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en Psycho's British Empire RAW novel - Chapter (215)
215_[외전] 사춘기와 사이코(5)
“이 함선에 대영제국의 여왕께서 타고 계신다!”
외침 소리가 바다를 울렸다.
바다 한가운데, 고립된 왕자는 당황했다.
‘어머니께선 어째서 위기를 자초하시는 거지?’
여왕만 잡으면 이 전쟁이 끝난다는 걸 알리는 것 아닌가.
왕자인 자신을 잡기 위해 저만한 전력이 동원되었는데,
저 병력이 이젠 전부 어머니에게 쏟아지는 것 아닌가?
“여왕이다! 놈들이 설마 제 여왕을 걸고 거짓말을 하진 못하겠지. 놈들의 여왕만 잡으면, 이 전쟁은 끝난다!”
왕자의 우려를 증명하듯, 이곳저곳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이게 마지막 희망이라며, 병사를 독려하는 지휘관의 외침이.
그러나 지휘관도, 또 해리 왕자도 간과한 것이 있었다.
모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은 한 덩어리가 아니었다.
“여왕이 이곳에 있다고?”
“저, 정말 영국의 마녀가 왔단 말인가?”
따라서 누군가에겐 ‘기회다!’라고 여겨지는 외침이,
누군가에겐 ‘위기다!’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그 마녀는 사람의 피로 목욕해 젊음을 유지한다며?”
“으으, 우리는 다 죽을 거야! 요술로 우릴 전부 죽여버릴 거야!”
일단 여왕의 이름이 들린 순간, 병사들은 즉각 겁에 질렸다.
물론 그간 사이코 여왕이 쌓아온 위업과 업적은 대단했으나, 그걸 고려해도 병사들의 반응은 유별난 면이 있었다.
‘모리스의 선전 탓이지.’
여왕은 그리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그간 그가 어떤 수작을 부리고 있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영국의 여왕은 매일 어린 아기를 잡아먹는다.] [처녀의 피로 목욕하는 게 그 이상한 젊음의 비결이다] [그 여왕은 사악한 요술로 악마에게 제물을 바치는 마녀다]모리스는 이 같은 악소문을 퍼뜨려왔다.
주변 영지가 차례차례 영국에 흡수되는 상황,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탈영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 영지라도 철저히 세뇌할 수밖에 없었다.
여왕은 그 소문에 불쾌해하기는커녕,
이 기회를 노려 소문을 유용하게 써먹은 것이다.
사악한 공포의 마녀, 그 마녀가 그들을 공격하고 있다.
순진한 병사들의 사기가 뚝 꺾여 버렸다.
물론, 이런 수작에 넘어가는 병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여왕이 지시한 다음 구호는 달랐다.
영국의 병사들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런던에서 출병한 여왕이 여기까지 도달하셨다! 북부의 적들은 희망을 버리고 항복하라!”
영국 군의 외침에, 군영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조금 전보다 더욱 규모가 크고 다급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런던에서 출발한 여왕이 어떻게 여기까지?”
“서, 설마 앞선 저지선에 있던 병사들은 다 죽은 거야?”
말단 지휘관이나 병사들은 전황을 알 수가 없었다.
누가 이기고 지는지 모른 채, 오직 눈앞만 보고 싸운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질 게 뻔한 전장에서 싸우겠는가.
하지만 그런 그들이라도 바보는 아니다.
높으신 분들의 세세한 전략은 몰라도, 큰 그림은 안다.
북쪽의 아가일 백작령과 남쪽의 영국이 이번 전쟁의 적군.
그들, 모리스 군은 남북으로 포위당한 채 양면 전쟁을 시작했다.
현재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분명히 북쪽의 전장이다.
그런데 남쪽 전장을 이끄는 영국 여왕이 이곳에 당도했다?
그러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모든 병력이 돌파당한 거야! 이미 최후의 접전이라고!”
“말도 안 돼! 그러면 우리 집은? 영국에 점령당한 건가”
“그렇게 봐야겠지. 최북단을 빼면 전부 점령된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여왕이 이곳까지 왔겠냐고!”
다들 깨닫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패배가 결정된 전장에 서 있는 것이다.
불길함과 불안함이 저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여왕이 그들의 불안을 더욱 부채질했다.
“감히 누가 여왕에게 칼을 들이대는가!”
“폐하에게 칼을 들이댄 자들의 클랜을 말살하겠다!”
