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165
정도마신 164화
어딘지 전혀 알 수 없는 화려한 방.
설린은 벌써 보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 방안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허락된 공간은 오직 이 방과 복도를 따라 걸으면 나타나는 변소뿐이었다.
그녀의 내공은 어떤 점혈 수법에 의해 금제되어 있었고, 열 명의 무인들이 번갈아가며 문 앞을 지키고 감시했다.
그들은 하루 세 번 진수성찬을 차려 설린에게 공손히 올리면서도, 변소를 갈 때조차 그녀를 따라다니는 철두철미함을 지니고 있었다.
나흘째 되던 날, 설린은 권각술을 이용해 보초를 서는 두 명의 무인에게 기습을 가했다.
하지만 그들은 설린이 내공이 온전하다고 해도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로 뛰어난 고수들이었고, 그녀의 공격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막히며 실패로 돌아갔다.
다만, 그들은 설린이 어떤 행동을 해도 마치 지극히 높은 윗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태도를 유지했는데, 아마도 오대 교주의 명령인 듯싶었다.
설린은 그들과 싸워 이곳을 탈출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방안과 복도를 유심히 살폈다.
건물의 양식이나 고급스러운 가구들은 마치 하나의 궁궐(宮闕)처럼 느껴졌는데, 그것 외에는 특별히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랜만이오. 불편한 것은 없으시오?”
보름 만에 다시 찾아온 사람은 바로 마교의 오대 교주였다.
“저를 언제까지 이곳에 가둬둘 생각이죠?”
오대 교주는 미소를 짓고는 시녀를 시켜 찻잔에 차를 따르게 했다.
“천천히 말합시다. 최고 등급의 백호은침이요. 음미할수록 맑고 깊은 맛이 느껴지는 좋은 차요.”
설린은 황당한 표정으로 오대 교주를 바라봤다.
“지금 나보고 당신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라는 건가요?”
“식사는 한 끼도 거르지 않고 먹으면서 차를 마시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오?”
“밥은 내 건강을 지키기 위해 먹는 것이죠. 이곳에서 빠져나가 반드시 당신의 정체를 알려야 하니까요.”
오대 교주는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나는 설 문주에게 내 여인에 어울리는 대우를 해 주고 있는데, 그대는 오직 이곳을 도망갈 생각뿐이라니.”
설린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은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오대 교주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기분은 아니오. 현종이 당신에게 그토록 마음을 빼앗긴 이유를 여실히 느끼고 있소.”
설린은 현종의 이름이 언급되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분은 어떻게 된 거죠?”
“그놈은 아직 무사하오. 나 역시 그를 함부로 죽일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 생각보다 귀찮기는 하지만…….”
오대 교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화제를 돌리듯 말했다.
“천의문의 제자들이 죽었소. 문주인 백신형과 그의 동생 백신우, 그리고 사음탈명주의 제자인 그 늙은이도. 운룡무왕과 무적천검은 사완악의 손에 죽었고, 남은 세 사람이야…… 신경 쓸 필요 없는 녀석들이지.”
설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천의문의 사람들과 친분이 없었고, 오히려 그들의 음모로 인해 큰 위기를 겪었기에 감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죽었다는 소식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면…….
‘연 소저는 살아 있다는 뜻이구나.’
만약 연비려가 죽었다면 사완악의 슬픔이 얼마나 클 것인가?
설린은 그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이때 오대 교주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물론 본교의 피해 역시 만만치는 않지만, 천의문은 마선께서도 꺼려했던 천기(天機)의 후손이니 확실히 제거해 두어야 했소. 그리고 사완악의 무공이 생각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냈으니 나쁜 교환은 아니겠지.”
설린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사 공자님에게는 별일이 없는 건가요?”
그러자 오대 교주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그대는 내 여인이 될 사람이오. 그러니 내 앞에서 사완악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리고 천의문의 제자들이 대부분 죽었으니 다음은 현종이 죽고, 마지막으로 사완악이 죽을 것이오. 현종이 없어진다면 사완악은 결코 내 상대가 되지 못할 테니 말이오. 그러니 그를 향한 마음도 이제는 포기하시오.”
설린은 그의 말에 불안함과 분노가 동시에 차올랐지만,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당신은 참 오만하군요. 나는 사 공자님을 믿어요.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 순간, 오대 교주의 전신에서 돌연 가공할 마기가 흘러나오며 설린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오대 교주가 그저 기운을 일으킨 것만으로도 설린은 숨이 막히는 듯했고, 본능적인 불안함과 공포심으로 다리가 떨리고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릴 정도였다.
오대 교주는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말했다.
“이래도 내가 사완악을 죽이지 못할 것 같소?”
그의 표정과 음성은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야수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설린은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꽉 쥐며 정신을 가다듬은 후 말했다.
“물론이에요. 나는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아요. 사 공자님과 함께 목숨을 걸고 당신을 막을 것이고…… 만약 당신의 손에 우리 모두가 죽는다면, 그저 하늘을 원망할 뿐이겠죠.”
설린의 말에 오대 교주는 싸늘한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대는 참으로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오대 교주의 눈에서 불이 번쩍였다.
“나를 자극하는 재주가 뛰어나구려.”
