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69)
18장
***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카르한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바라보자, 블레어드는 조금 놀란 듯했다. 좀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태도였다. 지금의 카르한은 블레어드만 보면 고개를 수그리던 어린 짐승이 아니었다. 블레어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평소와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저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다만.”
카르한을 훑던 블레어드가 도리어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질책하기 시작했다.
“카르한, 너야말로 무슨 예의인지 모르겠구나. 여긴 집이 아니다.”
“…….”
“대화 중에 난입하다니, 무례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카르한이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 쥐었다. 역시 블레어드와 정면으로 싸워서는 이길 수 없었다. 항상 말려드는 것은 카르한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먼저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깨지더라도 부딪쳐보고 싶었다. 그때 카르한의 등 뒤에 서 있던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기분 나쁠 만하지요.”
일리아가 카르한의 옆에 나란히 섰다. 서늘한 시선이 블레어드에게 닿았다. 일리아의 얼굴에선 미소 한 자락도 볼 수 없었다.
“연인이 다른 남자랑 있는데, 좋아할 사람이 있나요?”
일리아는 카르한의 팔에 손을 얹었다. 블레어드에게 시선을 고정한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는 아까 말씀만 듣고 두 분 사이가 좋은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뒷말은 굳이 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들려왔다. 여기서 일리아가 나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블레어드는 잠시 말이 없었다.
빠르게 서로를 탐색하는 눈빛이 오갔다. 두 사람은 창과 방패였다. 일리아는 상대의 표정을 잘 파악했지만, 블레어드는 표정을 숨기는 것에 능했다. 이내 블레어드가 눈을 내리깐 채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영애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블레어드는 오히려 깔끔하게 사과해왔다. 지적하면 바로 발끈하던 다른 놈들과는 달랐다. 확실히 만만치 않은 놈이라고, 일리아는 생각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카르한 너도, 집에서 보자꾸나.”
눈도장 찍은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블레어드는 미련 없이 먼저 발걸음을 돌렸다. 뒷모습을 바라보던 일리아는 분석을 끝냈다.
‘여우 같은 놈.’
블레어드 때문에 피 터지게 당했을 카르한이 뻔히 보였다. 카르한의 자존감이 낮아진 것도 저놈 탓이 컸으리라. 상상만으로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일리아는 겨우 화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뒤늦게 이곳에 찾아오게 된 목적을 상기했다. 일리아가 고개를 홱 돌려 카르한을 쳐다보았다.
“…….”
분명 하고 싶은 말은 참 많았다. 그러나 카르한의 얼굴을 보니 말이 쏙 들어가 버렸다.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안색이 무척 나빠 보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일리아가 카르한의 팔에 얹은 손을 거두고 먼저 걸음을 뗐다. 카르한은 안절부절못하다가 뒤따랐다. 여관 안으로 들어가서 계단을 오르는 동안 기분이 더더욱 나빠졌다.
아까는 블레어드 때문에 분노가 끓어올랐는데, 이젠 속상함이 밀려왔다. 지금껏 카르한이 어떻게 당해왔을지 보여서…….
“어느 방이에요?”
꼭대기 층에 도착한 일리아가 묻자 카르한이 앞으로 나서서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일리아가 먼저 방으로 들어가고, 뒤이어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찾아온 건 미안해요.”
먼저 사과부터 한 일리아는 무슨 말을 꺼낼지 고민하다가 일단 블레어드에 대한 것부터 묻기로 했다.
“그런데 장남은 외국에 가있다 하지 않았어요?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거라.”
머뭇거리던 카르한이 말을 덧붙였다.
“이전부터 감시인이 붙었는데, 이번에 급하게 나오느라 따돌리질 못했습니다.”
아마 감시인이 블레어드한테 이야기해줘서 찾아온 것 같다고 그가 중얼거렸다. 일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블레어드가 완전히 돌아온 거라면……, 상황이 나빴다. 카르한의 말로는 적어도 내년쯤에 귀국할 거라 했기 때문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카르한도 블레어드가 어쩌다 돌아온 것인지 모르는 눈치여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카르한은 마치 죄 지은 사람처럼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가슴이 쓰라렸다.
