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99
-99-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당황한 레아는 눈을 크게 떴다. 블레언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왕께서 직접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덕분에 더욱 성대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밤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쿠르칸들의 기세가 흉흉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 반해 블레언은 더욱 즐거워하고 있었다.
레아는 쿠르칸의 왕을 바라보았다. 이샤칸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고요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정말 몰랐습니까? 내가 당연히 찾아올 것을 알고 있으셨을 텐데.”
블레언이 레아의 허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생각보다 늦으시기에 오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샤칸은 잠시 흘긋 시선을 줬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에스티아에서는 도둑질한 자의 양손을 자른다 들었습니다.”
그가 블레언을 내려다보며 질문했다.
“허면 남의 아내를 탐한 자는 어찌 처리합니까?”
“글쎄요. 탐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블레언은 비뚜름하게 웃었다.
“저는 처음부터 제 아내뿐이었던지라.”
블레언의 답에 이샤칸 또한 피식 따라 웃었다.
“나도 그렇습니다. 쿠르칸은…….”
금색 눈동자가 레아에게 향했다. 블레언에게 끌어안긴 채 인형처럼 서있는 레아를 바라보며 그가 속삭였다.
“반려가 정해지면 평생 그 하나만을 쫓으니.”
레아는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샤칸은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며 대화를 매듭지었다.
“베풀어주신 연회는 만끽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먼저 발길을 돌렸다.
쿠르칸들은 왕을 따라 소리 없이 움직였고, 이내 연회장 쪽으로 사라졌다. 블레언이 욕설을 중얼거렸다.
“건방진 새끼.”
레아는 못 들은 척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고개가 강제로 들어 올려졌다.
블레언이 레아의 턱을 움켜쥐고서 눈을 들여다보았다.
“…….”
그는 무언가를 확인하듯 한참 동안 레아를 보다가 놓아주었다.
“들어가자.”
모든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블레언에게 물어봤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것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쿠르칸의 왕과 직접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레아는 궁금증을 눌러놓고 블레언을 뒤따랐다.
연회장의 문이 열리는 순간 레아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바깥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답답한 공기와 함께 온갖 냄새들이 확 밀려들었다.
화장품과 음식, 술 냄새가 어지럽게 뒤섞인 공기에 곧장 속이 울렁거렸다.
근래 먹은 것도 없는데 코르셋까지 꽉 조여 놓은지라,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심호흡했다. 잠시만 참았다가 바로 휴게실에 갈 생각이었다.
레아는 블레언과 함께 쏟아지는 인사를 받았다.
에스티아의 귀족들은 그림처럼 웃으며 레아와 블레언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칭찬했다.
인사를 나눈 후에는 블레언이 잠시 외국의 사절단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떨어졌다.
레아도 함께 가고 싶었지만, 블레언이 허락해주지 않았다.
홀로 남은 레아는 귀부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사절단들을 살폈다.
에스티아 귀족들과 달리, 외국에서 온 사절단들은 전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애를 쓰는 듯했다.
특히 레아를 흘금흘금 살폈는데,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황망히 시선을 돌렸다.
즐겁고 경쾌한 분위기의 연회장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어색하게 굴어대는 사절단의 모습에 레아는 미간을 좁혔다.
예전 같으면 사소하다 치부하며 넘어갔을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유난히 거슬리게 느껴졌다.
아까 쿠르칸들과 나눴던 대화부터 지금 연회장까지. 꺼끌꺼끌한 이질감과 함께 ‘왜’라는 단어가 자꾸만 떠올랐다.
꼭 자신만 모르는 인형극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레아.”
그때 상냥한 목소리가 레아를 불렀다. 세르디나였다.
그녀는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레아와 가볍게 포옹했다.
“예쁘구나. 요즘 살이 빠져서 드레스가 더 잘 어울려.”
칭찬을 건넨 세르디나가 살풋 눈웃음을 그렸다.
“약차는 챙겨 먹고 있니?”
공교롭게도 먹는 족족 전부 게워내는 형편이었고, 당연히 세르디나가 준 약차도 함께 왕녀궁 정원의 거름이 되는 중이었다. 하지만 레아는 작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네. 왕녀궁의 시녀들이 잘 챙겨주고 있어요.”
“귀한 것이란다. 네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여서 어렵게 구했으니, 꼭 챙겨 먹도록 하렴.”
주변의 귀부인들이 세르디나의 자상함과 세심함을 입 모아 칭송했다.
레아는 그녀들과 함께 세르디나에게 감사하다고 답했다.
“연회를 즐기렴. 나는 먼 길을 오신 손님들과 대화를 나눠봐야겠구나.”
그녀가 사절단들을 하나씩 살피며 짙게 미소 지었다.
“오늘부터 부지런히 움직여놓아야 결혼식날에 성대한 축제를 벌이지 않겠니?”
