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13
-13-
속삭임에 담긴 뜻이 은근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레아는 입 안의 대추야자를 씹었다.
말린 대추야자는 에스티아에선 먹지 않는 음식이었다. 레아도 쿠르칸 출신의 노예들에게 한 번 받아다 먹어본 게 고작이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인지라 당연히 맛은 기억나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달콤함이 감각을 가득 채웠다. 과육을 말끔히 먹어치운 레아는 무심결에 입맛을 다셨다. 일말의 아쉬움이 혀끝에 맴돌았다.
이샤칸은 레아가 먹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가 또다시 입을 헤집기 전에, 고개를 돌려 손바닥에 씨앗을 조심스럽게 뱉어냈다.
하지만 어찌 처리할지가 문제였다.
잠시 머뭇거리는 찰나 손이 뻗어왔다. 이샤칸은 타액 묻은 씨앗을 서슴없이 움켜쥐고서 정원 수풀 사이로 휙 던져버렸다.
레아로서는 상상도 못할 행위였다. 눈을 크게 뜨자 그가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씨앗이니 흙으로 돌려보내야지.”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레아는 달싹이던 입술을 다물었다. 그에게 무어라 하는 대신, 조용히 분수대로 다가가 손을 씻었다.
끈끈하게 달라붙은 찌꺼기를 씻어내며 흘긋 이샤칸을 살폈다.
이국의 사내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가 하는 짓은 레아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가지런히 정렬된 일상을 뒤흔들고 어지럽혔다.
뒤늦게 후회가 들었다. 내일 있을 연회는 세르디나가 직접 찾아와 준비과정을 지켜볼 터였다.
그녀의 앞에서 허리를 잔뜩 조이는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데, 이런 걸 덥석 받아먹다니 큰 실수였다. 배가 튀어나오진 않았을지 벌써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후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혓바닥이 아릴 정도로 달달한 대추야자를 물리도록 실컷 먹어치우고 싶었다.
양껏 먹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과거를 더듬던 레아는 흠칫 정신을 차렸다. 이샤칸이 손에 무언가를 쥐여 준 것이다.
천천히 시선을 내리니 말린 대추야자가 들어있는 상자가 보였다. 상자 안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대추야자를 바라보던 레아는 눈을 깜빡였다.
겉모습만 봐서는 피 뚝뚝 흐르는 고기만 뜯어먹을 듯 생긴 남자였다. 그런데 이런 것을 들고 다니다니 의외로웠다.
“쿠르칸은 달콤한 것이 악귀를 쫓아낸다고 믿거든. 내가 단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선물이니 가져가.”
가벼이 덧붙이는 설명을 듣고 있던 레아는 열려있는 상자를 굳게 닫았다. 먹음직스러운 대추야자는 나무뚜껑 아래로 사라졌다.
상자를 그에게 다시 내밀었다. 단호한 거절이었으나, 이샤칸은 상자를 받아드는 대신 한가로이 대꾸했다.
“독은 안 들어있어.”
“그런 뜻이 아닙니다. 받을 수 없으니 가져가세요.”
“왜?”
“절식을 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이샤칸의 눈동자가 빛났다.
“무엇을 위해서?”
“…….”
“최소한 널 위한 일은 아닌 것 같군.”
곤란한 대화에 빠져드는 대신, 레아는 화제를 돌렸다.
“이샤칸 님께서는 무엇을 위해 에스티아 왕궁을 찾아오셨습니까? 정말 제게 원하시는 것이 없으신가요.”
“당연히 있지.”
이샤칸은 상자 쪽을 까닥 고갯짓했다.
“다 먹어. 네 약점을 틀어쥔 사람의 명령이야.”
손가락으로 대추야자 상자의 모서리를 문질렀다. 기름을 먹여 마감한 나뭇결은 거스러미 하나 걸리는 것 없이 매끄러웠다.
“또 먹여줄까.”
슬며시 웃으며 하는 소리에 레아는 얼굴을 굳혔다. 더 이상 그에게 휘둘릴 수 없었다. 상자를 쥔 손끝에 힘을 주며 냉정한 목소리를 꺼냈다.
“그날 밤은 없었던 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왕녀로 대하실 때는 더 이상 무례한 짓도 저지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무례한 짓이라면?”
“몸에 손을 대는 일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봐. 못 배운 야만족이라 잘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갑자기 팔을 움켜쥐거나, 아까……. 입에 손가락을 넣은 것처럼…….”
이샤칸은 소리 내서 웃었다. 분수대에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햇빛에 부서지듯, 그의 웃음소리도 시원하게 퍼져나갔다.
그가 눈매를 가느스름히 접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넣어주는 거 좋아하잖아.”