“왜 눈치 봐요. 당신 잘못한 거 없잖아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푸른색 눈동자는 흙탕물이 떨어진 것처럼 탁했다. 일리아는 팔을 뻗어 카르한의 손을 잡았다.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곳으로 이끌어 카르한을 자리에 앉혔다. 일리아는 맞은편에 앉는 대신 바로 옆자리를 차지했다.
“둘이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일리아는 테라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가 지워냈다. 숨을 짧게 들이마신 일리아가 물었다.
“분쟁 지역으로 가야 하는 이유가 뭐예요?”
“…….”
“말해주지 않으면 나는 몰라요. 당신의 의도도, 생각도.”
일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카르한은 다급히 숨을 삼켰다. 그의 입술이 몇 번이고 떨어졌다가 붙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둘러댈 거짓말을 대강 생각해두었지만, 차마 지껄일 수가 없었다. 그런 카르한을 보던 일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계속 마음에 걸린 게 있었는데……, 혹시 헤인리 오라버니를 도와줬던 것 때문이에요?”
카르한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뒤늦게 표정을 수습한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때로는 눈이 입보다 더 정확할 때가 있다. 지금처럼. 일리아는 카르한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고 진실임을 알아차렸다.
손끝이 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가슴 아래에서부터 숨이 차오르고 눈동자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문제였다. 카르한이 괜찮다고 말했기에.
하지만 카르한을 배척하는 공작이 아무런 대가 없이 헤인리를 도와줄 이유는 하등 없었다. 아직 블로든과 약혼하지 않은 데다가, 카르한은 결국 버리는 패가 아닌가.
“……당신 바보예요?”
일리아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카르한의 눈동자에 일리아의 얼굴이 비쳤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에 숨이 막혀왔다. 일리아의 눈물에 온몸이 잠겨버린 듯했다. 꽉 막혔던 목소리가 겨우 흘러나왔다.
“미안합니다.”
카르한은 고장 난 것처럼 몇 번이고 사과를 반복했다. 일리아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후에 물었다.
“왜 그랬어요?”
“그러니까……,”
카르한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어서…….”
매번 받기만 해왔는데, 그때 처음으로 일리아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에반테온 공작과 거래하고, 카르한은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일리아에게는 늘 최선을 다하고 싶으니까.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리고 일리아는 알고 있었다. 독단으로 저지른 일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지금 저를 울려서 사과하는 것임을. 카르한은 바보였다.
일리아는 두 팔을 벌려 카르한을 끌어안았다. 자꾸만 눈물이 쏟아져서 아예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짤막하게 숨을 들이마신 일리아가 중얼거렸다.
“……사과하지 마요.”
카르한은 그제야 미안하다는 말을 멈추었다. 머뭇거리던 그가 두 팔을 뻗어 일리아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우는 아이를 달래듯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카르한의 태도 때문에 다시 눈물이 나왔다. 여기서 사과해야 할 사람은 일리아였다. 카르한이 저 몰래 그런 결정을 내렸다 한들, 결국 일리아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당연하다는 듯이 희생하려는 그의 태도도 그렇고, 혼자 속앓이 했을 것이 보여서…….
“미안해요.”
일리아가 사과하자 카르한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일리아는 겨우 눈물을 거두고, 숨을 가다듬었다. 고개를 든 일리아가 카르한을 마주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거절할 방법을 찾아봐요.”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째서요?”
카르한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분쟁 지역으로 떠나지 않으면, 블로든 가문이 곤란해질 겁니다.”
카르한은 가문의 그늘에서 벗어나 양지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손 놓고 보고 있던 공작 부부는 슬슬 위협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카르한이 분쟁 지역으로 떠나지 않는다고 버티면 블로든 가문에 화살이 돌아갈 게 분명했다. 카르한의 약점이자, 지금의 기반을 다져준 배경이니 말이다.
