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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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적인 말에 피가 차갑게 식었다. 레아는 흐트러진 옷을 가다듬으며 날카롭게 받아쳤다.
“변경백이 무서워서라도 그러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변경백을 언급하자 블레언의 얼굴이 곧장 일그러졌다. 무섭도록 레아를 노려보던 그는 이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말대꾸는 잘하지. 야만족 새끼랑 정원 구석에 숨어있던 년이…….”
머리채를 잡아당기던 손이 한쪽 뺨을 감쌌다. 짐짓 다정한 척 쓸어내리는 손길과 함께 비아냥거리는 질문이 날아왔다.
“그 새끼가 너한테 반하기라도 했어? 한번 자자고 그래?”
이미 거하게 잠자리를 가진 사이라고 답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내가 변경백의 약혼자이니 관심을 가진 것뿐이에요.”
“…….”
블레언은 눈썹 사이를 살짝 찌푸렸다. 딱히 레아의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러나 더 캐묻지는 않았다.
아주 예전에는 블레언과 친밀했던 것도 같았다. 레아도, 블레언도 어리고 멋모르던 시절에는 말이다.
마치 진짜 남매라도 된 것처럼 서로를 살뜰히 챙겨주었다.
그때의 블레언은 레아를 진심으로 따르고 좋아했고, 외로웠던 레아 또한 블레언을 많이 아꼈다.
어쩌면 진실로 가족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이어 붙어있던 관계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점 갈라졌다.
레아가 능력을 내보일수록 블레언은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시달렸고, 서서히 레아를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얼마든지 레아를 깔아뭉갤 수 있고, 함부로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길 원했다.
점점 벌어져가던 관계는 레아가 진실을 알게 되면서 완전히 부서졌다.
어머니가 어떻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며, 그것이 누가 만들어낸 비극인지 알게 된 것이다. 레아는 블레언을 예전처럼 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블레언을 피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는 본성을 드러냈다.
“…….”
레아는 저를 노려보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천천히 밀어내니, 의외로 블레언은 순순히 물러났다.
“……레아.”
제법 간질간질한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다. 거칠던 손길도 어느새 보드라워져선, 흘러내린 레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얌전하게 있어. 함부로 나돌지 말고.”
더 말을 섞기도 싫어서, 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지긋지긋했다. 빨리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 * *
왕녀궁으로 돌아오니 시녀들이 전부 궁 앞에 나와 있었다. 레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앞에 서있던 멜리사 백작부인은 레아를 발견하자마자 체면도 잊고 마구 달려왔다.
“왕녀님!”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왕태자 저하께서 찾으셔서…….”
“이미 만났어요.”
멜리사 백작부인은 망연히 입을 다물었다.
“별일은 없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차분한 대답에도 그녀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레아는 조금 더 말하려다가 관두었다.
블레언이 제 머리카락을 온통 뜯어놓았다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산발에 뜯어진 옷을 한 채로는 무슨 말을 해봤자 의미가 없었다.
멜리사 백작부인은 미리 준비해놓았던 숄을 레아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레아는 그녀의 부축을 받아 왕녀궁 안으로 들어왔다.
따뜻한 차를 마시니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녹아내렸다. 차를 마시는 동안, 멜리사 백작부인은 뒤엉킨 머리카락을 다시 빗어주었다.
레아가 차를 반절쯤 마신 것을 확인한 후, 멜리사 백작부인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쿠르칸의 왕과는 어찌 되셨습니까.”
레아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는 일은 손쉬웠다.
“그저 호기심이었어요. 내가 오베르데 변경백의 약혼녀라 하니 궁금했던 모양이에요.”
멜리사 백작부인은 레아의 거짓말에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렇게 사라지셔서 많이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사납고 흉포한 자더군요.”
평소 같았으면 블레언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샤칸과의 만남이 인상적이었는지, 그녀는 계속 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게다가 그 눈동자는 정말이지…….”
기억을 되짚던 멜리사 백작부인이 말을 멈추고 짧게 인상을 찌푸렸다.
예법을 중시하는 그녀가 이런 식으로 말을 얼버무리는 일은 흔치 않았다. 레아는 남은 차를 입에 머금으며 황금색 눈동자를 떠올려보았다.
