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88
87화. 세 번째 관문(5)
“이 년만인가?”
정천은 대답 없이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과거를 회상하는 송백림.
“후회가 되는구나. 사문에서 함께 지낼 때부터 더 잘 챙겨주었어야 했는데……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어야 했는데……. 무엇보다.”
송백림이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꼭 알려주었어야 했는데 말이다.”
한 마디로, 정천이 위아래 모르고 날뛰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제서야 픽 웃음을 흘리는 정천.
“하하, 그럼요, 다 사형의 잘못이지요. 위아래를 똑바로 가르쳤어야지, 안 그렇소?”
“여전히 그 버릇을 못 고쳤구나.”
“그것도 가르쳐 주지 그러셨소?”
“호오, 이제 가르쳐 주려 하는데?”
“그렇소? 이야, 그거참 궁금하네.”
두 사내가 주고받는 대화.
유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중한 분위기,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검을 겨눠야 하는 두 사형제의 비극, 그리고 숨막히는 대결. 그것이 유운이 생각했던 둘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애새끼들인가?’
두 사형제의 유치한 대화를 듣고 있는 유운이 절로 부끄러워지고 있었다.
“깨달았더냐?”
유치한 대화 끝에 이어지는 송백림의 물음.
“대사형이 깨달은 만큼은요.”
그가 깨달은 만큼. 말인즉슨, 적어도 그의 경지에는 도달했다는 의미였다.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오만하구나.”
정천이 웃음 지었다.
“보통 이럴 때 사형은 사제에게 ‘오만’이라는 단어보다는 ‘자신만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마련인데 말이오.”
“우리가 보통 사형제는 아니니 말이다.”
그의 말에 정천은 장백파의 두 사형제를 떠올렸다.
‘그들이 부러웠지.’
구태와 근형. 사문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둘이 맺은 끈끈한 사형제의 우애가 얼마나 부럽던지.
“하나만 물어봅시다.”
“말해라.”
정천이 과거를 회상했다.
“서로 화(和)하여 극(極)에 이르면 무(無)의 오의(奧義)를 깨우치리라.”
사부가 떠나며 남겨놓은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무(武)가 아닌 무(無)였소. 아무리 생각해도 무(武)여야 했는데 말입니다.”
끝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가 화합해야 한다는 말은 네 귀에 들어오지 않은가 보구나?”
“당연하지 않소? 우리가 서로 화합할 깜냥이 되지 않는데 말이오.”
송백림이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이 나를 따랐다면 가능했을 일이지.”
둘째와 셋째, 그리고 여섯째와 막내 정천까지. 그를 따랐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서로 화합하라 했지, 그 어디에도 대사형을 중심으로 뭉치라는 말은 없는데 말입니다?”
정천이 허리춤에 걸려 있는 묵룡을 가리켰다.
‘사부는 묵룡도 내게 주셨는데?’
몸짓으로 말하고 있었다. 화합한다면 그 중심은 자신이라고.
“사부님도 인간이란다. 언제든 실수를 할 수 있는 법이지.”
화아아아악-!
송백림의 전신에서 가공할 살기가 퍼져 나왔다. 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유운.
“화가 많이 났나 보오?”
“이런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 말에는 정천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당하오. 큰 의미가 있을 리 없지요.”
더 이상 입씨름할 이유는 없었다.
스르릉-
묵룡의 묵빛 검신이 태양빛을 머금고 그 위용을 드러냈다.
“탐이 나는구나.”
송백림이 꺼내 드는 검. 투명하리만치 맑은 은백색의 검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백은성류검(白銀聖瀏劍)으로 만족하셔도 될 것 같은데 말이오.”
사실 묵혼혈룡검에 집착을 보여서 그렇지, 그의 검 또한 무림십대기보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진귀한 검이었다.
“만족은 발전을 미루는 법이란다.”
정천도 동의하는 바이기는 하다.
“그럼, 뺏을 수 있으면 뺏어보던가.”
정천과 송백림이 내뿜는 진기가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우우웅-
우우웅-
묵룡의 검신에 스며드는 암적빛 검강, 그리고 송백림의 백은빛 검강.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 달려드는 두 사내.
콰과과과광!
두 검이 마주한 순간, 굉음과 함께 강기(强氣)의 폭사가 일어나며 먼지구름이 사위를 덮었다.