아무리 블로든 가문이 대단하다 한들, 에반테온 공작이 작정하고 나서면 막대한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공작은 국무 회의에서도 발언권이 강한 편이었기에, 간접적으로 압박을 가해올지도 몰랐다.
카르한은 자신을 거둬준 안식처가 자기 때문에 망가지길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분쟁 지역에서 세력을 쌓을 수도 있을 겁니다.”
카르한이 덤덤히 말하자, 일리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래도 결국 전쟁터인데, 위험하잖아요.”
보는 눈 많은 수도와 달리, 분쟁 지역은 무법지대였다. 암살한 뒤에 적의 손에 전사했다고 위장하면 그만인 곳이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팔을 들었다. 금방 녹아버릴 눈송이를 건드리듯 손가락으로 살살 일리아의 뺨을 문질렀다.
“저는 살아남을 겁니다. 그래서…….”
카르한이 일리아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의 눈매가 서서히 휘어졌다.
“제 생일엔 일리아 곁에 있고 싶습니다.”
일리아는 문득 자신의 생일에 카르한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저는 겨울이 생일입니다.
-기다렸다가 그때 축하해줄게요.
그때는 별 의미를 두지 않고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리아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애써 눈물을 참은 일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보낼 수 없어요.”
일리아는 절박하게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방법을 알아볼게요.”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카르한은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일리아의 고집을 꺾을 능력이 없었다. 일리아는 손등으로 눈을 꾹 눌렀다 뗀 후에 입을 열었다.
“……당신 생일 파티는 거창하게 할 거예요.”
“얼마나요?”
“모두가 축하해줄 만큼.”
수도 사람들 전부가 카르한의 생일을 알게 될 정도로 크게 열 것이다. 평생 제대로 된 생일 축하도 받아보지 못했던 카르한에게 가장 행복한 날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기대해요.”
카르한은 그런 일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파티도, 선물도, 케이크조차 없다 해도. 그저 생일에 일리아가 제 옆에만 있어준다면 그것만으로 특별한 날이 될 것이다.
상상만 해도 행복한 미래를 앞두고, 카르한은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자신이 분쟁 지역으로 떠나야 하는 게 맞았다. 일리아가 수를 쓴다 해도 결국 역풍으로 돌아올 것이다.
카르한은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일리아의 손등을 조심스레 문지르다가 멈추었다. 오랫동안 묻어두고 잊으려 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열네 살, 카르한은 공작저를 떠나 전쟁터로 향했다. 울타리 밖으로 내던져진 짐승처럼, 갑자기 펼쳐진 세계는 냉혹하기 짝이 없었다.
상관은 카르한을 포함한 소년병들에게 몸에 맞지도 않는 갑옷과 무기를 내주었다. 그리고 적을 죽이라는 간단한 지시만 내리고 뒤로 물러났다.
첫 전투에 나갔을 때, 카르한은 방어밖에 하지 못했다. 몇 번이고 적을 찌를 기회가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카르한은 도피할 곳이 없어서 전쟁터로 떠밀려 왔다 한들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카르한의 옆에서 싸우던 소년병이 쓰러졌다. 카르한이 머뭇거리다 죽이지 못한 적에게 당한 것이었다. 전투가 끝났을 때, 누군가가 카르한의 멱살을 붙잡고 소리쳤다.
-뭐 하는 짓이야! 뒈지고 싶으면 혼자 조용히 나가서 뒈져!
넋 나가 있던 카르한에게 그가 비난을 퍼부었다.
-그 애는 너 때문에 죽은 거야.
뺨을 얻어맞는 것보다 더한 충격이 밀려왔다. 그는 덜덜 떠는 카르한을 밀친 후 씩씩거리며 가버렸다.
그날 밤, 카르한은 악몽을 꾸었다. 죽어버린 소년병이 나타나 원망을 토로했고, 카르한은 잘못했다고 하염없이 사과하는 그런 꿈이었다.
