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161)
161화
“내 이름은 천해선이다. 치킨.”
-이상한 새끼. 네놈은 이름을 꺼내 놓고 왜 난 치킨이냐.
“너네 영물들은 이름이 너무 거창해. 임페리얼 타이거 대신 대범이. 얼마나 좋아? 그러니까 그냥 너도 치킨 해라.”
황금올리브를 닮은 날개 색깔도 그렇고, 여러모로 치킨이 딱이다.
익룡은 내가 지은 이름에 거부감을 표시했으나, 그보다는 묻고 싶은 게 많은 것 같았다.
-한동안 이곳에 출입한 인간 놈들이 없었는데…… 여긴 어떻게 안 거지?
“나와 뜻을 함께한 사람이 알려 줬다. 아까 말했다시피 이곳을 침략한다거나 괴롭히거나 할 목적은 전혀 없어. 우린 그저 이곳에서 적응하기를 원한다.”
-적응?
“그래. 적응. 곧 인간들이 영계에 탐사를 나서게 될 거다. 세상에서 제일 센 놈들만 모았지. 그 장소가 여기는 아니겠지만, 영계의 다른 쪽에서 등장하게 될 거다.”
그러자 치킨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탐사라니. 누구 맘대로 그런 개 짓거리를 한다는 거지? 오기만 하면 몸을 반으로 갈라 내장을……!!
“워워. 너는 누구 닮아서 그렇게 입이 거치냐.”
나는 한 손을 휘휘 저은 뒤 설명을 이어 갔다.
“너희들에게 뭘 빼앗으려는 게 아니야. 우린 그저 몬스터와 마인들을 상대하기 위한 단서를 찾으려는 것뿐이다.”
-지랄하네.
치킨이 콧김을 내뿜으며 내 말을 받아쳤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안 속는다. 너희들이 그렇게 손을 내밀어 놓고 뒤통수를 친 걸 잊었을 거라 생각하나?
“?”
이건 뭔 소리야.
인간이 영계의 뒤통수를 치다니.
그럼 그전부터 영계에 진입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치킨의 두 눈에 귀화가 피어오른 걸 보니 진심인 것 같다.
“우리가 무슨 뒤통수를 쳤다는 거야? 난 모르는 일인데. 좀 알려 줄래?”
그러자 치킨이 자신의 앞발을 내밀더니 가볍게 오므렸다.
그리고는 한 개의 발을 곧게 펴 ‘ㅗ’ 모양을 만들었다.
명백한, 손가락 욕이었다.
“이 새끼가…… 한번 해 보자는 거야?”
-네놈들이 벌인 일을 왜 나에게 묻는 건지 모르겠군. 딴 데 가서 알아봐.
“휴. 대범이와는 다르게 대화가 힘든 놈이네.”
인간을 싫어하는 것 같은데 하는 짓은 꼭 사람을 빼닮았단 말이지.
어쨌거나 이놈에게서 특별히 협조를 구하는 건 어려워 보였다.
“네가 이 구역의 대빵이냐?”
-우린 모두가 평등하다. 순위를 매기지 않으면 문둥병 걸린 환자처럼 몸을 긁어 대는 인간과는 다르지.
“어휴. 입에 걸레를 물었나……. 아무튼 부탁할 게 있다.”
-거절한다.
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치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듣지도 않고?”
-뻔뻔하군. 이곳 영계의 생명이 인간의 부탁을 다시 들어줄 거라 생각하다니.
“그러지 말고 들어 봐. 우리는 여기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그저 시간만 뻐기다 갈 뿐이라고. 가끔씩 너네 다친 애 있으면 치유도 해 주고. 좋잖아?”
-치유?
옳거니.
무슨 말을 해도 코웃음을 치던 치킨이 ‘치유’라는 단어에 반응한다.
나는 놓치지 않고 이레귤러가 가진 치유 능력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그래. 아까 바위에 깔린 애도 금방 치유해 준 거 봤지? 탈진해서 쓰러져 가면서도 영물을 말끔하게 회복시켜 줬잖아. 언제든지 다친 애들 있으면 데려와도 좋아.”
-흥. 그렇게 비리비리해 가지고 몇이나 치유해 줄 수 있을 것 같나.
“한 명이라고 한 적 없는데.”
-?
“여기 있는 이 몸도 치유가 가능하다. 좀 전의 그 힐러와는 달리 무제한으로 치유가 가능하지.”
어째 점점 약을 파는 기분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나는 이곳 히든 던전에서도 아무런 에테르 손실이 없었고, 그렇다는 건 인간 세계와 마찬가지로 무한에 가까운 치유가 가능하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뭐 하면, 나랑 붙고 좀 다쳐 보든가.”