스코틀랜드이기에, 이 협박은 더욱 효과 있었다.
모리스 군은 그를 따르는 여러 클랜으로 구성되어 있다.
병사들 또한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클랜 단위로 모여있다.
이미 그들 클랜이 영국에 점령당했다고 의심되는 상황.
설령 운 좋게 여왕을 사로잡아 승리하더라도, 분노한 영국군이 그들의 클랜과 가족을 전부 짓밟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나.
마녀라 불리는 영국의 여왕이, 민간인이라 해서 그들의 가족을 살려둘 것 같지도 않았다.
‘전쟁에 지면 나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몰살이라고?’
‘아니,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클랜 기가 보인 순간, 이미 끝이야!’
‘보아하니 승기가 기울어졌는데, 그런 위험까지 감수해야 해?’
‘모리스에게 그런 의리를 지켜야만 하나?’
‘상대는 악마다. 인간이 이길 수 없어!’
서서히, 전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돌연, 한 클랜의 군대가 퇴각하기 시작했다.
하나가 움직이니, 그다음은 쉬웠다.
“적을 앞두고 도망가다니, 이게 무슨 수치인가! 그러고도 스코틀랜드의 전사라고 할 수 있나!”
모리스 군이 뒤늦게 외쳐봤자, 공허한 소리일 뿐이었다.
스코틀랜드 전사들의 생업은 전통적으로 유럽을 상대로 한 용병업.
불리한 전장에서 빠르게 발을 빼는 것이야말로, 그들 스코틀랜드 전사들의 미덕이었다.
‘이건, 이것은···!’
하나둘 빠르게 흩어지는 스코틀랜드 군을 보며,
해리는 전율했다.
여왕은 지금 말 한마디로 승리를 따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했으나, 해리가 놀란 건 그게 아니었다.
‘설마 지금, 어머니는 내 전략을 따라 하고 있는 건가?’
해리가 그간 쓰던 전략은 ‘공포로 상대를 압도하기.’
뭉치면 성가신 적을 상대로, 겁을 줘서 그들의 발을 묶는다.
지면 본거지가 털린다는 위협으로 쉽사리 뭉치지 못하게 했다.
그것만으로도 제법 성과를 냈다고 생각했고,
해리 스스로는 나름 뿌듯하게 여기던 업적이었다.
그러나 여왕은 그 작전을 더욱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해리처럼 성가시고 오랜 전투를 벌이지도 않았다.
일일이 적의 본거지를 없애고, 소문을 퍼뜨리지도 않았다.
고작 말 한마디로, 훨씬 더 위협적인 협박을 해내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정체를 밝힌 것도 그래.’
해리는 왕자라는 정체가 밝혀져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여왕은 똑같이 정체를 밝히고, 이를 기회로 삼았다.
‘우연히 나와 상황이 겹쳤을 리는···, 없겠지.’
해리는 이를 악물었다.
여왕은, 어머니는 분명히 그를 의식하고 있다.
일부러 그의 앞에서 이와 같은 전략을 사용한 거다.
그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하여.
이런 위기 상황에서까지 태연히 후계 교육에 열중이다.
대체 어떻게 되먹은 배짱이란 말인가.
“어머니는, 정말 대단하구나.”
해리가 중얼거렸다.
지금껏 수없이 되뇐 말이었으나, 그 무게가 달랐다.
안락한 궁에서 선생들에게 보고 들었던 글줄이 아니라,
전장에서 체감하는 어머니의 위대함은 급이 달랐다.
‘내가 죽었다 깨난다 한들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해리 자신이 찢어진 돛배 아래 멍청히 서 있을 때.
어머니는 말 한마디로 저 거대한 군대를 제압했다.
‘나는, 절대로 저렇게 할 수 없을 텐데···.’
위대한 왕 앞의 부족한 아들.
어머니의 오점과도 같은 자식.
‘내가 이토록 작았었던가.’
해리는 비참히 서서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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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접전의 승자는 말하기도 입이 아팠다.
스코틀랜드군은 어렵지않게 퇴각했고,
여왕은 모리스를 생포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직접 지휘하지도 않고, 전장에 숨어있었다.
여왕은 일반 병사로 분장해 도망치려는 그를 사로잡았다.
“한심하기도 하지.”
여왕이 혀를 차며 말했다.
