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127
정도마신 126화
‘묘한 기분이 반복된단 말이지.’
사완악은 얼마 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고수들과 대립했던 일을 떠올렸다.
모든 것이 사완악의 계획대로 진행되었지만……
사완악의 가슴에는 한 가지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천하의 사완악조차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누군가에게 물어보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똑똑.
“사 공자님, 천화입니다.”
“응. 들어와.”
문이 열리며 천화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의 손에는 몇 권의 두꺼운 서책이 들려 있었다.
“가져왔어?”
“네. 그런데 이건 어디에 쓰시려고요?”
“뭘 어디에 써? 읽으려는 거지.”
“읽는…… 다고요?”
“왜? 문제 있어?”
천화는 고개를 저었다.
“문제는 아니지만…… 영겁사령존께서 도덕경을 읽는다는 게 어울리지는 않잖아요.”
“그동안 읽은 책들은 어울려서 읽었나?”
“그것도 아니긴 하죠.”
“참고삼아 읽는 거야. 보다 보면 협객 대사에 도움이 되거든.”
“풋.”
“왜 웃어?”
천화가 웃으며 말했다.
“사 공자님은 사령문 역사상 가장 특이한 지존이심이 분명합니다.”
“너도 사령문 역사상 가장 건방진 귀령일 것이다.”
“어머, 그럴 리가요. 단지 저는 알고 있을 뿐이에요.”
“뭘?”
“제가 모시는 지존은, 제가 평소의 저처럼 행동하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는 걸요.”
사완악은 피식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요란 떠는 놈은 가종후 하나로 충분해.”
“가 오라버니야말로 일당백이죠.”
“동감이다. 이제 나가 봐라. 책 읽을 거니까.”
“예.”
천화는 편안하게 주고받았던 대화와 달리 공손히 허리를 숙인 뒤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사완악은 고개를 돌려 책을 폈다.
그리고 한마디 주문을 중얼거렸다.
“현각극중견광사혼(玄覺極重見光死魂)…….”
그러자 사완악의 단전에서 한 줄기 기운이 솟아올라 뇌리로 향했고, 사완악의 두 눈에서는 은은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이것은 사완악이 사령문의 비급에서 익힌 주술 중 하나로 오성(悟性)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크게 향상시키는 능력이었다.
슥, 슥, 슥.
책장은 거침없이 넘어갔다.
불과 반 시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사완악은 천화가 가져온 책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두 눈을 감고 조용히 명상에 잠겨 있을 때였다.
“……!”
사완악의 눈이 갑자기 날카로운 안광을 쏟아 내며 번쩍 뜨여졌다.
‘이 기운은? 심지어 스스로를 마음껏 드러내고 있다?’
익숙한 하나의 기운이 사완악의 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감추기는커녕 오히려 사완악에게 미리 경고를 하듯 존재감을 내뿜으며 가까워졌다.
드르륵.
마침내 방문이 열리며 한 소년이 들어왔다.
소년은 홍안의 얼굴에 이슬처럼 맑은 눈빛으로 사완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소년의 등장은 사완악으로서도 매우 뜻밖이었다.
“너로군.”
“오랜만입니다, 사 공자님.”
소년의 이목구비는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사완악은 그가 바로 정유문의 소년 문도, 구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완악은 의아함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스스로 내 앞에 나타나다니. 무슨 일이지?”
소년은 천기자의 여덟 번째 제자, 팔군이기도 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무슨?”
“당신과 우리 천의문이 모든 관계를 정리할 때입니다.”
사완악은 장난기 넘치는 성격이지만, 누구보다 영특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당황하지 않았고, 사실 그 일들에 대한 대비를 모두 끝마쳐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천기자의 제자, 팔군의 방문과 그가 내뱉은 말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이렇게 갑자기?”
팔군은 말했다.
“갑자기가 아닙니다. 당신이 이 순간을 만들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우리의 계획을 모두 어긋나게 만들었고, 우리는 도저히 당신을 이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부님께서 당신을 만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부님이라…… 천기자, 그 늙은이가 직접 왔다는 말인가?”
홍안의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안내해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순간, 사완악은 자신의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가져온 의문.
그리고 반드시 만나야 할 상대.
천기자가 찾아왔다.
“좋아, 앞장서라.”
“따라오십시오.”
팔군은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도록 빠르게 신법을 펼쳐 정유문을 벗어났다.
물론 중간에 묵영이 나타나 길을 가로막았지만, 사완악은 묵영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정유문에서 기다리라는 명을 내렸다.
팔군은 계속해서 신법을 전개했다.
사완악은 팔군이 멈출 때까지 어떤 생각에 잠긴 채 묵묵히 그를 따라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팔군은 어느 야산의 중턱에 있는 공터에서 멈추었다.
“흐음.”
사완악은 주변을 돌아보았는데, 특별한 것은 없었다.
산 치고는 풀이나 나무들이 별로 없다는 정도.
그렇기에 사완악은 이상함을 느꼈다.
‘천기자가 굳이 이런 산속 공터에서 나를 보고자 한다고?’
사완악은 앞에 선 팔군에게 물었다.
“이거 함정이지?”
“아마 그럴 것입니다.”
사완악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흥분했었네.”
팔군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흥분을 한다고 실수할 사람이 아닙니다.”
사완악이 팔군을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게 보기 좋게 함정에 걸렸는데?”
