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80)
완연한 가을의 정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녹음 짙던 나뭇잎은 어느새 울긋불긋하게 물들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높았다.
분명 카르한이 떠날 때 막 여름에서 벗어난 가을 초입이었는데……, 벌써 겨울 초입이 다가오고 있었다. 카르한이 떠난 지 벌써 두 달도 더 지난 것이다. 일리아는 창틀에 올려둔 화분을 바라보았다.
-제가 본 풍경의 일부를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카르한은 그 말과 함께 이 화분을 일리아에게 선물해주었다. 아직도 선명하게 남은 기억을 떠올리자, 꾹꾹 눌러 삼킨 그리움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
한참 화분을 바라보던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옷장 문을 여니 깊숙한 구석에 가방 하나가 있었다. 카르한이 제게 맡기고 간 가방이었다. 정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가 보고 싶을 때 열어보려 했다.
조심스레 가방을 꺼낸 일리아는 천천히 열어보았다. 곱게 접힌 옷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옷을 펼치자, 희미하게 남은 잔향이 끼쳐왔다. 유행이 지난 디자인부터 지금 체격보다 한참 작아 보이는 옷까지 다양했다.
일리아는 이 옷을 입었을 카르한을 상상했다. 어린 카르한은 어땠을까. 초상화라도 보고 싶지만, 없을 확률이 높았다.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일리아는 아쉬움을 삼키며 다음 옷을 꺼냈다. 옷을 펼쳐든 일리아는 단추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부하기 전에 수선해야 한다는 옷이 이건가?”
카르한이 남긴 말을 상기한 일리아는 단추를 살폈다. 비슷한 단추가 있으면 찾아서 달아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일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
옷에 달린 단추가 너무나 익숙했기에.
일리아는 옷을 그러쥔 채 한참 굳어있었다. 단추에 새겨진 특이한 무늬까지 똑같았다. 다음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 일리아는 이미 서랍장을 뒤지고 있었다.
서랍장 안쪽에 넣어둔 보석함이 손에 잡혔다. 보석함을 꺼낸 일리아는 잠깐 그렇게 있다가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뒤이어 떨리는 손끝으로 뚜껑을 열었다. 버릴 거라고 다짐해놓고 결국 버리지 못한 단추가 덩그러니 담겨 있었다. 단추를 꺼내려 했으나, 손이 떨려서 자꾸만 헛손질했다. 몇 번이나 떨어뜨린 후에야 겨우 잡혔다.
일리아는 단추를 빈자리에 대어보았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간 것처럼 딱 맞았다.
“말도 안 돼…….”
너무 놀라서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한참 굳어있던 일리아는 문득 비올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소공자도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 적이 있다더구나.
그때는 신기한 우연이라 치부하고 넘겼다. 혹시 카르한이 자신을 구해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이윽고 지금까지 별생각 없이 넘겼던 일들이 하나둘 기억났다. 예전에 독감에 걸려 크게 앓았을 때, 일리아는 물에 빠졌던 과거를 꿈으로 꾸었다. 저를 구해준 남자의 새파란 눈동자가 아직도 또렷했다.
진짜 있었던 일처럼 선명했지만, 그때는 망상이라고 생각했다. 리하트가 저를 구해준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으니까.
일리아는 잘게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손을 뻗어 단추가 뜯겨나간 자국을 손으로 쓸었다.
“……당신이었어요?”
손의 떨림은 어깨까지 번져가고 서서히 시야가 잠기기 시작했다. 눈동자는 차오른 눈물을 담아내지 못한 채 툭, 툭…… 떨구어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턱으로 이어져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추락한 작은 물방울이 옷감 사이로 스며들었다.
“당신이……, 당신이 내 운명이었어요?”
일리아가 그토록 믿었던 운명은 리하트가 아닌, 카르한이었다.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진짜 은인을 눈앞에 두고, 리하트가 저를 구해준 거라 의심치 않았다.
진작 알았다면 좋았을걸. 그럼 이렇게 오랫동안 엇갈리지 않았을 텐데. 서로 힘들고 아파했던 시간에 더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까지 알아보지 못한 스스로가 바보 같고 원망스러웠다.
