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 Who Returned 10,000 Years Later RAW novel - Chapter (502)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 503화
수하가 왕을 지키는 게 아니다 (1)
-스르르륵.
손가락 사이로 흰 가루가 흘러 허공에 흩뿌려졌다.
아파트 옥상에서 뿌려진 흰 가루는 바람에 휩쓸려 허공에 흩어졌다.
죽은 둠가드의 모습이 희미하게 머리를 스쳤다.
“…….”
강우는 눈송이처럼 떨어지는 흰 가루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흰 가루가 떨어지고 있는 서울 도심지는 마치 유령도시라도 되는 것처럼 황량했다.
광휘교와 가디언즈의 인도에 따라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에르노어 대륙으로 대피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한산한 거리를 내려다보며, 강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씨바… 궁상맞게 뭐 하는 짓이냐.”
툭툭.
강우는 손에 쥔 흰 가루를 털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다 끝나셨나요?”
몸을 돌리자, 이쪽을 바라보는 리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봤어?”
“호호, 예. 구천지옥에 계셨을 때도 종종 하셨잖아요.”
“끄응.”
강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리리스는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강우에게 다가왔다.
“너무 그렇게 마음속에 담아주지 마세요, 마왕님.”
강우의 팔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으며 어깨에 슬며시 머리를 기댔다.
“둠가드는… 마지막에 웃었잖아요.”
“…….”
강우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호호.”
리리스는 짓궂게 웃으며 강우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정말… 한결같은 분이시라니까.”
전쟁에서 부하를 잃은 후, 침울해 있는 강우의 모습은 이미 몇 번이나 봐왔던 모습이었다.
“시끄러.”
강우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리리스에게서 떨어졌다.
호호호, 리리스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었다.
“그나저나, 베히모스의 뿔가루는 좀 확보했어?”
“근육 돼지를 시켜서 어느 정도 얻어놨어요. 양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하네요.”
“그래?”
강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내밀었다.
리리스가 검은 가루가 든 자루를 하나 내밀었다.
‘신살(神殺)의 힘을 부여하는 가루라.’
확실히, 골치 아픈 물건이었다.
바알의 군세가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 정도는 생각했었지만, 설마 이런 사기적인 도핑약을 가지고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방위진을 좀 더 강화해야겠어.”
화르륵.
강우는 검은 가루가 든 자루를 불태웠다.
탐식의 불이 베히모스의 뿔가루가 든 자루를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강우는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는 검은 가루를 내려다보며 쯧, 혀를 찼다.
‘다른 곳에 써먹어 볼 걸 그랬나?’
머릿속에 스친 생각에 잠시 고민에 잠겼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너무 위험해.’
복용하는 것만으로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는 물건이긴 하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는 의미 없는 물건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애들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차라리 마음 편하게 불태워 없애 버리는 것이 나았다.
강우는 손에 남은 재를 탁탁 털어내며 물었다.
“천사들은?”
“레이라 씨에게 얘기를 듣고 수호의 전당 쪽에서 대기 중인가 봐요.”
“그쪽도 한 번 들려야겠네.”
“예. 아마 둠가드에 대한 일로 물어보는 게 많은 거예요.”
“…그렇겠지.”
강우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둠가드의 뒤를 쫓고 있던 것은 천사들이었으니까.
“리리스 너는 방위진을 구성할 마법진에 집중해줘. 미카엘한테는 내가 갈게.”
미카엘은 아직 그의 정체가 악마라는 사실을 모른다.
이제는 완벽에 가깝게 속일 수 있다고 해도, 리리스와 미카엘이 접촉하는 것은 되도록 피하는 것이 옳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리리스는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강우는 그녀를 지나쳐 아파트 옥상에서 내려갔다.
“…응?”
계단을 내려가고 있던 강우는 복도에 서 있는 익숙한 인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발록?”
“…예.”
“뭔 일이야. 인간 모습은 답답하다며 하기 싫어했잖아.”
“이곳에 오려면 어쩔 수 없으니까요.”
발록은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려 복도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여기서 본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머리와 어깨가 천장을 박살 내버리리라.
“그러면 그냥 좀 쉬고 있지 그랬어. 뭐, 급한 일이야?”
“…….”
발록은 굳게 입을 다문 채 강우를 응시했다.
강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표정, 전에 본 거 같은데.’
얼어붙은 신전을 향하기 전, 발록이 김시훈을 빤히 응시하고 있을 때와 비슷한 눈빛이었다.
“아.”
강우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눈살을 찌푸리며, 발록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이 뭘 원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마왕님.”
발록은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려고 했다.
“저를….”
“화신으로 만들어 달라는 거면, 안 할 거야.”
“…….”
발록의 눈이 떨렸다.
정곡을 찔린 듯,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왜….”
“넌 자력으로 신격을 각성할 수 있는 놈이니까.”
한 치의 의심도 담기지 않은 눈빛으로 말했다.
발록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결전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 남짓.
그 사이에 그가 신격을 각성할 수 있을지 못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알아.”
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사이에 네가 신격을 각성하지 못할지도 모르지. 아니, 어쩌면 영영 신격을 각성할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널 화신으로 만들어서 그 가능성을 없애버리지는 않을 거야.”
“…….”
“내 화신이 돼서 아무런 성취 없이 신격을 얻는 순간.”
더 이상 발록은 성장할 수 없다.
영영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도, 제게는 신격이 필요합니다.”
쿠드득.
발록은 거칠게 주먹을 쥐며 말했다.
씹어뱉듯 내뱉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응축된 감정의 격류가 느껴졌다.
“마왕님을 지키기 위해서는, 신격이… 그 힘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치욕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발록은 아라카일과의 전투를 떠올렸다.