“크윽!”
“윽!”
호신강기마저 찢어발길 듯 매섭게 불어치는 검기의 폭풍 속에서도 서로를 향해 정확히 검을 날리는 두 사내.
파바바바박-
도저히 눈으로 따를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의 쾌검을 구사하는 정천. 그리고 그 검을 교묘히 흘려내며 그의 급소를 노리는 송백림.
‘대단해……!’
유치했던 둘의 대화와는 달리, 상대를 향해 순간적으로 그 움직임을 놓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빠르고 정확한 검격을 구사하는 두 사내의 모습에 유운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둘의 차이가 갈리기 시작했다.
비릿한 미소를 짓는 송백림.
“아직도 무영신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구나.”
여전히 무영신검을 구사하는 정천과 달리, 송백림은 자신만의 검을 구사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했던가. 상대가 구사하는 검의 경로를 정확히 꿰뚫고 있는 그는 편안하게 검을 맞받아치는 반면, 정천은 점차 손이 꼬여가고 있었다.
“이제는 알 텐데 말이다. 무영신검이 아닌, 너의 검을 만들어야 한다는 걸 말이야.”
“…….”
“이러면 어떨까?”
한순간이었다.
정천이 행하는 검로 사이, 기습적으로 내지른 송백림의 백은빛 검강을 정천이 다급히 맞받아쳤다.
쿠우웅-
뒤로 주욱 밀려나는 정천의 신형.
터억.
거대한 바위를 발판 삼아 중심을 잡은 정천은 숨을 돌릴 여유도 없이 몸을 빼내야 했다.
콰아앙!
조금 전까지 정천의 뒤편에 우뚝 솟아있던 바위가 산산조각나며 부서졌다.
“너의 검이 없다면.”
공중으로 도약한 정천을 향해 맹렬히 쏘아져 들어오는 송백림.
“나를 도발한 죄를 달게 받거라.”
쿠우웅-
묵혼혈룡검과 백은성류검의 검극이 서로 맞닿아 강기의 폭발을 일으켰다.
‘계속 밀리고 있어!’
유운은 둘의 대결이 격화될수록 점차 안색이 어두워졌다. 파괴력, 속도, 대응력. 그 어느 것 하나 정천이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터억.
두 발을 지면에 딛고 마주 선 두 사내. 여유로운 얼굴의 송백림과 달리 정천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보겠느냐?”
검을 아래로 늘어트리는 송백림. 그의 주위로 맹렬한 소용돌이가 쳤다.
“이 검이 바로, 천마사대공을 파헤치고 또 파헤쳐 집대성한 파천마검(破天魔劍)이다.”
검신에 맺힌 은백색의 검강이 돌연 암흑의 강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의 주위로 몰아치는 암흑의 소용돌이.
“저건……!”
위험했다. 유운의 머릿속에서 끝없이 경종이 울려왔다. 그의 머릿속에 갈기갈기 찢긴 정천의 육신이 떠올랐다.
“보아라, 너와 나의 차이를.”
검은 잔상과 함께 정천을 향해 쏘아져 나가는 송백림. 그의 검이 내질러지는 순간, 암흑의 폭풍이 정천의 전신을 뒤덮었다. 모든 것을 바스러트릴 것처럼.
“정천……!”
울부짖는 유운.
파사사삭-
파사사삭-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폭풍의 힘이 옅어졌다.
‘어떻게 된 거지?’
유운의 시선이 송백림을 향했다. 굳은 얼굴의 송백림.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리고.
“…… 이게 끝이오?”
“……!”
점차 옅어지는 암흑의 폭풍 속에서 정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지난 과거.
“사부, 천마사대공이 강합니까? 장백무결경이 강합니까?”
어린 정천이 물었다.
“예끼, 이놈아. 그게 뭐가 중요하더냐?”
사부의 대답. 정천은 궁금했다.
“우리 사문의 천명신공과 함께 천하삼대신공이라면서요. 그러면 천명신공이 강한가요? 그 두 신공이 강한가요?”