-!!
도발이 조금 지나쳤나.
치킨이 밟고 있는 지면이 움푹하고 들어갔다.
한동안 죽일 듯이 내려다보던 치킨이 슬쩍 고개를 돌려 한쪽을 쳐다본다.
그곳에는 마리아가 치유해 준 영물이 치킨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좋다. 영물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걸 전제로 왔다 가는 걸 허락하지.
“고마워. 아까는 대빵 같은 거 없다고 하더니, 허락은 나서서 잘하네.”
-금방 취소하고 싶게 만드는 재주가 있군.
“농담이야. 보름 동안 신세 좀 질게.”
치킨은 별다른 말 없이 훌쩍 날아올라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휴, 역시 협상은 어려워.”
나는 잔디밭에 주저앉아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사실, 이렇게 주인(?)의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이곳 주변의 영물들은 나 혼자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조금 전에 만난 치킨도 사이즈가 어마어마했지만 서로 전력을 다하면 내 적수가 되지 못한다.
아니, 그냥 그런 거 다 필요 없이 이 자리에서 ‘독무’만 꺼내 살포해도 익룡은 머리를 땅에 처박고 읍소했을 거다.
이기고 지고를 떠나, 독무가 일단 자리에 퍼지면 모든 구역이 황폐화돼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야 게이트에서 뛰쳐나온 몬스터들과 다를 바가 없지.’
실제로 와서 보니 대부분의 영물들이 다 대범이처럼 맑고 순수한 것 같다.
치킨의 경우에도 말투만 좀 독할 뿐, 결국에는 내 의견을 수용해 주지 않았는가.
WHPO에서도 할 수 있으면 영계와 공존을 원한다고 한 마당에, 그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내 뜻을 관철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
조금 전의 소란이 무색하게 평화로운 고요가 찾아왔다.
겁먹은 얼굴로 경계하던 동물들은 이미 저어쪽으로 이동해 각자 돌아다니고 있었다.
딱 한 명.
불의의 바위 일격(?)을 맞은 백곰 하나만이 여전히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됐네.”
동료들의 적응을 돕느라 쉽지 않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난리 법석을 떨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하나 이제부터는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다.
다른 동료들의 목표가 단순한 적응인 데 반해, 내 쪽은 좀 더 명확하게 할 일이 있었다.
지잉.
주저앉은 그 자세 그대로, 프라셀에서 칼날을 꺼내 들었다.
자해가 취미는 아니지만 이곳의 환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고다.
나는 팔 안쪽을 검은 칼날로 주욱 그어 버렸다.
주륵.
붉은 혈액이 팔을 타고 뚝뚝 떨어진다.
나는 반대편 손을 둥글게 말아 혈액들을 한데 모았다.
스스로 치유되는 몸이다 보니, 제법 길게 그었는데도 상처가 금방 아문다.
다른 헌터들은 몰라도, 나에게는 몸속에 돌아다니는 혈액 자체에 힘이 깃들어 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극독에 가까운 성분.
‘발상을 전환시켜 보는 거야.’
이곳 영계는 에테르를 갉아먹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그런 환경이 내 혈액에도 영향을 끼친다면 어떨까.
이사순이 ‘순수한 힘’을 만들어 냈을 때, 그녀가 요구했던 것도 내 혈액이었다.
어찌 보면 이사순 회장의 능력과 이곳 영계의 환경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에테르를 비롯한 다른 에너지를 날려 버리고, ‘순수한 힘’만을 남기는 과정.
만약 내 가정이 맞다면, 이 혈액도 곧 ‘순수한 힘’만 남기게 될지도 모른다.
메루스(Merus).
이사순이 내게 알려 준 궁극의 에너지 말이다.
사륵.
“오.”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반응이 나타났다.
혈액에서 가지각색의 기운이 기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액체가 시간이 지나 증발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처음에는 에테르로 보이는 백색 에너지가 빠져나가더니, 그다음으로는 검은 색 기체가 혈액에서 추출되었다.
‘이건 아마도 블랙 에테르겠지.’
색깔도 색깔이지만, 근처에서 서성이던 백곰이 화들짝 놀라 도망가 버렸다.
원거리에서도 기운을 감지하는 걸 보면, 포이즈너의 독은 영계에서도 유효한 것 같다.
이런저런 기운이 빠져나가고, 혈액 본연의 성분도 말라붙어 간다.
그리고 조금씩, 예전에 보았던 황금빛의 물질이 모습을 드러낸다.