감히 왕을 배신한 배신자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했던 기억.
그 패배의 근원에는 신격이 있었다.
애초에 공격조차 제대로 통하지 않는 상대로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왕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니, 적어도 고기방패라도 되어 왕에게 위협이 될 공격을 한 번이라도 받아내기 위해서는.
‘신격이 필요해.’
다른 무엇보다 신격이 필요했다.
“…….”
강우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발록의 성격을 생각하면, 저 말을 내뱉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비참하게 머리를 숙인 채 힘을 구걸하는 것.
발록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머리를 숙였다.
자신을 위해.
“발록.”
강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어쩔 수 없는 진실을, 아무리 바란다고 해도 바뀌지 않을 사실을 입에 담았다.
“화신이 된다고 해도 너는 날 지킬 수 없어.”
“…….”
발록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화신이 되면 손쉽게 신격을 얻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해서 아라카일은 어떻게 됐더라?”
“…….”
“네가 만약 아라카일만큼의 힘을 가지게 됐다고 치자고.”
그러면.
그런 힘을 가진다면.
“나를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강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발록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침묵했다.
아라카일과 왕의 전투를 두 눈으로 보았다.
아니, 그것을 과연 전투라고 할 수 있을까.
마왕의 힘 앞에, 아라카일과 나락의 군단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짓눌렸다.
그런데 고작 아라카일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된다 해서 왕을 지킬 수 있을까.
“그, 건….”
발록은 말끝을 흐렸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가정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왕을 지키기에는,
지금 자신의 힘은 너무도 하찮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화신이 가질 수 있는 힘은 한계가 있어.”
화신이라는 것을 결국, 그에게 신격을 빌려준 존재에 기생하여 힘을 나눠 받는 것에 불과했다.
“너는.”
그 한계와 끝이 명확한 힘을,
스스로의 가능성을 모조리 거세하는 독약을.
“정말로 가지고 싶은 거야?”
“…….”
발록은 주먹을 움켜쥔 채,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강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가슴을 헤집는 듯했다.
강우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발록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뇌까지 근육으로 찬 줄 알았던 놈이 꼴에 생각은 깊네.”
장난스럽게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왕님.”
“지금처럼 해, 인마. 언제부터 그렇게 걱정 많았던 성격이었다고 그러냐?”
“…….”
“뭐, 김시훈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겠지만.”
김시훈은 자력으로 신격을 각성했다.
그것은 화신이 되어 신격을 빌리는 것과는 근본 자체가 다른 위업이다.
바알과의 전투에서 유일하게 그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을 고르라면, 망설임 없이 김시훈을 고를 정도로.
‘발록 입장에서는… 복잡하긴 하겠지.’
무려 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왔던 악마가 발록이었다.
둠가드나 리리스도 물론 소중한 부하라고 생각하지만, 발록은 좀 특별했다.
‘오래 만나기는 했지.’
단순한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강우와 발록은, 서로가 가장 처절한 상황에 놓였을 때 만났다.
강우는 팔천지옥을 넘어 구천지옥에 처음 도착해 빌빌거리고 있을 때였고, 발록은 이전에 섬기던 주인을 잃고 폐인이 되어있을 때였다.
가장 힘든 시기를 함께한 존재가 어찌 특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건 발록도 마찬가지겠지.’
그의 비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충성심은 단순히 그의 성격이 아니었다.
강우였기에,
비참하고 처절한 시기를 함께 극복해온 사이였기에,
발록은 그에게 그토록 충성을 바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김시훈이 나타났다.
발록보다 재능있고, 강하며, 충성을 바치는 존재가.
‘자기 자리가 없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발록 성격에 티도 내지 못하고 속으로 감정을 억눌렀을 것이다.
“에휴, 이 미련한 근육 돼지야.”
강우는 고개를 숙인 발록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그냥 뭐, 씨바 사랑과 전쟁을 찍어라, 사랑과 전쟁을 찍어. 나도 이제 무섭다. 너네 둘이 나 가지고 검술 대련하지 않을까 무섭다고.”
“예? 저는 검은 사용하지 않습니다만….”
“아니, 그 검이 아니라 그… 왜 있잖아, 그 아래쪽에….”
말을 잇던 강우의 표정이 거칠게 구겨졌다.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상상하니 기분이 너무 좆같잖아!! 아니, 여기서 좆같다는 건 그 검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이런 씨발! 점점 더 이상해지잖아!”
강우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몸을 비틀었다.
발록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크흠.”
강우는 헛기침을 하며 발록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게 날 지키는데 집착할 필요 없어.”
“하지만….”
“애초에 말이야.”
강우는 발록에게서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수하가 왕을 지키는 게 아니야.”
뒤돌아선 채, 고개만 돌려 발록을 바라보았다.
“왕이, 수하를 지키는 거지.”
“……!”
발록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강우는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그걸로 충분해.”
“…왕이시여.”
발록은 멀어져가는 강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무거운 침묵이 복도 안에 내려앉았다.
“수하가 왕을 지키는 것이 아닌… 왕이, 수하를 지키는 것이라.”
발록은 강우가 내뱉었던 말을 곱씹었다.
“하지만, 나의 왕이시여.”
그의 목소리에 흐느낌이 섞였다.
웅크린 발록의 몸이 가늘게 떨린다.
입술을 짓씹었다. 찢어진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풀썩. 발록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당신은 이미 너무도 많이 저를 지켜주었습니다….”
전신을 짓누르는 무력감에,
몸이 타오를 듯 뜨겁다.
발록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주먹만 한 크기의 자루였다.
“…….”
자루의 입구를 살짝 벌리자,
검은 가루가 한가득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
발록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자루의 입구를 닫아 다시 품속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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