사부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놈아. 천하삼대신공이면 뭐하느냐? 장백무결경은 해동성국이 멸망하면서 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이지 않더냐. 그것만 남아 있었어도 장백파가 백도 무림에서 가장 강력한 문파가 되었겠지. 천마사대공은 말해 뭐 하느냐? 천마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제대로 대성한 적이 없는 것을. 모르긴 몰라도, 후대에 자신보다 강한 인물이 나올 게 두려운 천마가 중요 요결들을 숨겼을 테지.”
“그래서요? 천명신공보다 강하다는 거예요? 약하다는 거예요?”
딱!
“아악!”
그의 머리에 사랑의 주먹이 꽂혔다.
“우씨, 왜 때려요!”
“맞을 만하니 맞지 않겠느냐?”
다시 개기려는 정천을 향해 친히 사랑의 주먹을 들어 올리는 사부. 정천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세 무공 모두 천하일절이라 할만하지. 우위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단다. 허나 중요한 건, 어느 경지까지 그 요결을 익히고 깨닫느냐이다. 곰에게 황금을 던져 준다 한들, 그 가치를 알아보겠느냐? 아니면 사슴에게 고깃덩이를 던져 준다 한들 그 맛을 음미하겠느냐? 그것을 익히는 이의 그릇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란다.”
곰곰이 듣던 정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장백무결경은 이 세상에 있는지도 모르고, 천마사대공은 제대로 익힐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 천명신공이 가장 강한 거 아닌가요?”
“에라이, 이놈아. 천명신공이라고 그 오의를 깨닫기가 쉬운 줄 아느냐?”
“그럼 저는요? 저는 그럴 만한 그릇이 되나요?”
따악!
“아악!”
이번엔 뒤통수였다.
“왜 때려요!”
“그건 네가 나중에 직접 경험해 보려무나, 제자야.”
* * *
대사형의 검은 강했다. 인정할 만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천마사대공을 파헤치고 또 파헤쳤다고 했소? 천마 사후 그 누구도 제대로 대성을 한 적이 없다는 그 검을?”
“뭣이?”
암흑의 폭풍이 걷히고 드러난 정천의 모습. 핏기가 가신 얼굴을 보면 전혀 피해가 없어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의 눈빛은 총명하게 빛났다.
“그 시간에 천명신공을 더 파헤쳤으면 좀 더 나았을 텐데 말이오.”
“허어, 내 사제가 이렇게 입만 산 놈이었다니. 통탄스럽구나.”
정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야 정확히 알겠소. 제자 중 최고의 재능이라는 평을 들었던 대사형이 둘째 사형에게 왜 밀렸는지.”
“이놈!”
그것은 역린(逆鱗)이었다.
“네놈이 감히 겁도 없이 입을 놀리는구나.”
“대사형은 너무 자기애에 빠져 있었소. 언제나 우위에 있었기에 앞으로도 우위에 있을 거라는 착각.”
“닥쳐라.”
그의 전신에서 살을 에일 듯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말로는 안 될 것 같으니, 보여드리겠소. 내가 천명신공을 얻으며 깨달은 검을. 몸소 느껴 보면 알겠지.”
솔직히 말해, 실망했다. 과연 대사형이 창안한 검이 어떤 검인지 궁금하기도, 막연히 두렵기도 했었는데 까놓고 보니, 별 거 없었다.
‘고작 미완의 천마사대공을 따라한 것뿐이었어.’
물론 그 스스로도 부족함을 느끼고 백도의 검을 보기 위해 천마신교에서 나온 건 알겠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무영신검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소.”
그러나 그 뿌리는 무영신검에 있다. 정확히는 천명신공에 있다. 사부도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게 아니었다. 사문의 검을 계승하여 그보다 더 강한 검을 창안해낸 것뿐.
“대사형이 한 첫 번째 실수.”
들어 올린 묵룡에 풍신의 힘이 깃들었다. 이에 맞춰 모든 공력을 검 끝에 집중하는 송백림.
“머릿속에 버릴 생각뿐이었다는 것.”
그의 실수. 사문의 검을 계승하는 게 아닌, 버리고 새로운 것을 담으려는 오만이었다.
자연검(自然劍) 일식(一式) 풍신(風神) 일격집중(一擊集中).
바람은 공기의 힘. 팽창하는 공(空)의 기(氣)를 압축하고 또 압축해, 한점으로 쏘아 보낸다.
쏴아아아-!
두 사내가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