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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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의를 입고 작은 탁자에서 조촐하게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레아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쳤다.
음식에서 조금 멀어지니 살 것 같았다. 하지만 세르디나는 의자를 손수 끌어다 탁자 앞에 앉았다.
“식사하면서 이야기하자꾸나.”
그녀는 레아에게 반달 같은 눈웃음을 지었다.
“내가 네 식사를 방해해서야 되겠니. 가뜩이나 블레언이 난리를 부리는데.”
살이 조금이라도 빠지면 득달같이 쫓아와 내 탓을 한다며, 고개를 살랑살랑 내저었다.
레아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멜리사 백작부인에게 청했다.
“차를 내어주시겠어요?”
“네, 왕녀님.”
하는 수 없이 다시 음식 앞으로 돌아왔다. 레아는 최대한 냄새를 맡지 않으려 노력하며 식기를 집었다.
예리한 시선이 느껴졌다.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구나.”
“두통이 조금 있어서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레아는 아무렇지 않게 웃고는 음식을 입에 쑤셔 넣고, 목구멍 너머로 누르듯 삼켰다.
그리고 살짝 피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르디나는 미동 없이 그런 레아를 바라보았다. 레아는 시선 속에 갇힌 채 기계적으로 손을 놀렸다.
기억 속에서 세르디나는 항상 레아에게 친절했고 다정했다. 하지만 레아는 그녀가 무서웠다.
명확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몸에 새겨진 것처럼, 세르디나의 앞에만 서면 공포심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는 레아가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성격부터 사고방식까지, 죄다 레아와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났다.
세르디나는 블레언이 왕위에 오르며 대비의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대비 전하라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단순히 늙어 보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젊음과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덕분인지, 세르디나는 아직도 나이에 비해 상당히 젊어 보였다.
그녀는 왕궁의 젊은 기사들을 유혹해서 잠자리를 가지고, 때때로 시종시녀들까지 끼워다 난교까지 벌이곤 했다.
딱히 숨기려 들지도 않았기에, 레아 또한 알고 있는 일이었다.
이따금 블레언과의 성생활을 물어볼 정도로 개방적인 세르디나는 확실히 레아와 달랐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어려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 가끔씩,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레아는 자신을 향한 악의를 보았다.
명확한 이유가 정해지지 않은 순수한 악의였다.
세르디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레아를 빤히 보았다.
레아는 씹고 있던 음식을 조용히 삼키고 그녀에게 물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표정 없던 세르디나의 얼굴 위로 미소가 그려졌다.
“아니. 네가 먹는 모습이 예뻐서 보았단다.”
세르디나는 레아 앞에 차려진 음식들을 훑다가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건 입에 맞지 않니?”
얇게 저미듯 썰어낸 말린 햄이었다.
고기 냄새가 너무 역해서 차마 먹지 못하고 미뤄놓았는데, 그걸 딱 가리키고 있었다.
레아는 포크로 햄을 찍어다 작은 빵조각 위에 올려 먹었다. 시선이 달라붙었다.
집요한 눈은 음식을 씹고, 삼키고, 그런 후에 다음 음식을 집어먹는 것까지 전부 빼놓지 않고 확인했다.
멜리사 백작부인이 찻잔을 내려놓는데도, 세르디나는 미동조차 않고 지켜보았다.
레아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식사를 이어가자 그제야 찻잔을 들어올렸다.
세르디나는 차를 마시면서 이제 음식 대신 레아의 침실 이곳저곳을 살폈다.
세르디나의 관심이 완전히 돌려진 것을 확인한 레아는 식기를 내려놓으며 먹은 양을 확인했다.
평소 아침에 먹던 것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양이었다.
자신이 소식한다는 사실이 오늘만큼은 눈물 나게 감사했다.
멜리사 백작부인이 차를 내어주었다. 홍차를 보자마자 입 안에 신물이 올라왔다.
그러나 레아는 조용히 찻잔을 들어 홀짝였다.
