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 Who Returned 10,000 Years Later RAW novel - Chapter (701)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 외전 182화
율법(律法)이 없는 세계 (2)
찌르는 듯한 전율이 등골을 타고 퍼진다.
전신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선명하게 깨어나는 감각.
요동치는 마기의 바다가 발아래 드넓게 펼쳐져 흐른다.
“아, 아아.”
낮은 탄성을 흘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육체의 재구성이 완전히 끝난 지금, 그는 처음으로 ‘육체가 마해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감각을 실감했다.
‘그래, 이런 느낌이었구나.’
마기의 바다를 온전히 자신의 발아래 둔 감각, 아니 자기 자신이 마기의 바다 그 자체가 된 듯한 감각.
비유하자면 이제까지는 거대 로봇 안에 탑승해 로봇을 조종하는 느낌이었다고 하면, 지금은 자신이 그 거대 로봇이 되어 몸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건담이다.”
양팔을 넓게 펼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거짓말’을 처음 깨달은 낙원의 주민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강렬한 전능감이 몸을 뜨겁게 달궜다.
“…그랬군요.”
아카르트는 날카롭게 뜬 눈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태초의 어둠과 완전히 일체(一體)화되어 버린 그에게서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세가 느껴졌다.
‘이게, 그때 느꼈던 불안감인가.’
아카르트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탑의 옥상에서 마왕과 대치했을 때 느꼈던 불안감.
날카로운 무언가로 쇠를 긁어내는 것과 같은 불쾌감의 정체.
‘…하지만.’
아카르트는 차갑게 눈을 빛냈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불길함과 불쾌감은 여전했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내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세계를 구원(救援)해야 한다는 사명.
더없이 순수하며, 순결하며, 고결한 신념.
세상 전체를 집어삼킬 듯한 검은 바다를 눈앞에 두고도, 거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둠이 아무리 앞을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빛으로 나아감에 단 한 번의 주저함 없으니.
“빛이여.”
율법(律法)이 사라진 세계에, 구원의 길을 열어주소서.
-짤랑.
흔들리는 천칭.
맑게 울려 퍼지는 방울 소리와 함께 아득한 황금빛 기동이 하늘로 솟구쳤다.
태양이 떠올라 새벽을 밝히듯, 황금빛 기둥이 루케오 푸레를 밝혔다.
“와아. 씨이벌.”
찬란한 황금빛 기둥을 올려다보며, 강우는 감탄에 찬 탄성을 내뱉었다.
“설마 저딴 말을 육성으로 지껄일 줄이야.”
불알이 쪼그라들 것 같은 기막힌 대사였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걱정 어린 표정으로 김시훈이 다가왔다.
“푸흐흐흐! 당연히 괜찮지 인마.”
“…하아. 아까 전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갑자기 눈앞에서 자신의 배에 마검을 쑤셔 박는 모습을 봤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강우 씨!!! 적어도 미리 말씀은 해주시고…!”
한설아 또한 대경한 표정으로 그를 나무랐다.
“흐흐. 미안해, 임자. 죗값은 나중에 다 끝나면 치를게.”
“…그 말, 각오하세요.”
한설아가 입술을 삐쭉 내밀며 고개를 홱 돌렸다.
입술을 달싹이며 ‘이번에는 10일로 안 끝낼 거예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뭐가? 뭐가 10일로 안 끝나는데?”
“몰라요.”
“아니.”
그걸 임자가 모르면 어떻게.
“후훗. 저는 그래도 안 놀랐답니다?”
리리스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콧대를 세웠다.
“뭐, 어쨌든.”
강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수천, 수만의 [빛의 군세]의 앞에선 아카르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곧게 핀 허리.
흔들림 없는 신념에 타오르는 눈빛.
선(善)에 미쳐버린, 백색의 악마를 향해.
“시작해 볼까.”
콰아앙!!
망설임 없이 발을 박찼다.