“적어도 스튜어트는 어린데다가 반평생을 프랑스에서 철없는 공주로 양육되기라도 했지, 그대는 장성한 남자인데 무슨 핑계를 댈 건가? 아, 혹시 그대도 스코틀랜드의 공주가 되려 든 건가?”
치마 같은 형태의 킬트를 입은 모리스가 볼을 붉혔다.
그 꼴을 보자니 불쾌하여 더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모리스는 처음부터 왕이 될 재목이 아니었어.’
여왕이 차갑게 돌아서며 명령했다.
“사형.”
모리스는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이제 스코틀랜드의 병사들은 항복했고,
적의 수괴는 죽었다.
그 모든 일이 마무리된 다음에야,
여왕은 병사들에게 명해 메리 호를 인양해왔다.
머지않아, 여왕은 고개를 푹 숙인 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따라오너라.”
여왕은 한마디만 남긴 채,
왕자를 끌고 임시로 설치한 막사로 향했다.
전전긍긍하며 왕자를 따라가려던 드레이크는,
뒤따라온 삼촌에게 귀를 잡혀 끌려갔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것 같구나.”
막사 안으로 들어온 뒤, 여왕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이 꼼꼼하게 아들의 몸과 걷는 모양을 살핀 뒤였다.
걱정은 해소되었으니, 이제부턴 제대로 혼이 날 차례였다.
“하나 묻지. 내가 왜 여기 있는지는 알겠나?”
어머니가 아닌 여왕의 말투로, 여왕은 말했다.
주변 사람을 모두 물린 상태인데도 이런 말투라니.
해리의 경험상, 지금 어머니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다.
“···죄송하지만, 모르겠습니다.”
해리가 여왕의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자신을 구출하러 왔다는 걸 모르겠다는 게 아니다.
여왕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하나뿐인 영국의 후계자를 구출하기 위해, 즉각 군을 이끌고 북부를 향해 달렸지. 다행히도, 제대로 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어.”
여왕은 분명 미끼 노릇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여왕과 마주친 군은, 항복하기 바빴다.
‘어차피 승리가 확정된 전투였으니, 이상한 것도 없지.’
바꿔말하면, 고작 그 정도 전투에 아들을 잃을 뻔한 것이다.
친정할 가치도 없는 전장에서 말이다.
여왕은 애써 화를 누르며 말했다.
“이곳에 도착하기 직전, 녹스가 이끌던 신교도 군대마저 항복했다. 그들이 말하길, 녹스는 자결했다더군.”
프랑스의 지원이 끊긴 이후, 원흉으로 지목된 신교도들은 모리스 군 내부에서도 고립되고 박해당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군까지 쳐들어오다니.
존 녹스는 모든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했다고 한다.
“여왕과 원한이 있는 내가 죽음으로 죄를 빌 테니, 너희들은 영국에 항복해 종교적 자유를 쟁취하라 했다더군. 절망이라면 영웅적인 순교이겠지. 정말이라면 말이야.”
여왕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확실히 그건 존 녹스가 할법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존 녹스가 할법한 일은 아니었다.
‘말로는 순교를 외쳐도, 속으론 제 목숨을 아끼던 자였으니까.’
과연 존 녹스는 마지막 순간,
오랫동안 이어온 번뇌를 끊고 숭고한 자결을 택했을까.
아니면, 자결 당했을까.
일순 궁금했지만, 어차피 상대는 죽었으니 중요하진 않았다.
여왕은 그보다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 이번 전투를 끝으로 스코틀랜드는 통일되었다고 볼 수 있겠구나. 자, 왕자. 그대는 지금 어떤 기분을 느끼는가.”
여왕은 그리 이죽거리면서 양손을 펼쳐 들었다.
마치 언젠가 의회에서 왕자의 모습을 흉내 내듯이.
“브리튼을 통일하는 그 영광스러운 순간에 그대 또한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 그대는 나와 함께 이 자리에 서 있지. 그래서, 어떤 기분이 드나?”
한참의 침묵 끝에, 해리가 간신히 대답했다.
“···참담합니다.”
그건 여왕이 예상했던 대답은 아니었다.
‘끽해야 죄송합니다. 정도일 줄 알았는데.’
해리가 이어 말했다.
“함부로 나서서 죄송합니다. 제 주제를 모르고 지나치게 날뛰어,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국가에 치명적인 위협을 초래하기까지 했지요. 전부 제 잘못입니다.”
여왕은 해리를 지그시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마음 같아선 정말이지, 등짝이라도 세게 후려쳐주려고 했다.