인간의 것이라 하기에는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눈동자였다. 눈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짐승을 앞에 둔 것처럼 본능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이샤칸을 생각하고 있자니, 문득 블레언이 세르디나에게 오늘 일을 말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아마 그러지 않을 것 같긴 하지만, 만에 하나 지나가듯 흘리기라도 한다면……. 세르디나는 블레언처럼 넘어가진 않을 터였다. 적절한 변명거리를 생각해놓아야 했다.
또다시 머리가 날카롭게 아파왔다. 가뜩이나 시달린 몸에 찾아온 두통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레아는 찻잔을 마저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남은 일정은 취소해주세요. 서류만 침실에서 보도록 할게요.”
“왕녀님…….”
“괜찮아요.”
레아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멜리사 백작부인을 달랬다.
“정말 괜찮아요. 그냥 연회 때문에 절식을 해서 그런지…….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아서요.”
이번에는 거짓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멜리사 백작부인은 레아가 괜찮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휴식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레아를 보내주었다.
내일 아침까지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 명한 뒤, 레아는 침실 속에 숨어들었다. 느릿느릿 침의로 갈아입고, 안락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저녁은 먹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연회 때문에 평소보다 식사량을 현저히 줄인 상태였다.
과일 두 조각이 전부일 식사를 위해 휴식을 방해받고 싶진 않았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었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의자에 앉아서 붉은 석양이 드리우고, 검은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그냥 계속 바깥을 보기만 했다.
밤하늘에 떠오른 달을 바라보던 레아는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발작처럼 치솟았다.
예전부터 수도 없이 느꼈던 충동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다. 그저 상상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되었다. 머릿속으로 남은 나날을 헤아려보았다. 화친협정이 끝나고, 쿠르칸이 돌아가고.
거기까지만 가면 끝이었다. 에스티아 왕실에게 모멸적인 치욕을 선사한 뒤, 마침내 안식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마지막 순간을 상상하며 느리게 한숨을 뱉던 때였다.
“……?”
톡 하고 무언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했는데, 두세 번 연이어 들려왔다. 창문에서 나는 소리였다.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간 레아는 까무러칠 듯 놀랐다. 비명을 지르지 않도록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가, 떨면서 창문을 열었다.
“어, 어떻게…….”
너무 놀라서 말까지 더듬거렸으나, 상대방은 지극히 태평했다. 이샤칸은 황금색 눈동자를 빛내며 씩 웃었다.
그는 창문 건너편의 나뭇가지에 걸터앉아있었다. 손에는 조약돌 하나를 쥐고 공중에 던졌다 받았다, 장난까지 치면서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사태에 눈앞이 아찔했다. 삼엄한 왕궁의 경비를 뚫고 어찌 여기까지 왔는지도 의문이지만, 그보다도 발각되면 정말 큰일이었다.
오늘 정원에서 블레언에게 추궁 당했던 것처럼 가벼운 수준으로 끝나진 않을 터였다.
막막하다 못해 아득해져오는 상황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두커니 서있는 사이, 이샤칸은 제멋대로 뛰어들었다.
거구의 덩치와 달리 발코니 난간 위에 착지하는 몸놀림은 가볍고 날렵했다. 레아는 파드득 놀라며 숨죽여 소리쳤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왕녀궁이잖아.”
알면서 어찌 그러냐고 발을 동동 굴렀지만, 이샤칸은 레아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전전긍긍하며 뒤쫓아 온 레아를 내버려두고, 그는 느긋하게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기까지 했다. 그런 다음 레아를 돌아보며 슬쩍 웃었다.
“잠옷이 귀엽군. 그걸 입고 자는 건가?”
뒤늦게 편한 침의 차림이었음을 깨달은 레아는 황급히 근처에 놓인 담요를 끌어당겼다.
보호막을 두르듯 서둘러 어깨 위에 덮으며 빠르게 말했다.
“어찌하여 이러시는 것입니까. 이건, 지금……!”
너무 놀란 탓인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엉킨 실타래처럼 잔뜩 꼬여있었다.
얼굴에 열까지 오르는 것 같았다. 엉켜버린 말을 가다듬으려 애쓰는데, 이샤칸이 불쑥 말했다.
“궁금한 것이 있어 왔는데.”
당장 나가라고, 정식으로 알현 신청을 하여 만나러 오거나 내일 연회장에서 대화를 청하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뒤이은 질문에 레아는 하려던 말을 모두 잊어버렸다.
“왜 내게 도와 달라 하지 않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