-쿠르르르륵!!
검은 점액질로 이루어진 날개가 펼쳐진다.
가볍게 공중으로 몸을 띄운 채, 미디르를 도끼처럼 내려찍었다.
-잘그락.
천칭의 끝에 매달린 두 개의 황금 그릇이 흔들린다.
천칭과 그릇을 잇는 쇠사슬이 내려 찍히는 마검의 칼날에 얽힌다.
“당신은…!”
아카르트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천칭을 위로 쳐올려 칼날을 튕겨내고, 오른쪽 무릎을 들어 올리며 복부를 노렸다.
철퍽!!
피륙으로 이루어진 육체를 때리는 것이 아닌 질척한 무언가를 후려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생물입니다!”
카아앙!!
올려친 천칭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폭발하듯 솟구친 황금빛이 머리를 노리고 쏘아졌다.
“존재하지 않는 건 네 엄마고 이 자슥아.”
고개를 낮게 숙여 황금빛 파동을 피해낸 후, 접었던 허리를 뒤로 젖히며 서머 솔트 킥을 날렸다.
사각에서 파고드는 발끝이 아카르트의 턱을 올려쳤다.
터엉!
분명 신체에서 가장 약한 급소 중 하나를 후려쳤는데도, 무슨 쇠로 이루어진 물건을 후려친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전히 천박한 입이로군요!!”
정통으로 턱주가리를 얻어맞았음에도 아카르트는 조금의 흔들림 없이 몸을 뒤로 빼내며 천칭의 끝을 강우에게 향했다.
응축된 황금빛.
열두 개의 방위(方位)로 갈라진 찬란한 빛무리가 맹렬하게 회전한다.
-콰아아아앙!!!
대포처럼 쏘아진 열두 개의 빛무리가 복잡한 궤도를 그리며 쏘아졌다.
-타닥!
마해(魔海)를 붕괴시키는 힘이 담긴 태초의 빛.
맞으면 죽는다.
춤을 추듯 스텝을 밟으며 옆으로 이동한다.
순식간에 궤도를 바꾸며 따라붙는 황금빛.
‘암영(暗影)의 권능.’
바닥없는 구덩이에 떨어지듯,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순식간에 사라진 강우의 몸이 아카르트의 바로 뒤에서 솟구쳐 올랐다.
-화르르르륵!!
검은 태양을 연상시키는 불꽃.
굶주린 아귀처럼 날름거리는 탐식(貪食)의 불길이 아카르트를 향해 그 거대한 입을 벌렸다.
“어딜!”
맹렬하게 회전하는 열두 개의 빛무리가 분열한다.
스물네 개의 방위를 점한 빛무리가 뱀처럼 그의 몸 주위에 똬리를 튼다.
탐식의 불과 태초의 빛이 격돌한다.
━━━━━━━━━!!!!
소리조차 집어 삼켜질 정도의 폭발.
격돌의 충격만으로 한 세계 전체가 가루가 되어버릴 같은 거대한 충격이 주변을 휩쓸었다.
“크읏!”
아카르트는 초조한 표정을 입술을 짓씹으며 천칭을 흔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돔 형태로 주변 대지를 감싼 황금빛이 공간 자체를 단절시킨다.
싸움의 무대가 되는 장소는 루케오 푸레.
전투의 여파로 인해 그의 소중한 낙원이 박살 나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꼴에 지가 만든 세계라고 소중하긴 하나 봐?”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공격을 이어갔다.
화르르륵!!!
거센 불꽃의 파도가 아카르트를 덮쳤다.
“당신 같은 악마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꾸욱.
입술을 깨물며 천칭을 들어 올린다.
“━제가 어떤 마음으로, 이곳을 만들었는지.”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낙원.
그것을 창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알 필요도, 알고 싶지도 않아 짜식아.”
-카가가가강!!!
일 초를 수십, 수백으로 쪼갠 찰나(刹那).