세르디나는 잡다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침 댓바람부터 침실에 쫓아온 것치고는 하등 쓸모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신변잡기로 대화를 이어가던 그녀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봐야겠구나. 약차를 가져다놓았으니 하루 세 번은 마시도록 하렴.”
“그리할게요.”
세르디나가 손을 뻗어 레아의 얼굴을 감쌌다. 그녀는 가만히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힘든 일이 있거든 내게 말하고. 어떤 마음의 변화가 생긴다거나…….
본래 결혼을 앞둔 새 신부는 변덕스럽기 마련이잖니?”
손가락이 살며시 뺨 위를 쓸었다. 블레언에게 손찌검을 당한 뺨이었다.
아릿한 고통에 움찔 몸을 떨자 그녀가 생긋 웃었다.
“너는 내가 마음으로 낳은 딸이야, 레아.”
세르디나는 붉게 부어오른 뺨에 입을 맞추고 왕녀궁을 떠났다.
그녀를 떠나보낸 후에, 레아는 멜리사 백작부인에게 말했다.
“잠시 산책하고 올까요.”
백작부인과 함께 왕녀궁 후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잠깐 다녀오는 것이니 다른 시녀들은 데려가지 않고 둘만 나갔다.
후원은 볼품없는 모양새였다.
싱그럽던 꽃과 나무들은 전부 사라지고, 우중충한 회녹색 수풀과 가시나무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바짝 마른 후원을 둘러보던 레아는 손으로 팔뚝을 감싸며 멜리사 백작부인을 돌아보았다.
“아직 바람이 차네요. 담요 좀 가져다주겠어요?”
후원을 걷고 있을 테니, 담요랑 바깥의 티테이블에서 간단히 마실 차도 가져다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멜리사 백작부인은 명령받은 것을 준비하기 위해 왕녀궁으로 돌아갔다. 몸에 잘게 경련이 일었다.
그러나 레아는 산책하듯 여유로이 거닐다가, 백작부인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속으로 숫자를 셌다. 정확히 서른까지 센 후에 곧바로 수풀 사이로 뛰어들었다.
“우욱……!”
한참 동안 심한 구역질이 이어졌다.
속이 쓰릴 정도로 토해낸 뒤에, 레아는 비틀거리며 옆의 나무를 붙잡았다.
“하아, 하…….”
숨을 몰아쉬며 손수건을 꺼내 입술을 닦았다. 어떻게 구토감을 참아냈는지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어지러워서 손으로 눈 위를 덮은 채, 레아는 잠시 우두커니 서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그냥 속이 안 좋다고 말하고 식사를 물렸을 터였다.
세르디나는 종종 레아가 식탐이 있는 편이라고, 몸매 관리를 위해서는 식단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고 넌지시 말해왔다.
그런 세르디나 앞에서 아침을 거르는 모습을 보이면 그녀는 분명 좋아했을 것이다.
블레언의 어머니인 그녀에게 호감을 살 수 있는 기회이니, 레아도 굳이 마다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오늘따라 이상했다.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온통 머릿속을 꽉 채웠다.
반드시 감춰야 한다는 절박함에 필사적으로 몸 상태를 숨겼다.
내가 왜 이러는 것일까.
어젯밤 이상한 남자를 만난 뒤부터 어딘가 비틀려버린 것만 같았다. 귓가에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매끄럽던 일상 위로 균열이 일어나는 소리였다.
* * *
최근 먹은 것이 거의 없었다. 무엇을 먹어도 속에서 받지를 않았다.
다행히 얼마 전 비를 맞은 탓에 몸살을 앓아서, 그 핑계로 입맛이 없다며 식사를 거를 수 있었다.
가끔 묽은 수프를 먹기는 했으나, 그마저도 입에 맞지가 않아 몰래 게워내기 일쑤였다.
날이 갈수록 바짝 마르는 레아를 보며 블레언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가 왕녀궁의 시녀들을 죄다 내쫓으려 들어서 겨우 만류했다.
