에도 불구하고 얼굴보다는 전신에 시선이 간다. 이런 모델을 거의 내가 독점하고 있는 게 기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이거 괜찮죠?”
난 마지막 촬영을 하고 결과물을 보영 씨에게 보여줬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면서 나를 바라봤다.
“정말, 승우 씨 사진 훨씬 좋아지셨네요.”
“네? 사진이 변했나요?”
“아니요, 승우 씨 사진인데·· 예전보다 더 좋아졌어요. 기분 좋으시라고 한 말이 아니라 진짜로 말이죠. 사진 한 장에 감성이 듬뿍 담겼다고 해야 하나? 정말 화보 같다는 느낌도 들면서 옷도 예쁘고, 모델도 예쁘고··. 제 말주변으로 더 이상 표현하기가 벅차네요.”
때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듣고 싶었던 말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뭐랄까 보영 씨의 말을 듣고, 길을 엇나가지는 않고 있구나, 잘하고 있다고 누군가 위로해주는 기분이다.
***
그 시각 제이필터 뮤직의 정수민 대표는 김훈철 홍보팀장과 직원 한 명을 앞에 두고 화를 내고 있었다.
“방송사에서 연락이 왔더라고, 우리 길승우 작가님 너무 잘하시고 계시는데, 다른 예능에도 돌릴 수 없냐고 말이지. 그게 무슨 소리인지 파악하는데, 한참 걸렸어. 아니, 내 허락 없이 우리 작가님을 그 험악한 방송계 사지로 집어넣은 이유가 뭐야?”
김훈철 팀장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대표님, 그게 말입니다··. 저번에 언루트 멤버들 방송 제안한 거 우리가 깠잖아요. 그래서 그쪽에서 길승우 작가님을 원했고요.”
그 말에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가 단번에 거절했지. 지금 한창 바쁘시고 방송 쪽에 관심도 없으신데 우리가 왜 그래야겠어? 고작 다른 가수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어리석은 걱정 때문에? 그놈들 이런 식으로 협박한 게 한두 번이야? 근데 왜 길승우 작가님이 예능에 나온 건지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봐.”
김훈철 홍보팀장은 아무 말 없이 옆에 겁먹은 얼굴로 앉아있는 여직원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모두, 얘가 한 짓입니다. 저도 아무것도 몰랐어요! 제가 미쳤다고 대표님 역린을 건드리겠습니까. 세영아, 네가 얘기 좀 해봐.”
여직원은 김훈철의 말에 몸을 움찔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 제가 느끼기에는 방송국 PD가 하는 협박이 진짜 같아서 무서웠어요. 그런데 모두 한숨만 쉬고 움직이지 않아서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잠깐, 아무것도 몰랐다고? 이봐 홍보팀장, 다 너 때문이잖아!”
다시 김훈철 팀장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려지자, 그는 항변했다.
“제가 뭘요?”
“우리 회사에서 길승우 작가님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왜 얘기를 안 했지?”
“일하다 보면 차차 알겠다 싶어서··. 아니, 사실 그런 거 막 들어온 직원한테 말하기가 좀 그렇지 않습니까.”
“뭐가 그런데. 생각해봐라, 우리 회사 망하지 않고 끌어올려 준 일등 공신이 우리 길승우 작가님이야. 앞으로 신입 들어오면 얘기를··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게 오히려 구차해 보일 수가 있어. 음, 그래 그러면 되겠구나. 됐어, 둘 다 나가봐.”
“··저기, 대표님. 뭘 생각하고 계신 거죠?”
“알 거 없어.”
“대표님?”
“어서 나가보래도.”
불안한 얼굴을 하며 김훈철 홍보팀장이 밖으로 나가자 정수민 대표는 탁자 위에 놓인 서류를 넘기며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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