결국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일리아는 테이블에 올려둔 옷을 품에 밀어 넣었다. 지금 이곳에 없는 카르한을 끌어안듯 꽉 안고서 흐느꼈다. 잔뜩 구겨진 옷이 눈물로 흠뻑 젖어갔다. 지금 당장 그를 안아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카르한은 저로 인해 구원받았다고 말해주었지만, 구원받은 쪽은 자신이었다. 목숨을 구해준 것도,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준 것도 카르한이었다. 그로 인해 일리아는 변화했고, 이제는 사랑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실은……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 하나 있었다. 이전에 카르한이 고백했을 때, 그는 일리아가 자신의 운명이라 말했다. 그러나 일리아는 내 운명도 당신이라고 선뜻 화답하지 못했다.
가끔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후회했다.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냥 말해줄걸, 하면서 말이다.
“보고 싶어. 너무…….”
지금까지 눌러 삼켜온 그리움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주위 사람들에겐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더 이상 괜찮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하고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일리아는 팔을 들어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또다시 눈물이 차올랐지만, 흘러넘치진 않았다. 일리아는 오랫동안 보관해왔던 단추를 손에 쥐고서 몸을 일으켰다.
카르한을 만나러 가자. 이제 자신이 말해줄 차례였다.
***
블로든 상단이 마을에 도착하자, 축제가 벌어졌다. 상단은 아낌없이 물건을 풀었다. 식료품뿐만 아니라, 옷감이나 질 좋은 포도주도 있었다.
오랜만의 축제에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즐거워했다. 카르한이 처음 마을에 도착했을 때와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루벤투스는 포도주 한 병을 가지고 카르한에게 다가왔다.
“포도주 좀 드시겠습니까?”
“술은 잘 못 마십니다.”
카르한은 스스로가 술이 약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의 주량은 평균보다 높은 편이었으나, 술고래인 블로든 가문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편견이 생겼다. 원래 술을 즐기지 않는 탓도 있었고 말이다.
결국 혼자 포도주를 홀짝이게 된 루벤투스는 어느 정도 취기가 올랐는지, 줄곧 궁금해하던 것을 슬쩍 물었다.
“그런데 블로든 가문과 무슨 관계이십니까?”
왠지 제 입으로 말하기 쑥스러워, 카르한은 잠시 입술만 달싹였다. 누군가에게 직접 밝히는 것은 처음이었다.
“블로든 영애가…… 제 약혼녀입니다.”
그 말에 루벤투스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술이 확 깬 얼굴이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루벤투스가 중얼거렸다.
“그럼 블로든 상단이 우리 마을에 온 것도 소공자님이 힘써주신 거군요.”
“아닙니다. 제 약혼녀가 애써준 겁니다.”
카르한은 루벤투스의 말을 바로 정정해주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왁자지껄한 거리의 풍경을 응시했다. 기뻐하는 그들을 보며, 카르한은 속으로 안도했다.
안 그래도 물자가 부족해 곤란한 상황이었다. 공작의 답신이 올 때까지 어떻게 버틸지 고민하던 사이, 일리아가 보낸 상단이 도착했다. 어찌나 물자를 많이 보냈는지, 마을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서도 진지에 가져갈 것이 넉넉했다.
거기다 일리아의 대리인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요청하라고 말해주었다. 유통체계가 잘 잡혀서 마을까지 물건을 운송하는 데 며칠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일리아가 거기까지 신경 써준 것이다.
카르한은 그것이 고마우면서도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해졌다. 그래서 자신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그림 연습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일리아는 마차 한 대당 그림 한 장을 요구했다. 열심히 연습해서 나중에 일리아의 초상화를 그려줄까 싶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야만족과 협상을 해야 하는 날이 오고 말았다.
양쪽 진영 한가운데 막사를 세우고, 정오에 지휘관끼리 자리를 가질 예정이었다. 카르한은 갑옷 대신 제복을 입었다. 싸울 생각이 없다는 의도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막사를 나오자 다들 긴장과 기대감 어린 눈으로 카르한을 보고 있었다. 이제부터 카르한이 하기에 따라,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날지도 몰랐다. 카르한의 어깨에 막중한 책임감이 달린 것이다.