그때부터 며칠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전장에 보내진 지 하루, 이틀, 열흘. 쏟아지는 눈처럼 죄책감이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카르한은 수많은 동료의 시체를 밟고 가장 먼저 움직이게 되었다.
‘내가 주저하면 다른 사람이 죽는다.’
그 한마디가 칼을 휘두르는 행위에 정당성을 주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카르한은 전투에 재능이 있었다.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익힌 검술로, 많은 공을 세웠다. 비록 공적 대부분을 빼앗겼지만 말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살인과 죽음에 익숙해지고, 동료들이 오늘은 몇 명을 죽일지 내기하는 동안에도 카르한은 최대한 살생을 피했다. 가끔 다쳐서 낙오된 적을 발견하면, 차마 죽이지 못하고 모른 척 지나갔을 정도였다.
과거에서 빠져나온 카르한이 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보며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만약 일이 잘 안 풀리더라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
“그래도 몇 년을 머물렀더니 전쟁터는 익숙해졌습니다.”
“익숙해질 리 없잖아요.”
일리아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마치 자신이 겪은 일처럼, 일리아의 얼굴은 카르한보다 아파 보였다. 카르한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닮아가는구나. 상대의 감정에 공감하고 더 아파하며……, 낯설고 생고한 과정이지만 그저 좋았다.
카르한은 찌푸려진 일리아의 미간을 손끝으로 살짝 눌렀다 떼어냈다. 그제야 표정을 푼 일리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저를 올려다보는 카르한을 보며 말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요.”
***
검술 대회가 끝난 지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수도는 카르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결승전을 구경했던 호사가들이 열심히 소문을 퍼뜨린 탓이었다.
전장의 악귀라 불리던 에반테온 소공자. 거기다 666번이라는 불길한 숫자를 달고, 기어코 우승을 거두었다. 그것만으로도 이야기할 거리는 넘쳐났다.
검술 대회가 끝나고 카르한에게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서신이 쏟아졌다. 축하 서신과 조금이라도 친분을 쌓아보려 하는 이들이 보낸 초대장으로 가득했다.
계속 카르한을 탐탁지 않게 보던 사람들마저 이번 대회가 끝나자, 역시 에반테온 후계자는 다르다며 태도를 달리했다.
그에 비해, 블레어드 쪽은 무척 잠잠했다. 블레어드가 수도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비밀리에 돌아온 것이 사실인 듯했다.
그리고 일리아를 납치했던 용병들은 하루 만에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들의 자백을 바탕으로, 리하트는 곧바로 체포되었다.
연회에서 일리아를 해하려 한 정황이 있었고, 테르시안 후작 가문 측에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에 리하트는 구금되고 말았다.
수도는 연신 시끄러웠다. 이전에 일리아의 납치 사건으로 떠들썩했는데, 납치한 주범이 약혼자인 리하트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다시 불이 붙은 것이다.
이미 바닥을 친 리하트의 평판은 너덜너덜하다 못해서, 그 이름이 나쁜 의미로 유행어가 될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일리아는 다른 일에 몰두하느라, 그쪽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정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까?’
요즘 일리아는 카르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카르한이 분쟁 지역으로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리저리 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마땅한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분쟁 지역으로 떠나야 할 판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황후께서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하셨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일리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무리 황후라고 한들 공작 가문의 가정사까지 참견하는 건 무리일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황제를 통해, 가벼운 설득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더 이상 망설일 시간도 없었다. 뭐라도 해봐야 할 때였다.
“아가씨, 서신이 왔습니다.”
고용인의 말에 일리아는 생각을 멈추고 봉투를 건네받았다. 이렇게 따로 챙겨주는 서신은 중요한 것이거나 일리아가 미리 언질을 준 경우였다. 빳빳한 봉투를 살피던 일리아는 인장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서신이었다.
일리아는 밀랍 인장을 떼어내고 봉투에서 종이를 꺼내들었다. 내용은 간략하다 못해서 무척 짧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