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ease stay away from my family RAW novel - Chapter 97
97화>
“…….”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고작 한 번밖에 만난 적 없는 데다가 13살밖에 되지 않은 라요테에게.
위나델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눈만 깜박였다.
파베 또한 예상을 뛰어넘는 말에 조금 놀랐다가, 이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하이른, 네 자손들은 잘 자란 것 같구나. 다행스럽게도.’
비록 저는 평범한 환경에서 학대받을 것 없이 자랐으나, 라요테는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상흔으로 남는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직접 겪진 않아도 간접적으로 경험한 적이 있기에.
소년은 진중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당장은 밝고 부드러워 보이는 저 모습 뒤로,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이 있었을지를 생각했다.
보통 큰 아픔이었다면 시조의 비호 아래 가문을 새로 세운다는 극단적인 사태가 벌어지지도 않았으리라.
거기까지 생각하자 명치가 싸해지는 기분이었다.
“위나델라 양.”
“네, 오빠.”
“조금 무례한 행동을 해도 되겠습니까?”
“으음, 네……?”
되묻는 것인지, 허락하는 것인지 모를 대답이었으나 라요테는 거기까지 무례해지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앞에 앉은 소녀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보다 다섯 살은 어려 보이는 11살짜리 소녀가 동그란 눈을 깜박인다.
소년은 입가를 살짝 올려 자주 짓지 않는 미소를 머금고서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소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잘했습니다.”
“…….”
“그간 많이 힘들고 많이 아팠을 텐데. 잘 버텼고, 잘 이겨 냈습니다.”
“…….”
아.
세상엔 왜 이렇게 상냥한 사람이 많은 걸까.
고작 넉 달 전까지만 해도 온정 한 줌 없이 춥고 까맣기만 한 세계에서 살고 있었는데. 엄마의 손을 따라 밖으로 나오자 온통 따뜻한 손길투성이다.
위나델은 비스듬히 고개를 들었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제 머리를 쓰다듬는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나는 정말 운 좋고 행복한 사람이구나.
어쩌다가 이렇게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들이 내 곁에 잔뜩 찾아왔을까.
“고마워요.”
눈을 접은 위나델은 활짝 웃으며 따뜻한 칭찬에 화답했다.
라요테는 제대로 된 대답도 듣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은 무례를 사과했고, 위나델은 전혀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파베는 그런 두 아이를 녹녹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마음이 절로 푸근해지는 광경이었다.
“위나델라 양.”
“네, 오빠.”
“혹 위나델이라 불러도 실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와, 물론이에요!”
“말을 놓는 일은?”
“그것도 좋아요!”
순식간에 저희 사이에 있는 벽을 허물어뜨린 두 아이가 친구처럼 가까워졌다.
아니, 어쩌면 친구와는 조금 다른 사이로.
앞으로 라요테를 자주 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베는 아까보다 한결 친밀해진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둘을 바라보며 그렇게 예감했다.
* * *
저녁엔 약속했던 대로 왈라이카가 왔다.
용언을 써서 진실을 증명하는 절차는 필요 없었다. 저녁이 오기까지 위나델과 긴 이야기를 나눈 라요테는 그들의 말을 진실로 완전히 받아들였으니까.
그와 별개로 파베는 정령왕을 불러 제 정체를 인증했지만.
실피드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싫지는 않은 표정으로 근육을 불끈거렸다.
위나델과 라요테의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길 기다리던 파베는, 제자의 후손과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하이른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저런. 내가 제대로 해명도 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하이른 부부가 고생이 많았구나.”
“5대조 조모님께선 세간의 소문에 신경 쓰지 않는 분이라 들었습니다. 다투는 일도 거의 없이 백년해로하셨다 하니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위나델조차 오해하고 있었듯, 당대에도 알리데론 크로슈는 파베와 하이른의 아이로 여겨졌다고 했다.
그리하여 정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조용히 결혼한 하이른 뒤로는 평생을 꼬리표가 따라다녔단다.
제 잘못된 선택으로 제자에게 폐를 끼쳐 미안하면서도, 그런 소문 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저들끼리 행복하게 살아갔을 제자 부부가 상상되어 마음이 넉넉하기도 했다. 파베는 하이른의 이야기를 들으며 긴 추억에 잠겼다.
“5대조의 수기가 가보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니, 다음번 찾아뵐 때 들고 오겠습니다.”
“오냐. 나로서는 그저 고맙고 감사한 일이지. 언제쯤 또 방문할 생각이냐?”
파베가 넌지시 다음 방문일을 묻자, 옆에 앉은 위나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가까운 또래를 사귀는 것이 처음인 양녀의 풋풋한 모습이 맘에 기꺼웠다. 라요테가 대답했다.
“이달 안에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그래. 아무 때나 편하게 오려무나. 너라면 언제나 환영이다.”
왈라이카가 저는 소 닭 보듯 하는 녀석이 위나델과 사부에겐 살갑다며 구시렁거렸지만 아무도 그 투덜거림에 신경 써 주지 않았다.