카르한은 테시온을 대동한 채 진영을 벗어났다. 저 멀리 맞은편에서도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야만족 지휘관과 아들인 우르시오였다. 협상이 이루어질 막사와 가까워지자, 긴장이 몰려왔다.
카르한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광활하게 뻗어나간 대지를 응시했다. 풀 한 포기조차 보기 어려운 황야였으나, 그의 시야에는 한여름의 녹음 짙은 풍경이 아른거렸다.
평생 잊을 수 없는 한여름 밤의 꿈.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여름. 일리아와 함께했던 그날을 되찾기 위해, 카르한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심호흡을 내뱉은 카르한은 다시 걸음을 떼, 막사 앞에 도착했다. 소지한 무기가 있는지 서로 확인한 후 그들은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원형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지휘관끼리 마주 앉았다.
카르한은 짧은 시간 동안 익힌 야만족 언어와 제국어를 섞어서 의견을 제시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전쟁을 휴전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러자 우르시오가 어설프게나마 통역을 해주었다.
“우리는 평화, 원한다.”
우르시오는 지휘관의 뜻을 전달했다. 카르한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저쪽도 평화 협정을 바라는 듯해서 다행이었다.
카르한과 야만족 지휘관은 제법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카르한이 알고 있는 사실과 제법 달랐다. 카르한은 야만족이 먼저 공작령을 침범해왔고, 그들이 땅을 탈환하기 위해 전쟁을 지속해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르시오의 말로는 공작의 병사들이 먼저 공격해왔으며, 자신들의 땅을 빼앗길까 싶어서 전쟁을 받아들였다고 하였다. 그동안 서로를 끝없이 의심하며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르한은 오해를 풀기 위해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조용히 카르한의 말을 경청하던 야만족 지휘관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전쟁을 멈추었으면 좋겠습니다.”
카르한은 1년 정도 휴전하며 상황을 지켜보자는 의견을 제안했다. 만약 서로가 약속을 잘 지킨다면 기간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누구도 피를 보지 않고, 오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잠깐 침묵하던 야만족 지휘관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우르시오가 통역해주기도 전에 야만족 언어를 알아들은 카르한의 얼굴이 밝아졌다. 뒤이어 우르시오가 말을 덧붙였다.
“우리 왕, 함께 이야기한다. 그리고 말해준다.”
카르한 또한 에반테온 공작에게 이 상황을 보고해야 했다. 만약 공작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금 협상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나 카르한은 공작이 협상을 받아들일 거라 확신했다.
쓸모없는 변경을 지키기 위해 지금껏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다. 만약 전쟁이 끝난다면 공작은 누구보다 가장 이득을 볼 사람이었다.
협의가 끝나고, 카르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야만족 왕과 에반테온 공작의 의견을 구한 후, 다시 만날 계획이었다. 카르한이 막사를 나가려 하자, 우르시오가 그를 불러 세웠다.
“힘, 보여 달라.”
아무래도 우르시오가 지휘관에게 카르한에 대해 떠들어댄 모양이었다. 고민하던 카르한은 단단한 나무 테이블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듯 테이블이 두 동강 나자, 지휘관의 눈이 대번에 커졌다.
잔뜩 흥분한 지휘관이 뭐라고 소리쳤다. 우르시오는 무척 흡족한 미소를 띤 채 야만족 언어로 말했다. 내 말이 맞지 않느냐. 대충 그런 말이었다.
***
레베타는 얼마 전에 스텔라를 찾아갔다. 약혼을 다시 추진해보기 위함이었다.
-저번엔 미안했어요. 내가 너무 모질게 굴었지요?
스텔라는 레베타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몰라서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많이 후회했답니다. 분명 영애같이 좋은 사람을 다시 만나긴 어려울 텐데 말이에요.
레베타는 은근슬쩍 자신의 목적을 스텔라에게 내비쳤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스텔라는 이내 노련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오히려 공작부인 덕분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어요.
-……?
-약혼이 취소되고, 제가 가문을 잇기로 결정 났거든요.
