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61
정도마신 60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현종이 돌아서는 설린을 불러 세웠다.
“예?”
“그 옷차림은 오해를 살지도 모릅니다.”
“아……!”
설린의 옷은 앞쪽이 길게 찢어져 양손으로 감싸 쥐고 있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어두운 새벽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여 누군가 설린의 옷매무새를 보게 된다면 여인으로서는 오해받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현종은 자신의 어깨에 길게 걸치고 있는 붉은 가사를 벗어 설린에게 다가갔다.
“이걸 걸치고 가십시오. 누가 본다 한들 밤이라 색깔 구분이 잘되지 않을 것이고, 특별히 오해받을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소림사의 승려들은 붉은 가사를 매우 경건하게 대하고 간직했다.
붉은 가사에는 소림사의 제이조, 혜가(慧可)를 기리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현종은 설린의 표정을 보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마음만 있다면 겉치레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고는 설린이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현종은 가사를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기골이 장대한 현종의 가사는 설린의 상체를 모두 감쌀 수 있어서 큰 겉옷을 걸친 듯한 느낌이었다.
“감사합니다……!”
설린은 조금 민망한 얼굴로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다가 현종과 눈이 마주치고는 조금 놀랐다.
이때 두 사람은 현종의 눈동자 속에 설린 자신의 모습이 비칠 정도로 가까웠기 때문이다.
설린이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현종 스님께는 번번이 신세를 지는군요.”
“별말씀을요. 앞으로도…….”
“예?”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설린 문주님과 저는…….”
현종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말했다.
“좋은 친구가 아니겠습니까.”
“좋은 친구…….”
설린은 그 말을 한 번 중얼거리고는, 이내 옅게 웃으며 말했다.
“현종 스님이 친구라고 해 주시니 정말 기분이 좋네요. 오늘 일은 정말 감사합니다.”
“친구끼리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지나치게 표현하지 않는 법입니다.”
“풋, 그런가요?”
설린은 일련의 사건으로 긴장되었던 마음이 풀어지는지 한층 더 밝은 표정으로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적당히 진심으로 감사드리도록 할게요.”
그녀의 익살스러운 말에 현종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적당히 진심으로. 좋군요. 이제 돌아가시지요.”
“네, 그럼 이만.”
설린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현종은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 * *
설린은 처소로 돌아가는 내내, 현종의 마지막 눈빛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눈빛은 매우 기묘했고, 뭐라 형용하기 어려웠다.
어딘지 모르게 뜨겁고 깊고 번뜩였으며, 빨려 들 것만 같았고 심장을 옥죄는 듯한.
마치 그 눈빛은…….
설린은 문득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설린은 현종이 걸쳐 준 붉은 가사를 단정하게 개어 두고는 애써 잠을 청했다.
* * *
이틀 뒤, 비무 대회 당일.
사완악은 아침 일찍 설린을 데리러 왔고, 평소와 전혀 다름이 없었다.
“문주님, 기분은 좀 풀렸어?”
“예? 아, 네…….”
설린은 민망한 듯 시선을 피했다.
사완악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직 안 풀렸나 본데?”
“아니에요. 단지…….”
“단지?”
“죄송해서요.”
설린은 하루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사완악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독화 당소윤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했고, 그것이 자신의 솔직한 느낌이라고 해명했다.
그렇다면 설린은 일방적으로 오해를 하여 화를 낸 것이다.
“별일도 아닌데 그럴 필요 없어. 비무장이나 어서 가자고.”
사완악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설린은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사 공자님은 나에게 다른 마음은 없으신 거야.’
설린은 사완악의 표정과 태도에서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설린은 내심 기분이 좋았다.
어쨌든 사완악이 그녀의 미모를 강호 사대미녀인 당소윤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한 것은 진심이라는 뜻이었으니까.
“같이 가요!”
설린은 사완악의 옆으로 따라붙어 나란히 걷다가 물었다.
“사 공자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사 공자님은 사부님들께 무공을 배우고 협객이 되기 위해 출도하셨다고 하셨죠?”
“그렇지.”
“그럼 정유문에 오기 전에도 강호 유랑을 오래 하셨나요?”
“강호 유랑?”
설린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 그냥 궁금해서요. 그때 사람들 앞에서 신비 문파로 불리는 월궁문의 백리향도 만나 보셨다고 하셨잖아요. 혹시 다른 재밌는 경험도 해 보신 적 있나요? 저는 사 공자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하북성 밖으로 나가 본 적도 없어서요.”
사완악이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 여인을 만난 건 정말 우연이었어. 그 외에는 나도 북경을 조금 구경하고, 곧바로 정유문이 있는 하북성에 도착했으니 별다른 경험은 없지.”
“그럼 특별히 친분이 있거나 원한이 있는 사람도 없겠네요?”
사실 설린은 이 질문을 하고 싶어서 앞의 말을 꺼냈던 것이었다.
지난밤, 남궁준휘와 있었던 사건.
그 배후는 사완악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건 왜?”
사완악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설린을 쳐다봤다.
이때 사완악은 무표정했지만, 설린은 왠지 모르게 뜨끔한 느낌이 들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아하핫! 아니, 원래 강호의 무인들에게는 그런 사연들이 있는 법이잖아요. 혹시…… 사 공자님께도 어떤 사연이 있다면, 제게도 꼭 말해 주세요. 정유문은 사 공자님과 함께 싸울 거니까요.”
물론 이것은 단순히 떠보기 위해 묻는 것이 아닌, 설린의 진심이기도 했다.
사완악은 설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거 없어.”
설린은 그 대답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함이 더 깊어졌다.
‘그럼 대체 남궁 소가주를 이용한 사람은 누구일까?’