“역시……!”
이사순이 내게 보여 주었던 바로 그 물질.
메루스(Merus)가 나타난 것이다.
샤르르…….
검붉게 말라붙은 핏자국 위로, 황금색의 메루스가 보석처럼 빛난다.
이런 표현은 뭔가 웃기지만 염전에서 소금을 얻어 내는 것 같은 기분이다.
눈을 가늘게 떠야 비로소 보이는 황금색의 작은 결정들이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다만, 기대와 달리 실망스러운(?) 부분이 하나 있었다.
“쩝. 양이 좀 적네.”
쏟아 낸 혈액에 비해 메루스의 양이 터무니없이 적었다.
이사순 회장에게도 비슷한 양의 혈액을 준 것 같은데, 그녀가 되돌려준 메루스는 이것보다 수십 배는 많았다.
이곳에서 그녀가 준 만큼의 메루스를 만들어 내려면 커다란 페트병 안에 혈액을 가득 채워야 할 것이다.
“그전에 출혈 과다로 죽어 버리겠지.”
영계에서 피를 뽑아 메루스를 늘리는 건 무리다.
이사순 회장이 말한 대로, 먼저 메루스의 감각에 익숙해져야 할 것 같다.
스윽.
몬스터의 코어를 흡수할 때처럼 정신을 집중하자, 황금색의 메루스들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그 작은 결정들은 오색 찬란한 프라니움보다 더 아름다웠고, 힐러에게 치유를 받을 때보다 더 포근한 기분을 선사했다.
‘느껴진다.’
확실히 이전과는 다르다.
이곳에서 만들어 낸 메루스에 솜털 하나하나가 반응하는 기분이다.
에테르만큼은 아니지만, 이 녀석을 다루는 게 가능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들어와.”
공중에 떠서 부유하던 메루스가 다시 손바닥에 내려와 앉는다.
마치 햇빛을 받아 녹아내리는 초콜릿처럼, 메루스들이 서서히 녹아 손바닥 안으로 스며든다.
황금빛의 메루스가 몸 안에 퍼지자 부르르 몸이 떨린다.
그 달콤함은 보스급 코어를 흡수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진한 것이었다.
“중독될 거 같아 무섭네.”
한차례 쓴웃음을 지은 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이사순이 만들어 준 메루스에 방금 만든 극소량의 메루스를 한데 섞었다.
다행히 특별한 부작용은 없는 것 같았다.
뭐, 둘다 내 혈액을 통해 만든 것이니 당연한 일이려나.
“아, 자꾸 어디 가냐.”
메루스는 에테르와 달리 몸 안에서 컨트롤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웠다.
그나마 이곳이 영계라 망정이지, 인간 세계로 돌아가면 컨트롤은커녕 감각을 익히는 것조차 어려울지도 모른다.
집중, 또 집중.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수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손바닥 끝에 메루스를 집중하는 데 성공했다.
뿅.
“아무래도 지금은 이게 한계인가 보네.”
실망스럽기도 하고 조금은 머쓱하기도 하다.
포이즈너 레벨이 2로 올랐을 때 손바닥에 생겨난 검은색 아지랑이.
그 아지랑이 옆에, 형과 아우처럼 메루스의 황금색 기운이 작게 돋아났다.
지금의 메루스는, 단순히 점화 플러그 역할을 하는 검은색 아지랑이보다도 크기가 작은 것이다.
‘오늘은 이걸로 만족해야겠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돌아가라고 했지만, ‘이레귤러’ 동료들은 내가 나타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을 것이다.
첸이 있지 않냐고?
그놈은 내가 없으면 집에 가는 길도 모르는 놈이다.
그러니 오늘은 이쯤하고 돌아가는 게 맞는 것 같다.
‘나름대로 수확도 있었고.’
히든 던전에 머물 수 있도록 치킨과 협상(?)도 마쳤고, 메루스에 대한 확신도 얻었다.
동료들이 이곳에 적응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해 보였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 있겠는가.
나는 손바닥에 핀 새로운 아지랑이가 꺼지지 않게 조심조심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너 여태 있었냐?”
-…….
평화롭게 잘 살다가 바위 날벼락을 맞은 백곰이 아직까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블랙 에테르에 놀라 화들짝 도망갈 때는 언제고, 또 언제 여기까지 왔대?
처음에는 경계를 하는 것 같았는데, 이제 보니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뭔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보자.”
얻은 소득이 꽤 많아서일까.
메루스를 보충했기 때문일까.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처음보다 훨씬 가볍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