스텔라는 델로타 가문의 무남독녀였다. 결국 스텔라가 후계자가 되기로 결정 난 모양이었다.
-그러니 데릴사위가 필요한데…… 소공자께서 작위를 계승하시면 데릴사위는 될 수 없잖아요.
스텔라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잘된 일이죠.
내심 기대를 걸었던 스텔라가 완전히 발을 빼버린 것이다. 이전에 스텔라에게 카르한이 공작이 될 거라는 식으로 말해두었기에,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레베타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공작저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레베타는 고민에 빠졌다. 사채 이자는 점점 불어나는데, 어떻게 메워야 할지 걱정이었다. 공작령에서 세금을 좀 더 걷으면 원금을 어느 정도 상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도 영지들이 빠듯하게 운영되고 있어, 갑자기 세금을 올리면 반발이 심할 것 같지만…… 일단 급한 불을 끄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때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
익숙한 목소리에 레베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여니, 그곳에 블레어드가 서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블레어드가 문을 닫으며 말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오늘은 레베타의 생일이었다. 이번에 공작과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서 조용히 넘기려 했는데, 기억해준 모양이었다.
“너밖에 없구나.”
레베타는 감동한 눈으로 블레어드를 바라보았다. 블레어드가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열어보세요.”
레베타는 자리에 앉아, 리본 끈을 풀었다. 상자 뚜껑을 열자 보석 브로치 하나가 보였다. 화려한 브로치는 한눈에도 비싸 보였다.
“정말 예쁘구나. 고맙다.”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그녀는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사실 레베타는 블레어드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그저 예전에 문 앞에 두었던 꽃 한 송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어느 날을 기점으로 뚝 끊겼지만 말이다.
“선물을 준비하느라 무리한 건 아니니?”
“어머니 생신인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요.”
“다 컸구나. 이런 선물을 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니. 네가 꽃 한 송이씩 전해주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기억나지?”
블레어드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오래되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모양입니다.”
블레어드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레베타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과거의 그녀는 여러 이유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그때 종종 문가에 놓인 꽃을 보며 마음을 달랬다.
레베타는 꽃을 둔 사람이 블레어드일 거라 믿었다. 공작저에서 저를 위해줄 사람은 블레어드뿐이었다. 그것이 블레어드에게 완전히 마음을 주게 된 계기였다.
오래되었으니 잊어버렸을 법도 하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섭섭함이 밀려들었다. 레베타는 애써 서운함을 떨쳐냈다.
***
무사히 협상을 마친 후, 카르한은 공작에게 서신을 보냈다. 답신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마을과 진영을 오가는 나날을 보냈다.
바쁜 와중에도 카르한은 틈틈이 일리아에게 줄 그림을 그리고, 편지를 썼다. 그러다가 가끔 일리아가 너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을 때, 아껴둔 초상화를 벽에 걸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소공자님!”
집무실에서 행정 업무를 처리하던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루벤투스는 숨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이웃 도시 영주님이 오셨습니다.”
“영주?”
카르한이 고개를 갸웃하자 루벤투스가 설명을 해주었다.
“이 마을은 영주가 없다 보니, 가끔씩 방문하셔서 도움을 주시곤 하셨습니다.”
인사라도 해야 하나. 고심하던 카르한은 몸을 일으켰다. 멀리서 온 손님이고, 지금은 카르한이 공작의 대리인으로 마을에 머무르고 있으니 마중하는 것이 도리일 듯했다.
카르한은 저택 현관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막 저택으로 들어선 중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말에서 내리자, 카르한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카르한 에반테온입니다.”
잠시 카르한을 살피던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시오릭 에반테온입니다.”
왠지 낯익은 이름이라 생각했다. 이윽고 카르한은 그가 에반테온 원로 중 한 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만간 야만족과 협상을 완전히 매듭지으면 시간 내어 찾아가볼 계획이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만남에 카르한이 머뭇거리다가 문 앞에서 비켜섰다.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소공자께서 이 마을을 관리하고 있습니까?”