일격만으로 세계 전체를 붕괴시킬 수 있는 격돌이 연달아 이뤄졌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팽팽했던 그 싸움은 점차 한쪽으로 승기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찬란히 빛나는 황금빛으로,
“하아, 하아, 하아.”
턱까지 차오른 거친 숨.
강우의 몸에 점차 상처가 늘어갔다.
불사(不死)의 힘으로도 재생할 수 없는 상처들이.
“결국, 이 정도로군요.”
숨을 헐떡이는 강우에 비해 훨씬 고른 숨을 내뱉고 있는 아카르트는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 정도로 저를 넘으실 수 있다 생각하셨습니까?”
비웃듯, 조롱하듯, 아카라트는 입꼬리를 올렸다.
등골을 타고 흐르던 불길함.
그 불길함은 몇 번의 교전으로 씻겨지듯 사라졌다.
“후우… 카악, 퉷!”
강우는 입안에 고인 침들을 바닥에 뱉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카르트는 강했다.
‘지금 상태’로서는 도저히 상대할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에휴.”
강우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기껏 육체의 재구성을 완성했는데도, 여전히 아카르트란 벽은 드높았다.
넘을 수 없을 듯 거대했다.
‘그때보다 더 세진 것 같기도 하고.’
하긴.
이곳은 루케오 푸레.
아카르트가 직접 만들어낸 세계였다.
이곳에서 조금 더 ‘본신(本身)’의 힘을 끌어낼 수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생각보다 여유로우시군요.”
아카르트는 가늘게 눈을 뜨며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뭐, 그야….”
강우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존나 여유로우니까.”
“…….”
“아, 근데 솔직히 2페이즈는 볼 거라 생각했는데.”
홈그라운드에서 힘이 강해질 줄이야.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지금 상태로도 네 본체까지는 끄집어낼 줄 알았다고.”
“…….”
하지만 역시.
생각대로는 되지 않았다.
“뭐, 어쩔 수 없지.”
모든 일이 생각대로만 흘러갔다면 애초에 이 고생을 할 리도 없을 것이다.
“뭐가… 어쩔 수 없다는 겁니까?”
아카르트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근데 아까부터 말이야.”
무시하며, 말을 돌린다.
“그렇다느니, 결국 이 정도라느니.”
마치.
“날 되게 잘 아는 것처럼 말한다?”
자신의 본질을 모두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이.
자신의 한계를 모두 파악하고 있다는 듯이.
‘너는 이 정도’라며, 단정 짓듯이.
“우리 그렇게 친한 사이 아니잖아? 그치?”
그가 아카르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듯, 아카르트 또한 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아니.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슨 일을 겪었으며, 무슨 삶을 살아왔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제가 굳이 알 필요가 있습니까?”
“그럼, 알아야지.”
모르면.
“처맞을 테니까.”
낄낄낄.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다.
두 팔을 활짝 펼치며 깊게 숨을 들이쉰다.
몸속에 흐르고 있는 마기의 바다를 느낀다.
-솨아아아아.
몰아치는 파도.
그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악(惡)의 무리들.
예전에는 그들을 다룰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만 년 전. 마해(魔海)를 얻고 난 이후 처음으로.
최초(最初)이자 태초(太初)로.
그 어떠한 ‘리스크’없이 이 바닷속에 웅크린 존재들을 다룰 수 있게 됐다.
욕망의 갈증 없이, 탐욕의 발작 없이.
온전한 정신으로, 냉철한 이성으로.
-‘전력’을 다할 수 있다.
“괜찮아, 지금은 몰라도 돼.”
어차피 이제부터 알게 될 거니깐.
“하아.”
달뜬 숨을 내쉬며,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굳이 그 동작은 필요 없었지만, 굳이 그 주문(呪文)은 필요 없었지만.
“나를 지나는 자.”
경건한 의식을 벌이듯. 나지막이 말을 잇는다.
“━비탄의 도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