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23
정도마신 22화
혼비백산(魂飛魄散).
장내의 사람들이 너무 놀란 탓인지 장내에는 고요한 침묵이 맴돌았다.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사완악의 말에 흑사방의 무사들은 귀신을 마주친 듯 허둥지둥하며 궁화종의 시신을 수습하고, 광투견 엽응을 부축하여 돌아갔다.
“흑사방과 정유문의 비무는 끝이 났소! 모두들 돌아가시오!”
총관 황임의 말에 구경꾼들도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이곳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혹여 자신들에게도 불똥이 튈까 봐 부리나케 장원을 빠져나가 흩어졌다.
이제 마당에는 설린과 황임, 관일성, 구휘, 그리고 사완악만이 남아 있었다.
사완악은 여전히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정유문의 사람들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보다 일이 커져 버렸군. 아무래도 이곳에서 며칠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은데.”
설린은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사 공자님, 어서 이곳을 떠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사완악이 당황하며 주변을 쳐다봤다.
“응? 뭐야, 이 넓은 장원에 내가 묵을 객실 하나 없는 건가?”
설린은 궁화종의 목을 베어 버리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의 사완악을 보며 세상에 이렇게 특이한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자님이 잘 모르시는 것 같아 말씀드리자면, 흑사방은 정말 강대한 단체입니다. 특히 세 명의 방주는 절정을 바라보는 고수들입니다.”
사완악은 그제야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 조금 섭섭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나보고 빨리 도망가라는 소리였어?”
설린은 사완악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말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고 했습니다. 사 공자님은 혼자이고 흑사방에는 백 명이 넘는 무사와 세 명의 방주가 있으니, 자리를 피한다고 해서 비겁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때였다.
“아니요! 비겁하고 무책임한 겁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관일성 옆에 서 있던 소년 문도, 구휘의 음성이었다.
구휘는 사완악과 눈이 마주치자 움찔했지만, 지지 않고 노려봤다.
정유문의 사람들은 조금 놀란 얼굴로 구휘를 바라봤다.
구휘는 언제나 문파 사람들에게 순종적이었고 어떤 일이 있어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 소년이었기에,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사완악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 소년을 쳐다봤다.
“비겁하고 무책임하다고? 어째서지?”
구휘는 용기를 내듯 주먹을 꽉 쥐며 소리 높여 말했다.
“당신은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해 버렸습니다. 흑사방이 복수를 위해 찾아온다면, 당신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정유문의 사람들 모두 죽게 될 거란 말입니다! 당신은 무공이 뛰어나니 어쩌면 이곳에서 도망갈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문주님은…….”
구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완악은 그 모습을 보고 흠, 하며 설린을 바라봤다.
“문주도 이 꼬마랑 똑같이 생각하나?”
설린은 고개를 젓고는 구휘를 꾸짖듯 말했다.
“휘아는 조용히 하거라.”
“무, 문주님…….”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명예와 긍지는 다르다. 사 공자님이 아니었다면 오늘 정유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선대의 업적들까지 비웃음을 샀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정정당당한 비무에서 이겼으니, 복수를 당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정유문이 아니라 흑사방을 욕할 것이다. 사 공자님은 정유문의 둘도 없는 은인이니 그런 말을 삼가라.”
이때 관일성이 포권하며 말했다.
“나 역시 문주와 같은 생각이오. 흑사방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죽는다 해도 당신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오. 휘아는 나이가 어리고 문주를 생각하는 마음이 커서 한 말이니 너그럽게 넘어가 주셨으면 좋겠소. 그리고 귀인을 알아보지 못한 처음의 결례를 용서해 주시오.”
그 말에 사완악은 혀를 쯧쯧 찼다.
“이거 봐. 다들 이 꼬마랑 같은 생각이네. 내가 흑사방과 싸우면 질 거 같다는 거잖아.”
설린과 관일성이 의아한 표정으로 사완악을 쳐다봤다.
‘설마 이 사람은 진심으로 흑사방과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때 사완악이 구휘에게 말했다.
“꼬마야, 아까 그 궁화종이라는 개망나니는 나쁜 놈이었지? 사람도 죽이고, 여자도 겁간하고, 정유문에게 시비를 걸고 말이야.”
구휘가 볼멘소리로 답했다.
“꼬마라고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궁화종은 정말 나쁜 놈이 맞습니다.”
“그럼 그 아비인 흑사방의 삼방주는 어떤 사람이냐? 착한 놈이냐?”
“그럴 리가요! 흑사방의 삼방주는 궁화종보다 더 악명이 높은 사람입니다. 소문에는…….”
구휘가 말을 하다가 입술을 깨물며 멈추었다.
사완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소문을 들었다. 사실은 설 문주를 원하는 것이 궁화종이 아니라 그 삼방주 놈이라는 거.”
설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 역시 그 소문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단순히 소문이 아니라 기정사실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완악이 말했다.
“그럼 내가 오늘 궁화종을 죽였든 죽이지 않았든, 흑사방이 과연 정유문을 가만히 두었을까?”
“…….”
구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완악은 소년에게 더 이상 다그치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무책임하다는 말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내가 밥값을 하려고 나섰으면, 결자해지(結者解之)하는 것은 도리이지.”
사완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꼬마야, 하나만 묻자. 어쨌든 궁화종과 그 아비는 나쁜 놈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니, 그들을 죽이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라 할 수 있을까?”
구휘는 사완악에게 궁화종을 왜 죽였냐고 화를 냈던 것이 민망했으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분명 정의로운 일이고, 수많은 사람을 구하는 협행입니다.”
“협행이라. 그렇단 말이지?”