그런데 이토록 기죽은 반응이라니.
‘이래서야 제대로 혼낼 수도 없잖아.’
그렇게 의욕을 보이더니, 한 번의 실수로 저렇게 기가 죽다니.
정말이지, 사춘기 아들을 다루는 건 너무나도 까다로웠다.
여왕에게 육아는 스코틀랜드 정복보다 더 어려웠다.
잠깐의 고민 끝에, 여왕이 입을 열었다.
“뭘 잘못했는지는 잘 아는 것 같네.”
여전히 차갑지만, 조금 전처럼 딱딱하지는 않은 말투.
“너는 섣불리 나섰고, 네 능력을 너무 과신했어.”
해리는 뭐라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하면 죽을뻔했지. 간담이 서늘했어. 내가 늦었으면 어쩔 뻔했니? 전장은 네 전략을 자랑하는 쇼 같은 게 아니야. 까딱하면 죽는다고.”
여전히 해리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여왕은 아들의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아들의 굽힌 어깨를 더 보아주지 못하겠다는 듯이.
“주변의 의견에 귀를 잘 기울인 것 같더구나. 전략도 나름 괜찮았고, 아가일 백작도 네 칭찬을 하더구나.”
왕자는 분명히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병사들의 목숨을 가볍게 생각하지도 않았지. 네가 마지막까지 병사들을 구하려 노력한 건 알고 있어.”
과신으로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날 계획을 짜낸 것은 칭찬하고 싶구나.”
하지만 그런데도, 종합적으로 총평하자면.
“처음치고는 정말 잘했어. 고생했구나.”
어머니의 따뜻한 말에, 해리는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어머니였기에, 응석을 부리게 되었다.
“엉망이었어요.”
“내가 네 나이 때는 그보다 엉망이었어.”
“설령 그렇더라도, 저는 죽었다 깨나도 어머니처럼은 할 수 없을 거예요.”
“글쎄, 꼭 나처럼 할 필요는 없잖니.”
왕이 굳이 전장에 설 필요는 없다.
해리는 해리 나름의 장점이 있다.
“이곳에 오며 네 평판을 들었을 때, 나쁜 이야기라고는 없더구나. 주변 귀족들도, 병사들도, 너를 존경했어. 그렇게 존경을 사는 건,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란다.”
사이코 여왕이기에 장점도 있었으나, 단점도 있었다.
그러니 여왕은 아들이 사이코 왕이 되는 걸 바라진 않았다.
“너는 너다운 왕이 되거라. 평화로운 시대엔 네가 나보다 더 좋은 왕이 될 거야.”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이 내가 보장하마.”
해리는 그 말에 간신히 안정을 되찾았다.
여왕을 마주 보고, 웃음 지을 수 있었다.
“예. 어머니.”
여왕은 자신감을 되찾은 아들을 신중히 살폈다.
그리곤, 그가 완전히 침울함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그건 그거고, 혼날 건 혼나야지.”
비로소 매를 들었다.
아들의 등짝에 어머니의 스매싱이 작렬했다.
“요놈 시키! 요놈 시키! 그렇게 사람을 걱정시켜?”
“아, 어머니!”
“너 진짜 엄마가 왜 사이코인지 한번 보고 싶니? 엄마 뚜껑 열리게 할래? 응?”
아무도 보지 못할 막사 안에서,
사이코 여왕의 한국식 처벌이 이루어졌다.
한참의 매타작 뒤에, 여왕이 속 시원하다는 듯 말했다.
“너, 이걸로 끝날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
한국식 처벌은 한국식 처벌이고,
공식적인 처벌은 따로다.
불공평하다고? 여왕 마음이다.
“한동안 런던의 안락한 궁전에서 생활할 생각은 버리거라.”
“예?”
“앞으로 한동안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성에서, 스코틀랜드와 영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거라. 외교 업무라고 할 수 있겠지.”
해리는 당황했다.
듣고 보니, 그리 나쁘지 않은 일 아닌가.
이게 처벌이라고?
의아해하는 그에게, 여왕이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에든버러에서 벗어날 생각은 꿈도 꾸지 말거라. 브리튼의 통합이 시작되었으니, 아주 온종일 업무에 시달릴 테니까. 스코틀랜드 클랜의 영주들 얼굴도 전부 외우고, 전쟁 뒤처리 서류 작업을 하려면 아마 하루가 모자랄 것이다. 너를 에스파냐의 서류 왕처럼 만들어주마.”