순간.
쫙!
천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설린의 얼굴에 당혹스러움과 수치심이 동시에 떠올랐다.
오대 교주가 돌연 손을 뻗어 그녀의 옷을 속살이 드러날 만큼 찢어 버린 것이었다.
설린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으나, 이를 악물며 손으로 상체를 가리고 소리를 삼켰다.
만약 여기서 당황하고 수치스러워한다면 상대의 야만적인 행동에 굴복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설린은 오히려 의연한 눈빛으로 오대 교주를 노려봤다.
“이게 무슨 짓이죠?”
오대 교주는 겁을 먹지 않고 반항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설린의 모습에 더욱 흉포해진 눈빛으로 말했다.
“궁금해지는군. 내가 지금 그대를 범하면, 그 도도한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사완악의 반응이 어떠할지.”
“이렇게까지 해서 당신이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이죠?”
“이미 말하지 않았나? 천하를 얻고, 군림하며, 너를 내 여인으로 굴복시키는 것이지.”
오대 교주는 말과 함께 손을 다시 뻗어 설린의 어깨를 잡았다.
설린은 몸을 움츠리며 가슴을 가렸지만 오대 교주의 손길은 우왁스럽게 그녀의 팔목을 잡아챘다.
하지만 그 순간.
“큭!”
오대 교주는 돌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심장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다.
전신에서 흘러나오던 기운이 불안정하게 흔들렸고, 그는 지병을 앓는 사람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설린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저토록 무시무시한 마기를 지닌 오대 교주의 몸에 어떤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때 오대 교주는 다시 정상으로 회복한 듯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성가시군. 오늘은 이쯤 해 두지. 하지만 다음부터는 나를 자극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오대 교주는 화가 난 듯 말을 내뱉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치듯 방안을 빠져나갔다.
설린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옷을 추스르며 홀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하지만 곧 그녀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오대 교주가 말했던 한마디가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다음은 현종이 죽고, 마지막으로 사완악이 죽을 것이오. 현종이 없어진다면 사완악은 결코 내 상대가 되지 못할 테니 말이오.
* * *
정도맹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사완악이 동분서주 움직인 덕분에 남궁세가와 사천당문, 그리고 제갈세가 모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마교의 주축 세력이라고 알려진 칠대마가 중 네 곳을 궤멸시킨 것도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마교의 출현에 불안해했던 강호의 무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사완악은 그야말로 영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피해가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사천당문은 비교적 괜찮았지만, 남궁세가와 제갈세가, 그리고 제갈세가를 도와 칠대마가의 무인들과 싸운 개방은 적잖은 수의 무인들을 잃어야 했다.
또한 마교와의 싸움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천의문의 제자들이 죽은 것은 큰 손실이었다.
사완악은 제갈세가와 개방의 사람들과 함께 정도맹으로 돌아왔고, 하북팽가에 있던 구파일방의 고수들 역시 정도맹으로 모였다. 마교의 기습이 어느 문파로 향할지 예측할 수가 없기에 한 장소로 집결한 것이다.
그렇게 사완악이 정도맹에 도착하고, 며칠 후.
납치당한 설린을 쫓았던 현종 역시 정도맹으로 돌아왔다.
다만 현종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불철주야 사방을 돌아다녔으나, 아무런 수확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린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고, 도망친 원독마가의 가주와 무인들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현종 사제의 뛰어난 경공술과 총명한 두뇌로도 어떤 단서조차 알아내지 못하다니…….”
소림사의 방장 대사 현암은 새삼 마교의 능력이 두렵게 느껴졌다.
현종이 정도맹에 도착한 그날 밤.
현종의 자신의 처소 앞마당에서 밤하늘의 별들을 보며 고통스러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참으로 무능하구나.”
현종은 그 심후한 내공이 모두 소모될 때까지 경공을 펼치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마교의 무인들은 땅으로 꺼진 듯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현종은 자신이 함께 있었음에도 설린이 납치당했다는 사실과, 스스로의 능력으로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깊은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천하의 현종이 무능하면 강호에 유능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
현종은 낯익은 음성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백의장삼을 입은 한 청년 사내가 홀연히 나타나 서 있었다.
바로 사완악이었다.
“완악…….”
“설린 문주랑 그 마교 놈들을 못 찾았다고?”
“미안하다.”
“미안할 일은 아니야. 이거 보통 놈들이 아니더라고. 칠대마가의 가주들은 설린 문주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있었어. 설린 문주가 납치당한 건 마교 내에서도 극비에 가깝다는 뜻이겠지.”
현종은 심각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완악. 그들은 무슨 연유로 설린 문주를 데려간 것일까?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내 목숨도 취할 수 있었는데, 나를 어째서 살려 둔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풀리지 않는 의문 중 하나였다.
설린은 마교의 입장에서 전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반면 현종은 그들이 특별히 경계하는 인물 중 하나.
실제로 원독마가의 가주를 손쉽게 막아 낸 현종이니 마교의 입장에서는 기회가 된다면 제거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런데 현종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뿐,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설린은 납치를 당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사완악은 현종의 말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다가 마치 뭔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말했다.
“사실 그것 때문에 할 말이 있어서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