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177
정도마신 176화
하늘을 찌를 듯한 누각(樓閣), 날아갈 듯한 처마, 눈부시게 화려한 단청(丹靑).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와 셀 수 없이 많은 방.
세상에서 가장 웅장하고 존귀한 듯한 이곳을 나타내는 말은 단 하나.
구중궁궐(九重宮闕)!
바로 황제가 기거하고 있는 자금성(紫禁城)이었다.
“폐하, 안색이 좋지 못하십니다. 괜찮으십니까?”
약관을 조금 넘었을까?
청년의 안색은 혈색이 하나도 없이 매우 창백했다.
하지만 비록 병약해 보인다 해도, 그 청년의 전신에서는 태어나서면서부터 모든 사람들의 위에 군림했던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존귀함과 위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당금(當今)의 황제, 영한제였다.
삼 년 전, 영한제는 선대의 황제가 급작스럽게 병사하여, 열여덟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
상당히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 영한제.
그렇기에 우려의 시선이 많았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영한제는 심약한 것이 흠이었으나, 머리가 영특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 명군(名君)의 자질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선대의 황제가 술과 여인에 취해 정치를 멀리하여 나라가 어지러워진 상황이었기에, 영한제의 이러한 기질은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와 같았다.
다만…….
약 백 일 전쯤부터.
영한제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술에 취하는 날이 늘었으며, 정사에 대한 열정이 조금씩 식어가는 듯한 느낌.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수척해진 얼굴.
황제의 건강을 살피는 어의가 면밀하게 진맥을 해 보아도 특별한 원인은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근래에는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고 며칠을 밤샌 사람처럼 눈 밑이 시커메지고 있었다.
영한제는 한림원의 수장이자 황제의 가장 은밀한 측근이라 할 수 있는 내각(內閣)의 수장, 대학사(大學士) 공손도에게 말했다.
“오늘은 몸이 좋지 않아 먼저 들어가야겠소.”
대학사 공손도는 영한제의 어린 시절 글을 가르쳤던 황사(皇師)이기도 했기에, 남다른 충성심을 지니고 있는 자였다.
“폐하. 정말 괜찮으신 것입니까? 최근 건강이 더 악화되신 것 같습니다. 어의에게 다시 한번…….”
“아니오.”
영한제는 공손도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동안 어의가 제조한 탕약들은 효과가 좋았소. 오늘은 그저 잠이 부족해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건청궁(乾淸宮)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싶으니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만 해 주시오.”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혹시 몸에 어떤 불편함이 있으시면 바로 말씀하셔야 합니다. 어의에게 대기하도록 말해 두겠습니다.”
영한제는 그 말까지는 거절하지 않았다.
“알겠소. 아,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조만간 특별한 연회를 열 생각이오.”
“특별한 연회라 하시면?”
“나와 이 나라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을 위한 연회요. 좌우도독(左右都督)과 좌우도어사(左右都御史), 육부상서(六部尙書)와 통정사(通政司)까지 모두 참석할 수 있도록 미리 언질을 주시오. 아, 물론 황사도 참석하셔야 하오.”
대학사 공손도가 깜짝 놀라며 영한제를 바라봤다.
좌우도독은 이 나라 군사부의 최고 관직이라 할 수 있는 두 명의 장군이었고, 좌우도어사는 감찰기관인 도찰원의 수장이었으며, 육부상서는 나라의 행정을 맡고 있는 여섯 부서의 수장들이었고, 통정사는 상소나 칙령 등, 황제와 관련된 문서를 관리하는 기관의 수장이었다.
게다가 공손도 자신은 한림원과 내각의 수장이었으니.
한마디로 이 나라에서 황제를 제외하면 가장 강한 권력과 높은 신분을 지닌 신하들을 한 자리에 부르라는 뜻이었다.
“폐하, 무슨 일이 있으신 것입니까?”
“아니오. 정말 그들과 한 자리에 모여 연회를 즐기고 싶은 것이니 그리 알고 준비해 주시오. 참고로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황명을 어기는 것으로 알겠소.”
영한제는 연회를 즐기고 싶다고 했지만, 황명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반드시 참석하라는 뜻이다.
대학사 공손도는 이것이 예사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이 중원에서 가장 학식이 깊고, 황제를 직접 가르친 공손도조차, 이번 황제의 의중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황제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이기에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한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런 연회를 주최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황제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므로.
“알겠습니다. 대략 언제쯤 연회를 열 생각이십니까?”
“약 석 달 뒤쯤이 될 것이오. 변동은 있을 수 있소.”
“그리 전해 두겠습니다.”
“대학사.”
“예, 폐하.”
영한제는 잠시 공손도를 바라보다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그럼 이만 쉬러 가야겠소.”
* * *
건천궁은 황제의 침궁(寢宮)이다.
연회에서 빠져나온 영한제는 신하에게 말한 것처럼 곧바로 건천궁으로 향했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게 꾸며진 듯한 방안.
그런데 기이한 일이었다.