날것의 화법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레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여태껏 보고 겪어왔던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남자였다.
겪어본 적 없는 상대에게 자꾸만 말려들고 있었다.
힘주어 눈을 치뜨며 날래게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순간, 인기척이 들려왔다. 정원의 석판길에 구두굽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
놀라서 고개를 돌린 레아는 하마터면 상자를 떨어트릴 뻔했다. 그곳에는 자신과 똑같은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었다.
레아의 이복동생인 블레언이었다.
은빛 머리카락과 새파란 눈동자를 가진 블레언은 아름답지만 차갑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따금 저를 샅샅이 훑어볼 때면, 레아는 그의 눈빛에 섬뜩함을 느끼곤 했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뚫어져라 쳐다보던 블레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레아가 손에 들고 있는 작은 나무상자를 확인한 후, 느릿하게 이샤칸을 보았다.
별로 당황한 기색도 없이 상황을 관망하던 이샤칸은 느긋하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왕태자 저하.”
먼저 아는 체를 하니, 블레언도 그제야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의례적으로 주고받는 인사말은 건조하고 버석했다.
그마저도 사라진 후에는 다시금 침묵이었다.
묘한 분위기가 세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분수대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이 졸졸거리며 고요를 부숴낼 뿐이었다.
숨 막히는 침묵 끝에 블레언이 입을 열었다.
“쿠르칸의 왕께서 이곳에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샤칸은 여유롭게 받아쳤다.
“내가 오면 아니 될 곳입니까?”
“……쿠르칸의 풍습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으나.”
블레언이 이를 갈며 말했다.
“에스티아에서는 미혼의 여인이 사내와 단둘이 있는 것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말을 던지듯 내뱉고서, 블레언은 레아를 휙 돌아보았다.
“누님.”
그의 호칭에 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블레언은 이복동생이지만, 레아에게 제대로 예의를 갖춰 대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레아가 왕태자인 블레언을 공손히 받들도록 호되게 교육받아왔다.
블레언은 제멋대로 레아의 이름을 부르다가, 제 마음이 내킬 때면 누님이라 부르곤 했다.
지금은 그나마 쿠르칸의 왕이 있어서 격식을 차리는 모양이었다. 왕실 내부가 개판이라는 사실을 들켜서 좋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할 이야기가 있어 찾아왔는데. 조용한 곳으로 가지.”
화를 꾹꾹 눌러 참는 목소리였다. 끌려가면 한바탕하겠구나 싶었다. 레아는 조용히 대답했다.
“……예, 저하.”
답을 내놓기가 무섭게 손목이 낚아채였다. 사정없이 당기는 힘이 거칠었다.
석판의 돌부리에 발이 걸려 몸이 크게 휘청거렸지만 블레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픔을 삼키며 끌려가던 레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레아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이샤칸은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도와줄까?
대답을 기다리는 황금색 눈동자가 선명했다. 레아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저 남자는 왜 자꾸 저리 곤란한 질문만 던지는 것일까.
싫었다. 블레언에게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싫다고 답하고, 그래서 이샤칸이 자신을 구해주길 원했다.
허나 그런 순진한 생각을 따르기엔 어른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저자는 에스티아를 집어삼키러 온 쿠르칸의 왕이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정치적으로 계산된 짓일 터였다.
당장 무슨 속내인지는 모르겠지만, 얽히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레아는 속으로 생각을 삼키며 짧게 고개를 내저었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끝끝내 외면했다.
그리고 그대로 블레언에게 끌려갔다.
눈이 닿지 않는 정원의 안쪽에 들어서자마자, 거칠게 몸이 밀어붙여졌다. 얇은 드레스가 거친 나무껍질에 쓸려 뜯어졌다.
나무에 짓눌린 레아가 숨을 들이마시기 무섭게, 커다란 손이 머리채를 붙잡았다.
곱게 정돈된 머리가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강한 힘에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뭐 하고 있었어.”
목이 꺾일 것만 같았다. 고통을 견뎌내느라 정신없는 레아에게 블레언이 재차 물었다.
“그 새끼랑 뭐 하고 있었냐고.”
푸른 눈동자가 광기를 품고 번들거렸다. 손이 아프게 몸을 더듬어왔다.
어깨와 가슴, 허리를 함부로 만지다가 드레스자락까지 들추려 했다.
간신히 힘을 짜내어 손을 쳐냈다. 손등을 얻어맞은 블레언이 거칠게 내팽개치듯 머리채를 놓았다.
레아는 악에 받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쿠르칸들 앞에서 엉덩이 흔들지 마.”
레아를 내려다보며, 블레언은 싸늘하게 경고했다.
“알겠어, 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