에스파냐의 펠리페를 말하는 건가?
영국과 전쟁 이전에도 하루 5시간씩 자며 서류 작업을 하다가,
전쟁 이후 서류 마비 사건 이후에는 하루 4시간도 못 잔다는 그 서류 왕?
날 그렇게 만들겠다고? 해리의 안색이 시꺼멓게 변했다.
‘비, 빈말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려는데, 여왕의 음산한 혼잣말이 들려왔다.
“공부를 안 시키니까 애가 딴생각하지. 아주 한국의 수험생 기분을 느끼게 해주마.”
무슨 뜻인진 몰라도, 어머니는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해리는 모든 희망을 버린 채,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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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마침내 스코틀랜드는 통일되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어쨌건 통일은 통일.
형식상 스튜어트가 통치하지만,
실제로는 영국 여왕이 통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후일에는 해리가 모든 걸 물려받으리라.
“그래서, 해리는 아직 모릅니까? 이 ‘벌’이 그가 스코틀랜드를 물려받기 위한 준비단계라는 것을.”
페르디난트의 말에, 여왕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알면 벌의 의미가 줄어들잖아.”
“하긴, 그도 그렇군요.”
해리의 엉망진창 활약은 여왕의 분노를 샀지만,
동시에 스코틀랜드 내에서 그의 명성을 올려주었다.
무대포적인 그의 행동은 오히려 성정이 거친 스코틀랜드의 정서상 호감을 사기도 했다.
“내가 북부에 집중시켰던 모든 오욕은 모리스와 존 녹스가 뒤집어쓰고 가 주었어. 잦은 클랜 간의 갈등으로 ‘스코틀랜드’라는 개념도 희미해졌지. 이제 해리가 하기에 따라, 스코틀랜드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의 브리튼으로 통합될 것이야.”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 얼마나 마음을 썼는지, 원.”
페르디난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역시, 아들을 걱정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해리에게 업무를 더 보내지요.”
페르디난트가 말했다.
해리가 알면 배신감을 느끼겠지만,
사실 이번 처벌은 페르디난트가 제의한 일이었다.
“바쁘면 딴생각할 일도 없지 않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그 막무가내 성격을 좀 고치게 일로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으음, 너무 심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반성하고 있는 것 같던데.”
마음이 약해진 듯한 여왕의 발언에,
페르디난트가 단호히 말했다.
“필요합니다. 제가 보니, 그 성격이 여간해서는 고쳐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혹시 해리도 당신처럼···.”
중간에 말끝을 흐렸으나, 뜻은 분명히 전해졌다.
“지금 설마, 해리가 날 닮아서 그렇다는 거야?”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방금 그랬잖아!”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사실 해리가 당신을 닮아서 좀 과격한 면이 있는 건 사실이지요.”
“아니, 날 닮아서 그렇기는? 언제는 해리가 예술에 재능이 있는 건 당신 닮아서 그렇다고 했으면서?”
“예술성은 날 닮고, 막무가내 성격은 폐하를 닮았지요.”
부부싸움이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오래가진 않았지만 말이다.
“에잇!”
명분상 밀리는 여왕이 전술적 행동에 나섰다.
페르디난트의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페르디난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버렸다.
“정말이지, 아내와 아이 때문에 늙습니다, 늙어.”
둘은 킥킥대며 장난을 쳤다.
아이가 이렇게 컸어도, 둘은 아직 신혼이었다.
“더 늙기 전에 해리에게 일을 맡겨두고 싶군요. 그리곤 함께 여행을 다니면 좋겠습니다.”
페르디난트의 말에, 여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네. 어디로 갈까?”
“글쎄, 동양은 어떨까요? 당신의 고향이 있다는 곳 말입니다.”
그런 미래를 생각해보면, 정말 좋았다.
여왕이 밝게 웃음을 지었다.
“그러려면, 아들을 확실히 키워야겠습니다.”
페르디난트의 은근한 말에, 여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렇긴 하네.”
결국 부부싸움의 승자는,
은근한 회유에 강한 페르디난트였다.
에스파냐도, 스코틀랜드의 모리스도 이루지 못한 위업이었다.
그리고 런던에서 부부가 깨를 볶으니,
에든버러에 있는 해리에게 영문 모를 업무가 쏟아졌다.
다 자신의 업보이니, 누구를 원망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