세르디나는 그리 말하곤 훌쩍 가버렸다. 그녀는 블레언과 함께 타국의 사절단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난 돌처럼 어색하게 굴던 사절단들은 세르디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표정이 자연스러워졌다.
쿠르칸의 사절단을 제외하고 말이다.
쿠르칸들은 연회장에서 뚝 떨어진 섬과 같았다.
연회를 즐기러 왔다기에는 살기등등한 얼굴을 하고 있어, 다른 이들도 쉽게 다가가질 못했다.
세르디나 또한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았다.
레아는 애써 쿠르칸들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블레언이 쿠르칸을 싫어하는 듯했으니, 쳐다보는 것을 들키면 좋지 않을 터였다.
블레언은 질투심이 무척 많은 편이었다.
레아가 다른 남자와 말 섞는 일조차 싫어하는데, 쿠르칸들을 쳐다보다 걸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또다시 미라옐 부인과 성교하는 침실에 밀어 넣어지고 싶진 않았다.
참석한 귀족들과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눴다 싶을 즈음, 레아는 살며시 블레언에게 걸어갔다.
휴게실에 가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블레언은 남쪽 나라에서 온 사절단들과 소리 내어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술에 취했는지 얼굴이 조금 붉어진 그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전하.”
“아, 내 부인께서 오셨군.”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으니 부인은 아니지만, 레아는 그냥 장단에 맞춰주었다.
블레언은 사절단 앞에서 레아를 소개하고선,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레아는 몸을 조금 움츠렸다.
남들 앞에서 이런 짓은 안 했으면 좋겠는데…….
아까 쿠르칸들 앞에서 뺨에 입을 맞췄을 때도 너무 싫었다.
하지만 레아가 싫다고 해서 안 할 사람도 아닌지라, 그냥 얌전히 감내했다.
그를 사랑하니까 이런 건 참아야 했다.
블레언은 레아에게 한참 지분거렸다. 양껏 치대도록 내버려뒀다가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잠깐 휴게실에 있다가 올게요.”
“다녀와.”
블레언의 허락을 얻은 레아는 서둘러 연회장을 벗어났다.
아까부터 참고 있던 구토감이 블레언과 붙어있으면서 더욱 심해졌다.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멜리사 백작부인이 레아의 뒤를 따라 함께 왕녀의 휴게실로 향했다.
근래에는 왕녀궁 시녀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져서, 공적인 일이 아니면 최대한 시녀장인 백작부인만 데리고 다녔다. 사실 그녀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을 데리고 다니는 일보다는 나았다.
옛날에는 왕녀궁 시녀들과 정말 가족처럼 지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들이 거북하게 느껴졌다.
다들 예전과 성격이 조금 달라져서 그런 것 같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도 이상했다. 여태껏 그냥 넘기기만 했던 이질감이 유난히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인지, 곰곰이 과거를 짚어보았다.
왕녀의 휴게실 앞에 다다른 레아는 멈칫 정신을 차렸다. 진즉 문을 열어줬어야 할 멜리사 백작부인이 조용했다.
뒤돌아보며 그녀를 부르던 때였다.
“부인……, 흣!”
레아는 눈을 크게 떴다.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입이 틀어 막혔다. 레아의 입을 막은 이는 쿠르칸이었다.
거대한 체구의 그녀는 냄비뚜껑 같은 손으로 레아의 입을 틀어막고서, 제가 더 당황해 사과의 말을 마구 속삭였다.
“레아 님, 노, 놀라셨습니까? 죄송합니다……!”
레아는 그녀의 뒤편을 내다보았다.
고양이처럼 날씬하게 생긴 쿠르칸 남자가 기절한 멜리사 백작부인을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그는 레아와 눈이 마주치자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더니, 슬쩍 손을 들어 인사해 보였다.
다들 미친 것 같았다. 바둥거리는 레아를 꾹 누르며, 쿠르칸 여자가 속삭였다.
“잠깐만 대화를 나눠주십시오. 잠깐이면 됩니다.”
그녀는 레아를 조심스럽게 휴게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레아는 아연히 입술을 벌렸다.
왕녀의 휴게실을 뻔뻔스럽게 점거하고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안락의자에 앉아있던 남자는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그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슬렁슬렁 다가왔다. 점차 가까워지는 거리에 심장이 마구 뛰었다.
레아는 닫힌 문에 등을 바짝 붙이고서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나를, 나를 욕보이려는 생각이라면……!”
이샤칸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답했다.
“그럴 생각이었으면 벌써 분수대 앞에서 벗겨놓고 박았겠지.”
“…….”
레아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너무 과격한 언사에 말문이 막혔다. 그가 문에 손을 짚었다.
레아는 커다란 품에 갇히듯 서있게 되었다.
문득 코끝에 향기가 스쳤다. 처음 맡아보는 향기였다. 어떤 향수를 쓰는 것인지 시원한 향내가 좋았다.
거북하던 속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몰래몰래 냄새를 맡아보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싫다면 하지 않아, 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