그는 곧장 저택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깐깐한 눈빛에 카르한은 괜히 주눅이 들었다. 책 속에서 자주 나오던 까칠한 사감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관리인은 이쪽입니다. 저는 도움만 약간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시오릭은 루벤투스를 힐끗 보았다. 아는 사이여서인지 그는 별말 없이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응접실에 도착한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고용인이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시오릭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 근방에서는 보기 드문 고급 차로군요.”
“제가 이곳에 올 때 가져온 것입니다.”
카르한의 대답에 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소공자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제 영지까지 명성이 자자하더군요.”
칭찬을 내뱉는데도 어쩐지 그의 눈빛과 말투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의중을 알 수 없어서 카르한이 아무 말 하지 않는데, 시오릭이 서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어차피 돈으로 산 환심 아닙니까.”
“영주님……!”
루벤투스가 놀라서 그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말을 정정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카르한은 딱딱하게 굳어진 입매를 다물었다.
제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이는 간만이었다. 그것도 카르한이 도움을 받아야 할 원로였기에 더더욱 당혹스러웠다. 블레어드를 지지한다고는 들었는데, 그것 때문일까. 하지만 지금 그의 태도는 다른 이유가 있어 보였다.
“혹시 제가…… 뭔가 실수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카르한의 정중한 부탁에 시오릭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내 그가 단호히 말했다.
“어중간한 마음으로 이곳을 바꾸려 하지 마십시오.”
“…….”
“소공자께서는 곧 떠나실 분이지 않습니까.”
그의 말처럼 카르한은 야만족과의 분쟁을 매듭지으면 수도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늦어도 봄이 오기 전까지는 귀환하려 했다. 카르한이 대답하지 않자,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소공자께서 떠나시면 이 마을은 다시 버려질 겁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카르한의 방문은 가뭄의 단비였다. 그러나 카르한이 가버리면 다시 혹독한 가뭄에 시달리게 될 터였다.
“기대감을 심어주지 말라는 말입니다.”
카르한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저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최선을 다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자신이 떠나고 나서도 마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 했다. 하지만 더 먼 미래까지는 보지 못했다.
“제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카르한의 물음에 시오릭이 움찔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방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 해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카르한의 심지 굳은 눈빛을 본 시오릭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 대 공작이 자리에 오르고, 영지마다 불균형이 더 심해진 건 알고 있습니까?”
과감한 발언에 루벤투스는 또다시 숨을 삼켰다. 시오릭은 지금껏 품고 있던 불만이 많은 듯 카르한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수익이 나지 않는 땅은 버려지다시피 했습니다. 그리고 제 영지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그는 공작 가문에 소속한 원로였지만, 공작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다.
“후계자 지지를 받고 싶어서 호의를 베푸는 거라면 그만둬 주십시오. 저희는 그런 도움 필요 없습니다.”
“저는…….”
카르한이 다물린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사심 없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곳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합니다.”
“…….”
“제가 떠난 후에도 이곳이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시오릭은 잠시 침묵했다. 카르한이 제 말을 듣지 않을 것을 깨달았는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한번 잘해보십시오.”
시오릭이 먼저 응접실을 나가버리자, 루벤투스가 안절부절못하더니 그를 따라갔다. 카르한은 한참 자리에 앉아 있다가 속이 답답해져서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고기를 안겨줄 것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줘야 했다. 자신은 지금껏 그것을 놓치고 있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이곳에서 수익을 창출할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만약 전쟁이 끝난다면 사람들을 이주시킬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다들 마을에 대한 애착이 커 보였으니까. 그렇다고 계속 구휼금을 지원하자니 일리아에게 무작정 기대는 것 같아서 싫었다.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르한이 현관으로 향했다. 아직 채 가지 못한 시오릭과 루벤투스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마차 두 대가 저택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화려하진 않으나 무척 고급스러워 보이는 마차였다. 시오릭도 이런 마차는 흔히 보지 못한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 일리아가 또 뭔가를 보내온 것일까. 지금까지 받은 것으로도 충분한데…….
카르한은 빠르게 마차를 훑었으나, 어디에도 블로든 가문 문장이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때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마부가 설치해준 간이계단을 밟으며 누군가가 내렸다. 시선을 한 몸에 받던 여인은 카르한과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었다.
“카르한……!”
일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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