만약 이때 설린이 사완악에게 이틀 전 있었던 일을 말했다면, 사완악은 바로 그 배후를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설린은 현종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대화를 하는 사이, 어느덧 비무 대회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느 문파에서 왔소?”
“정유문입니다.”
“정유문. 삼 번 비무대 앞으로 가시오.”
사완악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비무장이 네 개나 있었군.”
사완악의 말대로 대회장에는 넓은 크기의 비무대가 네 개 있었고, 북쪽 끝에는 모든 비무대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높은 곳에 설치된 관람석이 있었다.
그리고 그 관람석에는 연회장에서 개회사를 했던 정도맹의 맹주, 운룡무왕 양천상과 집법당주인 냉혈판관 서문석, 그리고 그 외에도 약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시(午時)가 되자 양천상이 다시 한번 짧은 개회사를 말하고, 집법당주 서문석이 내공을 담은 음성으로 비무 대회의 규칙에 대해 설명했다.
“본 대회는 예선과 본선을 나누어 진행할 것이오. 각 비무마다 심판이 존재할 것이고, 서로의 무예를 겨루어 발전의 밑거름이 되기 위한 대회이니 무기는 비무대 옆에 구비된 목제(木製)를 사용하시오. 또한, 상대의 눈과 목, 낭심을 노리는 초식과 독공은 금지이며, 비무가 과열될 경우 심판의 역량으로 중지시키고 판정승을 내릴 것이오. 그 외 정도인으로서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비겁하다고 판단되는 행위는 실격패이며, 심한 경우 추가적인 징계가 있을 것이오. 설령 심판의 눈을 피한다고 하여도, 맹주님께서 이곳에서 그대들을 지켜보고 있으니 양심에 어긋나는 편법은 사용하지 않기를 바라오. 대진표는 배정된 비무대 앞에서 확인할 수 있고, 비무자는 심판이 호명할 것이오.”
대회의 규칙에 불만을 표하는 후기지수는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정도맹에서 생사를 겨루는 비무를 할 리도 없거니와, 그런 목적을 지닌 사람도 있을 리 없었다.
“어떡하죠? 제 상대가 비연문의 조달이에요.”
사완악은 비연문의 조달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소윤의 외모를 평가절하할 때,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질문했던 청년이었다.
“비연문이 강한 문파인가? 그 녀석 별 볼 일 없어 보이던데.”
“그건 사 공자님한테나 그렇죠! 비연문의 무공은 경쾌하고 날렵하기로 유명해요. 중소 문파들 중에서는 이름이 있는 편이죠. 무엇보다…… 너무 떨려요.”
설린은 사완악에 대한 생각이나 남궁준휘와의 사건 때문에 이틀간 비무 대회에 대한 것은 잠시 잊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대진표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보니 손발이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사 공자님, 왜 저도 비무 대회에 참석한다고 말한 거예요? 아직 제 실력으로 이런 곳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설린은 초조한 듯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사완악은 태연자약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걱정 마. 아까 규칙 들었잖아. 죽거나 크게 다칠 일은 없어.”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명색이 저도 정유문의 문주인데…… 망신만 당하면 어쩌죠? 형편없이 당해 버리면 사람들이 크게 비웃겠죠, 네?”
사완악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아악! 이게 다 사 공자님 때문이에요!”
사완악은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문주 말대로 우리 정유문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으려면 최선을 다하라고.”
“아니, 정유문의 문도로서 어떻게 그렇게 얄밉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때였다.
“비연문의 조달! 정유문의 설린! 올라오시오.”
설린은 아연실색하며 중얼거렸다.
“맙소사…… 심지어 첫 번째야…….”
비연문의 조달은 여유 있는 미소로 비무대 위로 힘껏 뛰어올랐다.
“정유문의 설린, 열을 셀 동안 올라오지 않으면 실격이오!”
설린이 사완악을 돌아보며 속삭였다.
“차라리 실격을 당할까요?”
“오호? 그런 방법이 있었나?”
“그럴싸하죠?”
그러자 사완악은 씩 웃고는 돌연 음성을 높여 말했다.
“여기, 정유문의 문주 설린 있습니다. 지금 올라갑니다!”
“사, 사 공자님…….”
하지만 이미 심판과 다른 문파 사람들의 눈은 설린을 향해 있었다.
설린은 그 시선을 느끼고는 단전에서부터 크게 한숨을 끌어올려 내쉬고는, 원망 섞인 눈초리로 사완악을 한 번 쳐다본 뒤 힘없이 비무대로 올라갔다.
“아까 들었겠지만, 상대의 눈과 목, 낭심을 노리는 초식과 독공은 금지요. 위험하다 판단되면 비무를 중단하고 판정승을 내릴 것이고, 판정에는 무조건 승복해야 하오. 알겠소?”
“예, 알겠습니다.”
“네…….”
“그럼 시작하시오.”
심판은 뒤로 물러서서 두 사람이 싸울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주었다.
비연문의 조달은 잠시 설린의 기색을 살폈다.
‘문주라는 사람이 무공은 문도보다 훨씬 약한가 보군. 하긴…… 애초에 그건 정유문의 무공이 아니었으니까.’
조달은 사완악의 무공을 직접 보았기에, 처음에는 정유문의 이름에 크게 긴장했었다.
하지만 그는 설린의 자신 없는 표정과 몸짓에서 그녀의 실력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조달은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남궁준휘와의 사건 이후, 정유문의 이름은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런 정유문의 문주를 자신이 꺾는다면,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아름답군.’
조달은 설린을 적당히 봐주면서 인연을 맺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선공을 양보하겠소.”
“…….”
조달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오.”
설린은 그의 말에 내심 동의하며 생각했다.
‘그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까…… 바보같이 창피당하지 말고 공격이라도 해 보자.’
설린은 조달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검을 고쳐 쥐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