영한제가 그 방안에 들어갔을 때, 한 사내가 의자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누가 있어 감히 황제의 침궁에 홀로 앉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영한제는 사내를 보는 순간, 분노가 아닌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큰 키에 넓은 어깨, 그리고 호랑이 같은 두 눈빛.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에 짙은 눈썹, 깎은 듯한 콧날과 조각 같은 얼굴형까지.
그는 실로 절세의 미남이었고, 천하를 호령하는 대장군 같았으며, 사람을 압도하는 듯한 기운이 전신에서 흐르고 있었다.
흑발이 길게 자랐으나,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과 기도.
놀랍게도 그 사내는 바로 소림수호승이었던 현종의 다른 인격, 마교의 오대 교주 종천이었다.
종천은 영한제가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이 안에서의 이야기는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는다.”
영한제가 흠칫한 표정으로 종천을 바라봤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 사람의 능력은 과연 어디까지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당신이 시킨 대로 모두 하였소.”
“잘했군.”
종천은 씩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는 영한제를 향해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고 있었고, 차를 마시는 여유로움은 흡사 영한제보다 더 황제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영한제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당신은 도대체 무슨 계획을 하고 있는 것이오?”
종천은 황제 영한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예로부터 무림에서는 관무불가침(官武不可侵)이라는 말이 있었다.”
관무불가침.
관과 무림은 서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건 무림이 자신들의 체면을 지키기 위한 허울 좋은 말일 뿐이었지. 정확히 말하자면 관은 무림을 신경 쓰기 귀찮은 것이었고, 무림은 관을 두려워했으니까.”
무공을 익힌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일반인을 상대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에 관에서 무림이 벌이는 일들을 일일이 간섭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했다.
또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황궁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었기에, 정도맹이 무림의 실세가 된 순간부터 관은 무림에 매우 관대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무림은?
무림은 황궁보다 약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빠진 무림은 황궁을 결코 이길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관과 무림이 전쟁을 벌인다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관의 편에 설지도 모를 만큼, 그들은 긴밀했다.
또한 황제가 거느린 수많은 병사를 상대하는 것은 무림인이게도 버거운 일.
따라서 관은 귀찮고 번거로운 이유로, 무림은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이유로 서로 불가침의 조약이 불문율처럼 생겨났던 것이다.
물론 가끔 사파의 무인들 중 거침없이 사건을 저지르는 자들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대악인이었다.
사대악인은 무공을 모르는 일반 민초들을 죽이거나, 여인을 범한 적도 있었다.
그들의 악행은 관에서도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무림은 그들을 무림공적으로 선포하고, 자체적으로 처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교는 다르다. 본교의 목표는 무림일통을 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천하의 통치자가 되는 것이었다. 다만…… 본교가 황실을 침공하지 못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종천은 다시 한번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어 갔다.
“첫째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황실을 보호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바로 천황무위대(天皇武衛隊) 때문이었다.”
순간, 영한제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천황무위대.
그 이름은 영한제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천황무위대는 오직 무림이 황실을 위협할 때만 모습을 드러내는 수호자들이지. 그리고 그들의 무공은 놀랍게도…… 본교의 무공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음양천자의 열두제자 중 무연자(無然子)의 힘을 계승했기 때문이지. 과거 본교의 삼대 교주는 그 사실을 알게 되고는 천황무위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으나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그것이 마교가 황실에 침공할 수 없었던 이유이다.”
바꾸어 말하면 천황무위대가 있는 이상, 마교는 황실을 이길 수 없다는 뜻.
하지만 영한제의 안색은 오히려 더 어두워졌다.
종천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천황무위대는 이미 삼백 년 전, 그 명맥이 끊어졌지. 그렇지 않은가?”
“…….”
“하하. 그런 이상 본교가 황실을 차지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영한제가 종천에게 물었다.
“당신은 황제가 되고 싶은 것이오?”
“물론이다.”
종천은 큰 체구를 일으키며 말했다.
“황제야말로 이 세상의 가장 높은 위치. 나는 너를 대신하여 황제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정도맹과…… 한 녀석을 처리해야겠지만. 그 일이 마무리되면 천하는 본교의 세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전까지, 너는 네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한다. 그때의 그 고통을 다시 겪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종천의 눈빛에서 핏빛의 붉은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영한제는 어떤 기억이 떠올랐는지 몸이 사시나무처럼 부르르 떨려 왔다.
“만약 내 말대로 잘 이행한다면, 너는 여생을 조용한 곳에서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보상이다.”
종천이 말한 그때의 그 고통.
그것은 결코,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지옥 같은 경험이었다.
영특하지만 심약한 황제.
영한제는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 고통을 다시 견뎌 낼 자신이 없었다.
“아, 알겠소. 당신이 말한 대로 하겠소. 대신 그 약속은 꼭 지켜 주시오.”
“하하. 물론이다. 나는 내가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니까. 그럼 조만간 다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
종천은 돌연 극심한 두통을 느끼는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