사완악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알았다. 직접 찾아가기 귀찮아서 오라고 했던 건데, 네 말을 듣고 마음이 바뀌었다. 후딱 해치우고 와야겠다.”
사완악이 설린을 보며 말했다.
“다녀와서 아까 먹은 그 고기 요리나 한 번 더 먹고 싶군.”
설린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사완악을 쳐다보다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했다.
“사 공자님, 지금 설마 흑사방에 직접 가신다는 말씀은 아니지요?”
“맞는데?”
“그렇죠? 그럼…… 네?”
설린이 눈을 깜빡이며 사완악을 바라봤다.
그러다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됩니다! 흑사방은 정말 무서운 곳이라고요! 차라리…….”
하지만 설린은 미처 말을 끝내지 못했다.
사완악의 신형이 어느새 바람과 같이 날아가 정유문을 빠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사완악이 신형을 돌려 다시 설린의 앞에 오더니 구휘를 보고 물었다.
“너, 흑사방 어디 있는지 알지?”
“예? 아, 알긴 아는데…….”
그 순간, 사완악이 구휘를 번쩍 들어 옆구리에 끼고 말했다.
“얘랑 같이 다녀올게!”
“예?”
옆구리에 끼어 매달리게 된 구휘도 깜짝 놀라 말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완악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난 흑사방이 어디 있는지 모르거든. 꼬마야, 네가 나보고 무책임하다고 했으니 너도 이 정도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냐?”
“그, 그런…….”
“왜? 말만 대장부처럼 하고, 막상 문주님을 지키러 흑사방에 가려고 하니 두려운 거냐?”
구휘가 얼굴이 붉어지며 언성을 높였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래? 안 무섭다니 잘됐구나. 그럼 가자!”
“으아아악!”
사완악은 설린이 뭐라 말릴 새도 없이 다시 경공을 발휘했다.
사람을 한 명 들고서도 사완악의 경공술은 설린이 태어나 처음 보는 것일 만큼 빨랐다. 사완악은 눈 깜짝할 새에 정유문을 빠져나가, 저 멀리서 구휘의 비명 소리만이 메아리쳐 돌아올 뿐이었다.
* * *
쾅!
마치 벼락에 나무가 쪼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뱀의 형상이 음각된 태사의가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이, 이게…… 이게 어찌 된 일이냐아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온몸으로 기파를 내뿜는 한 장년인.
그는 바로 흑사방의 삼방주, 천사환검(千蛇幻劍) 궁무외였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목과 몸이 분리된 한 구의 시체를 보며 두 눈을 의심했다.
그 시체의 목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궁화종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궁무외는 실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된 눈으로 대청에서 내려와 잘게 떨리는 양손으로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다가 천천히 말했다.
“엽응이 함께 갔을 텐데?”
흑사방의 무사가 덜덜 떨며 대답했다.
“엽 대주님은 단전이 파괴되고 큰 내상을 입어 혼수상태입니다.”
궁무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유문의 누가 있어 이 아이와 엽 대주를 그리 만들었단 말이냐?”
“그, 그게…… 그냥 갑자기 나타난 청년이었습니다. 저희도 그가 누군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청년?”
“귀한 집안의 자제처럼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고, 약관 정도로 보였습니다.”
궁무외는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은 분노 속에서도 생각했다.
‘약관의 청년이 흑사방의 이름도 무서워하지 않고, 광투견 엽응을 그리 만들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강호의 청년들 중 그 정도 무위를 지닌 고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구파일방 같은 대문파에서 자랑하는 후기지수 중에는 그런 천재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이라면 타 문파의 비무에 끼어들어 대뜸 흑사방 방주의 아들을 죽여 버리는 일 따위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었다.
흑사방의 무사는 여전히 떨리는 음성으로 간신히 다음 말을 전했다.
“복수를 하고 싶으면 삼방주님께서 정유문으로 직접 오시라고…… 했습니다.”
“하하, 그런가.”
궁외무가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어서 궁외무가 말했다.
“주인을 지키지 못한 개는 죽어 마땅하다.”
“바, 방주님?”
“하지만 내 아들의 시체를 수습하고 흉수를 전해 주었으니…… 고통 없이 보내 주는 것이 내 마지막 자비이니라.”
“사, 사, 살려 주십……!”
그 순간,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말을 전하던 흑사방의 무사를 비롯해서 정유문에서 돌아온 다른 무사들 전원의 목에 하나의 붉은 선이 그어지더니 모두 목이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궁외무의 손에 들린 검에는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이를 지켜보는 다른 흑사방의 무사들은 공포에 질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엽 대주 휘하의 독사대 전원을 집결시켜라. 정유문으로 가겠다.”
그런데 그때였다.
“으아악!”
갑자기 처소의 입구 쪽에서 한 줄기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음성이 이어졌다.
“아, 그러게 길 좀 막지 말라니까.”
이어서 등장하는 한 명의 청년과 소년.
곱상한 얼굴에 고급스러운 백의장삼을 입고 있는 청년은 왼손에는 한 소년을 옆구리에 끼고, 오른손에는 흑사방에서 하급 무사들에게 지급하는 철검 한 자루를 들고 여유롭게 걸어 들어왔다.
한 무사가 호통을 치듯 외쳤다.
“웬 놈이냐!”
물론 청년은 사완악이었고, 옆구리의 소년은 구휘였다.
사완악은 씩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한 번 훑어보더니, 돌연 검을 들고 서 있는 궁외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가 흑사방 삼방주의 처소라고 들었는데, 삼방주라는 놈은 대체 어디 있는 거냐? 제 아들의 복수가 하고 싶으면 대답 좀 해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