평소 비슷한 취급에 시달리는 실피드가 고소하다는 듯 킥킥 웃기까지 해서, 둘은 서로 눈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파베는 유치하게 기 싸움 중인 정령왕과 하프 드래곤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가 소년에게 다시 물었다.
“저녁이 늦었는데 이젠 어쩔 셈이냐? 살던 곳으로 바로 돌아갈 참이냐?”
벌써 달이 뜬 늦저녁이었다. 마법을 쓰지 않고 돌아가기에는 많이 늦은 시각.
슬그머니 눈치를 보던 위나델이 말했다.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면 안 돼요, 오빠?”
“그래. 제자의 후손을 이렇게 보내기엔 내 마음도 아쉽다. 하룻밤 묵었다가 내일 돌아가려무나. 돌아가는 길엔 왈리가 마법을 써 줄 거다.”
제자가 바쁘다면 제가 대신 마법을 써 주겠다 말하는 파베의 얼굴엔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선조의 스승과 그 양녀를 번갈아 가며 바라본 라요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를 열어 주었던 마법사와 다시 연락하기엔 시간이 늦었으니 그게 좋겠습니다. 염치 불고하고 숙소를 빌릴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엄마보다 먼저 대답하는 위나델의 얼굴에 화색이 잔뜩 피었다.
왈라이카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으나 계속되는 실피드의 도발 때문에 상황에 개입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라요테는 크로슈 저택에서 하룻밤 묵고 가게 되었다.
“오빠한테 방 안내해 주고 올게요.”
다른 가문 같았으면 손님에게 방을 내어주는 일 정도야 사용인이 맡았을 것이다.
하지만 크로슈 가는 파베 크로슈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사용인들의 행동반경을 제한해 놓아서 가문 사람들이 직접 움직여야 하는 일이 많았다.
그게 아니어도 라요테의 방 안내는 직접 하고 싶었겠지만.
“그래, 둘이 다녀오너라.”
위나델의 마음을 짐작한 파베는 못마땅해하는 왈리를 흘기고서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하여 위나델은 대부의 방해 없이 라요테와 둘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오빠가 와 줘서 정말 행복한 하루였어요.”
볼이 살짝 상기된 소녀가 눈을 별처럼 반짝이며 말했다.
오늘 일은 위나델에게 있어선 특별하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가문과 얽히지 않은 사람이, 다른 이유 없이 친분만으로 자신을 찾아와 준 건 처음이었으니까.
크로슈의 사생아로 살 적에 위나델에겐 친구 따위 하나도 없었다. 가족과 친척들은 능력 없는 아이를 감추기 급급했고, 밖에 나갈 기회도 거의 주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라요테 리카도르는 위나델라 크로슈가 처음으로 가져 본 또래 친구였다.
오로지 위나델라 크로슈라는 인간을 보고 다가와 준 첫 번째 친구.
제게 친구가 생기고, 그 친구가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간다고까지 하자 마음이 몹시 설렜다.
위나델은 여느 11살짜리가 그렇듯 사소한 ‘처음’들에 들떠 있었다.
“나도 즐거운 하루였어. 사정을 알았더라면 훨씬 빨리 찾아왔을 텐데.”
“전 오빠가 오늘 찾아와 줘서 더 좋아요. 그동안은 바쁘고 일이 많았거든요. 엄마와 몸을 같이 쓰기도 했고.”
또박또박 대답하는 위나델의 눈이 다시금 휘었다.
라요테는 그 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두어 달 전엔 한참 어린 꼬마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눈이, 위나델의 본래 나이와 겪었던 과거를 알고 나니 이전과 다르게 와닿았다.
소년은 왜 심술궂고 장난기 넘치는 왈라이카 님이 이 아이를 대녀로 삼았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파베 크로슈 님이 아이 안에 깃들어 있었다는 이유가 가장 컸겠지만.
어렵고 힘든 일을 겪고서도 선량하게 웃을 수 있는 이 심성을 느낀 것이겠지.
고작 한두 번 본 자신조차 소녀 곁에서 힘이 되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위나델.”
“네, 오빠.”
“파베 님과 왈라이카 님이 곁에 계시긴 하지만, 혹시라도 내 도움이 필요한 문제가 생기면 편하게 말해 줘.”
만약 위나델에게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었다.
깜짝 선물을 받은 것처럼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던 아이가, 이내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고 노래하듯 인사했다.
그 모습이 작은 동물 같아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요테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위나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그런데 그때.
“허락도 없이 남의 머리를 만지는 게 예의 바른 행동은 아닌 것 같은데?”
저쪽 앞에서 웬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들려왔다.
라요테는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말고 고개를 틀었다.
복도에 쭉 늘어선 문 닫힌 방들 사이에서, 이상하게 문이 살짝 열려 있는 방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열린 문틈으로 아까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온다.
“더군다나 상대가 한 가문의 가주씩이나 되는 사람인데 말이야. 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가주의 위엄을 해칠 만큼 허물없는 행동 아닌가? 리카도르 영식은 예의가 부족한 것 같네.”
“…….”
얌전히 방 안에만 있으라고 명령해 두었던 아퀴스의 참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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