“그건 흥분이 아니라 당신의 오만함이지요. 당신이 손목에 차고 있는 사령문의 보물, 사령녹리완천(邪靈綠彲腕釧)을 어떻게 얻었는지 기억하겠죠?”
사완악도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사령녹리완천은 가종후가 사완악에게 가져왔고, 영겁사령존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는지 시험하고자 했다.
사완악은 그깟 팔찌가 얼마나 대단하냐며 곧바로 손목에 차 버렸고, 그 결과 사령문의 지존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게 왜?”
“내가 당신이라면 그 팔찌를 곧이곧대로 착용하지 않았을 겁니다. 어떤 물건인지, 어떤 위험이 있을지 전혀 모르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다르게 행동했습니다. 마치 그깟 팔찌 따위가 당신의 운명을 바꿔 놓을 수 없다는 듯 말이죠.”
사완악은 그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머리를 긁적였다.
팔군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은 은밀히 진행하는 함정에는 잘 걸리지 않지만, 오히려 자신의 역량을 시험해 볼 때는 지나치게 모험적입니다. 그러니 흥분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순순히 따라왔을 것입니다.”
사완악은 자신에 관한 팔군의 분석이 꽤 그럴듯하다고 여겨졌다.
“뭐 그렇다 치고. 그래서 어떤 함정이지?”
그런데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함정은 아닙니다.”
나타난 사내는 창백한 안색에 백면서생처럼 생긴 천기자의 두 번째 제자, 이군이었다.
사완악은 이군의 외모가 태산에서 그와 만났을 때보다 더 수척해진 것을 느끼며 말했다.
“이제는 반갑기까지 하군. 오랜만이네, 이군.”
이군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함정이 아니라 대결이지요.”
“대결?”
“당신과 우리 천의문의 목숨을 건 대결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곳에서 당신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으니까요.”
“그것 참 무서운 말이군.”
사완악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당신은 진법을 사용할 건가? 그런 잔재주 말고 제대로 붙어 보자고.”
이군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평생을 잔재주만 익혀 왔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를 것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완악은 눈앞의 장면이 갑자기 바뀌었다.
팔군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는 평범한 야산이 아니라 험준하기 짝이 없는 기암괴산에 서 있었다.
진법이 발동된 것이다.
사완악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이건…… 보통이 아닌데?”
단순히 눈앞의 풍경이 바뀌어서가 아니었다.
불어오는 바람, 굴러가는 돌 부스러기까지, 눈앞의 모든 것이 진법으로 만든 환상이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현실감 넘쳤다.
이때 사완악의 귓가에 이군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 심장에는 열 개의 환이 박혀 있습니다.”
사완악은 그가 어디 있는지 몰랐지만,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심장에 환이 박혀 있다고?”
이군의 대답이 들려왔다.
“천심환(天心環)이라 부르지요. 선천적으로 큰 병을 안고 태어나 사부님께서 어쩔 수 없이 천의문의 보물을 제 심장에 넣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한 가지 특이한 능력을 얻을 수 있었지요. 이 천심환을 사용하면 어떤 진법이든 그 위력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완악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이군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천심환 세 개를 써야 했습니다. 태산에서 당신을 만났을 때는 두 개의 천심환을 더 사용했지요. 그래서 지금 내 심장에는 다섯 개의 천심환이 남아 있고, 이것을 모두 사용한다면 나는 시한부의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너…….”
사완악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이군의 음성이 덮어졌다.
“그리고 지금, 남은 다섯 개를 모두 사용했습니다. 이전의 다섯 개보다 더 강한 위력을 지닌 내 마지막 천심환들이었습니다.”
“……!”
사완악은 그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정말 자신의 목숨을 불태우며 사완악에게 진법을 펼친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사완악의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스쳐 갔다.
이군이 다시 말했다.
“진법의 이름은 천의영회진(天意永回陣)입니다. 당신에게는 잔재주일지 모르나, 내게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모든 증명이 이 진법에 담겨 있습니다. 아무리 당신이라 하더라도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상대는 내 진법만이 아니니까요.”
사완악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 가며 날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이지?”
“…….”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지만, 사완악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오늘 어차피 당신들과 나, 둘 중 하나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면 굳이 진실을 감출 필요도 없을 텐데?”
이때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이 수호성의 기운을 타고났기 때문이오.”
사완악은 놀란 듯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기골이 장대한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오른손에 한 자루의 보검을 들고 있었는데, 검과 사내는 일체인 듯 매우 안정되어 있어 그가 평범한 검도고수(劍道高手)가 아님을 말하고 있었다.
사완악은 그가 언제 나타났는지 전혀 감지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사내의 무위가 사완악보다 더 우위에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 진법, 까다롭군.’
이군이 펼친 진법이 사완악의 기감(氣感)을 정상적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사완악은 눈앞의 중년 사내를 찬찬히 살폈다.
확실히 이 사람은 지금까지 강호에서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도 강했다.
천기자의 세 번째 제자이자, 천하 팔대고수 중 한 사람.
정도맹의 맹주였던 운룡무왕 양천상도 이 사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영환 사부보다도 강하네.’
사완악은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천기자의 제자인가?”
절대고수의 풍모를 지닌 중년의 검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사군이다.”
사완악이 다시 물었다.
“강호에서의 이름은?”
“…….”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사완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도준. 사람들은 나를 무적검천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