뭘 먹어도 구역질이 치미니 레아도 죽을 맛이었다. 사실 먹고 싶은 것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도저히 생각나질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 어떤 맛을 막연하게 그리워하다가, 아무 음식이나 먹고 토하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와중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블레언은 직접 나서서 도착한 사절단들을 맞이하고 대접했다.
대륙 각국에서 모여드는 사절단들이 전부 도착할 때까지 약 이 주일가량 연회가 이어질 예정이었다.
레아는 사절단들이 에스티아에 머무르는 동안 많은 외교적 성과를 이뤄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블레언은 레아가 사절단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환영연회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만들려했다.
“넌 굳이 나올 필요 없어.”
이미 준비를 다 끝냈는데 제멋대로 저러는 것이었다.
예전 같으면 얌전히 하라는 대로 했겠지만, 레아는 그를 설득했다.
“예의가 아니잖아요. 결혼식을 축하해주기 위해 찾아온 사절단인데…….”
쿠르칸 또한 사절단을 보냈는데, 특이하게도 왕이 직접 사절단과 함께 에스티아를 찾았다고 들었다.
허무맹랑한 소리를 늘어놓던 남자가 진실로 쿠르칸의 왕인지 궁금했다.
머릿속에서 위험한 호기심이라 경고를 보냈다. 그러나 레아는 확인해보고 싶었다.
“제가 얼굴을 비치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어찌 생각하겠어요.”
설득을 듣고 있던 블레언이 불쑥 손을 잡아끌었다.
네 번째 손가락에서 빛나는 결혼반지를 확인한 그가 손가락을 얽어매듯 깍지 꼈다.
“날 사랑하지, 레아?”
“사랑해요.”
그가 좋아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예쁘게 단장한 레아를 찬찬히 살피던 블레언이 낮게 중얼거렸다.
“……껍질뿐이라도 분명 내 것이지.”
블레언은 레아를 에스코트하며 말했다.
“같이 가도록 해. 보여주는 것도 괜찮을 듯하니.”
레아는 블레언과 함께 연회장으로 향했다. 밤이 내려앉았으나, 왕궁은 대낮처럼 훤하게 밝았다.
연회장의 음악소리가 바깥까지 흘러나왔다.
그러나 경쾌한 음악소리에도 왕궁의 음울한 분위기는 쉬이 걷히질 않았다.
레아와 블레언이 시종시녀들을 이끌고 등불을 밝혀놓은 긴 회랑을 지나던 때였다.
블레언이 걸음을 멈추었다.
맞은편 모퉁이에서 무리지은 이들이 돌아 나왔다.
기다란 장신과 짙은 피부, 미형의 외모를 지닌 그들은 쿠르칸이었다.
그리고 가장 앞에 자리한,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
남자가 느릿하게 발을 멈추니, 그를 따라 쿠르칸들도 전부 걸음을 멈췄다. 레아는 남자를 보았다.
남자 또한 레아를 보았다.
일전에도 생각했지만, 참으로 또렷한 눈동자였다.
빛을 박아 넣은 것처럼 광채가 맴도는 금색 눈동자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었다.
홀린 듯 바라보던 레아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시선을 느낀 탓이었다.
“…….”
남자의 뒤편에 자리한 쿠르칸들은 전부 레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들 애가 타서 어찌할 바 모르는 눈빛이었다.
레아는 문득 블레언과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졌다.
“에스티아에 빛이 내리길.”
그윽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성큼 앞으로 다가온 남자는 레아를 내려다보았다.
샛노란 눈은 오직 레아만을 보았다.
“쿠르칸의 왕, 이샤칸입니다.”
그 순간 어떤 기시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마치 과거에 이와 비슷한 순간이 있었던 것처럼.
레아가 살짝 입술을 벌리는 찰나, 블레언이 팔짱을 풀더니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레아는 휘청거리며 블레언에게 달라붙었다.
“먼 길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쿠르칸의 왕이시여.”
블레언은 레아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쪽이 제 아내 될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